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
41화. 영웅은 타협할 줄 모른다 (3)
복잡한 마음을 가진 게 꼭 헬뿐만은 아니었다.
올림포스에서도 복잡하기 그지없는 심경으로 TV를 주시하는 이가 있었다.
“저 새끼만 보면 이가 갈립니다.”
아레스였다.
올림포스의 왕세자인 그는 아드득- 이를 갈며 말했다. 그에 푸른 수염을 가진 포세이돈이 그를 달랬다.
“아레스, 올림포스의 왕좌는 무겁다. 알아야 할 것도 많지. 그중 가장 확실히 알아 둬야 하는 게 무엇인지 아느냐?”
묵직한 말에 아레스가 눈을 끔뻑였다.
전쟁이 아무리 깊다 할지라도, 바다만큼 깊으랴?
아레스는 백부의 말을 경청했다.
“바로 적이다. 누가 나의 적인지 알아야 하지. 드러난 기마대보다 매복하고 있는 보병이 더 무서운 법 아니더냐? 동방에는 이런 말이 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드러난 적이라면 모조리 깨부술 수 있지만, 베개 아래 숨겨진 비수가 영웅의 숨통을 끊는 법이지요.”
아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포세이돈은 언제나 알기 쉽게 말해 주었기에 아레스는 포세이돈이 좋았다. 높디높은 하늘의 뜻을 알기가 어려웠지만, 바닷길은 되새겨 보면 이해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닌가.
“그러니, 네 적이 될 녀석을 잘 보는 게 좋다.”
“저깟 놈이 제 적이나 되겠습니까?”
“상대를 얕잡아 보지 말거라. 무서운 상어가 우스꽝스러운 복어를 삼키고 죽으니.”
아레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오디슨을 높게 쳐 주는 포세이돈의 말이 영 마뜩찮다. 하지만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포세이돈이 푸근하게 웃으며 아레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저놈이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도 없지 않느냐? 셋이서 싸워야 할 상대를 홀로 상대하니 말이다.”
“그렇고말고요. 미드가르드 근해에 있는 세계뱀들은 약한 녀석들이 아니죠.”
포세이돈이 흐뭇하게 웃었다. 아레스가 제 말을 따라 준 것이 기뻤다.
실상은 비열한 웃음이었지만, 막내에게 동생 취급을 받아 온 포세이돈의 인내심은 강했다.
‘…보고서대로라면…….’
포세이돈이 속으로 키득댔다.
발할라에 파견된 님프의 보고서에 따르면 오디슨은 이미 자신에게 푹 빠졌으며, 아레스가 자신을 겁탈하려 했다는 것에 진노했다 한다.
사랑에 눈이 먼 사내가 어떤 모습을 보일까?
포세이돈은 그 선명한 미래에 흐흐- 웃음을 흘렸다. 저도 모르게 실수했나- 생각하고 표정을 굳혔지만…….
“그렇지! 그래!”
아레스가 환호했다.
때마침 오디슨이 당하는 장면이었다.
[어어어어! 오디슨 선수! 맞았어요!]
[꼬리가 생각보다 훨씬 길죠? 바닥을 구르는 오디슨 선수! 곧장 일어납니다!]
쉬이이익-! 세계뱀이 거대한 아가리를 쩍 벌린다. 오디슨은 그에 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 그 커다란 몸을 뒤틀어 보거라!]
오디슨이 세계뱀에게 달려들었다.
만신창이가 되어 싸움을 펼치는 오디슨의 모습에 아레스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전쟁신으로서 아레스는 오디슨 같은 전사들을 총애했다. 개 같은 소리만 하지 않았다면, 위대한 아레스의 이름하에 싸움을 펼쳤을 전사다.
아쉬움과 불쾌함에 쯧- 혀를 차는 아레스.
‘그렇지! 잘한다!’
포세이돈은 정반대였다.
오디슨이 활약할수록 기분이 점점 좋아졌다.
그가 이기고 난 뒤에 소리 지른다면? 아레스의 기분은 개판이 되리라. 그리고 이 개차반 같은 조카는 제 기분에 따라 마구잡이로 행동한다.
아레스의 평판이 박살 났을 때, 포세이돈은 스스로 직접 나서 그 상황을 정리할 셈이다.
TV 속 오디슨이 창을 내질렀다.
* * *
크레네는 투기장을 좋아하지 않는다.
