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그 오브 발할라-62화 (62/208)

# 62

62화. 영웅은 시험 받는다 (3)

“후우! 그런가? 알겠다. 다행이구나. 으음? 니플헤임으로 온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받던 헬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가 슬쩍 강글로트를 보자, 강글로트가 고개를 저었다.

헬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지긋지긋한 명협 회의!’

헬은 명계 협동 조합 회의가 싫었다.

방송에서 오시리스에게 한 소리를 한 뒤에 몇번 빠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빠질 수 없었다.

“쯧, 아마 나는 자리를 비울 것 같구나.”

-어? 그래요? 어쩐 일로…….

“다른 일정이 있어서. 어쨌든, 오디슨을 잘 모시도록 해라.”

-으음, 뭐… 네.

마뜩잖은 목소리로 대꾸한 이라호드가 전화를 끊었다.

이라호드가 생각하기엔 오디슨을 모시는 게 아니라, 관리하는 것이니까.

헬과 이라호드, 서로 간의 입장 차이가 분명했다.

헬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였다.

“건방진 발키리 같으니.”

“오디슨 님이 니플헤임에 또 오신대요?”

“으음, 오딘이 찌꺼기를 사냥하는 시험을 내렸다네.”

“찌꺼기 사냥이라… 뭐, 좋은 일이죠. 안 그래도 요즘 찌꺼기가 잔뜩 늘었잖아요.”

헬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게 모르게 점점 찌꺼기들이 늘어, 사냥꾼들이 피해를 보는 일이 많아졌다. 찌꺼기를 사냥하던 이들이 숫자에 밀려 그대로 쓸려버리는 것이다.

헬은 걱정됐다.

‘괜찮을까?’

슬쩍 강글로트를 보자, 그녀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여왕님, 이건 여왕님께서 하셔야 하는 일이에요. 혹시나 나중에 오디슨 님이 이 사실을 아시면 좋아하시겠어요? ‘널 보고 싶어서 네가 보호하는 부족에 침입한 군단 병사의 영혼을 모조리 넘겨줘 버렸다’ 하시려고요?”

헬이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오디슨이 ‘붉은 마왕’이라는 별명을 얻은 전쟁. 그 전쟁은 벌써 하계 시간으로 몇 달이나 지나 버렸지만, 아직도 명계 협동 조합에서는 지지부진한 논쟁이 한창이었다.

정해진 영혼법이 있지만, 이 사건은 좀 애매하게 걸렸다.

“데너리즈 지방… 지금은 덴 마스크던가? 그곳이 하필이면 사실상 제국 영토라니. 귀찮게…….”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일방적으로 학살한 뒤에 지네 땅이다? 그곳 지배 세력이 모조리 사라진 것도 아니잖아요.”

헬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쟁점이 바로 그것이다.

하데스는 주장했다.

‘군단 병력은 분명 제국민이고, 그곳은 제국의 땅이니, 속인주의로 봐도 속지주의로 봐도 그 영혼은 명백히 내 관리를 받아야 한다! 게다가 그 전쟁에 대해서 책임자인 아레스가 이미 형벌을 받지 않았는가? 영혼까지 집어삼키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다!’

그에 헬이 부정했다.

‘그 땅이 제국 땅이다? 몇백 년 전부터 우리 신민이 살았고, 지금도 그곳에는 우리 신민이 살고 있다. 제국민이 거기 몇이나 살지? 그런데 제국 땅이라니, 웃기는군. 게다가 침략전쟁에 대해서는 침략자 전원 그 침략한 곳의 명계로 가 심판을 받는다는 명계 영혼법 3조를 잊었는가?’

올림포스와 아스가르드가 첨예하게 대립했다.

영혼이라는, 신계의 가장 필수적인 자원을 얻기 위한 냉전이 한창이었다. 헬은 차마 니플헤임의 지배자로서 그 사건을 내팽개칠 수 없었다.

“후우. 알겠다. 가자, 가.”

결국, 헬은 명계 협동 조합 회의가 열리는 신계 연맹으로 향했다.

