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그 오브 발할라-59화 (59/208)

# 59

59화. 영웅은 사실 아무것도 모른다 (3)

토르는 고개를 저었다. 묠니르에서 손을 떼고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그럴 생각은 없다.”

“흥, 본래 아무 잘못도 없는 이를 쓸데없는 걱정으로 화나게 하는 게 특기 아니던가?”

헬이 빈정거리고, 토르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오딘이 회귀하기 전 역사에서 그랬노라는 이야기는 들었다.

“펜리르 건은 뭐, 솔직히 내가 좀 쫄았었지.”

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어투로 툭 내뱉은 토르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힘을 생각하면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지.’

펜리르는 아직 어릴 때, 이미 토르와 힘으로 드잡이질을 할 정도였다. 토르는 걱정했다.

이 사나운 늑대 녀석이 크면 얼마나 많은 패악을 저지를까?

그 걱정을 하는 건 토르만이 아니었다. 신들은 모여 펜리르를 묶어 둘 방법을 찾았다.

그때가 바로 오딘이 회귀한 시점이었다.

‘멍청한 소리.’

오딘이 대뜸 한마디를 내뱉었다. 모두가 오딘의 태도 변화에 당황했다.

오딘이 말을 이었다. 서늘한 경고였다.

‘순진한 어린 늑대를 묶어 두는 것이 정의인가, 티르? 너는 그 과정에서 맹세하는 오른손을 잃게 되리라.’

정의의 타락.

그뿐만이 아니었다. 악랄함을 용기로 포장하는 짓에 대해서도 경고했다.

‘아들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남의 것을 빼앗는 게, 수호더냐?’

‘믿음을 저버린 수호자는 침략자가 될 테고, ‘자괴감’이라는 독은 너를 아홉 걸음 만에 죽일 게다.’

멸망의 전조는 가름의 울음소리 따위가 아니다.

그저 신들의 타락이었다.

‘고슴도치도 제 아이는 예쁘다 한다. 그런데 로키에게서 자식 셋을 모조리 떨어뜨려 놓자고? 로키는 우리 신족도 아니지만, 우리를 위해 무수한 일들을 해 주었다. 너희가 지닌 것들 중 로키에게서 받지 않은 게 무어가 있더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날 선 비판으로 신들을 지적한 오딘은 회귀를 밝혔다.

미래에서 온 신은 운명을 뒤틀었다.

“…아버지는 멸망을 막을 수 없다면, 멸망을 미룰 방법을 생각하시는 건가.”

무수한 전쟁의 끝에 남은 것은 그런 생각뿐인지도 모른다.

오디슨을 강하게 만들려는 것도 역시, 멸망과 맞서 싸울 전사가 필요하기 때문이리라.

토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버지의 생각을 알 것 같다. 그러니 오디슨을 도우면 도왔지, 방해하거나 공격할 생각은 없다.”

“…그런가.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됐다.”

헬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강력한 거인의 머리도 단박에 쪼개는 토르라면, 오디슨을 어떻게 할 방법이야 무수히 많았다.

헬이 그를 막아내기도 힘들었다.

토르가 히죽 웃었다.

“그런데, 오디슨 그 녀석을 왜 그렇게 신경 쓰는 거지? 설마…….”

헬의 볼이 붉어졌다. 우물쭈물하는 그녀를 보고 토르가 폭소했다.

“크하하하! 펜리르 녀석도 묘하게 오디슨을 신경 쓴다 했지! 과연, 노처녀를 시집보내려는 생각이었던가!”

“…노처녀?”

헬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순식간에 방 온도가 떨어지고, 서리가 내렸다. 말실수를 한 토르가 눈을 데굴 굴렸다.

그때, 노른들이 노래를 시작했다.

“차가운 땅의 지배자! 그녀의 옆자리는 언제나 얼음 같았지.”

처음은 과거를 담당하는 장녀, 울드였다.

그다음으로는 미래를 담당하는 막내, 스쿨드가 이어받았다.

