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36화. 영웅은 사양할 줄 모른다 (2)
전쟁은 늘 참혹하다.
하지만 실상 전쟁이 아닌, 학살이라면 그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죽여라!”
“크으으, 사악한 것들아! 너희들이 그러고도 사람이더냐!”
“흐흐흐, 우리는 사람이지! 너희같은 야만인이 아닌 법과 질서를 따르는 제국의 용맹한 시민! 야만인들을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화살이 전사들을 할퀴었다. 그 뒤를 기병대가 따랐다.
화살이 할퀸 상처를 창날이 후벼팠다. 그러고도 만족하지 못했는지, 기병대는 그대로 전사들을 관통하여 부족으로 진입했다.
부족의 목책은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급조한 목책으로 제국군을 막는 건 불가능했다.
“기름을 던져라!”
기병대가 마을에 기름을 던지고, 기병대장이 들고 있던 횃불을 휘둘렀다.
화르륵! 순식간에 마을이 불길에 휩싸였다.
난방을 위해 마른 풀들을 겹쳐 쌓은 지붕은 화마의 먹이가 되었다. 딱딱하게 언 땅에서 돌을 캐낼 수 없어 나무로 지은 집은 불길의 발에 짓밟혔다.
아아아악! 꺄아아악!
비명이 들려온다. 부족을 지키기 위해 나선 전사들은 마을에 있을 가족을 신경 쓰느라 싸움에 집중하지 못했다.
제대로 정신을 가다듬고 싸워도 이기지 못할 대군세를 앞둔 채, 우왕좌왕하고 있는 전사들은 지리멸렬하게 죽어 나갔다.
“물러서지 마라! 가족을 지키려면… 크어억!”
“죽여라! 황제 폐하의 명이다! 야만인을 모조리 죽여라!”
전사들은 마을로 물러서며 방어를 굳건히 했다. 하지만 힘이 부족했다.
“마음껏 약탈해도 좋다! 이놈들은 인간이 아니니!”
상부의 허가에 제국군이 미쳐 날뛰었다.
“이, 이 천벌 받을 놈들!”
“아아악! 할아버지!”
그들은 노인들의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고 다니다 죽였으며, 아이들의 머리통을 걷어차며 낄낄거렸다.
“흐흐흐, 야민인치고는 꽤 곱게 생겼구나…….”
“사, 살려 주세요… 제, 제발…….”
“걱정 마라, 내가 천국으로 보내 줄 터이니.”
“아, 아아…….”
여인들은 욕망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전쟁의 불길은 성스러운 장소까지 뒤덮었다.
볼바가 머무는 신령스러운 장소에 제군군 병사들이 흙발을 들이댔다. 볼바는 쭈글쭈글한 입술을 벌려 노호성을 토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꽥 소리쳤지만, 할망구의 말에 겁먹는 병사는 없었다.
볼바는 덜덜 떨면서도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여기에서 그녀가 물러선다면 미래의 볼바들은 순결을 잃고 제국군의 노리개가 되리라.
‘가름이 달려오던 예지는 이를 경고함이었던가.’
볼바는 지난밤 불길한 예지를 떠올렸다.
제국군 병사들은 볼바의 앙상한 몸 뒤에서 떨고 있는 견습생들을 보고 히죽 웃었다.
곱상한 소녀들이 모여 있는 광경에 아랫도리가 뻐근해져 왔다. 욕망에 지배된 그들에게는 ‘야만인은 인간이 아니다’라는 면죄부까지 있었다.
“시끄러운 노인네 같으니!”
“커억……!”
제국의 칼날이 볼바를 물어뜯었다. 볼바는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빌고 또 빌었다.
오딘의 심판이 저들을 박살 내기를.
“흐흐흐, 이년들 좀 보게.”
“아아, 아아… 토, 토르시여. 우리를 지, 지켜 주소서!”
한 견습생이 덜덜 떨며 기도를 올렸다. 제국군 병사가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토르? 무식한 망치쟁이가 너희를 구할 거라고? 웃긴 소리! 잘 봐라, 그 무식한 망치쟁이가 너흴 구하는지!”
