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그 오브 발할라-57화 (57/208)

# 57

57화. 영웅은 사실 아무것도 모른다 (1)

오딘은 오디슨에게 세 가지 시험을 준비했다.

심기체(心技體). 모든 힘의 근본이 되는 세 갈래 길 중 가장 먼저 체(體)를 강화할 수 있는 시험을 내렸다.

토르는 걱정이었다.

“아버지, 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그가 아무리 신이 되었다고 한들, 그것들을 해낼 수 있을 거라 믿으시는 겁니까?”

오래된 고신(古神)이라 할지라도, 셋 모두를 해낸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그 셋 중에서는 신계연맹법에 저촉되는 것도 있었다.

토르는 불안했다.

‘아버지의 광증이 도진 게 아닌가?’

전쟁의 광기가 하계를 휩쓴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인류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토르는 언제나 그게 걱정이었다. 라그나로크의 때를 위한다는 명목하에 질끈 눈을 감아 왔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걱정은 없지 않은가.

또 다른 멸망의 운명이 다가온다 한들, 그것은 죽음으로 치자면 자연사였다.

나이 들어 죽는 것.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꾸준한 운동을 하듯, 쌓여 가는 찌꺼기들을 꾸준히 청소하는 걸로 세상을 유지할 수 있다.

언젠가 그 멸망이 다가올 거라 한들, 젊은 신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를 몰랐다.

“걱정 말거라, 아들아.”

“하지만 아버지…….”

“너는 모른다.”

오딘은 주름진 얼굴에 회한을 가득 담은 채 홀로 중얼거렸다.

“이 세계가 얼마나 연약한지… 이 세계가 어떤 길을 걸어가는지, 너는 모른다. 아들아, 언제나 나의 희생을 기억해라.”

토르는 진절머리가 났다.

희생, 희생, 희생! 그 빌어먹을 희생을 도대체 몇 번이나 반복하는 건가!

쾅! 테이블을 두드린 토르가 짜증을 부렸다.

“희생! 그래, 좋다 이겁니다! 한 번 실패하고 회귀했다는 게 그리도 큰 희생입니까? 네?”

토르의 말에 오딘이 끌끌 웃었다.

결국 아무도 그의 희생을 몰랐다. 노인은 외눈으로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세계수의 꼭대기에 앉은 커다란 새를 보았다.

그 눈에는 무수한 세월이 담겨 있었다.

“한 번뿐이라 생각하느냐.”

오딘의 말에 토르가 움찔 몸을 떨었다.

“네? 아버지, 뭐라 하셨습니까?”

“아니, 되었다.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걸로 족하다.”

“잠깐, 아버지……!”

토르가 진실의 편린을 엿보고자 했지만, 펑- 오딘은 그대로 사라졌다. 오딘이 있던 자리에는 까마귀의 검은 깃털만이 휘날렸다.

토르는 입술을 질끈 씹었다.

“…한 번이 아니라면… 도대체…….”

토르의 입장에서 오딘은 갑자기 이상해졌다.

어느 날부터인가 유쾌한 모습과 미치광이 같은 절제력 없는 모습이 사라졌다. 그저 이래야 하기에 이렇게 한다는 듯한 지친 태도로 일관했다. 자연히 오딘은 아내인 프리그와도 사이가 멀어졌다.

늘 왕좌에 같이 앉아 하계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던 둘인데… 이제는 그런 일이 없다.

토르는 생각했다.

“…여러 번 반복했기 때문이라는 건가. 그렇다면…….”

막을 수 없었다?

라그나로크가 아님에도 파멸이 늘 자리 잡고 있었단 것인가.

‘그대는 무언가 알고 있소? 이름을 알 수 없는 자여. 태초 이전부터 세계를 굽어보던 자여.’

토르의 눈이 세계수 꼭대기로 향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리’는 여전히 묵묵히 그 자리에 앉아 아래를 굽어볼 뿐이었다.

토르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두고 보십시오, 아버지. 인류의 수호자로서 파멸을 막아 내고 말 터이니!”

텅 빈 오딘의 거처에서 벗어난 토르가 종자를 불렀다.

“…티알피, 티알피! 염소를 전차에 매라. 니플헤임으로 가자. 운명에 대해서 들어야겠다.”

토르의 발길은 니플헤임으로 향했다.

오딘은 그 광경을 전해 들으며 관자놀이를 눌렀다.

“이 흐름은 변치 않는구나.”

