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52화. 영웅은 기다릴 줄 모른다 (3)
“다른 신계의 영웅이라. 돈 되는 놈이 나오셨군.”
“흐흐흐, 분명… 다른 신계 소속을 잡으면 1억 크로나부터 시작이던가?”
“어떻게 할까? 나누면 500만씩인가, 애매하네. 숨통을 끊은 놈이 독식, 어때?”
할랴헤랴르 용병들이 낄낄 웃음을 흘리며 모여들었다.
시정잡배 같은 꼴이다. 하지만 모두가 오딘의 부름에 응해 발할라로 초대받은 전사들이다.
나는 씩 웃었다.
“숨통을 끊은 놈이 독식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 꽤 센 놈이다.”
당연히 돈도 잔뜩 나오겠지. 기대된다.
아니, 처벌 탓에 돈도 못 받으려나? 그래도 놈의 시체를 들이밀면 올림포스 쪽으로 책임을 돌릴 수 있다.
마르스가 하계에 간섭했다는 증거가 될 테니까.
“후우.”
숨을 골랐다. 피로 끈적해진 창을 닦아 내고 고쳐 쥐었다.
실력자를 상대할 때에는 자잘한 실수 하나도 치명적이다.
이건 절대 놓칠 수 없는 기회다.
놈은 마르스의 부하. 마르스의 하계 간섭 증거보다도 더 중요한 게 있다.
“마르스를 놀릴 기회를 놓칠 순 없지.”
거기에 나라고 신들의 눈 밖에 나는 게 즐거울 리 없다.
만회의 기회가 눈앞을 얼쩡거린다. 꼭 잡고 말겠다.
우리 대화를 듣던 사내가 허- 웃음을 흘렸다.
“네까짓 애송이들이 모인다고 한들, 내 상대가 되겠느냐? 응?”
건들거리는 태도로 비웃는 사내.
이름을 모르니 영 불편하다. 인상을 찌푸릴 때 귓가에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페니키아 곡도에 갈색 피부를 가진 마르스의 사도라면…….”
제국군 병사들의 이야기다.
바싹 쫄아 도망치지도 못하고 눈치를 살피는 놈들.
저 사내에게 기대를 걸고 있나?
“…카드모스, 용살자 카드모스.”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를 죽인 카드모스?”
“저 붉은 악마에게 상처를 입힐 정도라면.”
꿀꺽, 제국군 병사들이 카드모스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낸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기대를 박살 내 주겠다.
카드모스가 말한다.
“자. 덤벼라, 애송이들아. 손발이 안 맞는 아군이 적보다 더 위험하다는 걸 알려 주마.”
카드모스는 클클 웃으며 어깨에서 곡도를 떼어 냈다.
톨킬드가 와락 인상을 구겼다.
“우리 전우애를 우습게 보는 거냐!”
“쯧쯧. 시끄럽구나, 꼬마야.”
“이 자식!”
톨킬드가 군단장의 머리를 카드모스에게 던졌다.
철퍽! 카드모스가 머리를 쳐 냈다. 톨킬드가 덤벼들었다.
“흐아앗!”
바이킹 소드를 앞세운 그의 공격은 뻔했지만 강렬하다. 이제껏 싸우는 모습을 제대로 본 적이 없건만… 꽤 기세가 날카롭다.
챙!
하지만 카드모스에겐 역부족이었다.
기본적인 실력 차가 역력했다.
“크흐흐, 봐라. 약해빠진 놈아. 네놈 혼자뿐이구나.”
“망할! 뭐 해! 안 싸울 거야?!”
톨킬드가 버럭 소리쳤다.
그에 용병들이 낄낄 웃으며 제각기 무기를 꺼내 들었다.
이전에 내게 얻어맞은 덩치가 으스대며 나섰다.
“우린 대장이 얼마나 잘 싸우나 보려고 했지.”
“미친! 저쪽도 졌는데 나라고 뭐 있겠냐! 덮쳐!”
“하여간, 패기라고는 하나도 없다니까.”
덩치가 흥- 콧방귀를 뀌고 카드모스를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나는 무식하게 덤벼들질 않거든? 머리를 써야지, 머리를.”
“으으으윽! 제발, 그 민머리를 좀 써먹어라! 이 자식아!”
카가가각- 톨킬드가 비명을 내질렀다.
곡도가 점점 톨킬드의 목 근처까지 다가갔다. 날카로운 칼날이 마침내 톨킬드의 목에 닿는다. 살갗이 벗겨지고 피가 주르륵 흘렀다.