자연 속에서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를 듣는 걸 즐기지, 광란에 가득 찬 함성을 즐기진 않았다.
와아아아아아아! 꺄아아아아악!
귀가 따갑다.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서고 싶었지만, 크레네는 꾹 참았다.
오디슨의 경기를 놓칠 순 없었다.
“하앗!”
오디슨의 고함과 함께 창이 세계뱀의 몸통에 박혔다.
길이만 50미터는 될 법한 괴물 앞에서도 오디슨은 겁먹지 않았다. 만신창이가 된 몸임에도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디슨……!’
크레네는 안타까웠다.
동시에 가슴이 떨렸다. 저토록 강인한 전사가 제 남자라는 사실에 묘한 흥분이 서려 왔다.
“오디슨 진짜 너무 좋아!”
“그렇지? 엄청 잘생겼잖아!”
주변 여성 관객들이 꺅꺅거리는 소리에 묘한 우월감이 자리 잡았다. 그 대단한 남자가 바로 내 남자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아앗!”
철렁- 심장이 내려앉았다.
오디슨에게 공격을 허용한 게 세계뱀의 함정이었다. 두 손을 꽉 모았다. 그를 죄어 오는 세계뱀에게서 벗어나기를.
쿵쿵쿵, 심장이 두근거린다.
[아아! 오디슨 선수! 그건 함정입니다!]
[빠져나와야 합니다! 빠져나와야 해요! 세계뱀의 조르기는 건물도 부술 정도로 강하거든요?!]
[바닥을 박차고 뛰는 오디슨! 세계뱀의 몸통을… 앗!]
[모래 때문에 미끄러졌죠?! 잡힙니다!]
오디슨의 발목이 잡혔다. 뱀의 몸통은 족쇄처럼 단단하게 오디슨을 휘감았다.
크레네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오디스으은!”
꽥 소리 지르자, 순간 오디슨이 이쪽을 바라본 것 같았다. 그는 까드득 이를 악물고, 제 다리를 잡은 세계뱀의 몸통을 마구 찔렀다.
푹푹푹푹!
절굿공이로 절구에 든 곡식을 찧듯, 창을 마구 내리 찌른다.
크레네가 손에 땀을 쥐고 울상을 해 보였다.
저런 강렬한 공격에도 세계뱀은 오디슨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발목을 시작으로 다리 전체를 휘감았다.
“끄아아아악!”
오디슨이 비명을 내질렀다.
우드드득! 끔찍한 소리가 투기장을 가득 채웠다.
옆에 있던 여성 관객들이 꺄아아악- 비명을 내질렀다.
“크으으……! 거긴 안 된다, 이 망할 자식아!”
오디슨의 하체를 완전히 감으려는 찰나, 오디슨이 꽥 소리를 지르고 세계뱀을 깊이 찔렀다.
전 체중을 다 실어 찌른 공격은 분명 내장에도 닿았으리라.
끼에에에엑!
세계뱀의 비명이 울렸다.
크레네는 기도했다. 누구에게 향하는 기도인지 모르지만, 누군가 오디슨을 구해주길 바랐다.
그 기도가 먹힌 걸까? 세계뱀의 조르기가 느슨해지고, 오디슨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크레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떡해, 어떡해!”
“걸렸잖아……!”
여성 관객들은 투기장 관람 경험이 많은 듯, 발을 동동 굴렀다. 크레네는 오디슨이 풀려났는데 대체 왜 그런 걸까- 생각했다.
곧 해설이 터져 나왔다.
[아아아! 저거, 저거! 세계뱀의 독특한 사냥 방식입니다!]
[작은 동물이 잽싸다 싶으면 한다는 그……?]
[예! 두꺼운 몸으로 똬리를 틀어 벽을 쌓고 그 천장을 머리로 막습니다. 그리고 입을 쩍 벌려 똬리 안쪽 것들을 모조리 집어삼키는 수법입니다.]
크레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오디슨이 죽어 버린다면? 발할라에서는 죽어도 죽은 게 아니다. 하지만 얼마나 아플까?
심장이 쿵쾅거렸다. 크레네가 가슴팍을 부여잡고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오디슨……!’
그의 고통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때, 세계뱀의 똬리가 들썩였다.
[어어어? 뭐죠? 지금…….]
[안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모두의 궁금증이 커져 갈 때 똬리가 풀렸다.
크레네는 오디슨을 찾았다. 뱀의 몸통 사이로 보이는 곳에 오디슨은 없었다.
