# 64
64화. 영웅은 초대받는다 (2)
“와아아아아!”
전쟁에서 기세는 상당히 중요하다.
찌꺼기들이 헬의 군단을 압도한 것은 상위 계급의 분전도 있었지만, 분위기도 한몫했다.
잡아먹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군단을 움츠러들게 했다.
하물며 살아온 터전이 무너지고 이웃들이 잡아먹히는 중이다.
기세가 살아날 리가 없다.
“놈들을 몰아내라!”
오디슨의 외침에 룬스톤이 번쩍인다.
그의 광신과 상관없는, 본래의 위업이 세계수의 힘을 빌려왔다.
〈홀로 군단을 찢어 죽이는 사내.〉
군단을 격파하고 얻은 구절이 빛을 발하며 뒤바뀐다.
《영웅이라 불리기 부족지 않다.》
그는 영웅이다.
군단을 홀로 상대했으며, 용을 찢어 죽인 영웅. 영웅과 함께하는 자들은 겁먹지 않는다.
영웅담은 언제나 영웅의 승리를 그리니까.
“와아아아아아!”
망자들이 고함을 내질렀다.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우리는 헬의 군단이다!”
“죽음도 우리를 막을 수 없다! 왜? 이미 죽었으니까!”
망자들이 파도가 되어 찌꺼기를 몰아붙인다.
찌꺼기들은 갑작스러운 군단의 변화에 어쩔 줄 몰랐다.
“이 자식들이!”
“죽어라! 죽어, 이 세계의 양분이 되어라!”
“우, 웃기지 마라! 신에게 잡힌 망령들아! 나는… 커억!”
동료를 도와 적을 찔러 죽인다.
허겁지겁 제 보신에 치중하던 망자들은 다시 하나로 뭉쳤다.
군단이 되었다.
“크윽… 이, 이… 망령들이!”
“젠장할! 갑자기 왜 이 지랄이야?! 대장군은 멀었나?”
찌꺼기가 흔들린다.
녀석들은 시간과 시선을 끄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찌꺼기 군세의 목표는 에이르 병원에 있는 육신.
몸을 탈취해 하계로 나아가는 것이 그들의 지상 과제였다.
생(生).
찌꺼기 모두의 목표였다.
결국, 살아 있는 인간들을 규합해 인간의 시대를 열기 위해서.
산 자들의 땅으로 갈 필요가 있었다.
오디슨은 창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감히 헬의 영지를 침범한 자들에게 용서는 없다!”
용과 맞서고 얻어 낸 구절이 빛과 함께 번쩍인다.
그 글자가 배열을 바꿔 문장을 이뤄 낸다.
〈멸망을 막는 전사, 두려움 없다.〉
《무기를 비웃는 이름, 방패나니.》
찌꺼기들은 본능적으로 오디슨이 가장 큰 위협이라는 걸 알아챘다. 공격이 오디슨에게 집중되었다.
그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선봉에 서서 적의 이목을 끌고, 공격을 막는다? 좋은 일이지. 아군의 피해가 줄어들 테니.’
영혼의 고통이 등줄기를 따라 짜릿하게 퍼졌다.
하지만 오디슨은 위풍당당했다.
“그래, 날 쳐라! 내가 너희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니!”
고함에 찌꺼기들이 핼쑥하게 질렸다.
창칼은 그의 피부를 뚫지 못했다. 방패로도 그를 저지할 수 없었다.
양 떼에 뛰어든 늑대처럼 그는 찌꺼기 사이를 헤집었다.
“괴물! 괴물이야!”
“미친! 왜 공격이 안 통하는 거야!”
찌꺼기들이 절망했다.
오디슨은 수족처럼 움직이는 무리를 이끌고 찌꺼기들을 찢어 놓았다.
병사와 전사 간의 체계가 엉망이 되자, 병사급 찌꺼기들은 쉽게 제압되었다. 하지만 역시나 전사급은 쉽지 않았다.
부우웅!
“날파리 같은 것들!”
거대한 망치에 망자 여럿이 그대로 곤죽이 되었다.
고릴라 머리를 한 찌꺼기는 이례적으로 몸마저 고릴라를 닮았다.