카드모스가 흐흐- 웃었다.
“서두르지 않으면 너희 대장 죽을걸? 뭐, 이깟 놈이 대장이라니, 너희들 수준도 뻔하지만.”
“그러셔? 그럼 이것도 받아 봐라!”
덩치가 덤벼들었다.
카드모스가 움찔 몸을 떨 때.
서걱!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카드모스가 휘청였다.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그가 뒤를 돌아봤다.
“크윽! 무슨!”
“흐흐흐, 둘만 상대할 거야? 여기 사람이 많은데 말이야.”
다른 용병이 카드모스의 빈틈을 노렸다.
그게 시작이었다.
“간다아아!”
“자자자, 여기도 간다!”
전후좌우에서 용병들이 카드모스를 덮쳤다.
카드모스는 이를 악물고 그 공격들을 모조리 쳐 냈다. 하지만 당당하게 주장한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손발이 안 맞는 아군?
그런 건 없었다. 룬스톤이 번쩍이며 제 공을 과시했다.
스칼드가 일렁인다.
〈삼백스물일곱째 자리 앉는다.〉
《금반지를 부수니, 스물한 조각.》
나는 피식 웃었다.
용병들의 생각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이건 늑대의 무리 사냥이다.
늑대 무리의 우두머리가 하는 일은 공격이 아니다.
적의 정면에서 시선을 끄는 것이다.
“용을 죽였다고? 그렇다면 늑대 무리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겠군! 어디, 그 솜씨를 보자!”
버럭 소리치고, 창을 내질렀다.
챙!
“헉!”
카드모스가 깜짝 놀라며 내 창을 막아 낸다.
자신만만하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까 자신이 한 말이 부끄러운 모양이다.
그가 이를 갈며 외쳤다.
“이 비겁한 놈!”
“나도 미안하게 생각한다.”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그만큼 네가 강하기에 어쩔 수가 없군.”
“정정당당하게… 큭!”
촤악! 덩치의 칼이 카드모스의 등짝을 갈랐다.
덩치가 히죽 웃었다.
“정정당당은 개뿔, 우리는 용병이다, 용병. 그 섬나라 시인이 말했다던가? 거 뭐더라?”
“겪어 보지 못한 자에게 전쟁은 달콤한 것이다!”
용병들이 하나같이 외쳤다.
“그래! 전쟁은 원래 개 같은 거라고!”
덩치의 말에 용병들이 낄낄 웃었다.
모두가 카드모스를 공격했다.
채앵! 챙챙챙!
카드모스는 내 창을 튕겨 내고 용병들의 공격을 최대한 막아 냈다. 하지만 한 손으로 열 손, 아니 마흔 손을 막을 순 없는 법.
그 몸에 하나둘 상처가 늘었다. 개중에는 치명상도 있었다.
“크흐으!”
카드모스가 이를 악물었다.
“네놈들이 꽤 손발이 잘 맞는다는 건 알겠군!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이 새끼 이거, 도망치려고 폼 잡는 거 봐라!”
톨킬드가 버럭 소리치고 덤벼들었다.
카드모스는 기다렸다는 듯, 공격을 받아내 휙 돌렸다.
휘이익!
“어, 어어?”
톨킬드의 칼이 아군에게 향했다. 하지만 톨킬드가 뭐라 외치기도 전에 용병은 그 검을 피해 냈다.
카드모스가 눈을 부릅떴다.
“어떻게!”
“글쎄, 왠지 모르게 들리더라고. 대장 저 새끼가, 어 씨바- 엿 됐는데? 하는 소리가 딱 들리더라, 이 말이지.”
킥킥 용병이 웃었다.
다른 이들도 오-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신기하게 나도 그게 딱 보이던데.”
“대충 하는 꼴만 봐도 생각이 읽어지는 경지에 닿은 건가?”
“거 뭐냐, 그게 그… 브로맨슨가 그거냐?”
“우엑, 더러운 새끼들! 너희들은 톨킬드 엉덩이에 종기 난 걸 보고 그럴 생각이 드냐?”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용병들은 평소에 어떻게 지내는 거지? 서로의 엉덩이에 난 종기를 알고 있다니. 역겨운 표정을 지으며 녀석들을 보자, 용병단 전체가 시선을 피했다.
“…대체 무슨… 아니, 됐다.”
듣고 싶지 않다.
어쨌거나, 이게 룬스톤이 발휘한 효과이리라.
