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37화. 영웅은 사양할 줄 모른다 (3)
“미친놈! 혼자서 군단에 뛰어들다니!”
“죽여!”
겨우 한 놈이서 군단에 대적할 수 있다고? 제국군은 낄낄 웃으며 발광하는 미치광이를 금방 죽일 거라 생각했다.
모두가 그저 학살 중 튀어나온 작은 돌발 상황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한 놈이 죽었다.
“크엑!”
창에 찔려 머리통이 터졌다. 눈알이 삐죽 튀어나와 바닥을 굴렀다. 병사들은 비웃음을 지웠다.
분노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개자식!”
“덮쳐! 찌르라고!”
단숨에 덤벼드는 수십의 병사들.
피에 젖은 가죽을 뒤집어쓴 전사는 히죽 웃었다. 복면에 가려진 입은 보이지 않지만, 그 서늘한 눈동자가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풀이나 뜯어야 할 것들이, 늑대에게 덤비는구나!”
오만한 말과 함께 전사가 사냥을 시작했다.
그랬다. 싸움이 아니었다. 일방적인 사냥일 뿐이었다.
창이 허공을 가로지르면 자상이 생겨났고, 창이 돌진하면 생목숨에 구멍이 뚫렸다.
“죽어라!”
쐐액! 글라디우스가 섬전처럼 내리꽂혔다. 하지만 살을 가르는 느낌은 없었다.
전사는 건틀릿을 낀 손으로 검을 받아 내 비틀어 가로챘다.
“어, 어어…….”
“내가 할 말이다.”
푹!
글라디우스가 제 주인의 목숨을 앗았다.
빈틈을 노리려 해도, 우르르 몰린 상태에서는 서로가 방해가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병사들은 하나둘씩 죽어 나갔다.
피로 물든 털가죽은 아예 원래부터 염색된 것처럼 새빨갛게 변했다. 계속해 창을 휘두르면서도 전사의 숨소리는 변함이 없었다.
당황과 비웃음이 공포와 절망으로 뒤바뀌었다.
“뭣하는 게냐!”
지휘관이 화려한 털 장식이 붙은 모자를 쓰고 나섰다.
백인장. 휘하에 백 명의 병사를 둔 이는 마르스의 기예를 익혔다. 그는 홀로 10명이 넘는 장정을 상대할 수 있었다.
자신만만했다.
자만했다. 그래서 단신으로 군단에 뛰어든 이가 얼마나 무서운지 몰랐다.
“창을 때려라! 아무리 좋은 창인들, 제국의 야금술보다 좋을 순 없으리니!”
백인장의 외침에 병사들이 비교적 노리기 좋은 창에 칼을 내리쳤다. 전사는 크흐흐- 낮은 웃음을 흘렸다.
“네까짓 것들의 야금술? 우습구나, 우스워! 드베르그들이 제련한 내 창을 부술 수 있다 보느냐!”
“허! 순록 오줌을 너무 마셨구나! 드베르그? 웃기고 있군! 저 약쟁이를 죽여라!”
순록 오줌을 마시는 건 광전사의 지혜다. 순록에게 광대버섯을 먹여 그 독성을 중화하는 것이다.
허나 전사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버섯을 씹어 삼켜 비릿한 독성에 입안이 다 까지더라도 오줌을 마시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하물며 강한 회복력을 가진 지금, 버섯마저도 먹지 않았다.
전사는 또렷한 맨 정신이었다.
챙챙챙! 캉캉캉!
창대를 두드리는 수많은 칼들.
창은 꿈쩍도 않았다. 그러자 병사들이 당황했다.
전사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너희들의 영혼은 플루토에게 가지도 못하리라.”
푸욱! 창을 찔러 넣고, 그 피를 치덕치덕 발랐다. 영혼의 일부라도 흡수하기 위해서였다.
기괴한 모습에 공포가 더 짙어졌다.