역시나 겪어 본 일이었다.

* * *

오딘께서는 말씀하셨다.

‘너는 신의 피를 이은 것도 아니오, 용의 피를 이은 것도 아니며, 영웅의 피를 이은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그러한 혈통을 지닌 이들에 비해 몸이 약하다.’

그 말에 눈살을 구겼다. 하지만 반박할 수는 없었다.

미간을 좁힌 채 생각에 잠겨 있자니, 이라호드가 옆에서 조잘댔다.

“오딘께서도 너무하세요.”

“너무하시다?”

“그도 그럴 게, 오디슨은 무려 비다르께 사과도 받은 신이잖아요?”

신에게 사과를 받았다.

하지만 그건 사과일 뿐이다. 그것도 치욕스럽다는 표정으로 한 억지 사과.

“그리고 용과 맞서 싸우기도 했죠.”

나는 죽기 직전에 구출 받았다. 용은 강했다.

“그 용은 무려 테베의 건국왕, 카드모스였다구요.”

영웅과 싸워서 이겼다?

그 역시 혼자 힘으로 해낸 게 아니었다. 할랴헤랴르의 도움이 없었다면 감히 해낼 수 없었으리라.

기분이 축 처졌다.

“그리고 또…….”

“그만.”

이라호드의 말을 잘랐다.

그녀가 한마디를 뱉을 때마다 내 기분은 점점 나빠졌다. 내가 이토록 약했나- 싶어서 참담한 심정이 되었다.

오딘께 한 질문은 옳았다.

“역시, 시험을 치러야 해.”

“강해진다는 건 좋은 거지만… 그래도, 좀 찝찝하지 않아요?”

“찝찝하다? 굴베이그의 도움을 받아야 하기에?”

“아무래도 좀… 그렇죠.”

굴베이그(Gullveig).

바니르 신족의 일원으로서 세상에 탐욕을 퍼트린 마녀라 한다.

그녀를 토벌코자 애시르 신들께서 합심하셨다. 세 차례나 그녀를 화형에 처했지만, 그때마다 그녀는 부활했다.

그녀 탓에 아스-반 전쟁이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애시르 신들께서 승리하시고, 뇨르드와 그 자식들(프레이와 프레이야)을 볼모로 삼으셨다.

“오딘께서 날 보내셨는데, 감히 날 함부로 하기야 하겠나?”

“그건 그렇죠. 굴베이그도 이쪽에서 살고 있으니까요. 감히 오딘께 반항할 수는 없겠죠.”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내 말에 이라호드가 입술을 삐죽였다.

그 모습이 귀엽긴 하지만, 당장 급한 것은 굴베이그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녀와 함께 길을 걸었다.

사인을 요구하는 팬들을 상대하며 걷다 보니, 휘황찬란한 상점이 모습을 드러냈다.

[굴베이그 고미술품 전문점]

[※24시간 상담 환영!]

황금으로 꾸며진 상점은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이제까지 본 그 어떤 곳보다도 화려하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심지어 오딘께서 기거하시는 위그드라실 최상부보다도 더!

입을 쩍 벌렸다.

“대단하군…….”

“그냥 금색 칠을 해 둔 거예요. 도금도 아니니까, 안심하고 들어가요.”

이라호드가 내 등을 떠밀었다.

딸랑딸랑.

문에 달린 종이 울린다.

“으응, 손님인감? 오랜만이구만.”

느긋하게 앉아 있던 미녀가 담배 연기를 훅 내뿜었다. 거의 알몸이나 다름없는 모습에 황금 장신구를 무수히 걸친 여자였다.

“옷 좀 입지 그래요? 그 꼴로 장사하다간 공연음란죄로 잡혀갈걸요?”

이라호드가 톡 쏘았지만, 굴베이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녀는 게슴츠레한 눈동자로 날 보고 배시시 웃었다.

“그래, 오디슨, 무슨 일로 이 할망을 찾았나? 미술품에 관심이 있어 보이지는 않더구만.”

젊은 외모와 달리 늙은 할멈들이나 쓸 법한 어투를 구하는 굴베이그.

나는 깜짝 놀랐다. 저 사악한 대마녀가 내 이름을 알고 있을 줄이야.

“…날 어찌 알았소?”

오딘께서 미리 언질을 주신 탓인가?

굴베이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장신구가 부딪혀 짤랑이는 소리가 났다.