소녀의 머리채를 질질 끌던 병사가 룬스톤 앞에 서서 바지를 내렸다. 소녀들이 비명을 내질렀지만, 제국군은 그저 낄낄 웃을 따름이었다.
“자! 토르시여, 제 오줌이나 맞으소서! 크하하하!”
병사가 룬스톤에 대고 소변을 보려 했다.
주르르륵, 하지만 그 룬스톤에 뿌려진 것은 오줌이 아니라 피였다.
“어, 어어……?”
“어이, 그런 쓸데없는 고추는 떼 버리지 그래? 응?”
“끄, 끄아아아아악!”
병사들이 흠칫 놀랐다. 어디에서 나타난 건지 알 수 없는 사내가 검은 복면을 쓰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허, 참. 어딜 가도 쓰레기 같은 새끼들뿐이라니까.”
“뭐, 뭐냐! 죽여!”
제국군의 외침에 그는 히죽 웃었다.
“날 죽이겠다? 네까짓 놈들이?”
덮쳐 오는 칼날을 순식간에 부러뜨리고, 놀라 부릅뜬 두 눈을 파냈다. 비명을 지르는 병사의 어깨를 잡아 끌어당겼다.
서걱!
“끄으으…….”
“이, 이런!”
낄낄낄, 사내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군을 죽이면 쓰나!”
“이익! 이 비겁한 놈이…….”
“비겁한 게 누군데 그래? 응? 그리고 비겁을 운운하려면 이 정도는 돼야지!”
사내가 훌쩍 뛰어드는 순간, 병사가 황급히 방패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사내는 공격하지 않고 멈췄다.
방패를 든 병사가 감았던 눈을 뜨자…….
“까꿍!”
그 눈에 흙을 뿌렸다.
끄아아악- 비명이 터져 나올 때, 사내가 광소를 터트리며 병사들을 죽여 나갔다. 병사들의 수준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적이었다.
“크흐흐… 개자식들. 어디 한번 해 보자고.”
사내가 신전을 나서려는 순간, 한 소녀가 물었다.
“오디슨 오빠……?”
사내의 몸이 흠칫 떨렸다.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정말 오빠야? 정말 발할라에서 내 기도를 듣고……?”
“아니, 얘야. 난 그 빌어먹을 놈이 아니거든? 사람한테 왜 욕을 하고 그러니, 응?”
“아…….”
소녀가 흠칫 몸을 떨었다. 오디슨은 분명 덩치가 크다. 거인처럼 큰 덩치는 아니었지만, 저 사내보다는 좀 작았다. 게다가 오디슨은…….
“우리 오빠는 그렇게 얼굴이 동그랗지 않은데…….”
꽤 잘생긴 편이었다.
사내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내가 누구 때문에…….”
그가 무어라 말을 하려는 순간, 뿌우우우- 뿔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숙련된 전사인 사내는 숱한 전장을 돌아보았다. 이 뿔피리 소리가 의미하는 바도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퇴각?”
사내가 인상을 구기고 잽싸게 신전 밖으로 튀어나갔다.
신전 안에는 소녀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가득 찼다. 그녀들을 돌봐 주던 볼바의 시체 옆에 주저앉아 울었다. 하지만 한 소녀는 그러지 않았다.
‘자기는 그놈이 아니라고 했어. 그렇다면… 오디슨 오빠를 안다는 거야!’
똑똑한 소녀는 이야기에 숨겨져 있던 의미를 금세 알아챘다. 볼바님이 돌아가신 건 슬펐지만, 울고 있어서는 신들께서도 보우하지 않으시리라.
소녀가 밖으로 나섰다. 평화롭던 부족 마을은 지옥도나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소녀가 흠칫 떨었다. 허나 그녀는 눈물을 참으며 희망을 쫓았다.
아까 그 사내를 찾았다. 그는 마을을 보며 분노하고 있었다.
“저 개새끼들.”