“으어, 으아아…….”
“괴, 괴물!”
칫, 혀를 찬 백인장이 앞으로 나섰다.
“그러고도 너희들이 제국의 병사더냐! 자, 이 미치광이의 죽음을 보아라!”
“글쎄, 죽는 게 누굴까.”
“하앗!”
다른 이들보다 더 번쩍이는 글라디우스. 황금으로 도금한 방패. 역시나 황금 도금을 해 놓은 흉갑.
그의 권위가 선명하다.
하지만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
채앵!
단 일 합을 겨룬 백인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인간의 힘이라 생각하기 힘들 정도의 괴력을 느꼈다.
“무슨……!”
“느리구나.”
푸욱! 튕겨 나온 창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백인장의 목을 꿰뚫었다.
붉은 피를 흥건하게 뒤집어쓴 전사의 모습에 한 병사가 무기를 떨궜다. 이전 도시방어전에 참전했던 베테랑 병사였다.
곧 십인장으로 진급할 예정이던 그는 오줌을 지렸다.
뇌리에 선명하게 남은 악몽과 눈앞에 있는 이 미치광이의 모습이 겹쳤다.
“부, 부, 붉은 악마…….”
덜덜 떨며 말한다.
“붉은 악마가 살아 있었어… 사, 살려 줘! 난 죽기 싫단 말야!”
엉엉엉, 베테랑 병사가 열 살짜리 꼬맹이처럼 울며 도망쳤다. 다른 병사들은 흠칫 굳었다.
도망치던 그의 목이 서걱- 잘렸다.
“여전히 기분 나쁜 별명이다.”
백인장의 글라디우스를 던져 그 목을 잘라 낸 전사의 말에 병사들은 직감했다.
자신이 바로 그 별명의 주인이라 말하진 않았건만, 모두가 그를 붉은 악마라고 생각했다.
외곽도시에 복수를 다짐하며 쳐들어왔던 야만인.
개중에서 광전사를 이끌던 늑대가죽을 뒤집어쓴 악마. 홀로 백인대 여럿을 박살냈다던 그 악마는 분명 중독되어 죽었다.
그렇게 알려져 있었다.
허나 공포는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다. 누구도 이 자리에서 붉은 악마는 이미 죽었노라 말하지 않았다.
“저, 저… 야만인들이 지옥에서 악마를 불러온 거야!”
“아, 아아…….”
공포는 빠르게 전염된다.
전사가 껄껄 웃으며 소리쳤다.
“무스펠헤임의 문을 두드린 것은 네놈들이다!”
불과 연기로 가득한 세상. 느릅나무 부족 마을의 참상을 떠올린 전사는 용서와 자비를 잊었다.
제국군의 숨통을 하나하나 끊었다.
고작 한 사람의 전사 때문에 제국군의 전열이 뒤흔들렸다.
“무슨 일이냐!”
군단장이 병사들의 혼란에 물었다.
휘하 지휘관들이 멋쩍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웬 야만인 전사 하나가 덤벼든 모양입니다.”
“허! 혼자서?”
“예… 나름 잘 싸우는 모양인데… 병사들이 붉은 악마라 하며 두려워하는지라…….”
“제국의 군단에 겁쟁이들밖에 없더냐! 그런 겁쟁이들은 필요 없다!”
훽! 손을 휘저은 군단장이 명했다.
“악마에게 화살이 안 통하는지 한번 시험해 보자고!”
아군의 머리 위로 화살을 쏘라는 명령.
지휘관들 대부분이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몇몇은 그럴듯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야만인 하나에게 우왕좌왕하는 약해 빠진 병사들은 필요 없다 여기는 강경파들이었다.
궁병대에게 명령이 하달됐다.
미친 짓이라 여기면서도, 궁병들은 시위를 당겼다.
“전원, 쏴!”
핑핑핑핑- 화살이 시위를 떠났다.
화살비가 보병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크아아악!”
