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48화. 영웅은 외면할 줄 모른다 (1)
싱글벙글 웃으며 재판장을 빠져나왔다.
본래 비다르에게 청구된 벌금은 매우 컸다. 하지만 상관없다. 그 콧대 높은 놈에게 사과를 받았다는 게 기뻤다.
“이쪽이에요.”
이라호드가 날 이끌었다.
위그드라실 최상부와 발할라를 잇는 마법 물품에 몸을 실었다. 붕- 뜨는 듯한 감각이 오금을 저리게 했다.
무서운 건 아니다. 너무 높은 탓에 바깥으로 난 창은 쳐다볼 수가 없었지만, 역시나 무섭진 않다.
덜컹!
“으억!”
이 미친 마법 물품이 크게 흔들렸다.
침을 꿀꺽 삼키고 슬그머니 벽에 손을 댔다. 언제 떨어질지 모른다.
이라호드가 킥킥 웃는다.
“이렇게 큰 엘리베이터는 처음이죠?”
“음? 엘리게이터가 이 물건의 이름인가?”
은색 방의 이름치고는 꽤 멋있다.
“아, 아예 처음이에요?”
“으음… 이 은색 방은 처음이지. 그것보다 묻고 싶은 게 있다.”
“뭔지 알 것 같아요.”
이라호드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눈을 끔뻑이자니, 그녀가 입을 열었다.
“신에 대해서. 맞죠?”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볼바가 유능한 모양이더라구요.”
“흠… 시그뉘는 똘똘한 아이지.”
“너무 아는 척은 하지 마요. 여기에도 CCTV가 있으니까.”
이라호드가 슬쩍 방의 모서리 부분을 바라보았다. 나도 그곳을 보았지만 씨씨티브인가 하는 건 보이지 않았다.
그저 까마귀 눈 같은 것이 작게 하나 붙어 있을 뿐.
마법으로 모습을 감춘 건가?
정말이지, 마법은 이해할 수가 없다.
“어쨌든, 그 이야기를 왜 꺼낸 거지?”
“벌써 당신을 확고하게 믿는 사람이 100명이 넘어요. 작지만 신성이 형성되었죠.”
음, 그건 시그뉘가 유능한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아마 시그뉘에게 시비 걸던 놈이 기괴하게 죽었기 때문이겠지.
그보다 100명?
“느릅나무 부족에 남은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을 텐데.”
오딘이나 토르, 티르를 믿는 이들이 모조리 돌아섰다?
그렇게 생각하긴 어려웠다.
그분들에 대한 신앙은 언제나 확고하다.
위대한 아스가르드의 신들(비다르는 뺐다)에 대한 믿음 중에서도 가장 확고한 것이 그 세 분에 대한 믿음이다.
나 역시 눈가 아래 티와즈 루 룬을 새길 정도로 티르를 믿었다. 내가 잃어버린 삼촌의 창에는 토르를 의미하는 쑤리사즈 룬이 새겨져 있었다. 내 이름은 아예 오딘의 아들이라는 의미다.
“부족을 잃고 떠돌던 이들이 합류한 모양이에요. 덕분에 느릅나무 부족은 다시 꽤 큰 부족이 됐어요.”
“아… 하계와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는 걸 잊고 있었군.”
머리를 긁적였다.
이라호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거나, 축하해요. 불멸자가 되었잖아요.”
“…불멸자라.”
눈살을 찌푸렸다.
신들은 죽지 않는단 말인가? 그렇다면 마르스 놈을 어떻게 찢어 죽이지?
내 표정을 읽은 이라호드가 쓴웃음을 흘렸다.
“뭐, 그렇다고는 해도 완벽한 불멸은 아니에요.”
“그런가?”
“예. 완벽한 불멸이라면, 올림포스의 왕태자라는 직위는 없어야 정상이겠죠?”
‘왕태자’는 왕자 중에서도 왕위를 이어받을 사람이니까요.
이라호드의 말에 눈살을 구겼다. 별생각 않던 일이건만, 사실 꽤 많은 의미가 담긴 이야기였다.
나는 이라호드가 씨씨티브이가 있다고 말한 방향을 힐끗 살피고, 나지막이 그녀에게 물었다.
“그럼, 신은 어떻게 죽지?”
“안 그래도 물어볼 줄 알았어요.”
이라호드가 어깨를 으쓱이고 대꾸했다.
이어질 말이 있을 텐데?
나는 꿀꺽 침을 삼키고 이라호드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도톰하고 매끈한 붉은 입술이 움직인다.
그 순간,
덜컹!
“으헉!”
이 빌어먹을 은색 방이 흔들렸다. 심장이 쿵쾅거린다. 몸을 낮추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창밖의 모습이 낯익다.
“…도착한 건가?”
이라호드가 킥킥 웃었다.
“일단 나가요. 발할라에 돌아왔으니까요.”
엘리게이터의 문이 열렸다. 발할라의 땅을 밟고서 나는 두 손을 모아 오딘께 기원했다.
“오딘이시여, 저는 다시는 저 빌어먹을 방에 들어가고 싶지 않나이다. 제발 저를 보우하소서!”