사내의 욕설에 소녀가 움찔 떨었지만, 그녀는 독한 마음을 먹고 그 곁으로 다가섰다.
“오디슨 오빠를 아는 거죠? 그렇죠? 오빠는 발할라에 있나요? 혹시, 오빠도 함께 온 건가요?”
질문을 쏟아 냈다. 사내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젠장할… 얘야, 상대가 곤란해하는 질문은 하는 게 아니란다. 세상에는 말할 수 없는 것도 있는 법이야.”
“하지만…….”
소녀가 머뭇거렸다. 그때, 사내가 버럭 욕을 토했다.
“저 미친 새끼들! 마을에 투석기를 쏘겠다고?!”
요새도, 성도 아니다. 그저 목책을 약간 쌓아 둔 작은 마을. 그곳에 쏘아 올리기엔 지나치게 과한 폭력이 준비되고 있었다.
뿌우우우-
재차 뿔피리 소리가 들렸다.
사내가 침을 꼴깍 삼켰다.
“아, 젠장할… 그 새끼 말을 듣는 게 아닌데, 진짜.”
“그 새끼? 오디슨 오빠 말이에요?”
“아, 씨… 일단, 피해! 바위가 날아온다!”
사내가 황급히 소녀를 잡아당기며 신전 안으로 피하려 했다. 하지만 약간은 늦었다.
뿌우우우-!
뿔피리 소리와 함께, 붕붕붕- 벌 떼가 날아오르듯 거대한 소음이 마을을 뒤덮었다.
“씨발, 이렇게 죽는 건가? 단장, 그 새끼도 진짜… 이게 뭐야, 그리 안 어렵다며?”
투덜대는 대머리.
소녀는 차마 오디슨에 대해 물을 수가 없었다.
하늘을 날아오는 바위들은 꼭 콩알같이 작았다. 하지만 점점 커지고 있었다.
시간이 느리다. 아니, 그저 죽음 직전의 주마등일지도 모른다.
천천히, 천천히. 바위들이 그 덩치를 키워 갔다.
덜컥, 겁이 났다.
완전히 뭉개지는 상상이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아, 아아…….”
그녀가 반쯤 정신을 놓았을 때, 그녀는 선 채로 꿈을 꿨다.
소녀가 꾸고도 기억하지 못하던 꿈이 선명하게 그녀의 앞에 드러났다.
“가름.”
“뭐?”
사내가 물었다. 소녀는 멍하니 혼잣말을 이어갔다.
“가름이 독수리의 목을 물리라.”
사내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소녀가 완전히 미쳤다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무슨 개소리인지.
사내가 한숨을 푹 쉬었다.
“젠장할. 그래도 예쁘장한 애랑 같이 죽겠구만.”
피할 곳은 없었다. 피한다 할지라도 투석기가 어딜 향할지 알 수 없었다.
그때, 고성이 터져 나왔다.
부족 마을에 있는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목소리였다.
“비겁하기 그지없는 작자들아! 내 너희를 모조리 찢어 오딘께 바치겠다!”
사내가 ‘젠장할, 저 새끼는 쫄지도 않나.’ 하고 투덜댔고, 소녀가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피로 물든 털가죽을 뒤집어쓴 전사. 그 목에 걸린 영롱한 목걸이가 신비로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으아아아아!”
쾅! 그 전사가 거대한 바위와 정면으로 부딪혔다.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런 용맹한 전사라 할지라도, 투석기에서 쏘아 올린 바위와는…….
쩌적! 바위가 쪼개지고, 전사가 소리 질렀다.
“토르의 용기와 티르의 정당함으로 오딘의 승리를 위하여!”
소녀의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던 구호였다.
* * *
느릅나무 부족에 도착하자마자 분노에 몸을 맡겼다.
노인들을 죽이며 낄낄 웃는 놈의 목을 가르고, 아이들의 머리통을 툭툭 걷어차는 놈의 사지를 잘라 냈다. 여인들을 겁간하는 놈의 엉덩이에 창을 쑤셔 박아 입으로 뽑아냈다.