“씨발! 가, 같은 편이라고!”
“살려 줘……!”
화살비에 죽어 가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비명 속에서 홀로 웃는 이가 있었다.
“크흐흐. 같은 편조차 죽이는 것인가? 잔학한 놈들!”
보병들이 쓰러진 탓에 중앙으로 향하는 길이 열렸다.
전사의 눈동자가 가장 화려한 모습을 한 이를 발견했다.
먼 거리였다.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보병은 여전히 많았고, 좌우익에 있는 기병대도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전사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딘이시여! 이 군단의 목숨을 당신께 바치옵니다!”
고함을 내지르고 돌격했다.
그를 향해 화살비가 쏟아졌다. 하지만 화살들은 감히 그를 건드리지 못했다.
양 떼가 수천이라도 늑대 한 마리에 휩쓸리는 법.
군단장은 당황했다.
선명하게 살기를 뿜으며 달려오는 야만인을 보고 놀랐다.
“쏴라, 더 쏴!”
“하지만 화살이 통하지 않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저게 진짜 악마라도 된다는 것인가! 어째서 화살이 통하질 않아!”
버럭, 화를 냈지만 군단장도 눈이 있었다.
저 병사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시뻘건 피 안개를 뿌리며 다가오는 야만인은 보통이 아니었다.
덜컥 공포가 그를 사로잡았다.
아악! 끄아아아악!
비명이 점차 가까워진다.
군단장이 저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 * *
“…허, 진짜 미친 새끼네, 저거.”
얼굴이 여전히 팅팅 부은 덩치가 혀를 내둘렀다. 투석기 공격이 멈추고 고개를 빼꼼 내밀어 군단을 확인한 그는 깜짝 놀랐다.
혼자 저런 짓을 하다니!
덩치는 톨킬드에게 다가갔다.
“저거, 괜찮겠어?”
“나더러 어쩌라고? 말을 안 들어 처먹는데…….”
“쟤 죽으면 우리 지원 뚝 끊기는 거지?”
“…후우, 그렇지.”
톨킬드가 한숨을 내쉬고 적을 살폈다. 적 군단을 혼자서 휩쓰는 모습을 보자니, 문득 자괴감이 들었다.
자신이 바라던 모습은 저런 게 아니었나?
그건 다른 용병대원들도 다를 바 없었다. 겨우 수십의 용병이 저기에 들이박는 건 바보짓이다.
하지만 바보짓을 훌륭하게 해내는 것만큼 멋들어진 게 어디에 있단 말인가?
용병들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젠장할! 혼자서 다 해 처먹으면 우리 보수는?”
“공짜 일은 싫은데… 남 등쳐 먹는 것도 할 짓이 아니지!”
“가자!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자고!”
용병들이 일제히 단장인 톨킬드를 바라보았다.
톨킬드는 질끈 눈을 감았다.
“젠장! 간다! 돌격!”
“그거지! 가자가자가자!”
“오오오오!”
용병들이 일제히 덤비자, 살아남은 부족 전사들도 울컥했다.
“저자들은 정체도 알 수 없는 자들이다. 그런데 우리 부족을 돕기 위해 제국군과 싸우고 있다. 우리는 뭘 하는가!”
“가자! 오딘께서 지켜보신다!”
“느릅나무 부족의 힘을 보여 주자!”
와아아아아아!
전사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사지(死地)로 뛰어들었다.
“아…….”
소녀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엉망진창이 된 마을이다. 태어나서 쭉 살아온 마을은 불길과 죽음으로 더럽혀졌다.
부서진 집들과 널브러진 시체들.
살아남은 이들도 제정신은 아니었다.
엉엉 우는 아이들, 피 흘리며 신음하는 이들. 그리고 멍하니 넋을 놓은 헐벗은 여자들.
소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싸움에 시선을 던졌다.
가장 먼저 군단에 달려들었던 전사를 떠올렸다.
