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
50화. 영웅은 기다릴 줄 모른다 (1)
부르릉.
하계로 가는 마차 안은 적막했다.
마차를 모는 발키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할랴헤랴르 용병단 녀석들도 조용했다.
나는 그저 분노를 삭이며 실망을 곱씹었다.
머리를 쓸어넘기며 생각했다.
“후우.”
신의 타락인가.
아니, 그저 서로가 생각하는 게 다른 것인가?
티르는 거절 이후에도 내게 부탁했다. 그 이름값을 생각하면 어울리지 않는 저자세였다.
그만큼 상황이 심각하다는 거겠지.
티르는 말했다.
이대로 두면 비다르의 신격에 금이 간다고.
그는 내가 신성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비다르의 신격이 깎이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여겼다.
개미가 죽어 가며 흘리는 피는, 코끼리의 생채기에서 흐르는 피보다 적으니까.
무게를 달아 생각하면 내 신성 따위는 별것 아니다.
나조차 신성을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신이 되고픈 마음은 없었다.”
심장에 손을 얹고 중얼거렸다.
신성보다는 느릅나무 부족 그 자체가 내게는 중요했다.
티르는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 신으로서 너무 오래 산 탓이리라.
“오디슨 님? 곧 도착해요. 하차 준비하세요.”
발키리가 말했다.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 냈다. 티르에 대한 배신감은 크지만, 그 생각을 계속해서 안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름의 털가죽을 뒤집어썼다.
-키이이.
건틀릿이 내는 괴성에 씩 웃었다.
탈착 불가 저주는 사라졌다. ‘죽음이 둘을 갈라놓으리’가 발동하며 저주가 풀려 버렸다.
그럼에도 악령은 건틀릿에 남았다. 타락한 몸뚱이를 끌고 다닐 수는 없었기에 죽여야 하나 생각했건만.
잘된 일이다. 이 녀석은 보험이다.
건틀릿을 쓰다듬었다.
끼이- 하는 소리가 들린다.
악령이라는 놈들이 모두 이렇게 귀여운 걸까?
잡생각에 빠져 있을 때, 옆에서 머뭇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톨킬드가 말을 걸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그를 보았다.
“그게…….”
“뭐지? 할 말이 있다면 해라.”
“오디슨, 너… 아니, 오디슨 님. 진짜, 신이 된 겁니까?”
어색하기 그지없는 존댓말에 피식 웃었다.
이전에도 존댓말을 쓰다가 반말로 바뀌더니, 이제 또 존댓말인가? 톨킬드는 불안한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딘께서 그렇다 하시더군.”
“허…….”
혀를 내두르는 톨킬드. 용병들이 쑥덕인다.
“야, 너 망한 거 아니냐? 전에 시비 제대로 걸었잖아.”
“내가 망하긴 무슨! 같이 싸웠으면 전우지! 그러니까… 어, 아마 안 망할걸……?”
덩치가 슬쩍 눈치를 보며 말했다.
신성모독이다! 그딴 소리를 할 생각은 없다.
애당초 에인헤랴르들은 오딘께서 모집하신 전사다. 신이라 한들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이들이 아니다.
나는 씩 웃어 보였다.
“이번에 하는 걸 보고 생각하지.”
덩치가 움찔했다. 다른 녀석들도 흠칫 몸을 떨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덩치가 소리쳤다.
“여, 열심히 하겠슘돠!”
그의 혀가 꼬였다.
덩치를 시작으로, 나에게 무수히 많은 충성의 서약이 쏟아졌다.
“어어? 저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헤헤… 저는 처음부터 오디슨 님이 대단한 분이시라고 알아봤습니다!”
“이 한 몸, 바치겠습니다!”
부르르. 룬스톤이 가늘게 떨었다.
슬쩍 룬스톤을 꺼내 본 나는 눈을 끔뻑였다.
“음?”
〈삼백 스물일곱째 자리 앉는다.〉
이건 단순한 순위 표시가 아니었던가?
스칼드 한 구절이 번뜩이고, 글자가 바뀐다.
《금반지를 부수니, 스물한 조각.》
금반지를 부순다.
족장, 혹은 왕이 하는 일이다.
그들의 별명은 반지파괴자. 반지를 부숴 그 조각을 나눠 주며 충성을 받는 이들이다.