“빈자리는 전사 중의 전사가 자리할 거라네! 그녀를 꼭 안아 주겠지.”

“크흐흐흐, 과연 운명이 정해 준 연인이라는 건가? 뭐, 잘생긴 놈이긴 하지.”

토르가 고개를 끄덕였고, 헬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마지막으로 현재를 담당하는 차녀, 베르단디가 구슬프게 노래했다.

“하지만 지금이 중요하다네. 지금 그 곁에 있는 여자를 조심해야 한다네.”

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여자? 여자가 또?”

“거, 얼굴값 한번 제대로 하는 놈이군.”

토르가 낄낄 웃으며 말했고, 헬이 그를 찌릿 째려보았다.

세 자매가 합창한다.

“그 여자는 전쟁의 도화선이라네!”

토르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의 두꺼운 팔에 소름이 돋았다. 침을 꿀꺽 삼킨 토르가 물었다.

“오디슨은, 설마… 벌써 갔나?”

“델로스섬에 뭐가 있지?”

토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참지 못할 것이 있지.”

치졸한 신의 흔적이다.

* * *

과연 영웅의 이름이다.

판도라라는 여자는 깜짝 놀라면서도 나를 반겼다.

“오디세이아의 주인공이신 바로 그? 엘리시움에 있으셔야 할 분이 어째서?”

엘리시움? 그게 어디지?

어쨌든,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둘러댔다.

“저 항아리를 가지고 가기 위해서다.”

“네? 저걸요? 정말이신가요?”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엄청나게 귀한 물건인가? 마음이 쿡쿡 쑤셨다. 하지만 나는 힘이 필요했다.

사실을 조금 생략했다.

“신께서 명령하셨다.”

“그렇다면… 저에게 내려진 벌도?”

이 여자의 벌?

그건 잘 모르겠다. 함부로 말했다간 내가 가짜라는 게 들킬 터,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판도라는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아직은 아닌가요. 제 죄가 깊긴 하죠.”

뭘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여자가 대체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르겠고.

세상에 악을 퍼트렸다고 했는가? 그럼 굴베이그와 비슷한 여자인가?

딱히 그렇게 보이진 않는데.

“그보다 저걸 가지고 가신다니… 마음이 한결 편해지네요.”

“지키고 있던 것 아닌가?”

“네, 지키고 있었죠. 혹시나 누군가가 저걸 열어 버린다면, 끔찍한 최후의 악이 풀려날 테니까요.”

“…열면 안 된단 건가?”

판도라가 쓰게 웃었다.

“신들께서 보낸 영웅이시니 별문제 없으실 거예요. 어느 정도 신성을 품은 이들만 엘리시움에 갈 수 있다니까요. 하지만 하계에서 저걸 여는 건 참아 주세요.”

그녀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인간들은 이미 많이 고통스러우니까요.”

후회스러운 목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 여자가 대체 뭘 했단 거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체…….”

“이쪽이야, 이쪽! 쌓인 건 풀어야지!”

그때, 왁자지껄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여자가 움찔 몸을 떨었다.

그녀의 눈에 공포가 서렸다.

뭐지? 눈살을 찌푸릴 때, 판도라가 말했다.

“어서… 어서 몸을 숨기세요. 신들께서 당신께 몸을 숨기고 항아리를 가지고 오라 한 이유가 있을 거예요.”

다시 타른카페를 써야 하는가?

중고라 그런지 꿉꿉한 냄새가 나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판도라의 말대로 내가 들키는 건 위험하다. 오디세우스라는 거짓말이 안 통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타른카페를 뒤집어썼다.

* * *

판도라는 입술을 짓씹었다. 다가올 고통에 파르르 떨었다.

몸을 숨기고 숨어든 사내가 있었을 때도 떨었다.

세상에 모든 죄악을 퍼트린 탓에 미움 받는 자신이다. 누군가가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 숨어들었다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영웅이었고, 신사적이었다.

오물투성이인 몸을 넝마주이로 숨긴 추레한 꼴을 보고도 얼굴 한번 찌푸리지 않았다.