“그야 텔레비를 보고 알았지.”

“…아.”

너무 뻔한 이야기에 한숨을 내쉬었다.

저 TV라는 마법 물품 탓에 신비가 모조리 죽어 버린 느낌이다.

굴베이그가 끌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바보상자라고 하는데… 이만한 게 또 없지. 이 텔레비 앞에 앉아 있으면 내 낡은 소파가 꼭 흘리드스캴프(Hlidskjalf)같단 말이지.”

흘리드스캴프는 오딘께서 지니신 의자다.

세상 모든 일을 볼 수 있게 해 준다는 신비한 물건. 그에 비할 바인가- 싶지만, 발할라 대부분 사람이 내 이름을 안다는 걸 생각하면 뭐.

나름 수긍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이 할망을 찾았는지 묻지 않았나?”

“아, 그렇지. 오딘께서 말씀하시길, 당신에게 온 세상 모든 악의(惡意)가 담긴 항아리의 위치를 물으라시더군.”

“…흐음. 그 노인네가 또 괜한 사람을 홀린 거 아닌가?”

굴베이그가 곰방대를 쭉 빨았다.

후우- 한숨에 짙은 회색 연기가 섞여 나온다.

“힘을 바라는 건가? 하지만 그것에는 이제 가장 질 나쁜 악의만이 남았을 뿐일세. 그걸 흡수하면 강해지기야 하겠지. 다만, 미쳐 버릴 걸세.”

그 말에 이라호드가 살며시 내 팔을 붙잡았다.

불안한 눈으로 날 보는 이라호드에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답했다.

“괜찮소.”

“…용감한 게야? 아니면 만용이 넘치는 게야?”

용기와 만용인가.

둘의 차이는 명확하다.

“내가 실패한다면 만용이겠지.”

“끌끌끌, 정답이구나. 나도 망할 놈의 오딘에게 잡히기 전에는 그리 생각했지. 그 전에…….”

굴베이그가 손을 내밀었다.

엄지와 검지를 붙여 동그라미를 그리며 손바닥을 보인다.

무슨 의미지?

“뭐요?”

“뭐긴 뭐야. 정보료를 줘야 할 거 아닌가?”

정보료? 이놈의 발할라는 모두가 돈이구나.

눈살을 구겼다. 입술을 질끈 깨물고 물었다.

“얼마요?”

“흠, 딱히 비싼 정보는 아니구만. 딱 1천만 크로나만 내게나.”

1천만 크로나라니.

당장 2천만 크로나가 모자라, 아슬라 아줌마와 라드게리타를 못 부르고 있건만!

나는 굴베이그에게 말했다.

“그, 오딘께서 보내신 건데… 좀 깎아 주시오.”

내 말에 굴베이그가 빙그레 웃었다. 이제까지 삶에 지친 할멈 행세가 거짓말이었다는 듯, 활기 넘치는 웃음이었다.

“고오호갱님, 저희 가게는 ‘정찰제’예요.”

또박또박 명확한 발음이었다.

과연, 황금에 대한 탐욕을 세상에 퍼트린 마녀다.

“감사합니다, 고-호갱님!”

망할 할망구.

* * *

정보를 얻어 내고 밖으로 쫓겨났다.

돈을 싹 받아 챙긴 굴베이그는 지명 하나를 딱 말해 주고, 손을 휘휘 저었다. 어이없는 일이지만, 그녀가 거짓말을 한 건 아니리라.

다만,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델로스섬?”

어쩐지 익숙한 이름이다.

그 이름을 어디에서 들었더라?

“오디슨.”

이라호드가 굳은 표정으로 날 불렀다.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지?”

“포기해요, 이 시험.”

이게 무슨 소린가? 왜 갑자기 이 시험을 포기한단 말인가?

눈살을 구기고 이어질 설명을 재촉했다.

이라호드가 한숨을 내쉬고 설명했다.

“델로스섬은 올림포스에서 관리하는 곳이에요. 당신이 그토록 싫어하는 제국의 영토라구요.”

“…제국 땅이라고?”

내 얼굴도 아마 딱딱하게 굳었으리라.

이라호드가 이어서 설명한다.

“심지어 보통 섬도 아니에요. 사는 사람이 얼마 없는 작디작은 섬이지만, 그곳에 가는 건 미친 짓이라구요.”

“…미친 짓이다? 어째서지? 에기르의 집을 건너야 하기 때문인가?”