그리고 마침 여기에는 스무 명이 있다.
번쩍! 룬스톤의 빛이 그들에게 뻗었다.
그들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시꺼먼 사내들이 떠는 모습은 보기에 좋지는 않았다.
* * *
“맞서 싸워야 합니다!”
“허! 웃기고 있군! 군단에 대적해? 개죽음이다!”
시그니료드는 두통을 느꼈다.
‘하나로 뭉쳐도 부족하건만…….’
임시로 만들어진 커다란 천막에는 날 선 대립이 한창이었다.
특히, 원부족과 도망쳐 온 이들 간의 갈등이 날카로웠다.
“부족을 지켜야 한다! 우리는 이미 도망쳤다! 어디로 더 간단 말이냐!”
지난 전쟁에서 살아남은 전사가 목소리를 높였다.
내륙 지방에서 해안가까지 도망친 지금도 수치스럽다. 그런데 아예 이 지방을 떠나 바다를 건너자니?
있을 수 없는 소리였다.
“개죽음을 당하려고 이곳에 온 줄 아나? 어떻게든 살아 보자는 거 아냐!”
멸망한 부족의 생존자가 외쳤다.
그는 살기 위해 전투에서 도망쳤고, 결국 살아남아 느릅나무 부족에 몸을 맡겼다. 그런데 적의 대군세에 맞서자니?
받아들일 수 없는 소리였다.
“바다에 몸을 맡기면? 항해 경험조차 없는 우리다. 지금 와서 배를 만들자고? 우스운 소리! 뇨르드께서 보우하셔도, 에기르의 영역을 지날 수 있겠는가!”
“그러면? 제국과 부딪혀서 살아남을까? 응? 부족민들이 어찌 될지 꼭 말해야 아나? 전사들? 잘해 봐야 그 끝은 콜로세움의 노예 검투사다. 그에 비하면 불확실에 몸을 던지는 게 낫지 않은가!”
둘 다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싸움을 피해 달아난다고 싸움이 없는 곳에 닿을 수 있다는 보장이 있을까?
삶은 언제나 투쟁의 연속이다.
시그니료드는 그 사실을 잘 알았다.
투쟁을 피한다고 한들, 또 다른 투쟁이 있을 따름이다.
“바다를 우습게 보지 마라!”
“흥, 운 좋게 군단을 물리쳤다고, 제국을 우습게 보는가! 에잇, 난 개죽음 당하긴 싫다! 나라도 살아야겠다고!”
벌떡, 멸망한 부족의 전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 느릅나무 원주민들이 그를 비난했다.
“저, 저 배은망덕한 놈! 우리 부족민이 되겠다던 약속은 어쩌고!”
“부끄럽지도 않은가! 전사라는 작자가 싸움에서 도망칠 생각이나 하다니!”
흥- 콧방귀와 함께 전사가 퉤- 침을 뱉었다.
“어떻게든 산 사람은 살아야지! 선조들이 머물던 땅? 지랄하고 있군.”
노호성이 터져 나왔지만, 전사는 모두 무시하고 천막을 걷고 밖으로 나섰다. 그에게 동조하는 이들도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퍽!
“커억!”
가장 먼저 튀어나가던 전사가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움찔! 모두가 몸을 떨었다. 바닥을 뒹구는 그의 가슴팍 위로 기이한 모양의 신발이 얹어졌다.
“제국 놈들은 쓰레기 같지.”
늑대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천막 안을 가득 채웠다. 털가죽을 뒤집어쓴 사내. 그는 맹수와 닮은 눈동자를 번뜩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때때로 쓸 만한 소리를 할 때도 있다.”
“으, 으으… 네, 네놈은 뭐, 뭐냐!”
퍼억! 사내가 쓰러진 전사의 머리통을 걷어찼다.
전사가 그대로 눈을 까뒤집었다. 사내는 쯧- 혀를 차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탈영은 즉참이다.”
씩 웃음 짓는 사내. 도망치려던 이들이 버럭 달려들려 했지만, 원주민들이 더 빨랐다.
“아아, 아아! 붉은 늑대시여!”
“정말로 오셨어! 정말 우리 기도를 들어주신 거야!”
원주민들이 눈물을 펑펑 흘렸다.
