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43화. 영웅은 숙일 줄 모른다 (2)
입술을 달싹이시며 어쩔 줄 몰라 하시는 헬.
내가 뭔가 이상한 걸 물은 건가? 눈썹을 찌푸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이라호드가 끼어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셨죠?”
하실 말씀?
이라호드는 진작 헬과 만났던 건가? 아까 헬께서 처음 들어오셨을 땐 굉장히 놀라던데.
그보다 하실 말씀이란…….
“혹, 가족에 대한 것이오?”
“…아.”
헬께서 눈썹을 찌푸리셨다.
역시나 쉽지 않은 건가? 니플헤임에 있는 망자가 한둘이 아니니 개중 삼촌과 어머니를 찾는 게 쉬울 리가 없다.
본 적도 없는 아버지는 그립지도 않다.
“가족들은 아직…….”
“…그렇소?”
화르륵 타올랐던 희망의 불씨가 삽시간에 사그라들었다.
이라호드가 우물쭈물하는 게 대충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다.
니플헤임의 주인인 헬께서 못 찾는 망자라는 건…….
“…찌꺼기가 되셨을 수도 있겠군.”
“그건!”
이라호드가 당황해 외쳤다.
헬과 크레네의 표정도 급격히 어두워졌다. 나는 쓰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안 그러길 바라지만, 마음의 준비 정도는 해 두는 게 좋지 않겠소?”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나라고 마음이 안 아플 리가 없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와 삼촌에게 배우며 자랐다.
이제는 얼굴도 잘 떠오르지 않는 어머니. 당신께서는 돌아가시기 전 말씀하셨다.
‘아버지처럼 강한 전사가 되거라.’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유일한 가족이었던 삼촌. 당신은 말씀하셨다.
‘강한 전사는 언제나 의지가 되는 사내여야 한다. 그러니 울지 말거라.’
그들의 말로 배웠다.
그렇기에 나는 굳건하게 자라났고, 전사 중의 전사가 되기 위해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들을 모조리 참아 낼 수 있다.
그것이 지금 당신들이 바라는 것을 짓밟는 것일지라도.
흠- 콧김을 뿜어 찝찝한 마음을 뱉어 냈다.
어색한 표정의 셋을 보며 히죽 웃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소? 난 헬께서 도움을 주실 수 있다는 게 더 궁금한데…….”
헬께 시선을 보내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셨다.
“축복을 내려 줄 수 있어.”
축복? 기억을 되새겨도 헬의 축복은 그 책자에 실려 있지 않았다. 나는 슬쩍 눈을 돌려 이라호드를 바라보았다.
이라호드도 그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듯,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헬께서 말씀을 이으신다.
“축복의 이름은 ‘죽음이 둘을 갈라놓으리’.”
이라호드가 흠칫 몸을 떨더니 주변을 슥 둘러보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와 크레네, 그리고 헬을 보았다.
입술이 달싹인다.
뭐라고 하는 거지? 뭔가 어이없어하는 것 같은데.
그렇게나 좋은 축복인 건가?
나는 흥미진진한 눈으로 헬을 바라보았다.
“죽음의 속성이라… 굉장히 강해 보이는군…….”
“아… 죽음이 둘을 갈라놓는다니, 너무 비극적이면서 아름답네요. 시적이에요.”
크레네의 말에 나도 동의한다.
죽음은 언제나 비극적이기 마련이다. 이름에 그 비극을 대놓고 사용하는 축복은 과연 어떤 능력을 지닌 걸까?
기대에 심장이 두근댄다.
헬께서는 나와 크레네의 칭찬이 마음에 드셨는지,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설명을 시작하셨다.
그때, 이라호드가 혼자서 중얼댄다. 그 작은 소리가 귓가를 살살 간지럽힌다.
“…내가 이상한 건가? 저 이름을 듣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아니, 상식적으로… 노린 거잖아…….”
