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44화. 영웅은 숙일 줄 모른다 (3)
비다르 클랜은 벌써 2번이나 패배했다.
‘M300R에서는 날 빼면 가라르밖에 남지 않는다. 가라르가 해낼 수 있을까?’
투기장에 선 바라르는 도끼를 만지작거리다 얼굴을 굳혔다.
한숨을 푹 쉬고 오디슨을 바라보았다.
씩씩대는 저 모습.
‘오디슨은 전사인 척하는 비열한 기교파다. 야만스러운 전사가 이제까지 해 온 행보치고는 모든 게 착착 맞아떨어졌지.’
방심을 끌어내기 위한 연기일 거라 확신했다.
그 생각에 대한 근거는 여럿 있었다.
동생인 가라르의 말.
‘힘? 힘은 별거 없었지. 근데 형도 녹화한 거 봤잖아? 그 새끼, 다 알면서 처먹은 거야. 그런 놈이 무식하게 싸운다고? 말도 안 돼.’
‘그럼 그 새끼가 진짜로 그 순간에 내 기술을 베꼈다고? 더욱더 말도 안 되지.’
‘날 방심하게 하고, 자길 노리러 오는 세계뱀을 이용한 거야. 놈은 똑똑해.’
그리고 비다르께서도 말씀하셨다.
‘놈은 철저한 연기파다. 로키스 패밀리의 후원을 미리 받고 있으면서도 내 앞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척을 했지.’
‘까드득! 반드시 놈을 쓰러트려라. 그렇게만 한다면, 지원금을 좀 더 늘려주지.’
트릭스터.
그럼 ‘싸움의 법칙’에서 보인 모습은?
‘혼란을 일으키기 위한 술수다. 그 술수 덕에 결국 최단 기간 M300R 승격이라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던가!’
게다가 오딘의 앞에서 맹세한 발키리가, 시시비비 앞에서 한 말이 TV에서도 선명히 나왔다.
‘저건 오래된 영혼체라면 다들 할 수 있는 기술이에요. 축복이나 마법 따위가 아니거든요? 오디슨의 영혼이 큰 탓에 육신을 가지고도 쓸 수 있지만요.’
이 발키리가 거짓말을 했다? 적어도 이런 문제에 있어서 거짓을 말하는 발키리는 발키리 자격을 잃게 되리라.
영혼체. 그러니까, 발할라에서는 그런 압도적인 모습을 절대 보이지 못한다.
그런 발언들뿐 아니라, 기록에서도 오디슨이 변칙적인 기교를 이용하는 술수에 능하다는 걸 알아볼 수 있다.
바로 1대1 승부 승률 문제다.
오디슨은 이제까지 투기장에서 1대1 승부는 다섯 번밖에 하지 않았다.
그 결과는?
5전 3승 1무 1패.
처참하게 칼리돈에게 당했고, 처절하게 고블린과 비겼다. 그리고 창을 던지는 변칙적인 공격으로 가름을 방심케 하고, 그 위치로 적을 유인해 승리했다.
그가 비다르 클랜과 싸워 거둔 두 번의 승리는 어땠나?
오디슨의 힘을 경계한 이가 소극적으로 나오자, 현란한 기술로 압살했다.
그다음은? 기술로 승부를 보려던 이에게 더 뛰어난 기술을 이용해 철저히 무너뜨렸다.
지금 장내 방송의 해설자도 말하지 않는가?
[이 승부, 바라르 선수가 오디슨 선수의 지능적인 싸움에 말려들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오디슨 선수가 이제까지 해낸 것들이 모두 계산된 거라 말씀하시는군요?]
[무식하고 무모한 투사가 M300R 최단 기간 승격이라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최근 승률을 보십시오. 고블린과 무승부를 이룬 뒤에는 모조리 승리예요. 대체 몇 연승입니까? 파죽지세를 이어가는 오디슨. 똑똑한 선수예요.]
그렇기에 바라르는 확신했다.
눈앞에 보이는 놈이 지금도 연기 중일 거라고.
“…도끼만 만지작대고 있을 텐가? 응?”
“흐흐흐, 내게 허세는 통하지 않는다.”
“무슨 소리지?”
바라르가 히죽 웃었다.
“나는 네놈의 속임수에 넘어갈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 이거지. 단 일격. 내 일격에 네놈은 무너질 것이다!”