그의 얼굴을 본 적은 없다. 그의 목소리는 낯익을 뿐,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소녀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오디슨 오빠…….”
소녀가 기도를 올렸다.
발할라의 전사, 에인헤랴르가 된 그가 부족을 지켜 주길.
열망을 담아 바라고, 또 바랐다.
언뜻 본 예지를 해석하기엔 아직 소녀의 수행이 부족했다.
그렇기에 예지가 승리를 뜻하는 것이기를 기도했다.
* * *
군단장!
제국군의 수괴를 잡는다면, 이 빌어먹을 것들은 두려움에 도망치리라.
나는 달렸다.
앞을 가로막는 이들은 창의 제물이 되었다.
“크악!”
“막아! 막으라고!”
“미친놈아! 저걸 어떻게 막아! 나, 난 살아야 돼!”
“개 같은 새끼!”
내 앞을 막는 이들은 비명과 함께 죽어 나갔다.
군단은 둘로 분열했다. 싸우려는 이들과 도망치려는 이들.
안 그래도 약해 빠진 양 떼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났다.
독전관들은 도망치는 이의 목을 베었다.
“싸워라! 황제 폐하의 칼이 도망칠 수는 없다!”
“으으, 으으… 네, 네가 싸우던가! 죽을 거라고! 우리 죄다 죽는다고!”
“이 멍청한 놈이!”
서걱! 내가 죽일 것들을 나눠 죽여 주니 참 고맙군.
히죽 웃을 때, 와아아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심코 그쪽을 쳐다보고는 창을 꽉 잡았다.
“죽여라! 놈들을 끝장내!”
“사나이가 되어 도망칠쏘냐!”
할랴헤랴르가 내 뒤를 따라붙었다. 제국의 병력들은 발할라의 전사들에게 대항할 수 없었다.
“마을을 지켜라!”
“가족을 죽인 것들에게 피의 복수를!”
“오딘이시여!”
느릅나무 부족의 전사들도 함께했다.
아군이 추가되었다고 한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우리는 다 합쳐 백도 되지 않는다.
그에 반해 제국군은? 적어도 한 군단, 7천에서 9천 정도.
“하하, 하하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말 웃긴 이야기다.
소수가 다수를 공격하여 패퇴시키고 있다는 게.
“으아아악!”
“야만인들! 죽어, 죽어!”
제국군이 몸서리친다.
나의 역할은 아까와 마찬가지다.
이 군단의 목을 친다. 머리인 군단장이 죽으면 제국군도 어쩔 수 없으리라.
“꺼져라!”
푸욱! 검은 창이 피를 머금어 검붉은 빛을 요요하게 흘린다. 창에 찔린 병사들은 그대로 쓰러진다.
베르&에타에서 얻어 낸 이 창은 반발력을 줄여 주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당시 그 설명에 크게 실망했다.
‘묠니르나 궁니르 같은 물건은 없소?’
내 질문에 어이없어 하던 드베르그들이 떠오른다. 반발력을 줄이는 것만 해도 엄청난 거라 떠들어 대던 모습에 나는 실망하면서도 수긍했다.
그리고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창은 내가 이제까지 써 본 그 어떤 무기보다 좋다.
“커억……!”
막아 낸들, 내 손이 아프지 않다.
튕겨 낸들, 쉽사리 공격을 이어 갈 수 있다.
이런 명품을 들고서 이 하찮은 양 떼에 쫓길 순 없지.
푹푹푹!
이라호드와 한 훈련의 성과가 점점 드러난다.
아직 방패를 비껴갈 정도는 못 된다. 하지만 칼로 막으려는 것 정도는 쉽게 빗겨내고 찌를 수 있다.
그 작은 움직임이 제국군의 목숨 수십 개를 앗아 간다.
“으아, 으아아아!”
“젠장하아아알!”
병사들이 절망하고, 나는 한층 더 속도를 올렸다.