명협 구성 인원 모두가 그곳에 자리했고, 하데스와 헬을 제외하면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이었다.

하데스와 헬은 이어질 격론을 떠올렸는지, 벌써부터 피곤한 얼굴이었다.

특히나.

“음, 오늘도 아름다우이.”

오시리스를 볼 때마다 헬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미친 새끼.”

“허, 그 예쁜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지 않소?”

“흥.”

헬은 오시리스를 대놓고 무시했고, 오시리스는 뻘쭘히 방치되었다. 주변에 있던 신들이 작게 비웃음을 보냈다.

오시리스가 핸드폰을 꺼내 문자 메시지를 작성했다.

[얼음 여왕이 자리를 비웠다. 이번에는 확실히 해라.]

[받는 사람: 아누비스]

답장은 금방 날아왔다.

오시리스가 후후- 웃음 지었다.

‘그대가 차갑게 군다 할지라도 나는 미라로소이다. 얼음 정도야 아무렇지도 않고말고. 다시 내 왕좌를 되찾기 위해서라면, 이보다 더 큰 치욕도 견뎌 내겠노라.’

폐왕(廢王)의 야망은 멈출 줄 몰랐다.

“자, 회의 시작합니다! 모두 핸드폰 꺼 주세요!”

* * *

끼익-!

비프로스트가 멈췄다. 입을 벌린 채 자던 이라호드가 깨어났다.

침을 닦은 그녀가 눈을 끔뻑였다.

“…습, 좀 깨워 주지.”

툴툴대는 말에 피식 웃었다.

“나도 잤다.”

“아, 그래요?”

뭐, 잠깐 자고 일어나긴 했다.

덜컹거리는 비프로스트에서 깊이 잘 수 없다.

익숙함의 문제인가?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아우, 일단 내려요. 옷 줄까요?”

고개를 저었다. 이라호드는 반질거리고 두툼한 괴상한 옷을 걸쳤지만, 나는 가름의 털가죽으로 만든 망토가 있다.

이거면 충분하다.

서늘한 니플헤임의 공기가 우리를 반겼다.

“오디슨 님? 오디슨 님!”

익숙한 얼굴의 병사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어디에서 봤더라? 눈살을 구기고 기억을 더듬었다.

“그때, 그 문지기?”

“어, 어어… 기, 기억하고 계셨군요!”

“그야 당연한 일이지. 그보다 헬께서는 엘류드니르에?”

니플헤임에 왔으니 먼저 인사를 드리는 게 도리리라.

그 대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헬께서는 다른 일정이 있다고 자리를 비우신다 하시더라구요.”

“그런가? 니플헤임의 왕좌도 가벼운 게 아니군.”

이라호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보다 헬께서 자리를 비우셨다면…….

“곧장 사냥터로 가면 되나?”

오딘께서 내가 바라던 것을 얻을 거라 말씀하셨지만, 그게 뭔지 모른다. 또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저 속에서 부글거리는 이 기묘한 힘을 어떻게든 써 보려 싸움을 벌이는 게 나으리라. 게다가 출장 정지로 투기장을 못 가는 상황이다. 찌꺼기라도 잡아서 파는 게 낫겠지.

한시라도 빨리 아슬라 아줌마와 라드게리타를 데리고 와야지.

병사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안 됩니다.”

“안 된다고?”

“예, 지금 밖에서…….”

으아아악!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게 무슨 소리지? 눈살을 구기고 창을 감싼 천을 풀어 헤쳤다.

병사가 내 팔을 잡았다.

“오디슨 님! 시간 없습니다! 어서 피하시죠!”

“피해? 대체 무슨 일이길래…….”

“여왕 폐하께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찌꺼기들이…….”

쐐애애액! 날아든 화살이 푹- 병사의 발치에 꽂혔다.

병사가 눈썹을 찌푸렸다.

“놈들이 여기까지? 당장 벗어나야 합니다!”

병사의 강짜에 나는 어느새 달리고 있었다.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으나, 특별히 보이는 건 없었다.

이라호드가 물었다.

“찌꺼기의 습격? 헬의 군대는?”