그래서 수치스러웠다.

‘오랜만에 날 사람처럼 대한 사람인데…….’

그 앞에서 이런 꼴을 당하다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어이! 판도라!”

“이년이 어디로 숨었어?”

델로스섬에 사는 사내들이 제우스 신전의 사제와 함께 찾아왔다. 판도라는 덜덜 떨면서도 그들 앞에 나섰다.

“무, 무슨 이, 일이에요……?”

“허, 이년 보게! 무슨 일이 개뿔! 너 때문에 내 아들이 병에 걸렸어!”

짜악!

따귀에 판도라의 고개가 홱 돌아갔고, 그녀가 쓰러졌다.

음- 하는 숨소리가 들렸지만, 판도라는 그쪽을 보며 입을 달싹였다.

‘숨어 계세요, 금방 끝나요.’

투명하게 이 광경을 지켜보는 이가 알아들었길 바랐다.

자신 때문에 신의 분노를 사는 영웅이라니. 판도라는 다시는 죄를 짓고 싶지 않았다.

“꺅!”

판도라가 비명을 내질렀다.

사내들이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따귀를 날렸다.

입술이 찢어지고 볼이 퉁퉁 부었지만, 그들은 가차 없었다.

“너 때문에 올해 흉년이 들었잖아! 망할 년!”

“이번에 전쟁이 벌어진 것도 너 때문이야! 그것 때문에 세금이 올랐다고!”

퍽퍽퍽!

사내들은 판도라를 마구 밟았다.

판도라는 비명 지르며 용서를 구했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아악!”

판도라는 제발 오디세우스가 이 광경을 보지 않길 바랐다.

치욕스럽게 얻어맞는 광경을 보인다 생각하면, 부끄러워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거북이처럼 웅크렸고, 사내 하나가 히죽 웃으며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챘다.

“이번 전쟁으로 사람이 많이 줄어든 거 알지?”

“전쟁이 생겨난 게 이년 탓이니까… 사람을 늘리는 것도 이년 몫 아냐?”

사내들이 음흉한 미소를 띠고 말했다.

판도라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는 분명 아프로디테에게 미(美)를 선물 받았다. 하지만 오물로 자신을 더럽히고, 넝마를 걸쳐 아름다움을 감췄다. 그럼에도 사내들의 추악한 욕망은 멈출 줄 몰랐다.

“그, 그건…….”

“이년, 씻겨 놓으면 꽤 괜찮다던데.”

“저쪽에 물이 있지 않던가?”

“나, 나는…….”

판도라가 덜덜 떨었다.

음탕한 미소를 지은 사내가 흐흐 웃으며 제우스의 사제에게 물었다.

“괜찮소?”

“뭐, 안 될 건 없지.”

판도라는 눈을 꾹 감았다.

남편에게 버림받고, 이미 더럽혀질 대로 더럽혀진 몸이다. 하지만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것이었다. 하데스에게 받은 죽음 면제권이나, 아프로디테에게 받은 아름다움은 고통이 되었다.

‘아, 제우스시여… 어찌하여 절 만드셨습니까? 어찌하여 제게 호기심을 주셨습니까!’

판도라가 몸을 움츠리고 신을 탓했다.

그리고 물을 가져온 사내가 그녀의 몸에 물을 뿌렸다. 몸에 달라붙어 있던 오물들이 약간 씻겨 나갔을 뿐인데, 그녀의 미모가 빛을 발했다.

관심 없다는 듯 딴청을 부리던 제우스의 사제도 침을 꿀꺽 삼켰다.

“오호, 과연…!”

“흐흐, 사제님 먼저 하시죠.”

“그래도 되겠습니까?”

“아아, 제우스 님을 모시는 분이신데 당연한 말입죠.”

“그렇다면 염치 불고하고…….”

판도라가 옷을 여며 몸을 가리려 했다. 하지만 물에 젖은 넝마로는 차마 몸을 가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제우스의 사제에게 말했다.

