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26화. 영웅은 쓰러지지 않는다 (1)
후우, 후우, 후우.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터질 것만 같다.
머리가 박살 난 레티아르에게서 시선을 떼고,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꿀꺽- 침 넘기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버럭 소리쳤다.
어째서 모두가 침묵하는가!
“승리했다-!”
승리의 선언에 반박하라!
반박하지 못하겠다면…….
와아아아아아아아!
꺄아아악! 꺄아아아악!
그래, 그렇게 소리를 질러라!
승전보를 울리는 전사에게 광기에 가까운 찬사를 보내라!
바로 그것이 내가 바라는 것이나니.
[대단합니다! 대단해요! 오디슨!]
[정말, 뭐라고 할까요? 가슴이 뜨거워지는 한판이었습니다!]
[사실 여러 가지로 문제될 법한 발언이 조금 있기는 했습니다만… 에잇! 뭐 어떻습니까! 자, 승자에게 찬사를 보냅시다!]
우아아아아아아!
고함이 내게 마구 쏟아진다.
온 사방이 뒤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에 나는 히죽 웃고 말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오른손이 아프지?
“윽…….”
어지럽다.
출- 렁, 눈이 한순간 요동쳤다. 원령을 너무 사용한 탓일까?
머리가 지끈거리고 오른손이 불타는 것처럼 아프다. 나도 모르게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하하! 오디슨 선수! 승리에 감격하는 모습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감격할 만하죠! U500이 아니거든요? O500이에요! 게다가 개중에서도 중위권에 오른 두 사람을 한 번에 상대해 이겼습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대단해요! 어우, U500의 루키가 이제는 O500을 씹어 먹습니다!]
[앞으로 이 선수를 주목해야… 엇?]
“쿨럭, 쿨럭!”
눈앞이 흐려진다.
검은 피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와 바닥으로 쏟아졌다.
이대로 처량하게 쓰러질 순 없다. 이를 악물고 몸을 돌렸다.
파란 하늘이 보인다.
독. 머릿속에 그 글자가 스친다.
꼭 하계에서의 마지막과 닮은꼴이 아닌가? 하지만 다른 게 하나 있다.
“내가… 닿은 거라곤…….”
레티아르가 휘두른 글라디우스. 그것 외에는 없다.
비열한 작자 같으니! 당장에 저 빌어먹을 물건을 반 토막 내야…….
욱씬! 심장, 아니, 그보다 좀 더 깊숙한 곳의 무언가가 타들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끄윽……!”
푸른 하늘이 노랗게 물든다.
좋지 못한데… 죽고 살아나면 괜찮아지는 곳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내 본능은 발버둥 치고 있었다.
이건 절대로 죽고 나서 괜찮아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고.
어째서인지 알 수 있었다.
“크흐… 제국 놈들은, 마지막까지도 비열하군……. 큭큭.”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목구멍에 핏물이 가득해 자꾸만 기침이 난다.
아아! 더 이상 눈꺼풀을 들고 있을 수 없다.
커다란 바윗덩어리도 자갈처럼 집어들 수 있는 힘이 있었지만, 눈꺼풀은 마치 온 세상 무게를 다 합쳐 놓은 것만 같다.
천천히 눈이 감길 때, 푸드득 푸드득- 검은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어쩐지 익숙한데?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웃음이 나왔다.
“이, 이번은 네… 가 나의 발키리군. 쿨럭!”
목구멍이 핏물에 완전히 잠기기 직전 내뱉은 말. 맑고 고운 목소리와는 거리가 먼 울음소리가 익숙하다.
“까악까악! 오디슨! 까악!”
메르키가 당황하는 꼴이 우스웠다.
나는 피식 웃고서 눈을 감았다.
어둠이 나를 반긴다.
* * *
[무, 무슨 일입니까? 갑자기 오디슨 선수가…….]
[독! 독입니다! 아아, 투기장 관리인, 메르키가 급하게 날아옵니다.]
웅성웅성. 관객들이 당황했다.
척 봐도 상태가 좋지 못한 오디슨.
승자의 당당함은 패자의 비열함에 무너지고 말았다.
새까맣게 죽은피를 토하는 오디슨은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감수성이 풍부한 여성 관객 중 일부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어떡해! 오디슨! 오디스은!”
“흑흑… 나쁜 새끼들…….”
투기장 리그에 대해 꿰고 있는 매니아층은 분노를 토했다.
“독은 금지잖아! 씨발, 그럴 거면 아예 독가스나 뿌리지 그러냐!”