도발했다. 오디슨이 눈살을 찌푸렸다.
바라르는 생각했다.
‘걸려들어라, 걸려들어!’
변칙적인 술수를 쓰면서, 연기로 순진무구한 전사를 표방하는 놈이라면? 이 상황에서 이 도발을 피할 수 없다.
그렇게 된다면 승리는 자신의 것이다.
바라르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일격으로 날 무너뜨리겠다?”
“그래! 난 기교도 뭣도 없이, 단 일격으로 네놈을 두 동강 낼 것이다! 네놈도 전사라면, 내 제안을 거절하지 않겠지? 피하거나 막지 말고, 단 한 번으로 승부를 보자!”
오디슨은 고개를 갸웃하고 머리를 긁적였다.
바라르는 그 잠깐을 놓치지 않았다. 저건 분명 초조함의 표시다. 그렇게 생각했다.
오디슨이 대꾸했다.
“그래, 남자답게 최고의 공격 한 번을 서로 하자 이거지? 생각보다 대담한 녀석이었구만.”
히죽, 오디슨이 웃으며 창을 고쳐 쥐었다.
바라르는 그 동작이 긴장을 풀기 위한 짓이라 여겼다.
‘긴장되겠지, 손에 땀도 나고 말이야. 하지만 네놈의 컨셉을 유지하면서 유명세를 팔아먹으려면, 이걸 거절할 순 없다!’
크크크- 나지막이 웃은 바라르가 붕붕- 전쟁 도끼를 돌렸다. 묵직하기 짝이 없는 전쟁 도끼와 얇은 창. 일격으로 승부를 본다면 어느 쪽이 유리할지 말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바라르는 어마어마한 힘을 지녔다.
투사 등록을 하자마자 M300R으로 배치가 되는 거인들. 바라르는 그 거인들을 힘으로 압도한 전적도 있었다.
체급 차이가 어느 정도 난다면야, 저체급의 선수가 이길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 어느 정도를 벗어난다면 힘에서 밀릴 수밖에.
체급이 존재치 않는 투기 경기지만, 바라르는 자신의 마음속에 체급을 나눴다.
‘S급이 거인, A급이 드베르그, B급이 알브, C급이 괴물. 순수 인간은 고작해야 D급이다. 보통의 드베르그라도 저놈에게 밀리진 않을 터.’
히죽 웃음 지은 바라르가 도끼를 꽉 쥐었다.
오디슨은 창을 단단하게 고정한 채,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바라르가 고함을 터트렸다.
“으아아아아압!”
쿵- 바닥을 박찼다.
그의 작은 몸이 포탄처럼 튀어나갔다. 어마어마한 거력이 담긴 돌진이었다. 도끼를 홱 젖힌 채 달려나가는 바라르.
해설자가 소리쳤다.
[바라르 선수! 힘으로 밀어붙일 생각입니다! 오디슨 선수는 속도를 앞세워… 어? 아니죠! 정면으로 싸워서 이길 수가 없습니다! 피해야 합니다!]
[어어어어! 물러서지 않는 오디슨! 거인족도 힘으로 압도하는 바라르 선수거든요? 계란으로 바위 치깁니다!]
“흐하하하! 사내답게 달려오는구나!”
오디슨 역시 바닥을 박차고 달렸다.
와아아아아! 꺄아아아악!
화끈한 승부를 기대하며, 관중들이 소리쳤다.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일까? 두 사람의 달음박질은 한층 더 빨라졌다.
파바바박! 발이 바닥을 박찬다.
두 사람의 거리가 급격히 가까워졌다. 그에 바라르는 이 승부를 위한 마지막 조각이 맞춰지길 바랐다.
‘비다르 님!’
기도를 올리는 게 아니다.
오디슨에게 내려진 축복을 거둘 타이밍이었다.
‘복수의 눈’은 전투 시 집중력을 올려 주고, 고통에 대한 내성을 주는 축복이다.
아마 오디슨이 전사를 연기할 때에 이 축복이 어마어마한 도움이 되었으리라.
“음?”
뭔가 묘한 느낌에 오디슨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됐다! 바라르는 환호성을 내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승리한 뒤에 웃어도 늦지 않다.
“하하하하! 이제 와 겁먹은 것이냐! 죽어라!”
