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그 오브 발할라-58화 (58/208)

# 58

58화. 영웅은 사실 아무것도 모른다 (2)

다시 주먹을 치켜들었다.

힘은 없어도 신은 신이라는 건가? 브라기는 헉헉거리면서도 이 하나 깨지지 않았다.

브라기가 슬쩍 실눈을 뜨고 눈치를 본다.

“아직이다.”

“으, 으억!”

브라기가 팔을 허우적거리고, 나는 다시 주먹을…….

턱! 이라호드가 내 팔을 잡았다.

“그만, 그만해요. 더 이상은 저도 보고 있을 수 없다구요. 저 발키리인 거 잊은 건 아니죠?”

“…하지만 이 작자는…….”

이라호드가 후- 한숨을 쉬더니 내 귓가에 속삭였다.

“법적으로 따지면 오디슨이 불리하거든요? 그러니까 그만해요. 게다가 브라기에게 바다를 건널 방법이 있다잖아요. 적당히 봐줘요. 더 큰일이 되기 전에.”

그래, 이라호드의 말이 맞다. 더 큰일이 되는 건 곤란하다. 이미 주변에서 우릴 보는 사람들이 많다.

난 멱살을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철푸덕, 브라기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으, 으으… 죽을 자를 고르는 여자를 불러…….”

“이봐요, 브라기 님. 요즘 그런 말은 안 쓰거든요? 안 죽이고 데리고 오게 된 지가 얼마나 지났는데요. 발키리 혐오 발언이에요.”

“…발키리? 왜 보고도 가만히 있었지? 내가 이 까마귀를 먹이는 자에게…….”

“그만! 정말 법정에 서고 싶으신 거예요, 네? 이둔께서 참 좋아하시겠네요.”

이둔이라는 말에 브라기가 입을 다물었다.

이그나르도 말한 적이 있었다.

‘요즘 세상에 시만 써서 어떻게 먹고 살겠냐? 뭐라도 하시려고 하겠지. 적어도 아내보다는 많이 벌어야, 남자 기가 사는 법이야.’

이라호드라면 인상을 찌푸릴 법한 소리다.

뭐, 어쨌든 이 놈팡이의 약점을 알 것 같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도대체 이 비실비실한 놈이 뭐가 좋다고 청춘의 여신인 이둔께서 남편으로 삼으셨는지 모르겠군.”

“뭐, 청춘이라는 건 때때로 멍청한 짓을 하는 법이니까요. 게다가 언제나 튀고 싶어 하죠. 옆 동네만 봐도 그렇잖아요?”

이라호드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옆 동네?”

“올림포스에 있는 청춘의 여신, 헤베는 그 똑똑한 철학자들이 널린 와중에 힘세고 다혈질인 이혼남을 골랐다구요.”

아, 허큘리스 말인가?

제국놈들이 간간이 찾곤 하던 양반이지. 신이 아니라던가 신이 됐다던가? 복잡한 이야기다.

“크흠, 당사자를 앞에 두고 그런 말을 하는 건 케닝그(완곡어구)가 아닐세.”

“케닝그 따위 쓸 생각이 없다. 그나저나 무슨 낯짝으로 내 앞에 나타났지? 네놈의 가게에서 얻은 건틀릿 때문에 손을 한참이나 못 씻었건만!”

-키이이…….

내 말에 건틀릿의 악령이 낮은 울음소리를 냈다.

딱히 녀석을 탓할 셈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잘 풀렸다. 그렇지만 내가 사기를 당한 건 확실하다.

상대는 좋은 의도였음에도 내가 해를 입었다면 웃어넘길 수 있지만, 황금에 눈이 멀어 손님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가게의 주인이라?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 분명, 높으신 분들께 공손하다 들었거늘!”

짜증을 부리는 브라기.

나는 흥- 콧방귀를 뀌었다.

“나는 언제나 신실하다. 하지만 시 구절이나 읊어 대는 네놈이 내 신이 될 자격이 있는가? 혀가 길어 하계에서도 마음에 들지 않았건만, 그 혀로 사기를 치다니!”