그 말에 이라호드가 말했다.
“이제 신이니까, 중대한 사안이 있을 땐 회의에도 참가해야 할걸요?”
으, 제길.
신이라고 다 좋은 게 아니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 * *
느릅나무 부족은 지난 반년간 엄청나게 팽창했다. 100명도 안 되던 생존자들은 부족을 잃고 떠도는 이들을 받아들였다.
그 덕에 지금 느릅나무 부족의 총원은 500에 달할 정도.
외부인이 많은 탓에 불안해하는 부족민도 있었지만, 잡음은 없었다. 모두가 신의 총애를 받는다 알려진 볼바, 시그니료드 덕이었다.
“앗! 볼바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래, 창을 연습하려고?”
“헤헤, 어머니가 만들어 주셨어요. 멋있죠?”
“그렇구나. 열심히 하렴.”
붉은 늑대와 닮은 전사가 되고 싶다던 꼬마가 나무를 깎아 만든 창을 자랑했다. 시그니료드는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임시로 만든 신전을 향했다.
언제나처럼 기도를 올리기 위함이었다.
부족민들은 모두 그녀에게 인사를 올렸다.
부족장이 사망한 뒤, 늑대를 부리는 볼바는 굉장한 권한을 얻었다. 부족장을 새로 뽑기 전까지 그녀가 부족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그에 전사들이 반발했다.
하지만 차마 그 자리를 내놓으라 하는 이는 없었다. 새로 부족장을 뽑자는 이야기를 할 법했지만, 누구도 시그니료드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하진 않았다.
아직도 히에라키의 죽음이 부족민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어쩐지 어젯밤 꿈이 좋질 않았어.’
제발 예지가 아닌 평범한 악몽이었으면 좋으련만.
시그니료드는 웃음 뒤에 불안감을 감추고 신전에 닿았다. 그리고 즉각 룬스톤 앞에 무릎 꿇고 빌었다.
“오딘의 아들이여, 적의 목을 물어뜯는 붉은 늑대여, 아직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자여. 지난밤 꿈에 대한 계시를 내리소서. 이 연약한 소녀에게 다가올 일을 보는 걸 허락하소서.”
경건하게 무릎 꿇은 시그니료드 위로 햇살이 내리쬔다.
그 순간, 시그니료드는 광기 어린 목소리를 들었다.
‘죽여라! 제국의 땅에 기생하는 야만족을 말살하라. 늑대의 새끼를 죽여, 큰 늑대를 불러오라. 그를 위해 내 너희에게 죽음 앞에서 당당할 용기를 내리나니.’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제국풍의 석조건물.
그 웅장한 건물 안에서 사제들은 신탁을 받고 있었다. 신전에 있는 석상은 투구를 쓰고 창을 든 모습이다.
시그니료드는 순간, 이 신전이 어떤 신을 모시는 곳인지 알아챘다.
마르스.
전쟁을 주관하는 피에 미친 신이 신탁을 내렸다.
“헉!”
시그니료드가 정신을 차렸다.
손발이 덜덜 떨렸고,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필멸자에게 허락되지 않은 힘을 사용한 탓에 온몸에 힘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휘청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시라도 빨리 이 사실을 알려야만 했다.
“…제국 놈들이…….”
시그니료드는 턱을 딱딱 부딪쳤다.
끼잉- 늑대들이 그녀를 받쳐주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쓰러졌으리라.
그녀는 늑대의 따뜻한 털 감촉에 한 사람을 떠올렸다.
아니, 한 신을 떠올렸다.
“오빠.”
그 순간, 시그니료드가 묘한 감각을 느꼈다.
그건 일종의 확신이었다.
그가 돌아와 부족을 지켜 줄 것이라는 확신.
이건 예지도, 예언도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믿었다.
그 용맹한 전사는 단 한 번도 믿음을 배신한 적이 없었다.
* * *
그 무렵, 신계는 한 가지 소식에 술렁였다.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곤륜에서 팔괘로를 훔쳐 달아난 손오공 일당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입니다.]
티르는 집무실에서 차를 한 잔 마시며 그 뉴스를 들었다.
“덕분에 재판은 잘 끝났으니… 고맙소, 손오공.”
잡힌 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면식 하나 없다.
하지만 아스가르드에 도움이 된 덕일까? 티르는 그에게 친밀감을 느꼈다.
그것도 잠시였다.
[아, 손오공이 연행됩니다.]
특파원인 레이프 에릭손이 감탄하듯 말했다.
이 사건에 대한 관심을 보여 주듯 TV 속에는 무수히 많은 카메라와 기자들이 우글우글했다.
그 사이를 헤치며 천장(天將)들이 손오공을 묶어 끌고 왔다.
[잠깐, 한마디만!]
[젠장! 어떤 새끼가 내 발을 밟아?]
[손오공 님! 손오공 님! 한마디만 해 주십쇼!]
시장바닥이 따로 없다.
티르가 혀를 찼다.
“쯧쯧, 왜 그런 물건을 훔쳐 가지곤…….”
무모한 짓이었다.