부우우웅! 도끼가 공기를 갈기갈기 찢어발긴다.
눈살을 찌푸린 오디슨이 대꾸하며 창을 내지른다.
“겁? 누가 겁을 먹었다고 그러는 거지?”
쐐애애액- 창이 먹이를 노리는 독수리처럼 쏘아진다.
[격돌! 격돌합니다아아!]
[아아아, 오디슨 선수… 너무 무모합니다, 무모해요! 바라르 선수의 힘을 이겨 낼 수가 없거든요?]
오디슨이 이를 악물었다.
그와 동시에 약지가 따끔거렸다.
쐐애애애액! 부우우우웅!
채애앵!
쇳덩어리 둘이 부딪히고, 불꽃이 튀었다.
붕붕붕- 무기 하나가 허공을 날았다.
푸욱-
피육을 뚫는 소리.
패자의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승자의 얼굴에는 미소가 서렸다.
“어떻게?”
나지막한 물음에 승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왜 이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는 확실하군.”
승자, 오디슨이 얼굴에 튄 피를 닦으며 VIP석을 바라보았다. 놀란 눈을 한 비다르가 보였다.
오디슨이 씩 웃으며 말했다.
“네놈의 클랜 따위, 안 들어가는 게 나았다!”
버럭 외치는 소리에 관중들이 부르르 떨었다.
기다림에 비해서 너무 빨리 끝난 승부다. 하지만 단 일격에 상대의 전력이 실린 무기를 쳐 내고, 상대의 목에 창을 꽂은 힘!
그 힘이 그들을 소리치게 했다.
“우아아아악! 미쳤어! 미쳤구나, 미쳤어! 벌써 비다르 클랜을 상대로 3연승이라고!”
“꺄아아아아아악! 오디슨! 꺄아아악!”
해설자가 흥분해 소리쳤다.
[말도 안 됩니다! 말도 안 돼요! 거인족보다 힘이 센 바라르 선수를 단 일격에! 그것도 정면승부로… 이게, 이게 정말 오디슨 선수의 힘입니까?!]
[정말 화끈한 승부입니다! 화끈해요!]
오디슨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바라르를 바라보았다.
바라르가 입가에서 피를 주르륵 흘리며 물었다.
“…너는 기교파가 아니었던가……?”
“기교파? 그게 무슨 개소리지?”
어리둥절한 오디슨의 표정을 보고, 바라르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비다르시여… 이놈은…….’
하지만 그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창을 뽑아낸 오디슨이 그대로 창을 휘둘러 바라르의 목을 쳐낸 탓이었다.
VIP석에서 그 광경을 보던 비다르는 으드득- 이를 갈았다.
“로키스 패밀리 놈들이 돈 칠을 했구나! 도대체 헤이드룬 미드를 몇 통이나 먹인 거지? 미친 작자들!”
“…걱정하지 마십시오, 비다르 님. 놈에게 반드시 복수할 터이니.”
“어떻게? 이제 남은 M300R 투사는 고작 가라르뿐이다! 녀석은 이미 패배한 전적이 있지! 허튼소리!”
그에 비다르를 보필하던 비다르 클랜장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녀를 보내겠습니다.”
비다르가 얼굴을 굳혔다. 하지만 반대 의사는 내보이지 않았다.
그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홱 몸을 돌리며 말했다.
“할 거라면 확실하게 해라. 감히 복수의 신께 맞선 놈에게…….”
으드득, 비다르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진짜 복수를 보여 줘라.”
클랜장이 고개를 숙였다.
와아아아아- 그들은 이 시끄러운 함성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 * *
“빌어먹을 새끼!”
쾅! 테이블을 내려친 아레스가 벌컥벌컥 술을 들이켰다. 보통의 술로는 취할 수도 없는 신의 육체라, 넥타르에 독주를 섞은 것이었다.
짜증이 치밀었지만, 차마 리모컨을 TV에 던질 순 없었다. 아프로디테의 경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보, TV 또 박살 내기만 해 봐요. 다음엔 안 사 줄 거예요, 알았죠?’
후우, 아레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올림포스의 왕태자가 어쩌다 이리 처량한 꼴이 되었단 말인가! 포세이돈과 사이가 틀어지자 돈줄이 메말랐다.
