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
49화. 영웅은 외면할 줄 모른다 (2)
곤륜은 손오공을 검거하고 그 범죄를 막았다.
대외적으로는.
실제 상황은 언론으로 보도된 것과는 달랐다.
팔괘로를 되찾지 못했는가? 아니다. 되찾았다.
그렇다면 대체 뭐가 문제인가?
“도대체 복제한 여의봉을 어디에 숨겼단 말이더냐!”
팔괘로 사건의 재판장을 맡은 태상노군(太上老君)이 소리 질렀다.
팔괘로의 주인이며, 동시에 곤륜의 최고 어른인 그를 제하고 누가 손오공을 벌할 수 있으랴.
태상노군은 언제나 장난스러운 웃음을 띤 노인이다. 그는 장난이 꽤 심한 편이지만, 미움을 사지는 않았다. 모두가 태상노군을 좋아했다.
단 한 마리, 손오공을 빼고 말이다.
“망할 놈의 영감쟁이.”
손오공이 투덜댔다. 태상노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얼굴을 곁에서 본 옥황상제가 혀를 내둘렀다.
‘도(道)와 덕(德)을 깨우친 노군을 저리 화나게 하다니……. 쯧. 늘 사람 좋은 미소를 띤 분이시건만.’
도와 덕을 깨우쳤기에 겨우 얼굴을 붉히는 거로 끝이다.
만일 다른 신선이었다면 진즉에 손오공을 후려쳤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태상노군이 화를 꾹꾹 눌러 참고 손오공을 다그쳤다.
“팔괘로를 한 번 작동하는 데에 드는 돈이 얼마나 드는지 알고 있느냐? 무려 10만 시안(仙)이다. 무게로 따지자면 황금 100관이 넘게 들어간단 말이다!”
손오공은 그에 짜증 부리며 말했다.
“거, 쟁여 둔 돈도 많은 양반이 자꾸 그러지 맙시다, 네? 나도 솔직히 오행산에 처박혀 있었던 거 빼고, 천축 다녀온 거 빼면? 그깟 금이야 우습게 낼 만큼 재산이 있었을 거요. 나름 왕이었으니까.”
“허! 원숭이들이 황금을 쓰더냐? 정신 나간 원숭이 같으니!”
태상노군이 부들부들 떨었다.
이러다 정말 폭발하는 거 아닐까- 걱정한 옥황상제가 끼어들었다.
“노군이시여, 너무 노여워하지 마소서. 제가 저놈을 고신해서라도 반드시 죗값을 치르게 만들겠습니다.”
“쯧쯧! 지금 문제는 황금이 아니란 말일세, 상제! 저놈이 팔괘로에 쟁여 둔 황금을 빼다가 술이나 처먹었다면 나도 웃어넘겼을 걸세!”
펄럭! 소맷자락을 날리며 태상노군이 손오공을 삿대질했다.
그 와중에도 손오공은 묶이지 않은 뒷발로 코를 후벼 팠다.
태상노군이 버럭 소리친다.
“저놈이 대체 무슨 짓을 한지 아는가!”
옥황상제의 얼굴에 의문이 서렸다.
그저 팔괘로를 훔쳐간 게 문제가 아니란 말이던가?
눈을 끔뻑이는 옥황상제를 보고, 태상노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한탄한다.
“이 원숭이 놈아… 어쩌자고 여의봉을 복제했느냐! 그 복제한 여의봉은 대체 어디에 뒀고! 여의봉이 네 개인의 신물이긴 하나, 곤륜 전체의 전력에 들어간다는 걸 잊었느냐!”
여의봉.
그 무기는 단순한 기능이 있다. 무게가 엄청나며, 길이와 굵기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다른 유명한 무기와 비교해 보자.
아스가르드에서 가장 유명한 망치, 묠니르.
그 유명세에 비해 굉장히 무식한 무기다. 기능도 여의봉보다 훨씬 단출하다.
던지면 되돌아온다.
놀랍게도 이게 끝이다.
엄청난 무게나 굉장히 단단한 것은 어지간한 신물에는 모조리 붙은 속성이다.
그런 단순한 묠니르가 토르의 힘과 겹쳤을 때, 끔찍한 파괴력을 낸다.
여의봉의 복제품이 다른 신계로 흘러간다면?
그 물건을 손에 넣은 신계는 전력이 뻥튀기되리라.