“어어어!”
“꺄아아아아악!”
와아아아아아! 꺄아아아아악!
환호성이 터졌다. 크레네는 마침내 오디슨을 발견했다.
크레네도 환호를 내질렀다.
“오디스으으은! 힘내요오오!”
오디슨은 뱀의 아가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완전히 뭉개진 다리는 힘없이 흔들리고 있지만, 뱀의 입천장에 창을 확실히 박아 넣은 채다.
세계뱀이 그 창을 깨물어 부수려 했다.
까드드득!
창대가 활처럼 휘었다. 그럼에도 창은 부서지지 않았다. 오디슨은 창을 좀 더 박아 넣으려 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단단하게 끼인 창대는 마구 휘어질 뿐이었다.
“빌어먹을 뱀 새끼!”
오디슨이 욕설을 토하고, 주먹으로 그 입안을 마구 때렸다.
[아아… 미끌미끌한 입안에 주먹질은 통하지 않습니다!]
[창이 점점 구부러지는데요? 창이 좋은 게 아니었다면 진작 부러졌어도 이상하지 않아요!]
[시간문제입니다, 시간문제. 오디슨! 이 난관을 어찌 헤쳐 나갈 것인가!]
크레네는 조마조마한 눈으로 오디슨을 살폈다.
다리가 완전히 박살 났고, 온몸에는 피가 흐르고 있다. 멀쩡한 곳이라고는 양팔뿐.
치이익- 독액이 오디슨의 몸에 닿을 때마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프지는 않을까? 아니, 분명 아플 것이다. 지켜보는 자신의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데, 당사자의 고통은 어느 정도일까?
도대체 오디슨은 어떻게 저렇게 싸울 수 있을까?
크레네는 입술을 깨물었다.
‘차라리 항복을 하지…….’
안타까운 마음에 눈을 꾹 감았다.
크레네도 안다.
전사 중의 전사고자 하는 오디슨이 항복할 일은 절대 없다는 것을.
그렇다면 압도적으로 이겨 줬으면 했다. 투기 경기가 재미가 있든 없든 상관없다.
크레네는 그저, 오디슨이 몸 멀쩡히 승리하는 게 보고 싶었다.
‘제발……!’
까드드득- 창이 거의 한계에 달했다.
오디슨도 그를 잘 알았다. 오디슨이 분노의 함성을 터트린다.
“그래! 이 빌어먹을 뱀 자식, 어디 한번 해 보자!”
[어어어어?!]
[무모한 짓입니다! 무모해요! 뱀의 점막에는 독액이…….]
와드득! 살점을 뜯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크레네는 입을 가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눈에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아…….”
“저러면…….”
옆에 앉아 있던 여성 관객들은 입을 쩍 벌렸다.
이제껏 세계뱀과의 싸움을 몇 번이나 본 그녀들이다. 하지만 이런 무식하고 처절한 짓은 처음이었다.
이렇게까지 몰린다면 대부분이 물러서려 하다 당하고, 결국엔 죽어 버렸다. 하지만 오디슨은 달랐다.
끼에에에엑!
[오디슨 선수! 세계뱀의 혀를 깨뭅니다!]
[입안이 죄다 녹을 텐데요?! 정말 어마어마한 투지입니다!]
[고통도 상당하겠죠?]
[물론입니다! 피부에 닿아도 피부가 녹는 독액을 몸속으로 집어넣는 짓 아닙니까? 지금 이가 안 녹는 걸 보니, 최대한 삼키고 있단 소리거든요? 식도와 위장이 녹아내리는 고통을 겪고 있을 겁니다!]
크레네는 덜덜 떨었다.
상상하지도 못할 고통이 오디슨을 덮친다 생각하니 눈앞이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오디슨은 포기하지 않았다.
우직, 우걱, 으드득! 오디슨은 그 혀의 살점을 뜯어내며 혀뿌리로 향했다.
그리고…….
촤아아아악! 어마어마한 피가 뿜어져 나온다.
[아아아아! 동맥! 동맥을 뜯었어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저게 의지로 가능한 수준입니까?!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독을 마셨어요!]
끼에에에에에에엑!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세계뱀이 고통에 몸서리쳤다. 입을 쩍 벌리고 입안에 든 전사를 뱉어 내려 혀를 마구 움직였다.
그 덕에 꽉 조여진 창이 풀려났다.