“아니, 엄밀히 따지자면 그건 사기가 아닌데…….”

뭐라? 눈을 부릅뜨자 브라기가 움찔 몸을 떨었다. 정말이지 비실비실하기 짝이 없다.

이라호드가 나섰다.

“둘 다 좀 그만하세요. 진짜 서로 가서 조서부터 쓸까요? 네?”

입을 다물었다. 브라기 역시 입가를 슥 닦으며 침묵을 지켰다.

이라호드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브라기에게 말했다.

“그래서 바다를 건널 방법이 뭐예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겠죠? 안전하구요?”

“그게…….”

슬쩍 브라기가 내 눈치를 보았다.

“당연히 좋은 제안이 있어서 왔지. 이런 꼴을 당할 거라곤 예상치 못했지만.”

별 거지 같은 시 구절을 뱉었다.

“아아- 목매달린 신께서도 이를 내다볼 수 없었으리라!”

오딘께서 이를 모르셨다고? 허튼소리.

가장 높으신 분이라면 당연히 아셨을 터다. 이놈이 날 찾아오는 것도, 내가 놈을 두들겨 패는 것도.

나는 브라기를 보며 눈살을 구겼다.

“내가 바보인 줄 아는가? 언제나 좋은 제안을 가지고 오는 놈들은 둘 중 하나였지.”

첫 번째는 사기꾼.

놈들은 늘 꿀 바른 혀로 안 좋은 걸 좋게 포장해 속여 넘기려 했다.

두 번째는 몽상가.

놈들은 좋은 제안이라며 기괴한 소리를 늘어놨다. 적이 우리보다 훨씬 많으니, 포위섬멸진을 펼치자거나.

“놀랍게도, 너는 둘 모두에 속하는 놈이군.”

최악이다. 역시 좀 더 패야…….

이라호드가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 황급히 내 팔을 잡았다. 그리고 속삭였다.

“진짜 개소리면 체포할 테니까, 걱정 말아요. 솔직히… 아니어도 체포하고 싶긴 하지만요.”

일단, 한번 들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적어도 이라호드 앞에서 사기를 치진 못할 테니.

* * *

핸드폰을 보던 헬이 입술을 삐죽였다.

화면에 떠 있는 것은 메신저. 헬과 이라호드, 크레네가 정보를 교류하는 채팅방이었다.

[이라호드: 브라기랑 거래]

[이라호드: 배 빌림]

[크레네: 아무래도 너무 위험한 거 아니에요ㅜㅜ?]

[크레네: 오디슨 올림포스에 적 엄청 많잖아요ㅜㅜ]

[이라호드: ㅇㅇ 위험함. 근데 꼭 간다네]

[이라호드: 아 타른카페도 빌리긴 함]

[크레네: 타른카페@[email protected]?]

타른카페(Tarnkappe)는 영웅 시구르드가 사용했던 걸로 유명한 망토다. 그걸 걸치면 사용자가 투명해진다.

칫- 헬이 혀를 찼다.

‘타른카페 정도야 창고에 쌓여 있건만.’

죽음은 보이지 않게 찾아간다. 그렇기에 엘류드니르의 창고에는 타른카페가 수두룩하게 있었다.

그리고 또, 바다를 건너는 것? 역시나 헬에게는 별일 아니다.

“나한테 부탁했으면 막내를 붙여 줬을 텐데…….”

그녀의 막내 동생은 미드가르드의 바다를 둘러싸고 있는 거대뱀 요르문간드니까.

강글로트가 피식 웃으며 차를 따랐다.

“남한테 손을 벌리고 다니는 남편이 갖고 싶으신 거예요?”

“남이 아니잖아.”

어림도 없는 소리. 강글로트가 허- 헛숨을 흘렸다. 그녀가 찻주전자를 소리 나게 내려놨다.

헬의 눈썹이 으쓱이자, 움찔 몸을 떤다.

“어, 그게…….”

“요즘 너, 점점 기어오르는데…….”

강글로트는 삐질 땀을 흘렸다. 아예 세게 나가기로 했다.