즉, 연맹 내부에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균형이 박살 난다.
‘아- 이 평화가 미친 원숭이 하나 때문에 깨지는가!’
태상노군이 얼굴을 구기며 손오공을 노려보았다.
손오공이 투덜댔다.
“젠장할! 천축 그쪽에서는 무소유니 뭐니 지랄을 해서 이리로 왔건만… 어찌 여기는 내 것 네 것 구분이 없단 말인가! 망할 놈의 공산주의!”
“어후… 이 얼어 죽을 원숭이 같으니! 당장 말해라! 말해! 여의봉의 복제, 그리고 근두운의 행방을!”
태상노군이 제 가슴팍을 두드리며 버럭 소리쳤다.
짜증을 부리던 손오공이 낄낄 웃었다. 태상노군이 분통을 터트리는 꼴이 꽤 기분 좋았다.
손오공은 으스대며 놀리듯 말한다.
“나의 신물? 원한다면 가르쳐 주지. 잘 찾아봐. 그것들은 모두 대라천에 두고 왔으니까.”
대라천(大羅天). 세상의 첫 기운이 모여 이룬 하늘이다. 모든 하늘의 위에 존재하는 하늘.
다른 이름은,
“태초의 공허…….”
위그드라실에 사는 이들은 긴눙가가프라고 부르는 곳이다.
모든 것이 뒤섞여 새까만 곳. 어마어마한 보물들과 신들도 알 수 없는 신비가 잠든 곳이다.
원시천존이 폐관 수련에 들어간 것도, 모두 그 태초의 공허를 이해하기 위함이었다.
태상노군이 분노로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이, 이 미친 원숭이를 당장 처벌하라-!”
“…여봐라! 곤륜의 위험을 불러온 대역죄인, 손오공을 오행산에 처박아라!”
예-! 우렁찬 대답과 함께 천장들이 손오공을 연행했다.
“킥킥, 킥킥킥킥! 우킥킥!”
싸움에 미쳐 버린 투선, 손오공. 끔찍한 형벌을 향해 가고 있는데도, 그는 긍지 높은 왕의 풍모였다.
물론, 그의 사형제들은 달랐다.
“꿀꿀, 이게 무슨 꼴이양……. 왜 나까징… 흐으……! 이럴 줄 알았으면 고기를 포기할 걸 그랬엉…….”
육식 금지를 견딜 수 없어 곤륜에 남은 저팔계가 한탄했다.
어쩌다 보니 사형들에게 얽힌 사오정이 넋을 놓았다.
“…이제는 스승님도 없는데 뭘 어쩐단 말입니까?”
그 공허한 목소리에 돌아온 대꾸는 없었다.
손오공 삼 형제는 오행산 가장 깊숙한 곳에 봉인되었다.
석가여래가 남긴 부적의 봉인 해제 조건은 이전과 똑같았다.
‘순수한 마음을 가진 자일 것.’
황금에 눈먼 지금 시대에는 찾아보기 힘든 조건이었다.
* * *
“어휴, 진짜.”
이라호드가 투덜거렸다.
신의 죽음에 대해 알려 주는 조건을 걸고 세스룸니르로 데이트를 온 것은 좋다. 하지만 어느 누가 데이트 도중에 도망을 친단 말인가?
사실 도망은 아니다.
이라호드도 그건 안다. 그렇기에 그저 한숨을 쉴 따름이었다.
그런 점이 오디슨의 매력이기도 하니 말이다.
“나도 갈까?”
벤치에서 일어나려던 이라호드가 멈칫했다.
‘아니… 그래도 프리키리 행사는 보고 가야지. 오늘 새 시즌 발표도 있다고 했으니…….’
이라호드가 세스룸니르를 데이트 장소로 잡은 데에는 약간의 딴마음도 있었다.
문득 어이가 없었다.
틱틱대는 성격 탓에 사람과 잘 어울리지 못하던 이라호드다.
그런데 데이트 신청이라니? 스스로 생각해도 굉장히 대담한 짓이었다.
‘속옷도 세트로 입었는데.’
그렇기에 좀 더 아쉬웠다.
그래도 즐거운 하루였다. 이라호드는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첩을 펼쳤다.
“후후.”
오디슨이 기괴한 표정을 짓는 사진들이 한가득이었다.
그가 처음 세스룸니르로 가자는 말을 들었을 때가 떠오른다.