“젠장, 젠장! 비다르 그 신발놈은 대체 왜! 으으으…….”
애꿎은 비다르를 탓한 아레스가 테이블을 쿵쿵 때렸다.
쓸 수 있는 돈이 극도로 제한되니, 하고 싶은 짓도 할 수 없었다. 집에서 처량하게 술을 기울이는 이유?
BAR쿠스에도 갈 돈조차 없기 때문이다.
아레스는 승리하고 껄껄 웃어젖히는 오디슨을 보며 아드득- 이를 갈았다.
그때, 따르르릉- 전화가 울렸다.
받을 기분이 아니었다. 아레스는 전화를 무시했다.
따르르릉-
재차 전화가 울렸다.
되는 일이 없구만. 아레스는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받았다.
“누구지?”
짜증을 듬뿍 받아 내뱉은 말에 기묘한 어투가 되돌아왔다.
-화가 났도다?
“…뭐야, 넌…….”
문득, 이런 말투를 쓰는 신이 뇌리에 스쳤다.
그에 아레스는 눈살을 구겼다. 자신과 영 관련이 없는 신이었기 때문이다.
“하데스 삼촌을 찾는 거라면 전화를 잘못 걸었다, 미라.”
-끌끌끌, 제대로 걸었도다, 아레스.
“…내게 두아트의 지배자가 무슨 일이지?”
전화기 너머, 오시리스가 아레스의 짜증을 자극하는 말을 내뱉었다.
-오디슨.
아레스가 대뜸 욕을 하려는 순간, 한마디가 더 날아왔다.
-그 필멸자가 거슬리지 않는고? 짐은 거슬리도다.
“…그래서?”
개차반 왕태자와 권력을 잃은 뒷방 늙은이가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음흉한 음모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 * *
왁자지껄한 잔치가 끝났다.
이그나르 그 자식은 그딴 잔치 필요가 없다는 데도, 괜히 사람 귀찮게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냈다.
‘거, 이제 비다르 클랜이라 해 봐야 꼴랑 하나 남았잖냐! 그 자식들도 머리가 있으면 이제 싸움 걸진 않겠지.’
나쁜 기분은 아니다.
다만 시끄럽던 잔치가 끝나고, 투기장으로 돌아가는 한산한 길이 유난히 조용한 기분이다.
한동안 다른 사람과 함께 있었기 때문일까?
이런 한적한 느낌이 낯설다.
토르손이 나와 함께 지내고 싶어 했지만, 쳐 냈다.
녀석에게는 이그나르의 집에서 지내는 게 발할라에 적응하기 쉬우리라.
이라호드는 언제나처럼 제집으로 돌아갔고, 실직자가 된 크레네도 직업을 알아보느라 바빴다.
그러니까…….
“습격하기 딱 좋을 때지, 안 그렇나?”
툭 말을 내뱉었다.
그에 칫-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검은 옷을 입은 도크알브(Dokkálfr)가 있었다.
도크알브는 또 처음이군. 역청보다 어둡다던 이야기와 달리 어두운 밤인데도 구분은 가능할 정도였다.
“어둠의 요정이라… 비다르 클랜 소속인가?”
눈을 좁히며 물었다.
보통의 암살자들이 입을 법한 검은 옷이 아니라, 거리에서 평범하게 볼 수 있는 옷을 걸쳤다. 체크무늬가 있는 셔츠에 딱 달라붙는 찢어진 청색 바지. 발할라의 노동에 지친 이들이 많이들 선택하는 복장이었다. 암살자라면 바지 정도는 멀쩡한 걸 사 입을 법도 한데, 기묘하군.
요염한 각선미가 돋보이는 도크알브는 씩 웃었다. 알브가 다들 그렇듯 상당한 미인이다.
“우리 도크알브는 복수를 중히 여기지.”
“그렇다고 해도 발할라 내에서 복수라. 꽤 대담하군.”
그 말에 피식 웃은 도크알브가 이상한 물건 하나를 툭 던졌다. 네모난 곳에 둥근 눈이 달린 것 같은 물건이었다.
“CCTV다. 신계 연맹에서 흘러온 문명의 이기가 후긴과 무닌을 게으르게 만들었지. 발키리는 오지 않아.”
“티브이? 내가 아는 것과 영 다르게 생겼는데…….”