“일 똑바로 안 해?! 엉?”
투기장 리그에서 독은 금지다.
애당초 독이라는 것이 적아를 가리는 물질이 아니라는 게 그 첫 번째 이유.
그리고 두 번째로 전사와 독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심리적 저항감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파멸의 때에 적이 될 ‘세계의 찌꺼기들에게는 독이 통하지 않는다’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투기장 리그의 목적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중계권 수익으로 황금을 모은다? 좋다. 하지만 발할라라는 곳은 본디 강한 전사들끼리의 싸움을 통해 더 강한 전사들을 생산하기 위한 훈련 시설이다.
황금으로 변질되었다 할지라도, 발할라는 여전히 발할라여야만 했다.
[독이라뇨… 이건 정말…….]
[쓰러진 오디슨 선수의 오른손을 보시면, 검은 피… 거의 타르 같은 피가 흐르고 있거든요?]
해설자가 으드득, 이를 갈았다.
[저건 그냥 독도 아닙니다. 세계의 찌꺼기로 만들어 낸 독입니다. 발할라 내에서는 소지하고만 있어도 극형을 받을 수 있는 끔찍한 독이죠!]
[아아… 오디슨 선수, 쾌차하길 바랍니다.]
[정말이지 비겁하기 짝이 없습니다! 사실상 2대 1로 덤비면서, 연맹법으로 제한받는 독까지 쓰다뇨! 저건 정말 강력한 처벌이 필요합니다!]
해설자는 분노한 상황에서도 말을 골랐다.
‘칼을 휘두르기 직전에 외친, 마르스… 그리고 하필이면 그곳에서 자주 쓰는 글라디우스… 설마.’
분노한 한편 머리를 복잡하게 굴렸다.
이 일이 어떻게 처리될지는 알 수가 없지만, 이 일로 인해 발할라가 한참 떠들썩하리라는 건 잘 알 수 있었다.
오디슨의 팬들이나, O500 경기를 본 사람뿐만이 아니라. 그야말로 발할라의 모든 사람들이 이에 대해서 알게 되리라.
심지어 아스가르드의 가장 위대하신 신들께서도 알게 되리라.
오디슨이라는 이름을.
그러니까…….
[오디슨 선수, 정말… 쾌차하길 바랍니다.]
그 끝이 비극이 되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오디슨이 입에 달고 사는 전사가 옮은 걸까? 해설자는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죽음과도 싸워 이기는 전사야말로 진정한 전사가 아니겠습니까?’
* * *
해설자의 생각은 절반만 맞았다.
발할라뿐만 아니라 아스가르드 전체가 시끌벅적했다.
그마저도 모자란 이야기였다.
니플헤임 역시 들썩였다. 헬의 싸늘한 분노가 헬하임과 니플헤임에 무서운 눈보라를 몰고 왔다.
이 정도로 끝? 아니다.
신계 연맹 전체가 소란스러웠다.
[오디슨 중태? 사용된 독은 연맹법상 금지된 독!]+877
[투기장 리그의 도 넘은 폭력성과 신성모독! 이대로 괜찮은가?]+72
[발할라 측, “외부유입 가능성 검토 중” …유력 용의자는?]+999
당장이라도 아스가르드와 올림포스 사이에 전쟁이 터질 것 같은 분위기가 맴돌았다.
두 신계 사이의 전쟁으로 끝이 날까? 아니, 연맹 전체가 둘로 갈라져 전쟁을 벌이리라.
아주 끔찍한 일이다.
연맹에 속한 신계들은 모두가 숙적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아스가르드는 요툰헤임의 거인 왕국을 적으로 두고 있으며, 올림포스는 사악한 거인 신들인 기간테스를 적으로 두고 있다. 그 외에도 곤륜은 사악한 요선들과 싸우는 중이다. 헤이븐은 악마들을, 메스트는 오염을 경계한다.
이런 와중에 연맹 내전?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모든 신계가 이에 대해 내부 단속을 시작했다.
발할라가 위치한 아스가르드 역시 다를 바 없었다.
* * *
쾅! 로키가 테이블을 때리며, 싸늘하게 말했다.
“내부 단속을 할 게 아니라, 책임 소재를 확실히 밝혀야지!”
평소의 낄낄대는 로키가 아니었다. 그에 펜리르도 으르렁대며 동조했다.