‘세스룸니르(Sessrúmnir)? 발할라와 마찬가지로 에인헤랴르가 기거한다는 프레이야 님의 궁전 아니오? 그곳에 가 볼 수 있다고?’
그 기대는 오늘 아침에 박살 났다.
세스룸니르의 입구를 본 오디슨이 당황한 얼굴이 선명하다.
핑크색 아치문에는 꽃장식이 가득했다.
세스룸니르의 광고마다 나오는 캐치프레이즈가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박혀 있었다.
[꿈과 희망의 궁전!]
[세스룸니르에 어서 오세요!]
그리고 세스룸니르에 들어와서 경악하던 표정이 떠올랐다.
그때, 드르륵-!
“꺄아아악!”
롤러코스터가 굉음을 내며 신나게 달렸다.
오디슨은 저걸 보고 창백하게 질렸었다.
‘세계뱀? 아니면 다른 괴물인 건가… 그 뱀의 뼈를 저렇게 전시해 두고, 사람을 썰매에 태워서 두렵게 하다니. 이게 대체 무슨 고문인가!’
오디슨은 롤러코스터 레일을 뱀의 뼈라고 생각했다.
그때의 모습을 찍어 둔 사진에 이라호드가 웃었다.
“킥킥.”
바이킹을 보고도 그랬다.
‘어느 바이킹이 프레이야께 무례를 저질렀소? 폭풍 치는 바다가 무섭다고는 들었지만… 그런 상황을 저렇게 재현해 두실 줄이야…….’
“끝이네, 사진. 좀 더 찍어 둘 걸 그랬나?”
이라호드가 아쉬운 마음을 반쯤 녹은 아이스크림으로 달랬다.
같이 먹으려고 큰 통으로 샀더니, 오디슨이 가 버렸다. 반쯤 녹은 아이스크림은 맛있었다.
하지만 그리 즐겁지 않았다.
다시 실망이 스멀스멀 스며 나왔다.
이라호드의 입술이 불룩 튀어나왔고, 저도 모르게 짜증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어휴. 여자 마음도 모르고.”
“이라호드!”
“으응?”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이라호드가 눈을 깜빡였다.
발키리 둘이 휙- 하고 땅으로 착지했다.
“응? 선배들? 갑자기 왜…….”
혹시 들은 걸까?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발키리들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이라호드에게 질문했다.
“오디슨, 오디슨은 어디에 있지?”
“오디슨요?”
다행히 아까의 혼잣말을 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오디슨이라면…….’
‘…하계에 일이 생겼군.’
떠났다.
하지만 이라호드는 입을 다물었다.
뭔가 느낌이 안 좋았다. 이라호드의 표정을 읽은 걸까?
발키리 하나가 이라호드를 재촉했다.
“티르 님의 호출이야. 당장 오디슨을 데리고 오라셔.”
“…티르 님께서요?”
이라호드가 눈살을 구겼다.
오딘, 토르, 티르. 세 신은 아스가르드의 가장 강력한 신이다. 그리고 오딘과 토르가 정무를 나 몰라라- 하자, 온갖 일들을 티르가 떠맡았다.
분명, 아스가르드 전체를 위한 일이리라.
하지만 이라호드는 진실을 밝힐 수 없었다.
‘미안하오, 이라호드. 하지만 난 전사요. 날 믿고 따르는 이들이 위험에 처했는데 가만있을 순 없소.’
오디슨의 신념과 아스가르드 전체를 위한 일.
이라호드는 망설이지 않고 대꾸했다.
“화장실에 간다고 갔어요. 좀 기다리면 올 거예요.”
발키리 직위를 박탈당해도 할 말이 없을 거짓말이었다.
* * *
“젠장할, 진짜 단장을 바꾸든가 해야지. 이게 뭐야? 쉬는 날에!”
“나 혼자 간다니까! 내가 한 내기니까 나만 가면 되잖아!”
“킥킥, 톨킬드 이 자식 또 삐쳤네. 용병단 단장이 용병단 이름을 걸고 한 내기에서 용병단이 빠진다? 그게 무슨 등신 같은 소리야? 안 그래?”
“그렇고말고.”
할랴헤랴르 녀석들이 시끌벅적하게 떠들어 댔다.
다급하던 마음이 녀석들의 수다에 어느 정도 진정이 됐다.