“아니! 그러니까 그날 확 잡으라 했잖아요! 근데, 뭐요? 오딘께서 상을 주신다니 가 봐야겠소. 그런가- 그러면 조심해서 가라, 특히 여자를 조심해라? 지금 저 놀리시는 거죠? 네? 그렇죠?”

헬이 입술을 삐죽였다.

“그 음탕한 년이 감히 남의 남편에게 꼬리를 치니까…….”

“제가 그래서 말하잖아요. 일단은 남편으로 만들고 그런 소리를 하시라구요.”

강글로트는 답답한 마음에 가슴팍을 퉁퉁 치고 싶었다. 하지만 이 수줍은 여왕님을 더 자극하는 건 위험하다.

강글로트가 입을 꾹 닫았다. 헬 역시 고민에 잠겼다.

‘어떻게 해야 하지? 대체 운명은 나와 그를 어디로 이끄는 거지?’

헬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노른들에게 몇 번이나 캐물었지만, 낄낄 웃을 뿐이었다.

그때, 집무실 밖에서 강글라티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왕폐하, 토르 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토르가?

헬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무식한 작자가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온 거지?’

헬은 토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인류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이인 만큼, 니플헤임의 망자를 늘리는 것을 언제나 경계했으니까. 헬 역시 울음소리가 늘어나는 걸 그리 바라지 않건만, 토르는 늘 헬에게 그에 대해 따졌다.

눈썹을 찌푸린 헬이 묻는다.

“혹시 미드가르드에 역병이라도 도나?”

“아뇨, 그런 소식은 없었어요.”

“그럼 큰 전쟁이라도?”

강글로트가 고개를 저었다.

“붉은 마왕 이야기가 퍼진 뒤로 모두가 전쟁을 쉬쉬하는 중이에요. 피가 흐르는 곳에 붉은 마왕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면서요.”

그렇다면 대체 왜 왔지? 일단 토르 정도 되는 신을 박대할 순 없다.

헬이 외쳤다.

“토르를 이곳으로 데리고 와라!”

강글라티가 토르를 데리고 왔고, 강글로트가 토르가 앉을 의자를 내놓았다. 하지만 토르는 대뜸 질문부터 던졌다.

“노른들은 어디에 있지?”

“…노른?”

“그래, 난 그 여자들에게 이 세계의 운명에 대해 들어야겠다.”

아아, 이 멍청한 근육덩어리.

헬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노른들이 그에 대해서 대뜸 말해 줄 거라 생각하나?”

“허, 말하지 않는다면? 그 여자들은 내 묠니르가 골통 깨는 소리를 가장 가까이에서 듣게 될걸?”

허리춤에 찬 망치를 두드리며 말하는 토르.

헬은 쯧- 혀를 찼다. 오딘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노른들에게 헛소리를 지껄이는 꼴이라니.

하지만 헬의 생각은 틀렸다.

“킥킥!”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까르륵, 소녀의 웃음소리. 호호, 아가씨의 웃음소리. 끌끌, 노파의 웃음소리. 노른들이 과장된 몸짓으로 커튼 뒤에서 튀어나왔다.

“끌끌, 우리 자매를 찾았는가, 흐린 날이여?”

“호호, 우린 여기에 있어요, 번쩍이는 섬광.”

“꺄, 우리 셋은 귀 안 먹었어, 천둥 아저씨.”

노래하듯 음율에 맞춰 말하는 세 자매.

헬은 흠칫 놀랐다.

‘그토록 물어도 대꾸 한마디 없던 셋이 갑자기 튀어나오다니. 그 정도로 토르가 물어볼 것이 중요한 이야기란 말인가?’

토르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살을 구겼다.

다짜고짜 질문을 던졌다.

“이 세상은 어떻게 멸망하지?”

* * *

왜 거친 바다의 신, 에기르께서 어째서 사기꾼 브라기를 선생이라 부르며 따르는가? 이해할 수 없었다.

에기르의 시종, 피마펭이 답을 내놓았다.

“에- 기- 르- 님- 께- 서- 는…….”

피마펭은 거대한 바다거북이다.

그 탓인가? 말소리가 크고, 그 속도가 느려 알아듣기 어려웠다.