시그니료드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달렸다.
“오빠!”
와락, 그 넓은 가슴팍에 안겼다.
오디슨은 피식 웃으며 시그니료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시그뉘, 많이 듬직해졌더구나. 옛날 그 울보가 말이야.”
“…어, 어……? 이제는?”
오디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체를 숨기는 것? 영 껄끄럽고 불편한 짓거리였다.
티르도 버렸는데, 올림포스와의 갈등을 두려워할까?
“그것보다…….”
주변을 둘러본 오디슨이 쯧, 혀를 찼다.
“제국군이 며칠이면 닿을 거리에 있는데, 참 여유롭군.”
오디슨이 바닥에 쓰러진 이를 밟으며, 천막 가운데로 걸어갔다. 그를 막는 이는 없었다.
이전 오디슨의 활약을 본 원주민들은 모두 경의를 표했고, 붉은 늑대가 시그니료드가 만들어 낸 신이라 수군거리던 이주민들은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모두의 주목을 받은 오디슨은 좌중을 둘러보고 입을 뗐다.
“난 수많은 전쟁을 치렀다. 울프헤딘을 이끌고 전쟁을 치른 탓에 군략도 어느 정도 알게 됐지.”
그가 씩 웃으며 질문을 던졌다.
“최고의 방어가 무엇인지 아는가?”
모두가 침묵하고, 오디슨이 답을 내놨다.
살짝 으스대며 내뱉는 표정에는 완벽한 답안이라는 자부가 가득했다.
“공격이다.”
좌중이 입을 쩍 벌렸다.
완벽은 개뿔, 미친 짓이었다.
* * *
“흐흐흐.”
최근 아레스는 기분이 좋았다.
오디슨 놈이 결국 사고를 쳤다!
신과의 재판? 모든 신계는 결국 신이 우선이다.
신의 힘은 신계의 큰 전력이기 때문이다.
결과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아레스는 확신했다.
분명 오디슨에게 큰 벌이 떨어졌으리라.
아레스가 웃으며 혼잣말한다.
“그런 상황에서 놈이 챙기는 부족이 박살 난다면?”
제정신을 못 차리리라.
이전 데너리즈 지방에 제국군 군단 하나가 박살 난 일이 있었다. 그에 올림포스는 아스가르드를 의심했지만, 언제나처럼 결정적 증거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은 다르다.
제정신이 아닌 놈을 쓰러트리는 건 쉬운 일이다.
온갖 스포츠에서 괜히 멘탈 케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아니다. 싸움 역시 스포츠와 닮았다.
상승세를 타는 전사는 대단한 일을 해내지만, 내우외환으로 흔들리는 이는?
대단한 헤라클레스도 헤라의 저주 때문에 광증을 앓아, 자신을 도와준 이피토스 왕자를 죽였다. 그 탓에 10년의 노예 살이를 했다.
정신적으로 지친 이는 늘 실수하기 마련이다.
“확실한 증거를 잡아내고 말리라.”
아레스는 딱- 손가락을 튕겼다.
헐레벌떡, 노예 하나가 달려왔다. 멀끔하게 잘생긴 데다 몸도 탄탄한 사내였지만, 그저 노예일 따름이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그래, 카드모스. 네가 해 줄 일이 있다.”
“분부를.”
납작 엎드리며 카드모스가 말했다.
그는 본래 페니키아의 왕자였으나, 아테나의 계시에 따르다 큰 실수를 했다. 신성한 샘물을 긷기 위해 샘지기, 이스메니오스를 죽인 것이다.
이스메니오스는 드래곤이었다.
동시에 신의 아들이다. 그것도 무려 군신 아레스와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고모와 조카 사이에서 근친상간, 그리고 불륜의 죄악으로 태어난 탓에 신이 아닌 드래곤이었다.
아레스는 분노했고, 카드모스는 속죄하고자 노예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노예 살이 중 서글픈 사실 하나를 알아챘다.
‘그놈도 참 불쌍하지. 어머니는 저를 버렸고, 아비라는 작자는 불륜 사실을 숨기기 위해 오지의 샘지기를 맡겼으니.’
카드모스는 이스메니오스를 동정했다.
애정 없는 아들이었기에, 아레스는 고작 쓸 만한 노예 하나를 얻는 걸로 분노를 풀었다.