그래, 나도 웃자.
난 전사다. 적을 앞에 두고도 웃음을 흘리며 적의 숨통을 끊는다. 그런데 딱딱하게 굳어 있다니.
어깨를 으쓱이고 톨킬드에게 물었다.
“이쪽이 맞는가?”
“어어, 저쪽에 보이지? 미드가르드행, 저기에서 등록해야 돼. 근데 진짜 괜찮아? 하계로 가는 데에는 신의 허가가 필요한데…….”
“걱정하지 마라.”
내가 바로 오딘께서 인정하신 신이니.
내 입으로 말하기엔 좀 부끄러운 일이긴 하나, 발키리들은 분명 알아볼 것이 틀림없다.
[미드가르드행]
[일반 1억 크로나.]
[우등 1억 5천 크로나.]
음. 우등이 좀 더 넓은 수레인가?
우등으로 하고 싶긴 하지만, 나는 그다지 여유가 없다.
비다르 클랜과 싸우면서 번 돈이 약간 있기는 하나, 2억 크로나에 미치진 못했다.
2억 크로나를 모아 아슬라 아줌마와 라드게리타를 한 번에 데려올 셈이다.
“크흠, 일반 수레를 타고 하계로 가고 싶은데.”
아껴야 한다.
“일반 수레 말이죠… 어? 오디슨! 팬이에요!”
날 보더니 방긋 웃는 발키리.
그 웃음에 나도 떨떠름하게 같이 웃어 주었다. 그녀가 내미는 종이에 사인이라는 것도 하고, 그녀와 사진도 찍었다.
으음, 한시가 급하건만…….
크레네의 충고가 있었다.
‘팬 관리 열심히 하세요. 오디슨이 버는 돈은 팬들한테서 나오는 거예요.’
미래를 위한 억지웃음이다.
하지만 여전히 익숙지 않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용병들의 시선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뒤에서 톨킬드가 쯧- 혀를 찬다. 다른 용병들도 수군거린다.
“우리가 왔을 땐 맨날 툴툴대던 그 발키리 맞아?”
“…역시 잘생기고 봐야 한다니까. 저 봐, 저 봐. 딱 달라붙어서 사진 찍는 거!”
어째 민망하다.
발키리도 그걸 알아챈 건지, 살짝 볼을 붉혔다.
“일반으로 하실 거라 했죠? 저쪽 분들도 같이 타실 건가요?”
“…너무 많은가?”
살짝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토라졌던 발키리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흐흐흐, 많긴요. 저는 한 번에 50명도 태워 봤는데요, 뭐.”
헤헤- 웃는 걸 보니, 수레에서 떨어져 허망하게 죽는 경우는 계산 않아도 되리라.
발키리가 손가락을 들어 허공을 쿡쿡 짚었다.
“어디 보자, 하나. 둘, 셋……. 오디슨 님까지 해서 20명이네요. 아, 그런데… 하계로 갈 때는 신의 허가가 필요한데요.”
“나도 말인가?”
“네. 오디슨 님이 유명한 투사라곤 해도…….”
그녀의 말을 끊고, 귓가에 속삭였다.
“오딘께서 나도 신이라 하시더군.”
“…에? 어… 잠깐만요.”
발키리가 검은 석판을 꺼내 조작하더니 움찔 몸을 떨었다. 그 놀란 표정은 곧 꽃이 피는 듯한 웃음으로 바뀌었다.
“아아! 정말이네요! 제가 실례했군요, 오디슨 님. 오디슨 님은 추가적인 혜택을 받으셔서, 우등으로 무료 업그레이드가 가능하세요. 자, 이쪽이에요.”
살랑살랑 엉덩이를 흔들며 우리를 인도하는 발키리. 톨킬드가 슬쩍 다가와 물었다.
“…무슨 소리를 했는데 우등으로 무상 업그레이드래?”
업그레이드가 뭔지를 잘 모르겠다. 어쨌든 공짜로 더 좋은 걸 주겠단 이야긴가?
나야 좋다.
…하지만 내가 신이라고 밝히고 다니는 건 역시나 부끄럽다.
“크흠, 뭐… 내가 괜찮다고 하지 않았나.”
“아니, 이건 괜찮을 정도를 훨씬 넘으니까 그렇지…….”
톨킬드가 슬그머니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다른 용병들도 이제는 딱히 수군거리지 않는다.