“헉헉! 강글라티께서 모두 이끄시고 에이르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병사의 외침에 눈살을 구겼다.

에이르의 신전? 덜컥 발을 멈췄다.

“오디슨 님? 왜 그러십니까! 서둘러야 합니다!”

“에이르 신전에 찌꺼기들이 발을 들였다 했던가?”

“예? 그야, 찌꺼기 놈들의 최우선 목표가 아니겠습니까?”

내가 인상을 찡그리자, 이라호드가 설명했다.

“찌꺼기들은 생(生)을 탐해요. 에이르 병원에 있는 육신을 탈취하여 하계로 가려는 셈이겠죠.”

아니, 찌꺼기들의 목적 때문에 얼굴을 구긴 게 아니다.

나는 자비의 여신 에이르께 숱한 자비를 받았다. 약간의 금전이 요구되는 자비기는 하지만, 분명 자비였다.

델로스섬에서 은혜를 저버리는 작자들을 쳐 죽인 게 얼마 전 일이다. 그런데 에이르의 은혜를 저버리고 도망친다?

있을 수 없다.

병사에게 물었다.

“에이르 신전은 어디에 있지?”

“아니, 지금 강글라티 대장이 군대를 이끌고 이미 갔습니다! 서둘러 몸을 피하십시오!”

고개를 저었다.

이라호드가 날 말렸다.

“오디슨, 찌꺼기들의 습격은 보통 대장군, 혹은 왕급이 이끌어요. 오디슨이 간다고 해도 크게 도움은 안 된다구요!”

내가 이제까지 잡은 작자들은 병사급, 혹은 전사급이 전부였다. 그 위로 몇 계급이나 올라야 대장군이나 왕이 되는 걸까?

겨뤄 보고 싶다. 처참히 패배한다고 한들, 그 패배는 내게 좋은 양분이 되리라.

재차 물었다.

“신전은 어디 있지?”

“오디슨!”

이라호드의 외침에 입을 열었다.

“이건 내가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해야 하느냐 아니냐의 문제지.”

은혜를 갚는 것.

전사들이 부족을 지키려는 것도 마찬가지다.

전사는 만들어 내는 사람이 아니다. 부족민들이 만든 음식을 먹고, 부족민들이 지은 옷을 입고, 부족민들이 세운 집에서 산다.

그렇기에 당연히 적이 온다면 나서서 지켜야 한다.

창을 움켜쥐고 다시 물었다.

“신전은 어디냐!”

후우- 한숨을 쉰 이라호드가 말했다.

“따라와요.”

* * *

레이프 에릭손.

그는 유명한 탐험가다. 숱한 발견을 했고, 무수한 모험을 했다.

레이프의 위업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에기르의 바다를 지나, 잠든 요르문간드 위로 배를 몰았다는 것이다.

그는 빈란드라는 새로운 땅을 발견했다.

그 덕에 예외적으로 전공 없이 발할라에 입성했다.

물론, 레이프는 뛰어난 바이킹이었다. 그러나 숱한 영웅들과 신화 상의 종족들이 즐비한 발할라다.

그는 다른 많은 이들처럼 투기장에서 견디지 못했다. 하지만 제 적성을 살려, 발할라 방송의 특파원으로 취직하는 데 성공했다.

레이프 에릭손은 언제나 그를 자랑스러워했다.

단, 지금은 아니었다.

‘젠장할! 이렇게나 상황이 나쁠 줄이야!’

비프로스트가 아닌 발할라 방송국의 차를 타고 니플헤임에 닿은 그는 자신을 보낸 국장을 원망했다.

카메라맨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거 괜찮을까요?”

특종 앞에 언제나 카메라를 들이밀던 사내다. 하지만 지금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창문 너머로 비치는 광경은 특종이라 말하기엔 너무나 끔찍했다.

“끄아아아아악!”

“꺄아아악! 꺄아아아악!”

언제나 침울한, 회색 표정을 짓고 있던 망자들이 비명을 터트렸다.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귀곡성처럼 헬헤임에 울려 퍼졌다.

펑펑펑! 니플헤임에 있는 공장들이 시뻘건 화마에 삼켜져 폭발을 일으켰다.