고릴라는 콧김을 훅훅 내쉬며 가슴팍을 텅텅 두들겼다.
“크흐흐! 약해 빠진 것들은 아무리 모인들 약할 뿐이다!”
고릴라가 웃으며 소리쳤다.
망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오디슨과 생각을 공유하는 이들이었다.
“찔러!”
푹푹푹! 고릴라 전사의 몸에 창들이 박혔다.
하지만 치명상은 없다. 두꺼운 근육에 가로막혔다.
고릴라가 껄껄 웃었다.
“약해 빠졌군! 죽어라!”
번쩍 그가 팔을 치켜들었다.
망자들은 계획을 공유했다. 희생을 꺼리는 게 당연한 심리지만, 집단의식이 그 희생마저 겸허히 받아들이게 했다.
“매달려!”
“잡아!”
우르르 망자들이 고릴라의 팔을 붙잡았다.
호쾌하게 망치를 휘두르려던 고릴라가 짜증을 부린다.
“이, 이 자식들이……!”
“찔러엇!”
푹푹푹!
다시 창이 그 가슴팍을 헤집는다.
고릴라는 짜증을 부렸지만 계속해서 그런 일이 이어졌다.
생각을 공유하는 54명.
몇몇이 죽기도 했다. 하지만 그 숫자는 줄지 않았다. 언제나 새로운 이가 무리에 합류했다.
“커억! 이, 이 벌레같은 놈들이……!”
고릴라가 뒤로 물러났다.
수십 명을 죽였어야 하는 시간에 겨우 수 명을 죽였다. 상처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이 났다.
물러서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그리 놔두질 않았다.
“큭! 놔, 놔라!”
고릴라의 다리를 잡고 늘어지는 이들.
그 영혼의 족쇄가 고릴라의 최후를 예고했다.
푹푹푹!
옅은 상처가 계속해서 늘었다.
고릴라는 공포를 느꼈다. 수십 마리의 쥐 떼에게 산 채로 물어뜯기는 듯한 공포.
으아아- 비명을 지르며 팔다리를 휘둘렀지만, 이미 사지에 각각 10명 정도가 매달린 상태다. 전사급의 괴력으로도 떨쳐 낼 수 없었다.
푸욱!
“커, 커억… 내가 고작 이딴 놈들에게에…….”
고릴라가 원통하다는 듯 소리치고 고개를 떨궜다.
놈이 죽었다. 망자들은 순간 짜릿한 흥분을 느꼈다.
‘모이면 해낼 수 있다!’
집단전의 기초 중의 기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직접 겪어 본 것과 아닌 것, 둘의 차이는 크다.
전사급의 찌꺼기를 잡아내며, 그들은 비로소 정예병이 될 수 있는 희생정신을 깨우쳤다.
‘내가 막으면, 전우가 찔러 준다!’
혼자서 모두 해낼 필요는 없었다.
“으으, 으아아아아! 우리도 이길 수 있다!”
“전사급도 별것 아니라고!”
망자들이 소리 질렀다.
그에 전사급 찌꺼기들이 눈썹을 비틀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예상치 못한 고릴라의 패배.
찌꺼기들이 위기감을 느꼈다.
“망령들이 감히!”
“방심하지 마라! 우리도 뭉치면 그만이다!”
전사급이 조를 짜기 시작했다.
몸을 던져 희생하는 것도 통하지 않을 정도로 강해졌다.
망자들은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전사급이 뭉치면서 싸움이 어려워졌다.
“비겁한 자식들! 우르르 뭉쳐서 하나를 잡고 뭐? 할 수 있다고?”
“흐흐흐, 포식하겠군!”
전사급이 너스레를 떨었다.
이른 축배다. 무리의 우두머리는 위기 상황에서 빛을 발한다.
그들의 앞에 창을 쥔 오디슨이 나섰다.
“전사급은 내게 맡겨라. 병사들을 모조리 정리해!”
오디슨이 외쳤다.
전사급 찌꺼기들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로는 역부족이었다.
“커억!”
오디슨의 창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찌꺼기들이 죽어 나갔다.