나는 히죽 웃으며 가슴팍을 두드렸다.
“그럼 끝장을 내자고! 시간 없으니까!”
“그렇지! 빨리 끝내고 가야지.”
용병들이 껄껄 웃었다.
카드모스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주르륵 흐른다.
녀석은 피할 곳이 없다. 사방팔방, 적에게 둘러싸였다.
“…허, 이스메니오스가 이랬던가.”
카드모스가 무어라 중얼거렸다.
하지만 더 이상 말을 섞을 생각은 없었다.
“죽어라, 마르스의 개야!”
방어할 수 없는 위치로 창을 내질렀다.
푸욱! 카드모스의 등을 뚫고 가슴팍으로 창이 삐져나왔다.
“커억……!”
카드모스가 덜컥 몸을 떨었다. 천천히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질끈 깨문 입술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그는 회한 가득한 눈으로 먼 곳을 보았다.
“…결국, 이 힘을 쓰게 되는가.”
그 힘? 눈살을 구겼다.
푹푹푹! 용병들이 일제히 그 몸을 난도질했다.
카드모스가 부르르 떨었다.
“무슨……!”
나는 입을 쩍 벌렸다.
이 무슨 명예도 모르는 짓거리란 말인가! 죽음을 앞둔 이에게 이런 무자비한 짓이라니!
“어차피 이긴 상황이건만!”
톨킬드가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말했다.
“아, 거… 이런 식으로 말하는 새끼들이 꼭 변신하거나 해서 깽판 놓습니다. 폼 잡을 때 쓱싹하는 게 최고예요.”
“아니… 그렇다고 해도…….”
나는 어이가 없었다.
눈을 끔뻑일 때, 번쩍- 빛이 터져나왔다.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예사롭지 않은 빛이었다.
용병들이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할! 끈질긴 놈 같으니! 야, 죽여!”
용병들이 와-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불안한 감각에 그들을 말렸다.
“안 된다! 저건……!”
부우우웅-! 내 만류가 무색하게, 굉음이 귀를 때렸다.
달려들던 용병들이 그대로 튕겨 날았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저건…….”
거대한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상상 속에서나 본 괴물이 크르릉- 유황 냄새 나는 입김을 내뱉었다.
* * *
카드모스는 생각했다.
‘자만했는가?’
눈앞이 흐려지고, 손발이 차가워졌다.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눈송이가 살갗에 닿아 녹았다. 차갑다. 그러나 곧이어 닿은 눈송이는 차가움이 덜했다.
촉감이 점점 희미해진다.
목소리 하나가 떠올랐다.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철렁이는 목소리다.
‘신성한 샘에 침입해, 내 아들을 죽여?’
아레스의 목소리.
카드모스가 뭣도 모르고 아테네의 계시를 따르다 저지른 죄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당시, 아레스의 분노에 카드모스는 덜덜 떨며 고개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감히 아레스 님의 아드님이신 줄 몰랐습니다! 제, 제가 뭐든 할 테니… 제발 용서를……!’
신의 분노란 무서운 것이다.
모국인 페니키아뿐만 아니라, 아테네의 계시로 신성한 샘물을 놓고 제사 지내 건국한 테베에도 분노가 내리리라.
카드모스는 빌고 또 빌었다.
저 자신보다 가족, 그리고 부하들과 국민을 생각했다.
그는 어진 왕이었다.
아레스는 왕자로 태어나 왕이 된 그에게 치욕을 내렸다.
‘너는 내 노예가 될 것이다. 영웅들이 죽어 가게 될 엘리시움의 문은 네가 노예 생활을 끝내고서야 열리리라.’
그리하여 카드모스는 노예가 되었다.
왕자에서 왕으로, 그리고 노예. 그의 기구한 인생의 끝에는 아레스의 저주가 달라붙어 있었다.
‘하지만 엘리시움에 들어설 수 있는 것은 네가 인간의 형상을 버렸을 때에나 가능하리라.’
아레스는 말했다.
그리고 축복을 내렸다. 그것은 동시에 저주였다.
‘너는 네 죄를 직면해야 한다.’
용을 죽일 정도로 강력한 힘이 봉인되었다.
그렇다고 한들 어지간한 영웅 이상의 힘을 지니고 있었지만, 언젠가 그걸로 부족한 날이 오리라.
신의 예감이란, 언제나 틀리는 법이 없었다.
“…이스메니오스. 너는 이토록 슬펐는가.”