그는 아레스가 두려웠다.
아레스는 친자식의 죽음도 이득이 된다면 용서하는 미치광이였다.
“데너리즈 지방을 공격하는 제국 군단을 따라가라.”
“제국군이라면… 하계 불가침의 원칙에 어긋나는 게 아닙니까?”
“그야 네가 정체를 숨기면 될 것 아니냐? 혹, 그 정도도 하지 못하는 것이더냐?”
뱀 같은 눈길이었다.
카드모스는 침을 꿀꺽 삼키고 고개를 저었다.
“최대한 정체를 숨기겠습니다.”
“흐흐, 그래야지. 데너리즈의 야만족 중에서 잘 싸우는 놈이 있을 거다. 그놈을 꼭 죽일 필요는 없다. 다만, 놈의 정체가 만천하에 드러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카드모스가 고개를 푹 숙이며 명을 받들었다.
그때, 푸드득! 독수리가 날아들었다. 아레스의 전령 노릇을 하는 신수였다.
“아레스 님!”
“음? 무슨 일이더냐.”
“오디슨이…….”
아레스가 히죽 웃었다.
“그래? 놈이 결국 데너리즈 지방으로 갔더냐?”
“아니, 그게 아니라…….”
독수리가 우물쭈물 말을 골랐다.
어찌 말해야 이 소식을 아레스의 기분을 안 건드리고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이었다.
아레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데너리즈 지방으로 가지 않았다고? 하계를 외면한 것이더냐?”
“…아니, 가긴 갔습니다만…….”
“그렇다면 뭐가 문제냐! 카드모스, 내 명을 당장 이행하라!”
카드모스가 넵!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철컥.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독수리가 눈을 꾹 감고 소식을 전했다.
“오디슨이 자신을 밝히고 제국군을 기습했습니닷! 그 탓에 제국군이 큰 피해를 보고 있습니닷!”
그 미친놈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다고?
아레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계에서 오디슨의 정체를 밝혀 신계 연맹의 처벌을 받게 할 셈이었는데, 뭐?
스스로 정체를 드러내?
당황 다음에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크하하하하! 미친놈 같으니! 정체를 숨기지도 않았다고? 완전히 돌았군! 크하하하하!”
지금도 제국군이 오디슨에게 죽어 나가고 있다. 게다가 카드모스가 하계로 향했다.
하지만 아레스는 그것들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저 오디슨에게 내려질 벌을 기대하며 껄껄 웃었다.
그에 독수리가 헤헤- 작게 같이 웃다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런데 아레스 님…….”
“음?”
“그 오디슨이 신이랍니다. 그런데 데너리즈 지방에 있던 부족 외에는 믿는 이가 없답니다. 정말 보잘것없는 놈 아닙니까?”
독수리는 히죽대며 말했다.
하지만 아레스는 웃음을 멈췄다.
“뭣?”
독수리와 달리 아레스는 신이었다.
당연하게도 그는 신계 연맹법을 잘 알고 있었다.
웃음이 사라진 얼굴에 분노가 자리 잡았다.
“이, 이… 이 영악한 놈 같으니!”
분노로 펄펄 끓는 뇌리에 신계 연맹법이 스쳤다.
[신계 연맹법 2장, 신의 권리와 의무.]
<제38조 하계에의 불가침>
① 모든 신계의 존재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하계에 직접적으로 간섭할 수 없다.
② 단, 신성의 소멸이 달린 경우와 신계로의 등용(발할라의 전사, 엘리시움의 영웅 등)은 예외로 한다.
아레스가 으아악- 소리를 질렀다. 독수리가 깜짝 놀라 푸드득 날아올랐다.
문득, 아레스는 방금 나간 카드모스를 떠올렸다.
“아, 안 돼! 안 된다!”
신성을 가진 오디슨이 카드모스와 맞붙으면? 카드모스가 질 수도 있다.
도망친다 한들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렇다면 정체가 발각될지도 모른다.
아레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황급히 문을 열고 카드모스를 찾았다.
“카드모스? 카드모스! 돌아와라, 카드모스!”
충직한 노예는 너무 빨랐다.
아레스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놈은 내 생각을 모조리 읽고 있었단 말인가.”
오디슨에 대한 착각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