전사급이 한데 뭉치며 군단의 피해는 오히려 적어졌다. 오디슨이 나설 곳의 수가 줄어들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찌꺼기들은 겁먹었다.
“대장군! 대장군은 아직 멀었나!”
“제기랄, 빠져나가야 하는 거 아냐?”
“윗대가리들은 죄다 어딨는 거야!”
찌꺼기들의 사기가 빠르게 가라앉았다.
승기가 확실히 헬의 군단으로 넘어왔다.
‘지금이다!’
오디슨은 경험상 싸움을 굳혀야 할 때라는 걸 알아챘다.
“밀어붙여라!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헬을 위하여!”
버럭 튀어나오는 고성에 군단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헬을- 위하여-!
헬헤임 전체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커다란 소리였다.
군단이 찌꺼기들을 압도했다. 찌꺼기들이 도주하고, 목숨을 구걸했다.
망자들은 잊지 않았다.
“크윽! 아, 안 돼! 사, 살려 줘!”
“내 친구를 먹어 놓고, 뭐? 죽어라, 죽어!”
“크아아아악!”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까와는 다른, 찌꺼기들의 비명이었다.
그 비명이 잠자는 호랑이의 코털을 건드렸다.
“뭐야? 잠깐 자리를 비웠더니, 이게 무슨 개판이야?”
호랑이 머리를 한 찌꺼기가 발할라 방송국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을 청어처럼 꿰어 들고 나타났다.
특파원인 레이프 에릭손과 그 촬영팀. 그들은 공포에 질려 오들오들 떨고 있었고, 입과 손발이 묶인 채 질질 끌려다녔다.
레이프 에릭손의 감이 외쳤다.
‘살 수 있다! 어?’
뜬금없이 감이 좋았다.
레이프는 혼란스러웠다.
자신의 감이 고장 난 게 아닐까? 무시무시한 대전사급에게 잡혀 있는데 살 수 있다니… 하지만 그의 감은 예지에 가까웠다.
군단이 촬영팀을 발견했다.
“저놈들이 사람을 끌고 간다! 잡아라!”
“와아아아아아!”
대전사가 콧방귀를 뀌었다.
“허… 웬 망령들이 설치는지…….”
“저놈도 다를 거 없어! 합심해서 공격하자!”
“…뭐? 다를 게 없다? 날 두고 한 말이더냐?”
호랑이의 물음에 대한 대꾸는 창으로 대신 되었다. 무수히 많은 창이 ‘그렇다’ 외치며 날아들었다.
호랑이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주제를 모르고 설치는 망령 같으니!”
호랑이가 스읍- 숨을 들이켜고 포효했다.
어- 흐- 으- 응!
그 입에서 터져 나온 포효가 모든 것을 뒤흔들었다.
그의 앞에 있는 것들은 모조리 충격파에 박살 났다.
쨍그랑! 유리창들이 깨진다. 부르르! 건물이 진동한다. 쩌적! 도로가 갈라진다.
망자라고 다를까?
“크륵…….”
망자들이 피를 주르륵 흘린다. 이윽고 그들이 털썩 쓰러졌다.
단 한 번의 포효에 근 100에 달하는 망자가 죽거나 몸을 가누지 못하게 되었다.
그 광경을 본 망자들은 생각했다.
늑대 무리가 물소 떼를 몰아붙일 순 있어도, 코끼리에겐 덤빌 수 없다고.
스멀스멀 무력감이 기어 올라왔다.
공포로 조용해진 거리에서 호랑이가 건들거리며 이죽였다.
“별것도 아닌 것들이… 음?”
호랑이 앞에 창을 쥔 남자가 홀로 나선다.
레이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오디슨!’
방송 쪽에서 그를 모르는 이가 있을까?
투기장 리그를 즐겨 보지 않는 사람이라도 기괴하기 짝이 없는 늪지머니 광고와 뉴스는 보았으리라.
비다르와의 다툼에 무려 신이 운영하는 클랜 하우스에 불을 질러 버리질 않나, 그의 광팬이라 밝힌 타 신계의 신이 범죄를 저지르고 처벌받지 않나.
아무튼, 사건 사고를 끌고 다니는 투사다.