곤륜 최고 권력자는 지금 폐관 수련에 열중하고 있는 원시천존이다. 그리고 팔괘로는 그 원시천존의 사형인 태상노군의 것이다.
원시천존을 대리해 곤륜을 통치하는 옥황상제는 태상노군의 눈치를 봤다. 그 탓에 곤륜의 전 병력을 이용해 손오공을 체포했다.
병력이 조금만 적었어도, 투선인 손오공을 잡을 수 없었으리라.
그때, 화면 속 손오공이 슬쩍 발할라 방송의 로고를 보았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발할라 방송? VBC?]
특파원은 손오공의 관심에 깜짝 놀라며 마이크를 들이댔다. 주변에서는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였다.
손오공이 묻는다.
[이거 발할라에 방송되는 거 맞지?]
[네네, 물론입니다.]
[그럼 됐어. 한마디만 딱 할게.]
손오공의 말에 천장들도 발걸음을 멈췄다. 그를 잡아끌던 팔에 힘을 뺐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천장들이 투구 아래로 흐르는 땀을 닦았다.
[후우.]
기자들과 카메라가 모조리 손오공에게 집중했다.
그가 한숨을 푹 쉬고 입을 열었다.
티르는 어쩐지 불안했다.
‘…어떻게 VBC를 알지? 아니, 발할라 투기장 리그를 저쪽에도 수출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TV 속에서 손오공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야! 내가 씁, 너 주려고 여의봉 복제하다 걸렸어!]
티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한테 여의봉을 복제해 주려던 걸까? 그 의문은 잠깐 사이에 풀렸다.
[오디슨! 더 강해져서 기다려라! 난 돌아온다!]
“어, 어어…….”
저렇게 되면? 여론에 물 타기 한 것이 바로 터진다.
이번 재판의 결과도 굉장히 민감한 사안이었다.
재판 결과가 알려지면?
‘…비다르의 신성이 확 쪼그라든다.’
티르의 동공이 흔들렸다. 찻잔이 덜덜 떨렸다.
그가 버럭 소리쳤다.
“오디슨! 오디슨은 어딨나!”
어떻게든 같은 신계의 신 하나를 살려야만 한다.
펜리르조차 찢어 죽이는 복수의 신. 비다르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에 딱 좋은 신이다.
그런 신의 신성이 줄어든다? 그건 아스가르드 전체의 전력이 줄어든다는 의미다.
아스가르드에 아주 치명적인 일이다.
“예? 오디슨이라면…….”
발키리 하나가 고개를 갸웃하고 대꾸했다. 그녀는 TV를 못 봤는지 갑자기 걔는 또 왜 찾나- 싶은 표정이었다.
티르가 그 뒷말을 재촉했다.
“오디슨이라면?”
“이라호드가 같이 세스룸니르에 놀러 간다고 자랑하던데…….”
“…당장 불러와! 당장!”
손오공의 말에 대한 인터뷰든 뭐든,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해야만 했다. 재판 결과가 적나라하게 공표되는 건 막아야만 했다.
티르가 손톱을 깨물며 신계 연맹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게시판의 상태를 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원숭이 커밍아웃ㅋㅋㅋㅋㅋㅋ]+965
[손오공, “오디슨, 나중에 한판 뜨자!”]+999
[손오공♡오디슨]+999
[근데 오디슨 재판은 어케 됨? 아무도 모름?]+957
[저팔계, “사형, 포세이돈한테 후원 밀리기 싫어했다.”]+879
티르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불을 끄려 물을 끼얹었다. 근데 알고 보니 그게 기름이었다.
그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이가 있었다.
새 글이 올라왔다.
[작성자: 로키]
티르는 작성자만 보고도 식은땀을 주르륵 흘렸다.
으드득- 이를 갈았다.
“젠장할! 왜 나는 편안할 수가 없어!”
분명 아스가르드 신계의 지배자는 오딘일 터인데!
티르는 두통을 느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이미 그가 수습할 범위를 벗어났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다리를 덜덜 떨었다.
‘오디슨, 오디슨만 오면 수습할 수 있다. 제발… 빨리……!’
잠시 뒤, 티르는 목덜미를 붙잡고 ‘억!’ 소리를 내게 되리라.
하지만 그 미래를 아는 건 극소수였다.
까악까악- 까마귀 울음소리에, 극소수에 해당하는 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구나. 후긴, 무닌.”
오딘이 후긴과 무닌이 물어다 준 생각과 기억을 듣고 그 머리를 쓰다듬었다.
주름진 볼이 씰룩인다. 오딘이 조용히 읊조렸다.
“궁니르야, 궁니르야. 지루한 평화가 곧 끝날 것 같구나.”
회한이 담긴 것 같기도, 기대가 담긴 것 같기도 한 목소리였다.
오랜 평화의 끝이 머지않았다.
“내 아들이 도화선이 되는 건 변함이 없군. 발버둥 쳐도 변하는 것은 없나니.”
빛바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오딘이 제 목을 쓰다듬었다. 마법을 얻기 위해 여드레 동안 목을 맨 자국이 선명했다.
“이번에는 친아들이 아니라는 게 다른 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