그냥 크기만 했더라면 알아듣긴 쉬웠겠지만, 크고 느린 탓에 단어가 끊어지는 부분이 잘 구분되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로키가 하필이면 이 녀석을 죽인 이유가 있었군.”

“네- 에? 무- 어- 라- 하- 셨- 습- 니- 까? 파- 도- 때- 문- 에…….”

피마펭은 원래 역사에서 로키의 손에 죽는다. 에기르의 연회 때에 신들이 에기르의 시종을 칭찬하자 아니꼬워 죽인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로키의 사악함을 욕했다. 하지만…….

“그- 래- 서- 에- 기- 르- 님- 께- 서- 는…….”

아, 오딘이시여.

당장 피마펭과 거리를 벌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없다.

브라기와의 거래. 그걸로 나는 델로스섬으로 갈 배와 투명망토를 받아 냈다. 그런데 에기르께서 지나친 친절을 베푸셨다.

‘브라기 선생의 부탁이라면야! 피마펭! 네가 직접 다녀오너라! 편하게 모셔야 한다!’

그리하여 거대 바다거북인 피마펭이 나를 등에 태웠다.

어쨌거나, 에기르와 브라기의 관계에 대해 대충이나마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에기르께서 거친 성정을 다스리고자, 브라기에게 스칼드를 배우셨다 이건가?”

“네- 에, 그- 렇- 습- 니- 다!”

젠장할. 나는 그 친분을 이용하는 대가로 사기꾼의 앞잡이 노릇을 하게 된 건가? 초상화만 걸어 두는 광고 모데르 일이다.

티브이에서 광대 노릇할 필요가 없다는 게 그나마 다행인가?

“도- 착- 했- 습- 니- 다!”

바다를 한참이나 가로질러 섬에 닿았다.

길 안내를 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게 불안하긴 했으나, 별것 아니었다.

굉장히 작은 섬인 데다가.

“…음.”

함정인가? 대놓고 수상한 곳이 있었다.

출입을 막으려는 듯 밧줄로 길목을 막아 둔 곳이다. 섬에 있는 유일한 산, 그 기슭에 뚫린 동굴 입구다.

“수상한 물건을 숨기기에 딱 좋은 곳이군.”

작게 중얼거렸다.

혹여 무언가가 지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창을 꽉 쥐고 천천히 걸었다.

동굴 안은 퀴퀴한 냄새가 가득했지만, 걷기 좋게 모래가 깔려 있었고, 횃불도 걸려 있었다.

“뭐지?”

잠깐 걸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긴장이 탁 풀렸다.

아무것도 없나? 지키고 있는 이는?

내가 모르는 글자로 무언가 경고 같은 게 적혀 있었다. 바로 그 아래에 항아리가 있었다.

화려한 금박이 떨어져 을씨년스러운 모습을 한 항아리. 게다가 피로 보이는 거뭇한 자국들이 떡하니 남아 있다.

멈칫할 때, 사브작- 모래 밟는 소리가 들렸다.

“누, 누구죠?”

여자 목소리.

움찔 몸을 떨었다. 땀이 주르륵 흐른다.

전신을 더듬어 타른카페가 벗겨지지 않았나 점검했다. 벗겨지지 않았다. 여전히 나는 투명한 상태일 터.

저 여자는 대체?

“거기 누구예요?”

고개를 돌려 여자를 쳐다보았다. 추레한 넝마를 걸친 채 두려움에 떠는 여자다.

죽일까? 창을 꽉 쥐었다.

단 한 번의 찌르기. 그걸로 끝이리라.

하지만 망설임이 있었다. 저 여자는 아직까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

“저, 저를 죽이려고 하시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전 죽을 수도 없단 말이에요! 제발, 아프게 하지 마세요! 저, 저는 그냥…….”

죽을 수 없다? 고개를 갸웃했다.

죽지 않는 이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거짓말인가? 아니, 거짓말이라고 하기엔 너무 당연한 듯 말한다.

게다가 그녀는 아무리 봐도 보물을 지키려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고민했다. 저 여자를 죽여야 하나? 죽지 않는다면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드는 게 아닌가?