‘오디슨이 대전사급과 싸워 이길 수 있을까?’
꿀꺽 침을 삼켰다.
투사라고 한들 Top 100에서 활동하는 투사는 아니다.
여러 가지 사건으로 신성을 얻었다고 한들, 신성과 그 싸움 솜씨는 크게 관련이 없다. 투기장에 넘쳐나는 알프들만 해도 미약한 신성을 품고 있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그럼에도 레이프는 기도했다.
‘제발……!’
만약, 이 자리에서 살아나갈 수 있다면, 방송에서 그에 대한 찬양을 쏟아내리라!
‘한 시간, 아니 하루 종일!’
레이프는 간절히 바랐다.
* * *
이놈이 이 자리에 있는 찌꺼기 중에서 제일 강한 놈인가?
거대한 덩치를 지닌 호랑이라…….
게다가 한번 고함을 터트려 100명 가까운 사상자를 냈다.
척 봐도 보통 놈은 아니다.
싸움에 앞서 이름을 밝혔다.
“나는 물푸레나무 부족의 전사, 붉은 늑대 오디슨이다. 넌?”
“오호, 네놈이 바로 그? 더크리프와 디케로스를 죽였다지.”
더크리프는 불독 전사. 디케로스는 코뿔소 전사였다.
둘 다 상당한 상대였다.
지금에 와서는 식은 죽 먹기겠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크흐흐, 내 부하들을 둘이나 죽인, 아니… 이제는 더 많이 죽인 놈인가?”
히죽 호랑이가 웃으며 자신을 밝혔다.
“알아 둬라, 나는 불루프 님의 오른팔! 대전사, 비카라다. 널 죽일 남자의 이름 정도는 기억해 두는 게 좋겠지.”
“글쎄, 마지막으로 듣게 되는 이름이 비카라인지, 오디슨인지… 겨뤄 보면 알겠지.”
창을 들고 자세를 잡았다.
호랑이는 낄낄 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늑대가 감히 호랑이에게 덤비다니. 정신이 나간 놈이군.”
보통이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나는 그냥 늑대가 아니다.
멸망의 늑대, 펜리르. 그리고 해와 달을 씹는 늑대, 스콜과 하티. 그들과 마찬가지다.
나는 괴물 늑대, 바르그(vargr)다.
“길게 끌 것도 없다! 죽어라!”
어- 흥!
호랑이가 포효하며 덤벼들었다. 그 소리에는 충격이 담겨 있었다.
“큭!”
쿵- 몸을 때리는 소리에 이를 악물었다.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속은 만신창이다. 영혼이 쪼그라드는 지독한 고통에 두통이 느껴졌다.
욱신욱신, 변이가 되지 않았건만, 전신이 욱신거린다.
하지만 피할 수 없다.
“부하들의 원수를 갚아 주지!”
비카라가 손톱을 휘둘렀다.
나는 입술을 짓씹고 그 공격을 쳐 냈다.
챙챙챙!
창과 손톱이 부딪혔지만, 오히려 창이 견디질 못했다.
반발력을 줄여 주는 마법이 의미가 없었다. 손아귀가 찢어질 듯 아팠고, 팔이 덜덜 떨렸다.
호랑이가 껄껄 웃는다.
“무기가 빈약하구나!”
“크으……!”
이를 악물며 그 공격을 최대한 흘렸다. 하지만 이제껏 내가 겪어 온 상대와는 격이 달랐다. 공격에 실린 힘과 속도는 내가 흘려 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호랑이의 공격이 이어졌다.
챙챙챙!
그때마다 창이 파르르 떨었다.
히드라와 격전을 치르고도 크게 상하지 않았던 창이다. 그런데 그 창 자루가 쩌적- 갈라지기 시작했다.
눈썹을 찡그렸다.
이대로 가다간 창이 먼저 부러질 터!
억지로 놈의 빈틈을 유도했다.
“흡!”
힘을 가득 모아 손톱을 튕겨 냈다.
내 자세가 쩍 벌어졌고, 호랑이가 히죽 웃었다.
“죽어라!”
팔은 두 개. 창은 하나. 그 차이가 선명하다.