“허. 이런 때도 그 컨셉을 유지하나? 생각보다 프로 정신이 투철한 놈이군.”
이 도크알브가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지?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뭐, 사실 알 필요는 없다.
상대 역시 그리 생각하리라.
“날 여기서 죽인다고 해도, 부활은 어쩔 테지?”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찰랑찰랑, 도크알브가 술병을 흔들었다. 그 술병 안에는 시뻘건 액체가 가득했다.
저건? 눈살을 찌푸렸다. 익숙한 액체다.
“피?”
“그래, 찌꺼기의 피지. 타락한 투사가 달려들어서, 어쩔 수 없이 처리했다. 그렇게 말하면 그만 아니겠어?”
게다가 난 공식적으로 비다르 클랜이 아니거든.
도크알브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조잡한 술수를 쓰는군. 그깟 속임수에 티르께서 속으시겠는가?”
도크알브가 어깨를 으쓱인다.
“발할라는 황금으로 돌아가는 곳이지. 죄 역시 값이 매겨지는 것이고 말이야.”
도크알브가 씩 웃는다.
“죗값을 충분히 치를 수 있다면?”
도크알브가 바지 주머니에서 단검 둘을 꺼내 든다.
그 모습에 나는 혀를 찼다. 창은 경기가 끝난 뒤, 투기장에 두고 왔다.
아무래도 나 역시 이 발할라의 평화에 젖은 모양이었다.
전사가 무기를 놓고 다니다니.
“죽음을 피할 수는 없겠군.”
“부활하니 뭐니, 그런 자상한 이야기는 없을 거야. 여기가 네 끝이다.”
도크알브가 단검에 찌꺼기의 피를 부었다.
비릿한 피 냄새가 코를 찌른다. 그리고 순간, 도크알브의 몸이 휙- 사라졌다.
눈으로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다. 황급히 바닥을 굴렀다.
슥!
목덜미가 따끔하다.
휘익- 휘파람 소리가 들린다.
“잽싸군.”
“…그쪽이야말로.”
그 한순간에 내 뒤를 잡았다고? 적어도 M300R에서 볼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로 여기가 내 끝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심장이 쿵쾅 뛰고, 입꼬리가 으쓱였다.
웃음이 나왔다.
목숨을 걸고 겨루는 싸움.
얼마나 오랜만에 겪는 결투던가!
나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티르시여, 정당한 자에게 축복을 내리소서.”
그 말에 도크알브가 히죽 웃는다. 달빛 아래 보이는 그녀의 얼굴은 몽환적이었다.
그 손에 들린 피에 젖은 칼은 더욱더 그랬다.
“신을 모욕한 작자가 신의 축복을 바라다니. 너무 왔다 갔다 하는 거 아닌가?”
“허, 비다르 그깟 작자는 신도 아니다.”
그저 신발 하나를 가지고, 펜리르를 운 좋게 이긴 작자에 지나지 않는다.
내 말에 도크알브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불경한 놈!”
“글쎄, 비열한 놈보다는 낫겠지!”
쉬익- 단검이 붉은 초승달을 그린다.
나는 건틀릿을 믿고 그 초승달에 맞섰다.
건틀릿이 단검과 부딪히고,
서걱!
“크윽… 뭐?”
내 손이 잘렸다. 건틀릿은 멀쩡한데 내 손이? 눈을 꿈뻑이자니, 도크알브가 킥킥 웃었다.
“그림자를 잡을 수 있던가? 회드르(Höður)께서 도크알브를 만드실 때, 맹인이신 그분께서 유일하게 보실 수 있는 걸로 만드셨지.”
그림자? 도크알브가 어둠의 요정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림자가 되어 움직인다고?
허, 나는 눈을 꿈뻑였다.
저항할 방도가 없다.
내 멍한 표정을 본 도크알브가 씨익 웃었다.
“말했지? 여기가 네 끝이라고.”
도크알브가 쇄도한다. 그녀의 움직임에 반사적으로 주먹을 휘둘렀지만, 도크알브의 몸을 허망하게 통과할 뿐이었다.
서걱! 내 가슴팍에 깊숙한 상처가 생겼다.
이를 악물고, 마구잡이로 팔다리를 휘둘렀다. 하지만 여전히 걸리는 것은 없다.
“그림자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나는 너의 죽음이다!”