오디슨은 허공에서 덜렁이는 채 그 창을 집었다.
그의 몸이 공중에 붕 떴다.
손에는 창을 쥔 오디슨.
크레네는 시간이 천천히 간다고 느꼈다.
내팽개쳐지는 오디슨의 몸을 따라 시선이 움직였다.
오디슨은 던져지면서도 투지를 잊지 않았다.
잘생긴 얼굴의 절반이 녹아내린 채, 다리가 모두 부서진 채, 온몸이 독액에 녹아가는 채.
그는 창을 잡았고, 한순간 히죽 웃었다.
크레네는 충격을 받았다.
저토록 끔찍한 상황에서 웃을 수 있다니!
등골을 따라 소름이 오소소 일어났다.
“죽- 어- 라! 이 사악한 것- 아!”
오디슨이 허공에서 창을 내질렀다.
크레네는 그 찌르기가 마치 검은 번개 같다 느꼈다.
창격이 세계뱀의 입천장을 꿰뚫었다.
우뚝! 세계뱀이 일순 멈추나 싶더니 그대로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와아아아아아아! 꺄아아아아아악!
믿을 수 없는 일격에 함성이 폭발했다. 관중들은 오디슨의 투지에 열광을 보냈다. 크레네의 옆자리에 앉은 여성 관객은 감격에 눈물을 흘렸다.
“오디스으으은!”
“사랑해애애! 꺄아아아악!”
하지만 크레네는 열광할 수 없었다.
오디슨은 그 일격에 온 힘을 쏟은 듯, 머리부터 바닥에 내팽개쳐졌으니까.
크레네가 울먹이는 눈으로 축 늘어진 오디슨을 바라보았다.
너무 울어서 눈이 팅팅 부을 것만 같았다.
‘다시는 보러 안 올 거야…….’
흑흑- 눈물을 흘리며 크레네는 덜덜 떨었다. 절대로 오디슨의 경기를 다시 볼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완치가 가능한 곳이라지만, 저건 지나치게 끔찍했다.
오디슨이 상처를 입을 때마다 심장에 바늘이 꽂히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된 건가요?]
[오디슨 선수? 오디슨 선수!]
[아아… 만신창이였던 오디슨 선수가 몇 차례나 세계뱀의 몸부림에 얻어맞은 모양입니다. 미동도 않는 오디슨 선수…….]
[세계뱀과 오디슨 선수, 양측 모두 사망한지라 이 경기는…….]
* * *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
뿌연 시선은 먼지 탓인지, 아니면 눈알이 뭉개진 탓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주변을 더듬었다. 낯익은 감촉이 느껴진다.
창이다.
“흐윽……!”
나는 창을 지팡이 삼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웅웅웅- 우우웅-
이게 무슨 소리지? 아, 주변을 보니 관객들이 미쳐 날뛴다.
함성이다. 꼭 물속에서 들리는 소리처럼 몽롱하기 짝이 없다.
목이 따끔거리고 가슴팍이 후끈거린다. 뱃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아마 독 때문이리라. 그럼에도 나는 히죽 웃었다.
밉상 드베르그 관리인이 다가와 무어라 말한다.
뭐라고?
들리지 않는다.
“잘 안 들리는…….”
목소리가 제대로 안 나온다. 쇠를 긁는 듯한 텁텁한 소리.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손가락을 움직여 마이크를 요구했다.
스피커라는 걸로 목소리를 크게 들리게 하는 그 마법 물품이다.
관리인이 움찔 떨더니 내게 뭐라 말한다.
“…하면 …절대 …돼!”
들리지 않는다. 멀리서 마이크를 찾을 필요가 없다.
승패를 발표하기 위함인지, 관리인은 마이크를 가지고 나온 채다.
나는 대뜸 관리인에게서 마이크를 뺏었다.
“알……?! 신… 모독은… 진짜 안…!”
여전히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하지만 대충 멍한 상태에서도 뭘 경고하는지는 알겠다.
신성모독을 하지 말라고?
걱정 마라. 이번에는 신성모독이 아니다.
오히려 신에 대한 찬양이다.
히죽, 웃음을 지었다. 얼굴이 잘 움직이지 않는다.
내 꼴이 얼마나 끔찍한 걸까? 저쪽에 앉은 크레네는 펑펑 우느라 날 쳐다보지도 않는다.
뭐, 그렇게까지 아프진 않는데 말이야.