호랑이의 앞발이 재차 날아든다.
아아!
망자들이 내지르는 걱정이 선명하게 들렸다.
그리 걱정되더냐? 걱정하지 마라.
나는 몸을 빙글 돌렸다. 호랑이의 공격을 튕겨 낸 충격, 그 충격에 거스르지 않고 순응했다.
쇄액!
빙글, 내 몸이 한 바퀴 돌았다. 손톱이 허공을 갈랐다.
나는 원심력에 더해 전력으로 창을 휘둘렀다.
쩌저적!
창 자루가 비명을 질렀고, 창날이 카가각- 녀석의 가죽을 긁었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흐흐흐, 간지러울까 봐, 긁어 준 거냐? 응? 고맙군그래.”
대전사급은 전사급에 비해 지나치게 단단했다.
내 공격은 아무런 충격을 주지 못했다.
“흐아앗!”
퍼- 억!
두꺼운 손바닥이 내 얼굴을 후려쳤다.
“컥!”
몸이 붕 떴다. 딱딱한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머리가 어지럽고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다.
이 정도로 차이가 난다고?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으득,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난 시간 끄는 걸 안 좋아한단 말이지!”
크허어엉!
호랑이가 포효하고 달려들었다.
몸을 일으키던 자세 그대로 움찔 굳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덤벼드는 호랑이. 녀석의 웃는 얼굴에 난 털 한 올 한 올까지 선명하다.
망자들의 기원이 들려온다.
‘제발!’
‘헬이시여! 당신의…….’
‘오디슨 님!’
망자들의 기원은 흐릿하기 그지없다.
시그뉘가 올리는 기도와는 달랐다. 그 기도는 언제나 선명하게 들려왔다.
뭐가 다른 걸까? 시그뉘가 볼바이기 때문에?
아니, 아니다.
영혼의 굳건함.
망자들의 의지는 그리 굳지 못하다. 그렇기에 찌꺼기들에게 밀렸으리라.
조건은 비슷하다. 따져 보자면 찌꺼기도 영혼이 굳은 녀석들 아닌가?
영혼을 인도하시는 오딘의 안내를 거부한 불경한 자들.
감히 오딘을 거부할 정도니, 지금 이 호랑이처럼 강인할 수 있으리라.
“끝- 이- 다!”
그 목소리가 느릿느릿하게 닿는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그렇다면 내 영혼은 얼마나 굳건한가?
영혼을 쥐어짜는 고통? 타고난 혈통이 부족하다?
아니, 오딘께서는 이미 내게 힘을 얻는 법을 일러 주시지 않았던가.
내 힘이 그대로 적용되는 곳.
여기는 니플헤임이다.
망자들의 땅. 영혼이 굳어져 살아가는 곳.
오딘께서 뭐라 하셨던가?
‘형체 없는 영혼도 얼어붙어 형체를 지니는 곳.’
내 영혼은 단단하게 얼어붙었는가?
창이 튀어 오른다.
“나는 지지 않는다!”
단단한 의지로 외쳤다.
내 영혼을 갉아먹는 광신이 나를 채찍질했다.
고통? 여전하다. 하지만 그를 즐길 시간은 없다. 어차피 전투가 끝나면 한참을 데굴데굴 구르며 즐길 수 있으리라.
쐐액!
창은 느려진 시간 속에서도 섬전처럼 뻗었다.
검은 번개가 아래에서 위로 번쩍였다.
푸욱!
호랑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쿨럭……!”
그가 피를 뿜어냈다.
가슴팍에 박힌 창을 내려다보고 철퍼덕 쓰러진다.
검은 번개를 닮은 일격. 언제나 최고조로 집중했을 때 사용할 수 있던 이상적인 공격.
나는 그 원리를 깨우쳤다.
“…허, 이러니 아무리 연습해도 나오지 않지.”
영혼의 힘으로 내지르는 공격이다. 연습으로 쓸 수 있을 리가 없다.
호랑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피식 웃으며 호랑이에게 말했다.
“끝이다.”
쓰러진 녀석의 위에서 창을 빙글 돌렸다.