모두가 내 눈치를 살폈다.
“자! 타세요, 오디슨 님.”
발키리가 내 팔을 잡아끈다. 보드라운 가슴의 감촉에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토록 노골적인 유혹이라니.
멋쩍은 표정으로 고맙다고 인사를 했고, 발키리가 빙그레 웃었다. 다른 용병들은 알아서 올라탔다.
“그럼 출발할게요. 안전벨트 다들 매시고요.”
이전 좁디좁던 수레와는 전혀 달랐다.
수레라기보다는 비프로스트를 좀 더 작게 만든 듯한 말 없는 승합 마차였다.
부르릉- 마차가 묘한 소리를 내고 덜덜 떨었다.
그리고 그때,
“오- 디- 스은!”
커다란 목소리가 날 불렀다.
“엇? 티르 님?”
발키리가 흠칫 놀랐고,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우리 모두가 놀랐다.
티르께서? 설마 날 축복하시러 오신 건가!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하계로 향하는 나다. 그분의 축복을 받을 자격은 충분하리라.
벌컥! 마차 문을 열고 나가, 티르 앞에 무릎 꿇었다.
“티르시여. 절 축복하시러 오셨습니까?”
“…아니다. 널 막으러 왔다. 쯧, 그래도 늦지 않아 다행이군. 네 발키리마저 따돌리고 움직일 줄이야.”
발키리를 따돌리고 움직여?
아니 그보다, 막으러?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서? 의문 섞인 눈빛을 티르께 보냈다.
티르께서는 살짝 미간을 좁히셨다.
“하계행은 그만둬라.”
“어째서입니까?”
“아직은 때가 아니다! 올림포스와 전쟁을 벌이고 싶은 것이더냐!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있다!”
으드득, 이를 갈았다.
죄 없는 동족이 죽어 나가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뭐가 있지?
쓰린 속을 눌러 참으며 물었다.
“…그게 뭡니까?”
“아스가르드 전체를 위한 일이다.”
“아스가르드 전체?”
나는 그 말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티르께서 눈을 크게 뜨시고 반색하시며 말씀하셨다.
“그래, 내 뜻을 알아주었구나!”
뜻? 글쎄.
“티르시여.”
“그래, 오디슨. 일단은 나가자꾸나.”
오해하시고 계신 것 같다.
나는 그분을 똑똑히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 한 말이 당신의 정의입니까?”
“당연한 이야기! 아스가르드 전체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겠느냐.”
잘근잘근 입술을 씹었다.
실망감이 나를 가득 채운다.
“더 큰 무언가를 위해 작은 것을 포기하는 게, 진정 정의란 말이오?”
실망감이 부글부글 끓었다. 실망은 곧이어 분노로 바뀌었다.
불경스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나는 화가 났다.
눈을 부릅뜨고 티르를 똑똑히 바라보며 말했다.
“강인한 아스가르드의 신들은 올림포스의 신들과 전쟁을 벌여도 스스로 이겨 낼 수 있을 거요. 하지만 하계의 연약한 이들은? 연약한 우리의 동족들은?”
“어쩔 수 없는 희생도 있는 법이다!”
가슴이 찢어진다.
심장이 분노로 쿵쾅댄다.
내가 믿던 신이 날 배신했다.
“어쩔 수 없는 희생? 난 그게 정의라고 생각지 않소.”
원래의 역사에서 티르는 펜리르에게 물려 ‘맹세를 하는 오른손’이 잘려 나간다. 그에 나는 비통해 했지만, 사실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의 맹세는 진작부터 의미를 잃은 채였으리라.
그가 부르짖던 정의가 가짜였던가?
나는 실망과 슬픔 속에서 피어오르는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적을 외면하고, 동족을 외면한 비겁자 같으니.”
퉤, 바닥에 침을 뱉고 티르를 노려보았다.
당황한 그 얼굴에 주먹이라도 한 방 먹여 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앞으로 나는, 적의 피로 당신의 이름을 쓰지 않겠소.”
나는 티르를 버렸다.
“물론, 내 눈 아래에도 티와즈 루 룬이 새겨지는 일은 없을 거요.”
휙 등을 돌렸다. 티르가 뭐라 외쳤지만 무시했다.
정당한 신이 아니라, 나 자신의 정당함을 믿으리라.
나는 날 믿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것이 전사의 마음가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