카드모스가 자신의 죄와 마주쳤다.
죽음을 앞두고 삶을 되돌아보니, 이스메니오스를 죽인 죗값을 여실히 느끼게 되었다.
후손들은 모두 불행했다.
그 모두가 이스메니오스를 죽인 죄 탓이다.
“원죄를 짊어진 불쌍한 용이여.”
근친상간과 불륜으로 태어난 용은 신의 피를 이었음에도 신이 되지 못했다. 카드모스는 속죄코자 했다.
그렇기에 중얼거렸다.
“내 생을 너에게 주노라. 그리하여…….”
아레스의 축복이 그를 감싸 빛을 뿜는다.
몸에 박힌 무기들이 스르륵 뽑힌다. 헤집어진 상처들에 새살이 돋는다. 제한되었던 영웅의 힘이 전신에 들끓는다.
“용이 내가 되리니.”
아레스의 저주가 내린다.
잘생긴 얼굴은 엉망으로 일그러진다. 뜨거운 심장은 차게 식는다. 펄펄 끓던 피가 싸늘하게 얼어붙는다.
꽈드드득!
등이 찢어지고 비죽- 날개가 솟았다. 매끈한 피부에는 추악한 비늘이 돋았고, 엉덩이에는 굵은 꼬리가 돋았다.
그리고 카드모스의 이성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크아아아아아아아!”
목 놓아 우는 용 한 마리뿐이었다.
“젠장할! 끈질긴 놈 같으니! 야, 죽여!”
“망할, 다 뒤져서는 변신하고 지랄이야!”
하찮은 인간들이 번뜩이는 날붙이를 들고 덤벼들었다.
용은 크릉- 콧김을 내뿜고 꼬리를 휘둘렀다.
부우우웅! 퍼억!
“커억!”
“켁!”
“으악!”
달려들던 용병들이 모조리 나뒹굴었다. 용의 힘에 대적할 수 있을 법한 영웅은 없었다.
바닥을 구른 용병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외쳤다.
“요, 용이다!”
단 한 번의 공격에 엉망이 된 이가 제 꼴도 잊은 채 소리쳤다.
용병들의 기세가 확 사그라들었다. 푸른 비늘을 지닌 용의 눈빛에 몸이 바싹 얼었다.
“크아아아아아!”
용이 포효했다.
제국군이 와아아아- 소리를 내질렀다.
“용이다! 마르스 님께서 보내신 용이다!”
“야만족을 벌하기 위해 마르스 님이 용을 보내셨다!”
꿀꺽, 오디슨이 침을 삼켰다.
“…미친.”
그저 커다랗기만 했더라면, 그가 당황할 일은 없었으리라.
거대한 몸에는 미증유의 힘이 담겨 있었다. 살짝 구르는 발 구름에 바닥이 움푹 파였다.
오디슨은 제 손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
덜덜덜- 손이 떨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겁먹었나? 오디슨은 스스로가 한심했다.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짝-! 제 따귀를 때렸다.
입술이 찢어져 피가 흘렀다.
떨림이 멎었다. 그 자리에 호승심이 차올랐다.
“그래, 용이라 이거지? 어디 한번 해 보자! 도마뱀 자식아!”
와아악! 오디슨이 고함을 내질렀다.
용이 그를 바라보았다. 크릉- 콧김을 내뿜었다.
그리고 콱!
목을 쭉 뻗어 이빨을 들이밀었다.
“거 목 한번 길구나!”
오디슨은 그 공격을 피하고, 잽싸게 목에 올라탔다. 비늘을 꽉 쥐고 다리로 목을 감쌌다.
용이 몸을 마구 흔들었다.
“크아아아아앙!”
“덩치만 커다란 괴물 같으니! 죽어라! 죽어!”
오디슨이 이를 꽉 악물고 창을 내리찍었다.
카- 앙!
“허…….”
오디슨이 헛숨을 흘렸다.
전력을 다한 우악스러운 공격에도 흠집 하나 나지 않다니!
으득! 그가 이를 악물었다.
“용이 이기나, 신이 이기나! 견뎌 봐라!”
캉캉캉캉!
연이어 창을 내리찍었다.
용은 그 공격이 거슬린다는 듯 마구 몸서리쳤다. 오디슨은 날아드는 발톱을 피하고 용을 계속해서 괴롭혔다.
그 광경을 보는 제국병사들은 침을 꼴깍 삼켰다.
“…요, 용과 혼자서 맞서다니…….”