깜짝 놀란 제국군이 덤벼들었지만, 나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놈들을 다 죽여 버렸다.
창으로 찔러 죽이고, 창 자루로 때려 죽였다. 목을 졸라 죽이고, 입을 찢어 죽였다.
수십의 병사들이 내 손에 죽어 나갔다.
그자들의 영혼이 영원토록 고통 받길 바랐다.
뿌우우우- 뿌우우-!
퇴각 명령과 함께 투석기가 등장했다.
톨킬드가 당황했다.
“미친 작자들! 이런 마을에 바위를 쏘겠다고?!”
나는 분노했다.
“모조리 처죽이겠다.”
“자, 잠깐! 아무리 오디슨 님이 대단해도 바위에 맞으면 죽어요, 죽는다고요!”
톨킬드가 매달려 왔다. 하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고함을 내질렀다.
“비겁하기 그지없는 작자들아! 내 너희를 모조리 찢어 오딘께 바치겠다!”
그 목소리에도 바위는 떨지 않고 덤벼들었다. 목에 걸린 룬스톤이 번쩍인다. 그러나 나는 주먹을 꽉 쥐고 분노를 그대로 쏟아 냈다.
“씨발! 피해, 좀!”
톨킬드를 무시하고 바윗덩이에 달려들었다.
주먹을 내질렀다.
쾅! 바위가 박살 난다. 하지만 쾅쾅쾅!
내 몸은 하나였고, 투석기에서 쏘아진 바위는 한둘이 아니었다.
“토르의 용기와 티르의 정당함으로 오딘의 승리를 위하여!”
나는 창을 움켜쥐고, 제국군 본대를 향해 달렸다.
등 뒤에서 톨킬드가 무어라 외치는 것?
무시했다.
허공에 떠 있는 발키리가 칫- 하고 혀를 차는 것?
무시했다.
저 발키리가 아니라, 이라호드가 함께했다면 어땠을까?
내 전속 발키리인 이라호드가 따라붙는 건, 저쪽에서 증거로 내세울 수 있기에 함께할 수 없단다.
그래서 다행이다.
이라호드였다면 아마 나에게 욕설을 퍼부었으리라.
‘그대에게 오딘의 승리가 함께하기를.’
하지만 그녀가 내 이마에 해 준 입맞춤은, 전사를 위한 것이었다. 다음번에 입술에 입맞춤을 받기 위해서는 물러설 수 없다.
그런 소리를 하다가 한 대 맞긴 했지만.
뭐 어떤가.
전사에게 발키리의 입맞춤이 허락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이런 무모함이 내 긍지다.
긍지를 잃은 전사는 추해질 따름이다.
죽기 전까지 벗겨지지 않는다는 복면이 답답하다.
이곳에서 죽어 나자빠진다면 내 영혼에 아로새겨져 금제를 걸 서약서가 뭐? 어쨌다고.
신계 연맹 내 불간섭이 어쩌고 뭐. 신경 쓸 것 없다.
죽는다면 죽는 것이다.
“씨발! 야! 여기 오는데 1억이나 들었다고! 근데 네가 죽으면 끝장이야! 끝장!”
용병들이 홀로 다니지 않는 이유가 톨킬드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하계를 왕복하는 데에는 거금뿐만 아니라 온갖 제약, 그리고 시간 제한까지도 있었다. 정말이지 답답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무시했다.
부르르- 아까부터 품속의 룬스톤이 덜덜 떨고 있었다.
나는 달리는 도중, 그것을 쥐어 들곤 확인했다.
〈늑대 가죽을 쓰고 늑대가 되어,〉
스칼드의 첫 번째 줄이 스르르- 신비롭게 변화한다.
실타래가 풀리고 새로 짜여지듯, 글자가 다른 글자가 된다.
〈양 떼는 그를 해치지 못하노라.〉
히죽, 웃고서 룬스톤을 손에서 놓았다.
“저기, 겁먹은 양 떼가 있군.”
이제는 늑대의 사냥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