일단 이야기를 해 보자.

“어떻게 내가 있다는 걸 알았지?”

“…아, 아무리 투명해지는 재주가 있으시다고 해도, 발자국을 감추진 못하셨어요. 그리고 전… 아르테미스께 사슴의 감각을 선물 받은 걸요.”

이런! 동굴에 얕게 쌓인 모래 위로 내 발자국이 남았다.

저 여자를 죽이고 항아리를 가져간다? 그래도 내 발자국이 선명히 남으리라. 디아나는 흔적을 추적하는데 도가 튼 사냥의 여신이다.

외통수다.

“후우, 이거 신경 쓰지 않은 부분이 내 발목을 잡는군.”

타른카페를 벗었다.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침입자가 들어왔건만, 왜 곧장 그대의 신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았지, 디아나의 사제?”

내 말에 그녀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한다.

“저는 아르테미스 님의 사제가 아니에요. 그저, 신들의 미움을 받아 이곳에서 영원토록 후회하는 벌을 받은 여자랍니다. 신들께 비명을 지르며 도움을 구한다고 한들, 절 지켜 주실 신은 안 계시겠지요.”

신에게 저주를 받았다?

“불사의 몸에 사슴의 감각을 지녔다지 않았던가? 그런 것들을 지니려면…….”

“제가 태어났을 때, 모든 신께서 선물을 주셨어요. 그리고 하데스께서 주신 선물이 바로 죽음 면제권이죠.”

시무룩하게 그녀가 덧붙였다.

“그땐, 영생이라는 게 이토록 슬픈 건 줄 몰랐지만요.”

아! 여자가 탄성을 내질렀다.

“워낙 오랜만에 사람을 만난지라, 기본적인 예절도 잊고 있었네요.”

꾸벅 고개를 숙인 여자가 제 소개를 시작했다.

눈을 끔뻑였다. 이 여자, 제정신인가?

아무리 내가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들, 여전히 나는 창을 들고 있다.

“제 이름은 판도라예요. 모든 신들의 선물을 받아 태어난 여자이며, 최초의 여자죠. 그리고 세상에 악을 퍼트린 여자고요. 당신은요?”

“나는 오디ㅅ…….”

흠칫, 몸을 떨었다.

이 맹랑한 여자에게 내 이름을 알려 줄 뻔했다. 황급히 입을 다물자, 판도라가 내게 묻는다.

“오디……?”

크흠! 헛기침했다.

내 이름은 척 들어도 이쪽 지방 이름은 아니다.

가명을 쓰자.

“혀를 깨물었군. 나는 오디세우스다.”

언젠가 들은 이 지방 영웅의 이름이었다.

* * *

노른들이 노래한다.

“처참한 인간의 전쟁. 분노한 영웅들도 뛰어든 전쟁.”

“온갖 영웅들이 서로를 저주하고 죽이고 죽어 나간다.”

“마침내!”

셋이 합창한다.

“신들도 참지 못하고 가면을 벗으리니!”

토르는 침을 꿀꺽 삼켰다.

하계의 전쟁은 끊이질 않는다. 저마다의 이유를 가지고 싸운다.

땅을 원하는 자, 황금을 원하는 자, 여자를 원하는 자. 그 모두가 창칼을 들고 다툰다.

그 욕망은 인류를 수호하는 토르라 할지라도 막을 순 없다.

‘그것들이 영웅 간의 전쟁으로 번진다고? 그리고 신들이 가면을 벗는다?’

소름이 돋았다.

그렇다면 그 전쟁의 도화선을 지닌 영웅은 누구인가.

토르의 뇌리에 한 이름이 떠올랐다.

“오디슨.”

신이지만, 아직은 신이라 하기에 연약한 전사. 그에게는 영웅이라는 단어가 딱 어울린다.

토르의 얼굴에 고심이 서렸다. 무심코 묠니르를 만진다.

헬이 말했다.

“이번에는 펜리르가 아니라 오디슨을 걸고넘어져 라그나로크를 일으킬 셈인가?”

차가운 겨울보다 싸늘한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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