“붉은 악마… 아니, 저건 마왕이야, 마왕!”
신화 속에서나 나오던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저런 작자를 죽이려고 설치던 것인가? 병사들은 새삼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신실한 병사가 버럭 화를 냈다.
“이 불경한 놈들! 마르스께서 보내신 용이 질 거라 생각하나!”
“아니, 저걸 보면…….”
“허! 상처 하나 내질 못하는데 뭘!”
오디슨을 폄하한 이도 속으로는 경악했다.
식은땀이 주르륵 흘렸다.
‘저건 인간이 아니다.’
붉은 악마가 이제까지 해 온 짓거리들은 모조리 비상식적이다. 그렇다고 해도 용과 홀로 맞서 싸우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제발, 제발! 마르스 님!’
병사가 기도했다.
그 기도가 먹힌 걸까? 고군분투하던 오디슨이 용의 발톱에 걸렸다.
퍼억! 쾅!
귀찮다는 듯 쳐낸 손길에 우람한 몸이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오디슨은 끄으으- 신음을 내뱉었다. 늑대의 힘을 이끌어 내도 공격 하나 먹히지 않는다.
“이렇게까지 차이가 난단 말인가.”
오디슨이 한탄했다.
그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볼 때, 그 위로 짙은 그림자가 졌다.
“크르르…….”
화륵- 입안에 불길을 머금은 용이다.
그놈이 오디슨을 똑똑히 노려보고 있었다.
오디슨은 설마- 하고 침을 꼴깍 삼켰다.
‘용의 숨결? 피해야……!’
용이 더 빨랐다. 입을 쩍 하니 벌렸다.
그리고 포효했다.
“크롸라라라라라!”
뜨거운 불길이 오디슨을 집어삼켰다.
제국군이 환호를 내질렀다.
“됐다! 마르스의 용이 붉은 악마를 불태웠다!”
“살았어! 살았다고오!”
서로 울며 그 몸을 부둥켜안았다. 혹자는 무릎 꿇고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
마르스에게, 그리고 사나운 용에게.
“마르스시여! 전쟁을 이기는 분이시여! 당신의 드라콘이 저를 살렸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거듭해 절을 올리고 용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크륵, 크르륵……?”
용의 거구가 뒤뚱거린다.
시뻘건 불길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용이 왜?
병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려는 것인가?’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만에 하나라도 붉은 악마가 이겼을 가능성은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이어진 광경에 눈을 부릅떴다.
쿠웅!
“크르륵……!”
용이 쓰러졌다. 그리고 불길 속에 검은 그림자가 비척대며 일어나는 중이다. 죽었으리라 생각한 이가 똑바로 일어선다.
병사는 입을 쩍 벌리고 오줌을 지렸다.
“마, 마르스의 요, 용이…….”
공포가 그의 심장을 옥좼다.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 그처럼 충격에 졸도하는 이가 몇 명.
그리고 믿고 있던 용의 패배에 겁에 질려 무작정 달리는 이들이 한가득.
그렇기에 그들은 알지 못했다.
불길 속에서 일어난 마왕의 곁에 한 사람이 더 있다는 걸.
“정말 고전적인 브레스네요. 안 그래요? 크롸롸- 라니.”
발키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의 창이 용의 뒤통수로 비죽 튀어나온 채다.
오디슨은 그녀의 힘에 깜짝 놀랐다. 강하다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용을 잡을 정도라니.
허나 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었다.
“…어떻게? 하계에 대한 불가침은?”
“그러니까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괜히 혼자 뛰어가서는.”
이라호드가 입술을 삐죽였다.
이 전사는 단순해서 기다릴 줄을 몰랐다.
느릅나무 부족이 위험하다는 걸 알아챈 오디슨은 무작정 달렸다. 이라호드의 제지에도 그저 미안하다 외치며 달렸다.
어휴- 이라호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프리키리 행사도 결국 못 봤어요. 내 말 좀 듣고 갈 것이지. 뭐가 그리 급하다고 곧장 가요?”
“하지만…….”
“신계연맹법이 그렇게 잔혹한 건 아니거든요?”
이라호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신성의 소멸이 달렸을 때는 모든 수단을 취해도 된다구요.”
“그 말은……?”
이라호드가 씩 웃었다.
“발키리들, 그리고 신들마저도 이 전쟁에 끼어들 수 있단 소리죠.”
신들까지도?