뭔가 아는 게 있나?
아니, 지금은 헬께서 하시는 설명이 먼저다.
나는 그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 * *
“핫도그 팔아요! 핫도그! 맛있는 핫도그가 단돈 1크로나!”
“대구포! 맥주와 함께하면 심심하지 않은 대구포!”
“맥주! 벌꿀주! 마유주! 모든 술 팝니다! 아가씨들을 위한 과즙음료도 있습니다!”
와글와글, 사람들이 너무 많아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특히나 발할라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들은 이 광경에 대뜸 질려 버린다.
그건 토르손도 다르지 않았다.
“어…….”
“스키르(Skyr, 요거트) 사시려구요? 지금 사시면 스키르와 함께 먹기 좋은 온천빵도 드려요!”
넋을 놓고 있는 사이, 토르손은 작은 소녀 판매원 앞에 서게 되었다. 그 꼬마 아가씨는 아무래도 판매 품목을 잘못 정한 듯 수북하게 쌓인 스키르와 온천빵을 내보이며 눈물을 글썽였다.
덩치답지 않게 마음이 약한 토르손은 소녀의 시선을 거절하지도 못하고 어버버- 더듬거릴 뿐이었다.
그에겐 저 물건들을 사 주고 싶어도, 돈이 하나도 없었다.
발할라에 올라온 지 아직 이틀. 토르손에게 돈을 주는 건 이르다 여긴 오디슨이 용돈 한 푼 주지 않은 것이다.
그를 구해 줄 덩치가 토르손의 어깨를 잡았다.
“뭐야? 왜 여기 있어? 우리 자리는 저쪽이라니까.”
“아! 이그나르 형님… 그게…….”
머뭇거리는 토르손과 울먹이는 소녀 판매원을 보자, 이그나르는 혀를 찼다. 이 어리숙한 놈이 거절도 못 하고 사람들에 밀려 여기까지 왔으리라.
투기 경기를 보면서는 시원한 맥주와 대구포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이그나르였지만…….
“부모님이 직접 만드신 거예요, 네? 1크로나에 스키르 두 컵이랑 온천빵 하나 드릴게요!”
차마 소녀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결국 이그나르가 값을 치르고, 투기장에 어울리지 않는 스키르와 온천빵을 가지고 자리로 왔다.
끈적하고 시큼한 스키르에 발효 없이 구운 온천빵은 영 기괴한 조합이었다. 크게 나쁘진 않지만, 차라리 온천빵 사이에 고기를 한 조각 끼워 뒀으면 훨씬 잘 팔렸으리라.
“발할라는… 너무 어지럽네요.”
토르손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이그나르에게 미안했다. 제 탓에 쓰지 않아도 될 돈을 쓴 것만 같았다.
안 그래도 오디슨이 발할라로 불렀다 할 때 얼마나 놀랐던가? 운명값과 부활 비용이 결코 싸지 않다고 알고 있었다.
실제로 토르손이 공장에서 일하고 받았던 일당은 하루에 10크로나가량. 그런데 1억 크로나를 모으려면?
휴일 없이 2만 년, 하고도 7천 년이 넘도록 일해야 한다.
“뭐, 금방 적응될 거야. 사실 오디슨 놈에 비하면 네가 훨씬 나아. 오디슨 그 자식은 발할라에 오자마자 투기장에 뛰어들어서 멧돼지한테 죽었거든.”
“…네? 대장이 멧돼지한테……?”
토르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아는 오디슨은 강력한 전사다. 누구도 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오디슨은 후퇴를 몰랐고, 아무리 적이 많아도 겁먹지 않았다.
그런데 멧돼지한테 죽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그나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여기는 전사 중에서도 날고 긴다는 전사 중의 전사들만 오는 곳이잖냐. 그런 곳에서 나오는 멧돼지가 평범할 리 없지.”
“…그렇다고 해도…….”
“뭐, 일단 보면 생각이 달라질걸?”