서걱! 서걱서걱!
도크알브의 단검이 내 몸을 난도질한다. 건틀릿이나 옷은 멀쩡하지만 내 몸만이 상처 입고 피를 흘린다.
머리가 핑 돌았다.
손끝이 차갑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것인가?
다리가 풀린다. 무릎이 바닥에 닿는다.
“찌꺼기의 피에는 내 피를 약간 섞어 뒀지. 어때? ‘복수의 피’를 거두지 않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니까. 안 그래?”
주르륵, 입가에서 피가 흐르고 눈앞이 흐리다.
나는 거친 숨을 쉬며 그녀에게 물었다.
“…‘복수의 눈’을 진즉에 거둬 갔단 말인가?”
“낮에 드베르그와 싸울 때 몰랐나?”
아, 그러고 보니.
그때 약간 묘한 기분이 들었었지. 본래 그다지 의지하지 않던 것이라 잘 몰랐다. 나는 피식 웃었다.
“내가 타락하지 않으면?”
“아아, 걱정하지 마. 아무리 굳건하다 해도, 짜잔.”
도크알브가 그림자 속에서 술병을 하나 더 꺼냈다.
저것 참 편리하겠군, 그래.
“자, 이제 새로 출발해야지? 안 그런가? 오디슨, 아니 찌꺼기?”
킥킥 웃으며 도크알브가 내게 다가와 단검을 휘둘렀다.
촤악, 촥!
양팔이 힘없이 늘어진다.
으드득, 이를 악물었다. 팔이 없다 한들, 전사는…….
푹!
“크으으……!”
“비명 정도는 지를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래, 여기가 내가 죽을 곳인가.”
“그렇지. 주변을 잘 둘러보라고. 아마 소멸하기 전에 볼 수 있는 마지막 광경일 테니.”
킥킥 웃는 도크알브가 쓰러진 내게 술병을 기울였다.
꿀렁꿀렁- 찌꺼기의 피가 내게 쏟아진다. 그 피에 섞인 도크알브의 피 때문일까? 순간적으로 몸이 회복되고 가슴속에서 불길이 들끓었다.
하지만 도크알브는 재차 내 팔다리의 힘줄을 끊는다.
“크아아악!”
“조금만 더 참으라고.”
으드득, 이를 악물었다. 내 이빨이 날카로워진 게 느껴진다. 도크알브가 히죽거리며 읊조린다.
“넌 어떤 모습의 찌꺼기가 될까? 네 별명처럼 늑대가 될까? 아니면…….”
“크르륵……!”
의식이 점점 멀어진다. 이 순간에도 내 몸에 걸린 축복은 저주가 되어 찌꺼기의 피를 천천히 빨아먹는다.
몽롱한 의식 속, 도크알브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인다.
그림자라고?
그렇다면…….
“그림자의 영혼도 그림자인가.”
“개소리. 그림자가 되는 건 영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이제 다 됐군. 잘 가라고, 친구.”
도크알브가 단검을 들어 올린다.
그리고 그 칼날이 내 심장을 헤집는다.
아, 죽음이 둘을 갈라놓으리.
“젠장할. 찌꺼기의 피를 네 병이나 버텨? 완전히 미친놈이잖아.”
혀를 내두르며 도크알브가 말했다.
그녀는 반쯤 괴물이 된 시체를 보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부수입을 챙겨볼까?”
시체의 주머니를 뒤지는 손, 나는 그 손을 잡았다.
“어?”
“다행이군, 그 힘이 영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서 말이야.”
“어, 어어어……?”
도크알브의 동공이 흔들린다.
그녀의 눈이 나와 누워 있는 시체 사이를 오간다.
그에 나는 헬께서 내리신 축복을 떠올렸다.
‘죽음이 둘을 갈라놓으리.’
죽음이 갈라놓는 것은 생전과 사후.
생전의 모든 족쇄를 끊어 버리는 축복이다.
그 덕에 축복을 받은 자는 ‘몸’이라는 족쇄조차 초월할 수 있다. 새로운 족쇄를 차기 전까지.
죽음은 늘 몸과 영혼을 갈라놓는다.
그리고 내 죽음은 나를 죽인 이의 머리통도 갈라놓을 수 있다.
부르르- 전신에 늑대의 힘이 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