창날을 아래로 향하고 두 손에 힘을 가득 주었다.
그대로 내려찍었다.
쩌적, 쩌저적! 쨍그랑.
내 창이 부서졌다. 어디선가 날아온 창에 부딪혀 깨졌다.
호랑이가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크윽, 부… 불루프 님!”
그 이름은 분명 이놈의 상관.
그렇다면 장군급? 침을 꿀꺽 삼켰다.
“이번에 피해가 커서 말이지. 더 이상 피해를 늘릴 순 없다.”
푸른 늑대 머리의 찌꺼기가 툭 내뱉었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사자를 부축한 채, 한 손으로 내 전력을 막아 냈다.
그 눈빛이 묘하게 따스하다.
…어쩐지 익숙한 창의 모습과 어쩐지 익숙한 창술이다.
아니, 내 느낌을 거부하진 말자.
후우- 한숨을 내쉬고, 그를 불렀다.
“…삼촌.”
찌꺼기가 된 삼촌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딘이시여, 당신께서 말씀하신 ‘바라던 것’이 이것입니까? 이런 재회를 제가 진정 바랐다고 생각하십니까?
으드득, 이를 악물었다.
“많이 컸구나, 오디슨. 하지만…….”
나는 버럭 소리쳤다.
“지금 그 꼴이 당신이 바라던 에인헤리요! 이 차가운 땅이 당신이 바라던 발할라냔 말이오!”
“…이번에는 한 번 죽거라.”
삼촌이 한 손으로 능숙하게 창을 휘둘렀다.
“…아.”
그러고 보니 삼촌의 창술은 부족 최고였지. 팔을 잃고 정신병을 앓기 전까지만 해도 삼촌은 단연 부족 최강의 전사였다.
장군급 찌꺼기가 된 지금, 삼촌은 얼마나 강해졌을까?
이라호드의 목소리가 들린다.
“오디슨! 피해요!”
늦었다.
푸욱!
내 가슴팍에 창이 박혔다.
그리고 나는 진정으로 바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걸 쟁취하기 위해 헬께서 내리신 축복을 발동했다.
[죽음이 둘을 갈라놓으리.]
“음?”
몸이 나동그라지고, 나는 영혼체가 되어 허공을 날았다.
잠깐 자유를 느꼈다.
육신에서 풀려난 해방감. 신음이 절로 나올 정도로 짜릿한 쾌감이 나를 감쌌다.
짧은 쾌락이었다.
나는 곧 쩌저적- 얼어붙으며 형체를 이뤘다.
“허.”
‘광신’을 너무 쓴 부작용일까? 내 영혼체는 앙상하기 그지없다.
겨울철 나뭇가지처럼 뚝 부러질 것 같은 팔을 뻗었다.
바라던 것을 움켜쥐었다.
“잡았다!”
“무슨! 이, 이거 놔, 놔라!”
호랑이가 비명 지르며 몸서리쳤다.
삼촌이 움찔 떨며 소리쳤다.
“오디슨! 뭐 하는 짓이냐!”
“이게 삼촌과 나의 차이요.”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가족과의 재회가 아니었다.
나란 놈은 어쩔 수 없는 싸움꾼이었다.
긍지 높은 전사? 그건 내 싸움을 정당화하기 위해 덮어쓴 탈이었다.
“나는 언제나 승리를 바라오.”
“그건 나 역시…….”
아니, 고개를 저었다.
“삼촌이 바라던 것은 승리가 아니오. 승리 뒤에 올 보상이지.”
황금과 명예. 그리고 발할라와 발키리.
삼촌은 언제나 그걸 바랐다.
“그러나 나는 단지 승리만을 바라오.”
입을 쩍 벌렸다.
와드득!
호랑이의 목을 물어뜯었다. 비릿한 피 맛이 입에 가득 찼다.
치명상을 입은 호랑이의 목살은 연했다.
“크아아아악! 크아앙!”
죽음을 예감한 호랑이가 비명 질렀다.
나는 히죽 웃으며 입가의 피를 닦았다.
찌꺼기들처럼 영혼을 먹고 영혼을 살찌운다? 미친 짓이다.
하지만…….
“이기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꿀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