“저, 저는 제우스 님께서 만드신 최초의 여자! 제, 제우스 님의 딸이에요!”

“허허, 지랄 마십쇼. 제우스 님께서 이미 신탁을 내리셨습니다. 판도라는 내 딸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럴 수가…….”

기간토마키아를 막기 위한 영웅, 헤라클레스의 생산을 위해서라곤 하지만 제우스는 난봉꾼이었다. 그런 만큼 제우스를 모시는 사제들도 난잡한 생활을 즐겼는데,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까?

사제가 음흉하게 웃으며 판도라의 넝마를 찢어 냈다.

쫘악!

판도라가 치욕에 눈을 꼭 감았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아, 잔인하기 그지없는 신들이시여!’

가냘픈 그녀의 다리가 두툼한 손에 의해 벌어지고, 사제가 히죽 웃음을 흘렸다.

퍽!

그 머리에 창이 박혔다.

판도라가 눈을 동그랗게 뜰 때, 영웅이 모습을 드러냈다.

* * *

“쓰레기 같은 작자들.”

퉤, 시체에 침을 뱉었다. 사내들이 움찔 몸을 떨었다.

약한 여자를 괴롭힐 때는 당당하던 자들이 겁을 먹은 겐가?

허- 코웃음을 흘렸다.

“약자를 괴롭힐 용기는 있고, 싸울 용기는 없나?”

“오, 오디세우스 님… 이, 이 사람은…….”

시체를 보며 안절부절못하는 판도라.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사람이 아니라, 추악한 돼지 새끼다.”

신을 모신다는 사제가 이딴 추악한 짓거리에 가담해? 용서할 수 없는 짓거리다.

사내들이 버럭 소리쳤다.

“세상에 모든 죄악을 퍼트린 여자를 감싸다니!”

“감히! 천공신 제우스를 모시는 사제를 죽이다니! 하늘이 무섭지도 않은가!”

그 말에 어깨를 으쓱였다.

슥, 주변을 둘러보고 말했다.

“여기 하늘이 어디 있지?”

여긴 동굴 속이다.

“으, 으으으……! 신의 저주를 받을 거다!”

“도망치려고?”

쐐액- 횃불의 일렁거림에 창이 번뜩였다. 등을 보이고 달리려던 사내가 움찔 굳었다.

그 가슴팍을 꿰뚫은 창을 내려다본 사내가 끄르륵- 피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어, 어어……!”

“그, 그 여자는 이 세상에 모든 죄악을 퍼트린 여자요! 신들께서 죄악을 봉인해 두신 항아리를 연 여자란 말이오!”

죄악을 봉인해 둬?

내가 가져가려던 항아리에 대한 이야기였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의기양양해진 남자가 소리쳤다.

“그 항아리에는 모든 죄악이 들어 있었지! 질병, 슬픔, 가난, 전쟁, 증오! 그것들을 인세에 풀어 뒀기에 이곳에서 신벌을 받고 있는 거요!”

그 말에 슬쩍 판도라를 바라보자, 그녀가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수긍할 수 없다.

“질병도 없고, 슬픔도 없고, 가난과 전쟁, 증오도 없었단 말인가?”

“그렇소! 낙원을 더럽힌 여자가 바로 저 여자요!”

어이없는 소리다.

“그렇다면 인간은 죽지도 않았을 것이며, 싸우지도 않았을 것이며, 눈물 흘리지도 않았을 것이며, 배고프지도 않았겠군.”

“그야 당연한 소리요!”

허- 헛웃음을 흘렸다.

“그럼, 나뭇조각과 뭐가 다르지?”

“그, 그건…….”

판도라가 그 모든 걸 퍼트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인간이 나뭇조각이 아니라면 당연히 있어야 했을 것들이다.

결국, 그녀가 퍼트린 건 악이 아니다.

“…그 항아리에 있던 게 뭔지 알겠군.”

그렇기에 오딘께서 그 항아리를 찾으라 하셨으리라.

나는 그들에게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패륜아들.”

역겨운 자들을 살려 둘 필요는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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