찌꺼기들은 잔인했다.

“크하하하! 잡아라! ‘죽지 않게’ 조심해서 말이야! 크하하하!”

“흐흐흐, 이 어린놈, 먹어도 됩니까?”

“물론이지! 수확하는 농부에게 그쯤이야.”

저들 나름의 농담이었지만, 그것을 보는 촬영팀은 안색이 핼쑥해졌다. 기괴한 몰골을 한 찌꺼기 하나가 어린 망자의 머리채를 잡았다.

망자가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목숨을 구걸했다.

“아악! 사, 살려 주세요, 곰아저씨…….”

“크흐흐, 이미 죽었는데 뭘 살려 달란 거지? 응?”

“어, 어어… 제, 제발… 제발!”

어린 망자가 덜덜 떨었다. 하지만 곰 머리를 한 찌꺼기는 입을 쩍 벌렸다.

“으윽!”

“웁!”

촬영팀 모두가 끔찍한 광경에 눈을 돌렸다. 하지만 레이프는 그 광경을 똑똑히 보았다.

차마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시, 싫어! 엄마아아아아!”

와득!

곰이 꼬마의 머리를 통째로 씹었다. 피가 튀고, 머리를 잃은 몸이 부르르 떨다 바닥에 툭 떨어졌다.

우물우물, 꼬마를 씹어먹은 곰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어어! 승급한다!”

“망할, 저 새끼가 나보다 먼저 전사가 되다니.”

“에이, 제기랄! 내가 먹었어야 했는데!”

레이프 에릭손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까지 알 수 없던 찌꺼기들의 힘을 설명할 장면이었다. 그들은 망자를 집어삼켜 더욱 강해진다.

“어…….”

카메라맨이 덜덜 떨었다. 그의 눈이 레이프를 보았다.

이거,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의문이었다. 특종이냐 물으면 특종이다. 하지만 방송할 수 있을 리 없다.

레이프는 눈을 꾹 감았다.

‘…이미 윗선에서는 알고 있었겠지.’

찌꺼기들의 계급을 나누는 신들이다.

이를 몰랐을까? 아니, 절대 아니다.

이걸 몰랐다면 신들이 찌꺼기를 혐오하는 게 설명되지 않는다.

세계를 오염시키는 불신자들? 그건 와닿지 않는 설명이었다.

‘찌꺼기는 망자를 먹고 강해진다.’

명확하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망자를 먹고 강해진다면, 산 자는?’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레이프의 등이 축축하게 젖었다.

탐험가의 감이 경고했다.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라고.

툭툭, 레이프가 카메라맨을 두드렸다.

“…도망치자.”

“네? 그러다가 들키면…….”

“여기도 위험해. 내 감, 알지?”

레이프의 말에 카메라맨을 비롯한 촬영팀 모두가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까지 몇 번이나 레이프의 감에 의존했다.

특파원을 하면서 뭔가 될 것 같다- 하면 항상 특종이 얻어걸렸다.

이전 손오공과 인터뷰를 따낸 것 역시 그랬다. 그들이 서 있던 곳은 레이프가 ‘이 자리다!’ 하고 지정한 위치였다.

“어서……!”

레이프가 문을 벌컥 열었다.

히죽, 웃고 있는 호랑이와 마주쳤다.

“이게 웬 떡이야?”

레이프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탐험가의 감은 삑삑 울리다 못해 펑- 터져 버렸다.

호랑이가 혀를 낼름였다. 그 송곳니에 낀 살점이 선명하게 보였다.

“어, 어어… 어어어……! 대, 대전사급……!”

쉬이이이- 카메라맨의 바지가 축축하게 젖었다. 방송작가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좁은 방 안에 공포가 자리 잡았다.

* * *

터미널 밖은 생지옥이었다.

“아아악!”

“안 돼! 발할라에 있는 가족이 날 부를 거라고! 그러니까…….”

그 광경을 마주하는 순간, 호승심 따위는 깡그리 치워 버렸다.

이건 실력을 겨루는 결투가 아니었다. 상대를 죽이기 위해 모든 수를 써야 할 전쟁이었다.