멍한 기분이 꽤나 좋다.
붕 뜬 것 같은 느낌이다. 트리오를 꾸려 잡아야 하는 세계뱀을 홀로 잡았기 때문일까?
바라르, 가라르 형제까지 포함하면, 허.
내가 트리오를 상대한 셈이군.
어쨌거나 경기를 서두른 건 지금 이 시간을 위해서였다.
크레네를 보내 미인계를 쓰려 해? 날 이용하려 했다면 네가 이용당할 것도 생각해라, 넵투누스.
“아, 아…….”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전달되었다.
웅웅웅-! 함성이 귓가를 울린다.
피와 땀으로 얼룩진 상태다. 서두르지 않으면 까무룩 정신을 잃을 것 같다.
나는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넵투누스시여…….”
웅웅거리는 소리가 확 줄어든다. 모두가 내 말에 귀를 기울인다.
나는 기쁘게 말을 이었다.
“아리따운 님프를 보내시어 제 승리를 바라시던 분이여. 이 승리를 당신께 바치오!”
나는 적의 숨통을 끊기 위해, 웃으며 적의 공격을 받아 줄 수 있는 전사다.
이깟 치욕쯤이야. 참을 수 있다.
그러니.
제국의 신들아, 싸워라.
서로 싸워 헐떡일 때, 내 창이 너희들의 숨통을 노리리라.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쓰러졌다.
눈앞이 깜깜하다.
* * *
아레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포세이돈을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동자가 순식간에 분노로 물든다.
“…삼촌, 아니 포세이돈.”
포세이돈은 당황했다. 입을 벙긋거리다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다, 아레스! 아니다!”
“아니라고? 그렇다면 왜 내가 바라던 님프가 저기 있지?”
아레스가 TV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곳에는 엉엉 울고 있는 크레네가 비쳤다.
포세이돈이 입술을 깨물었다. 보고 받은 것과 전혀 다른 광경이다.
아레스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군, 알겠어! 당신의 말이 맞다! 누가 적인지를 알아야 하지.”
“아니, 아레스. 그게 아니다! 저건…….”
“닥쳐라, 포세이돈!”
으르렁! 살기를 드러내는 아레스의 기세는 범상치 않았다. 허투로 전쟁의 신을 자처하는 자가 아니다.
일신의 무력으로 따지자면, 천공신 제우스의 바로 아래. 아레스는 분노로 씩씩대며 외쳤다.
“이제부터 당신은 나의 적이오, 포세이돈!”
휙, 몸을 돌려 자리를 뜨는 아레스. 포세이돈이 그를 잡으려 했으나, 아레스는 쾅- 문을 걷어차고 떠나 버렸다.
포세이돈이 허- 헛숨을 내쉬었다.
“이게 무슨…….”
당황이 지나자, 남은 것은 분노였다.
“여- 봐- 라!”
분노를 가득 담아 고함을 내질렀다. 그에 강의 신 중 하나가 덜덜 떨며 포세이돈 앞에 부복했다.
포세이돈이 까드득- 이를 갈며 외쳤다.
“당장, 크레네를 잡아오라! 내 그년을 찢어죽일 터이니!”
“그, 그게…….”
“뭣하고 있느냐! 당장 잡아오지 못하고!”
“…이, 이런 공문이…….”
포세이돈이 미간을 찌푸렸다. 부복한 이가 내민 것은 한 장의 종이였다.
홱! 그 종이를 가로채고 내용을 확인한 포세이돈이 부들부들 떨었다. 그 손에서 종이가 팔랑팔랑 떨어져 내렸다.
[발할라 망명 고지서]
[아스가르드 신계는 망명신청자 크레네(님프)의 망명 요구가 합당하다 판단하여 신계 연맹법에 따라, 대상자의 망명을 받아들였음을 고지합니다.]
“으아아아아! 이 빌어먹을 아스가르드 놈드을!”
노호성에 해일이 일었고, 바다 생물들은 배를 까뒤집고 수면으로 둥둥 떠올랐다. 그에 바다 위를 거닐던 배들이 뒤집혀 박살 났고, 항구 도시가 여럿 물에 잠겼다.
포세이돈의 원대한 계획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고야 말았다.
이를 수습하는 데에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할까?
포세이돈은 오래토록 준비해 온 자신의 계획이 실패한 탓에 한동안 화병에 시달렸다.
그 분노 탓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건, 하계의 제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