오디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그때, 하늘하늘 떨어지던 눈송이가 휘청였다. 눈발이 거세진다. 우아한 춤사위를 펼치던 눈송이들은 겁에 질려 요동쳤다.
서늘한 목소리가 눈 내리는 평원을 가득 채웠다.
“감히! 내 분노가 너희들을 얼어붙게 하리라!”
휘이이이잉-!
조용히 쌓이던 눈이 비명을 내지르며 미쳐 날뛰었다. 새하얀 설풍의 칼날이 도주하는 제국군들을 덮쳤다.
온 세상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오디슨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헬께서도 오셨소?”
“뭐, 그렇죠.”
이라호드가 틱틱대며 말했다. 그녀는 힐끔 오디슨을 노려보았다.
오디슨은 헬의 권능에 혀를 내두르는 중이었다.
이라호드가 덥석, 그의 볼을 꼬집었다.
“그래도 나랑 데이트하던 걸 던지고 왔으니까, 제가 먼저인 거 알죠?”
오디슨은 볼을 잡힌 채 눈을 끔뻑였다.
그는 그녀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랐다.
* * *
데너리즈 지방을 공격한 제국군 대다수가 차가운 눈보라를 이겨 내지 못하고 얼어 죽었다.
군단 하나가 파견되어 살아 돌아온 이는 극소수. 제국은 충격에 휩싸였다. 이전보다 더 큰 충격이었다.
신탁에 의해 움직인 군이 몰살당하다니!
살아 돌아온 이들마저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마왕, 마왕이 온다아아아! 검은 복면을 쓴 붉은 마왕이 피의 복수를 하러 온다아아아! 끄아아아! 끄아아아! 우, 우리는 모조리 죽을 거야… 죽을 거라구……. 흑흑흑!”
붉은 마왕에 대한 소문이 제국 전체에 퍼졌다.
제국민들은 공포에 떨었고, 귀족들은 신전으로 몰려가 마르스의 신탁을 빌었다. 하지만 신은 침묵했다.
“…마르스시여! 이 어찌 된 일이란 말입니까!”
“혹시… 마르스께서는 붉은 마왕을 징치하라 하셨던 게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인세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겨 낼 수 없다! 마르스의 용마저도 단신으로 처치했다 하지 않는가!”
시뻘건 공포가 제국 전역에 퍼졌다. 역병처럼 제국민을 떨게 하는 공포는 역병보다 더 넓게 퍼졌다.
소문은 바다를 건넜다.
왕국에서도 모두가 이 사건에 대해 말했다.
제일 재밌는 게 싸움 구경, 불 구경 아닌가? 불과 싸움이 어우러진 전쟁 이야기는 모두에게 인기였다.
음유시인들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지어 불렀다.
“그 땅은 가면 쓴 마왕이 사는 곳이라네. 용의 불꽃에도 멀쩡한 마왕은 제국을 증오한다네.”
가면 쓴 마왕의 땅.
데너리즈 지방에 새로운 별명이 생겼다.
가면의 소굴(Den of the Mask).
그 별명이 널리 퍼지며 덴 마스크가 되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고 나면 그 이름은 덴마크로 바뀌리라.
아직은 오지 않은 날이다.
* * *
“…음?”
오디슨이 눈살을 구겼다.
이 일은 제국과 왕국뿐만 아니라 신계마저도 떠들썩하게 했다.
붉은 마왕 이야기는 마왕 스스로도 예상치 못한 일을 불러왔다. 아레스가 곤란하게 된 것? 자신의 이름값이 훌쩍 오른 것?
아니, 그런 일이 아니다.
“뭐 하냐, 너.”
밥 잘 먹다 저게 무슨 짓인가? 이그나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음… 숯불이 약해진 거 아닌가?”
“으잉? 방금 갈았는데 무슨. 봐, 고기도 잘 굽히잖아.”
치이익- 생고기가 순식간에 불판에 달라붙었다.
오디슨이 제 손을 바라보다 말했다.
“하지만 뜨겁질 않은데?”
“이 미친놈! 뭐하는 거야!”
이그나르가 기겁했다.
오디슨은 여전히 태연했다.
“안 뜨겁다.”
“뭐?”
이그나르가 입을 쩍 벌렸다. 지금 눈앞에 있는 오디슨은 불판 위에 손을 얹은 채다.
지글지글, 손바닥 바로 옆의 고기가 육즙을 머금고서 익어 간다.
그런데 안 뜨겁다고?
오디슨의 신성에 마침내 권능이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