으드득!

어금니가 깨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라도 악물지 않는다면 참아 낼 수가 없었다.

이라호드가 내 등에 손을 얹었다.

“오디슨, 진정해요. 싸울 때 지나치게 흥분하는 건 좋지 못해요.”

그 말이 맞다. 하지만 어떻게?

나는 가슴속에서 부글거리는 분노를 식힐 수 없었다.

“이라호드.”

“네?”

“오딘의 뜻을 알았다.”

“그게 무슨…….”

그분께서는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알고 날 보내셨으리라.

오딘께서 내리신 시험은 바로 이 싸움이다. 그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전사로서의 사명이겠지.

창을 움켜쥐고 말했다.

“뒤를 부탁한다.”

“잠깐, 흥분을 좀……!”

그게 내 마지막 인내였다.

툭- 머릿속 끈이 끊어졌다.

다음 순간, 나는 찌꺼기의 머리통을 꿴 채 소리치고 있었다.

“덤벼라! 쓰레기들아! 나, 붉은 늑대 오디슨이 상대해 주마!”

움찔, 찌꺼기들이 떠는 와중, 찌꺼기 하나가 허- 헛웃음을 터트렸다.

철 장화를 신은 토끼 머리 찌꺼기다.

“혼자 덜렁 튀어나와서 뭐? 지랄하고 있네! 죽여!”

범상치 않은 꼴 하며, 주변 찌꺼기들이 놈의 눈치를 보는 꼴 하며.

“전사급?”

적어도 그쯤은 되는 놈이리라.

하나둘, 무리에서 으스대는 놈들이 튀어나왔다.

토끼 다음은 산양, 그리고 사슴이었다.

“뭐야, 사냥꾼이 아직 남았나?”

“흐흐흐, 살아 있는 놈이잖아? 맛있겠군!”

입맛을 다시는 놈들을 보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늑대 앞에 만찬이 차려졌군!”

약지가 욱신거리고, 그 욱신거림이 전신으로 번졌다.

악령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불길한 일렁임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끼이잇?

“되었다. 저놈들은 내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테니.”

나는 확신했다.

푸른 사과를 먹은 뒤 간질거리던 속이 편해졌다.

“늑대? 웃기는 소리! 죽어라!”

토끼가 달려들었다. 과연 토끼라는 걸까? 풀쩍풀쩍 뛰어드는 속도가 범상치 않았다.

놈은 훌쩍 뛰어올라 철 장화를 신은 다리를 휘둘렀다.

“오디슨!”

맹렬한 공격에 이라호드가 비명처럼 날 불렀다. 그녀는 아마 창을 들고 던질 채비를 갖추고 있으리라.

하지만 나는 창조차 들지 않았다.

쐐애애애액!

바람을 가르고 쇄도하는 발차기는 커다란 바위마저도 깨부술 힘이 서려 있었다.

허나 나는 쉽사리 그 공격을 막았다.

턱!

한 손으로 그 발을 붙잡았다.

“뭣?”

토끼의 빨간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나는 비로소 푸른 사과의 정체를 알아챘다.

그것은 온갖 나쁜 상황에도 꺼지지 않는 희망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온갖 나쁜 상황에서 눈을 돌릴 맹신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광신(狂信).”

스스로를 틀에 가두는 미친 믿음이다.

그리고 난 그 틀을 새로 짰다.

“토끼는 늑대를 이길 수 없다.”

다짐하듯 내뱉은 말이 법칙이 되어 나를 지배한다.

콰지직!

“크에에엑!”

토끼를 패대기쳤다.

그리고 나는 놀란 산양과 사슴을 보며 다시 틀을 만들었다.

“전사 계급이라 해도, 양 떼에 불과하군.”

부르르- 룬스톤이 떨었다. 보지 않아도 어떤 스칼드 구절이 발동했는지 안다.

〈늑대 가죽을 쓰고 늑대가 되어,〉

《양 떼는 그를 해치지 못하노라.》

놈들을 응시하며 창을 들어 올렸다. 산양과 사슴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늑대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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