이그나르가 킬킬 웃으며 빵 위에 퍽퍽한 요거트, 스키르를 얹어 한입 씹었다. 그리고 ‘어? 생각보다 엄청 맛있는데?’ 하고 우걱우걱 모조리 먹어치웠다.
그 모습에 토르손은 그다지 믿음이 가질 않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앗! 갑니다! 가요! 막아야죠!]
[아닙니다! 피합니다! 그런데… 와! 저기서 무기를 던지네요!]
[정말 절묘한 한 수였죠? 궁지에 몰고, 상대가 피할 걸 알고 무기를 던졌죠?]
[예, 정말 수준 높은 공방이었습니다. 이 경기의 승자는 결국…….]
투기장의 경기들. 몇 경기 보지도 않았건만, 이그나르의 말이 순식간에 이해가 됐다.
곰으로 변신하는 능력을 가지고도 무식하게 싸워 왔던 자신이 왜 그랬을까- 싶을 정도로 수준 높은 싸움이었다.
니플헤임의 한기에 꽁꽁 얼어 성장하지 못한 탓이었지만, 그런 것은 떠오르지 않았다.
“어때? 이 경기들이 죄다 Mid 300 Room 경기긴 하지만, 사실 최고 수준은 아니거든.”
“이게 최고 수준이 아니라고요?”
“뭐, Top100 경기는 너무 비싸니까, 나도 직관한 적은 없어. 게다가 그쪽 경기들은 기본이 페이퍼뷰(Pay Per View)거든.”
토르손은 페이퍼뷰가 뭔지 몰랐지만, 어쨌거나 비싸다는 건 알아들었다. 경기가 끝나고 경기장을 정리하는 시간.
이제까지 경기들은 모두 그 잠깐 쉬는 시간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기 일쑤였다.
비는 시간에 화장실을 찾는 사람이나, 음식을 사려고 하는 이들. 그리고 드물지만, 투기장을 빠져나가는 사람들까지.
혼잡하기 그지없었는데…….
‘다들 꼼짝도 안 하네?’
토르손이 눈을 꿈뻑이자, 이그나르가 피식 웃으며 그 어깨를 툭툭 쳤다.
“네 대장이 얼마나 인기 있는 투사인지 알겠어?”
“…대장을 보려고 기다리는 거라구요?”
“그렇지. 옆에서 말하는 걸 잘 들어봐.”
토르손이 귀를 쫑긋 세웠다.
“이번이 오디슨 경기지?”
“그럴걸? 비다르 클랜에서 척살령을 내려서 빡친 오디슨이 곧장 싸우자고 했다던데?”
“비다르 클랜의 척살령이면… ‘복수의 혈통’을 쓰겠단 거 아냐? 오디슨이라도 어려울 텐데…….”
“솔직히, 난 아무리 어려워도 오디슨이 허망하게 질 거 같진 않아.”
“그건 그래. 져도 제대로 싸우고 지겠지.”
“오디슨이 늘상 하는 말이 그거잖아.”
“전사답게!”
킬킬킬, 웃는 관중들.
토르손은 혀를 내둘렀다. 오디슨의 인기가 좋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기대받고 있을 줄이야.
심장이 쿵쾅거렸다.
토르손 역시 전사였다. 그렇기에 그는 오디슨이 부러웠다. 전사는 명예를 위해 죽는 족속이다.
명예롭게 살아간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장내 방송이 시작됐다.
[다음 경기는…….]
“꺄아아아악! 오디슨! 오디슨!”
“우아아악! 오늘도 화끈하게 가자고!”
장내 방송이 한순간에 묻힐 정도로 함성이 터져나왔다. 투기장에 오디슨이 모습을 드러낸 탓이었다.
오디슨은 언제나처럼 가름의 가죽을 뒤집어쓴 채 창을 하나 덜렁 가지고 투기장에 들어섰다. 어울리지 않던 신발을 벗은 그는 맨발이었다.