시간이 많지 않다.
용병들에게 허가된 전쟁 시간은 고작 3시간. 그 시간이 점점 줄어든다.
지금 상황에서 할랴헤랴르와 내가 빠지면?
느릅나무 부족은 그대로 전멸이다. 노인과 아이들은 죽을 것이고, 여인들은 성노가 되리라. 불구가 되어 살아남은 전사들은 노예로 부려지리라.
그 꼴을 두고 볼 수는 없다.
“뭐, 뭐, 뭣들 하느냐! 저, 저 자식을 죽여! 죽이라고!”
가장 화려한 몰골을 한 녀석이 꽥 소리친다. 그 목소리가 가깝다. 그리고 덜덜 떨린다.
군단장이 겁을 먹었군.
눈을 번뜩였다.
“이 저주받을 것들의 대장이 너로구나.”
“어, 어어어! 호위병! 호위병!”
군단장이 소리치자, 덩치 좋은 녀석들이 다가왔다.
숱한 싸움을 헤쳐 나온 듯 온몸에 흉터가 가득한 놈들이다.
“대단하군. 군단을 뚫고 여기까지 오다니.”
“글쎄, 곧 뚫릴 녀석이 날 칭찬한들, 기쁘지 않군.”
“흥! 야만인 같으니! 죽여 주마!”
덩치가 덤벼든다. 다른 덩치도 함께다.
확실히 손을 제대로 맞춰 본 녀석들답다. 내 공격로를 막으며 방어가 힘들게 양쪽을 동시에 친다.
챙챙!
창을 휘둘러 두 놈의 공격을 쳐냈다. 그러자 군단장이 작은 석궁을 꺼내 든다.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다.
“…독을 쓰려고?”
“흐흐흐! 이것도 피해 봐라!”
피웅! 석궁을 쏘는 군단장.
나름 사격 실력은 대단한 모양인지, 덩치 둘이 공격하는 그 틈을 노려 쏘아 냈다.
허- 감탄을 토하고, 한 손으로 창을 들어 덩치들의 공격을 쳐냈다.
덩치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뭣?”
“하, 한 손으로 내 공격을……?”
놀란 덩치들이지만, 아직 놀랄 일은 더 남았다.
턱! 빈손으로 석궁 볼트를 잡아챘다.
군단장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말도 안 돼… 정말, 정말… 악마란 말인가.”
부르르 떠는 군단장. 지휘관들이 황급히 도망을 말한다.
군단의 머리라는 것이 도망을 치겠다고?
긍지 없는 것들!
“막아! 시간을 끌어라!”
그 말에 덩치 둘이 결연한 표정으로 내게 덤빈다.
윗사람이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 목숨을 던지다니.
정말, 저런 놈을 섬기고 싶을까?
“크아아아!”
부웅! 전력을 다해 휘두른 칼이 내 머리를 노린다.
“하아앗!”
쇄애액- 마찬가지로 내 허리를 노리고 칼날이 달려든다.
뒤가 없는 공격에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전력으로 덤벼들면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나는 피식 웃으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쥐고 있던 볼트를 던졌다.
느슨하게 푼 관절을 채찍처럼 휘둘렀다.
꽈드득-! 관절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여전히 부담스러운 기술이다.
하지만 일격을 노리기엔 이만한 게 없었다.
승격을 한다면 그 알프에게 감사 인사라도 해야겠다.
쐐애애애액!
이토록 좋은 기술을 내게 가르쳐 줬으니 말이다.
푹!
“억!”
군단장이 휘청인다. 말에 오르려던 그가 바닥으로 털썩 떨어진다. 내 앞을 막던 덩치 둘은 이 상황에 멍청하게 입을 쩍 벌릴 뿐이었다.
어깨를 으쓱여, 욱씬거리는 관절을 풀었다.
“내가 이렇게 근처까지 왔을 때, 이미 끝난 싸움이었다.”