원양의 신, 에기르의 집은 먼 바다다. 바다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감히 건너기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오딘께서 내리신 시험이다.

어떻게든 건널 방법을 찾으면 되리라.

“그것도 그거지만… 거긴 태양신 아폴론과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의 고향이에요. 성지라구요.”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아폴로와 디아나의 고향이라고?

특히나 디아나와는 영 좋지 않은 감정이 있다.

투기장에서 처음 싸웠던 괴물 멧돼지의 정체가 바로 디아나가 만들어 낸 칼리돈이라는 녀석이었다.

“흐음.”

멧돼지에게 쩔쩔매던 전사가 이제는 신이 되었다는 걸 보여 줄 차례 아닌가? 호승심이 들끓었다.

“햇빛과 달빛을 피해서 섬으로 잠입한다? 딱 잘라 말하자면, 무리예요.”

이라호드의 말이 모두 맞다. 하지만 오딘께서 불가능한 임무를 맡기셨을 리가 없다.

무언가 방법이 있을 터.

그에 고심할 때, 툭- 내 어깨를 건드리는 손이 있었다.

“안녕하신가? 알프의 영광이 나무를 죽이는 독처럼 변한 시간! 만일 내게 묻는다면 답하리오, 숨결을 뱉는 자라고. 혹 고래의 길을 건널 바다의 말이 필요한 게 아닌가?”

이건 웬 미친놈이지?

알프의 영광? 태양을 말하는 건가? 나무의 독이란 게 불이니까.

“제길, 갑자기 뭐라는 거요?”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그의 손을 쳐 냈다.

그때 건틀릿이 우우웅 떨었다.

-키이이잉.

뭐지? 이런 일은 없었는데…….

마치 싫어하는 사람을 만난 아기처럼 칭얼댄다.

“댁은 누구요? 갑자기 왜 헛소리를 뱉는 거지?”

“허, 숨결을 뱉는 자를 모르는 건가? 아아, 텅 빈 투구여!”

갑자기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텅 빈 투구라는 케닝그(kenning, 스칼드 시詩에서 사용하는 완곡어구)는 나도 알아들었다.

주술사 영감이 때때로 말했으니까.

‘네놈 머리통은 꼭 텅 빈 투구 같구나! 속에 든 게 없으니, 그럴 수밖에!’

그러니까 멍청하다는 소리다.

까득, 이를 갈았다. 이 자식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뜸 욕부터 하는 걸로 봐서는 제대로 되먹은 놈이 아닐 터.

이라호드가 말을 꺼낸다.

“아, 그 사람은…….”

퍼억!

내 주먹은 이라호드의 혀보다 빨랐다.

“시(詩)의 신, 브라기예욧!”

이라호드가 깜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아, 이 미친 작자가 브라기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뱉는 멍청한 놈이 바로 그…….

“시성(詩聖), 브라기?”

“크, 크억… 이게 무슨, 억! 전투의 땀이여!”

‘전투의 땀’은 피라는 소리다.

그 말처럼 브라기는 입가에서 피를 주르륵 흘리고 있었다. 내 주먹질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이라호드가 다급하게 내 곁으로 다가왔다.

“브라기의 아내분은 황금사과를 관리하는 이둔이시라구요!”

황금사과를 먹지 않으면 신이라 할지라도 늙는다. 그렇기에 이둔께서는 모든 신과 친밀한 관계시다.

“이둔께서 한마디 하시면 온갖 신들이 오디슨을 핍박할 수도 있어요! 더 심각해지기 전에 사과를…….”

“그러니까 이놈이 브라기라, 이거지?”

나는 브라기의 멱살을 잡은 채 말했다.

브라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나는 숨결을 뱉는 자, 브라기의 숨결이라 함은… 바로, 어억!”

퍽! 재차 브라기에게 주먹질을 했다.

이라호드가 ‘꺅!’ 비명을 터트렸고, 주변을 걷던 이들이 모두 우리를 주목했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브라기의 멱살을 꽉 잡아챘다.

“나한테 저주받은 건틀릿으로 사기를 친 놈이 바로 이놈이라 이거지?”

-끼이이이!

건틀릿의 악령이 그렇다고 대꾸했다.

그럼 맞아야지. 주먹을 번쩍 들어 올렸다.

“자, 잠깐! 그러니까 바다를 건널…….”

퍼억!

바다는 개뿔, 네가 허우적댈 곳은 피바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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