저런 전사에게 현대적인 감각의 운동화는 어울리지 않았다. 오히려 맨발인 게 더 낫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때, 다시 장내 방송이 울렸다.
[경기 시작에 앞서, 비다르 클랜의 대표인 비다르께서 이번 척살령에 대해 말씀하시겠습니다. 장내에 계신 관객 여러분은 신께 경의를 보이십시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푹 숙였다. 그에 VIP석을 차지한 비다르는 흐뭇하게 웃더니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갑작스레 후원을 취소하고, 척살령을 내린 데에 대해 뒷이야기가 상당히 많은 걸로 안다.]
비다르가 투기장에 직접 와 설명할 정도로 무수히 많은 이야기가 떠돌았다.
오디슨이 신성모독을 일삼은 탓에 비다르 슈즈의 매출이 떨어졌다느니, 혹은 신성모독 탓에 겁먹은 비다르가 후원을 취소했다느니 하는 이야기였다.
개중 가장 어이없는 설은 일부 여성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오디슨의 수청 거부설’이었다.
비다르는 다른 건 다 참아도 성적으로 오디슨을 어찌하려 했다는 소문은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건 모두가 오디슨이 비겁하게 비다르 클랜의 일원인 바라르와 가라르 형제를 선공했기 때문이다. 이에 우리 비다르 클랜은 비열한 오디슨의 척살을 선포하는 바이다.]
그에 나서서 직접 해명을 했다. 관객들은 모두 바라르 가라르 형제가 비다르 클랜이었던가? 하면서도 납득했다.
이전 세계뱀과의 싸움은 몇 가지 의문이 남은 경기였으니 말이다.
모두가 납득할 때, 단 한 사람은 콧방귀를 뀌었다.
“웃기는군! 날더러 비겁하다 했는가!”
버럭 화를 내는 오디슨.
그는 마이크를 요구했지만, 투기장 측에서는 오히려 오디슨의 입을 막으려 했다.
오디슨은 제 입을 막으려는 손들을 피하며 재차 외쳤다.
“비겁자를 키우는 신이여! 당신의 전사가 어찌 죽는지 똑똑히 보시오! 내게 복수해야 할 터이니 말이오!”
와아아아아! 꺄아아악!
건방진 소리에 관중들은 환호를 보냈다.
저런 모습이 관중들을 들끓게 하는 것이다. 투박하고 강렬한 전사. 스스로 믿음에 남 눈치를 보지 않는 모습에 관중들은 열광했다.
비다르는 입술을 짓씹었다. 저 말에 뭐라 대꾸한들 손해였다. 비다르가 고개를 저었고, 손짓으로 경기 시작을 명했다.
펑-!
축포가 울렸고, 경기가 시작됐다.
토르손은 혀를 내둘렀다.
“…아무리 대장이라지만, 감히 신께 도발을 하다니…….”
이그나르는 심드렁했다.
“오디슨 성격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지, 뭐.”
“아니, 형님… 저거 문제가 되는 거 아닐까요? 아무리 대장이 강하다지만…….”
이그나르가 낄낄 웃었다.
그는 비다르 클랜의 척살령이 떨어진 후 오디슨과 훈련을 했다. 토르손의 발할라 이주 건을 처리하는 동안 이뤄진 훈련이었다.
그 며칠간의 훈련에서 이그나르는 학을 뗐다. 그렇기에 이토록 평안히 지켜볼 수 있었다.
이그나르가 토르손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네 대장은 건방지고 짜증 나는 놈이지만…….”
히죽 웃으며 덧붙였다.
“네 생각보다 훨씬 강해.”
토르손이 눈을 꿈뻑일 때, 관중들이 고함을 터트렸다.
우아아아악! 꺄아아아악! 자지러질 듯한 함성에 토르손이 꿀꺽 침을 삼켰다.
이그나르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