양 떼의 우두머리가 죽었다.
이제 남은 건…….
“머리를 잘랐으니, 손발도 끊어야겠지.”
이 군단의 지휘관을 모조리 죽일 생각이었다.
내 시선에 군단장을 잃은 지휘관들이 흠칫 떤다.
사냥을 마쳤으니, 그 고기를 뜯을 시간이다.
* * *
이겼다.
소녀는 멍한 표정으로 제 볼을 꼬집었다.
꿈은 아니었다. 정말로 이겼다.
전사들이 혀를 내두르며 하는 말이 들린다.
“토르의 현신이 아닐까……? 어떻게 혼자서 군단에 달려들어 군단장을…….”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살아남은 전사들은 이 싸움의 가장 큰 공을 세운 이에게 차마 다가가지 못했다. 강한 전사를 경외하는 마음에 고개를 슬쩍 숙일 뿐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복면 집단에서도 가장 강력한 전사.
그는 검은 창을 들고 울프헤딘의 복식을 하고, 홀로 싸웠다.
그리고 혼자서 군단을 물리쳤다.
다들 이들이 도왔다 한들, 군단장을 비롯한 수뇌부를 죽인 건 그 혼자만의 공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이 조용히 마을을 나선다.
전사들은 고개 숙여 경의를 표했지만, 주민들은 차마 그럴 여유도 없었다. 너무 많은 이들이 죽었고, 살아남은 이들도 큰 상처를 입었다.
단 한 사람. 볼바 견습생인 소녀는 달랐다.
소녀는 그들의 뒤를 쫓아 달렸다. 최선을 다해 달린 덕에 마을의 입구를 지나는 복면 쓴 이들을 볼 수 있었다.
소녀가 외쳤다.
“오디슨 오빠!”
그 소리에 모두가 움찔 몸을 떨었다.
모두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한 방향으로 향했다.
그 방향에 있는 것은 한 전사였다.
피를 뒤집어쓴 듯 시뻘건 혈인. 검은 창을 든 울프헤딘.
소녀가 헉헉- 거칠게 숨을 쉬면서 그에게 달려들었다.
“오빠! 엉엉엉!”
눈물을 마구 흘리는 소녀를 껴안은 전사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나는 오디슨이 아니다.”
“이 목소리, 이 머리색… 모두 오디슨 오빠가 맞잖아!”
소녀는 막무가내였다. 전사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오디슨이 아니다.”
“그럴 리가…….”
“시간이 다 됐군.”
전사가 소녀를 떼어 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난 오디슨이 아니다. 그러니 그만해라.”
“하지만……!”
전사가 재차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떼어 냈다.
“가야 한다.”
“벌써……?”
“그래.”
피식 웃은 전사가 머뭇거리다 덧붙였다.
나지막하지만 따뜻한 목소리였다.
“굳건하게 살아가거라, 시그뉘.”
소녀가 우뚝 굳었다.
곧이어 그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맺혔다.
소녀의 이름은 시그니료드였다.
그녀를 시그뉘라고 부르는 건 가족들뿐이었다.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시그니료드는 떠나는 전사들을 보며 무릎 꿇었다.
두 손을 모아 기도를 올렸다.
“흑… 오딘의 아들이여, 적의 목을 물어뜯는 붉은 늑대여, 아직까지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자여! 그대의 위대한 앞길에, 흐흑… 이 작은 여자의 기도가 힘이 되기를.”
볼바는 예언가이며, 주술사이며, 신관이다.
보통 그 믿음이 깊어야 하기에 진짜 볼바가 되는 건 한참이나 나이가 들어서 있는 일이었다.
시그니료드의 몸에는 성스러운 빛이 잠깐 머물렀다. 볼바 견습생이 볼바로 거듭났다.
그리하여, 하계에 ‘오디슨’이라는 생소한 이를 모시는 볼바가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