“O500투사가 금지된 독을 구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솔직히 로키네 애들이 별로 마음에 안 들긴 하는데… 이번은 얘네들 말이 맞다. 아레슨가 뭔가 하는 옆 동네 양아치 새끼를 잡아다가 아주 그냥…….”
토르가 끼어들어 우드득- 손가락을 꺾어 소리를 냈다. 산도 쥐어 터트릴 수 있는 거력에 하급 신들이 움찔 몸을 떨었다.
로키스 패밀리와 토르는 확고한 주전파였다.
그런가 하면 반전파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결투와 정의와 법의 신인 티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금 외부자의 소행이라 확실히 밝혀진 바는 없다.”
“그러니까 헤임달 저 새끼를 자르자고!”
토르가 꽥 소리쳤다.
가만히 있다가 불똥을 맞은 헤임달은 억울하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본래 무지개다리, 비프로스트를 관리하던 신이 헤임달이다. 하지만 비프로스트가 메스트 기술과 오딘의 마법, 그리고 곤륜의 부적 따위로 포장된 고속버스로 재탄생하자 제대로 된 관리직을 받았다.
발할라 출입국 관리처장.
“가만 있는 나를 왜…….”
“네가 입출국 관리를 대충 하니까 그러는 거 아냐?”
“아니, 확실히 하잖습니까?”
토르가 떫은 표정을 내보였다. 본디 토르는 헤임달에게 그다지 좋은 감정이 없었다.
다리 위에서 좀 신나서 쿵쾅 발을 굴렀기로소이니, 무지개다리 내구력 문제라며 통행 금지령을 내려?
게다가 그 전날 좀 과음을 하고 버스 안에서 토했다고 버스 탑승 금지령?
마음에 들 수가 없었다.
“내가 왔다 갔다 하는 것도 모르잖아, 너.”
“그건…….”
무지개다리를 못 건너게 하니, 훌쩍 뛰어내려 갔다가 세계수를 타고 돌아오는 이다.
어떻게 관리할까?
헤임달은 정말로 억울했다. 토르의 통행을 금지시킨 건 무지개다리를 박살 낼 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버스에서 좀 토했다고?
뭘 얼마나 먹었는지, 버스가 토사물로 침수 피해를 입어 몇 주간 재정비를 해야만 했다.
바닷물을 마시면 해수면 수위를 낮출 정도로 마시는 토르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토르 님은 힘이 너무 세서, 신계 밖으로 나가면 세계의 균형이 어그러지고 세계의 찌꺼기가 과하게 생성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막은 거죠.”
“어쨌든, 아직도 이번에 그 글라디우스를 건넨 놈의 정체를 파악 못 했잖아.”
“그건…….”
헤임달이 입을 닫았다.
티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토르. 후긴과 무닌도 그 작자의 진짜 정체를 알지는 못했다. 기억과 생각을 읽는 까마귀 왕을 피할 정도라면 아주 작정을 한 거지. 헤임달을 탓할 거 없다.”
“…젠장할. 모습은 알잖아? 독수리라며? 옆 동네 양아치 상징이 독수리인 거 몰라?”
“그걸 이용해서 거인 왕국에서 꾸민 짓이라면?”
“윽…….”
토르의 말문이 막혔다.
정말 올림포스와 발할라의 전쟁을 바라는 무리가 꾸민 짓이라면? 전쟁은 어마어마한 실책이 된다.
그렇기에 주전파도 강력하게 전쟁을 주장하진 못했다.
반전파 역시 깔끔하지 못한 상황에 속이 탔다.
결론을 내려 줄 이가 필요했다.
텅- 텅-
지팡이가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울렸다. 마력이 듬뿍 담긴 울림이었다.
모두가 입을 닫았다.
“그만.”
오딘이 말했다.
위그드라실 최상층부, 신들의 회의실에 있는 왕좌에 앉은 오딘. 그는 미라처럼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가물어 갈라진 논밭처럼 쩍쩍 갈라진 얼굴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지혜가 담겨 있었다.
높으신 분이 조용히 선언한다.
“전쟁은 없다.”
주전파의 얼굴이 실망으로 와락 구겨졌다.
반전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좀 나아졌다지만, 오딘은 분명 전쟁의 신이다. 그것도 옆 동네 양아치, 아레스와 같은 광기 어린 전쟁의 신.
“아버지!”
토르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지만, 오딘은 싸늘하게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기세 좋게 일어난 토르가 움찔 몸을 떨었다.
늙어 흐려진 아버지의 눈빛은 여전히 오싹했다.
“단.”
오딘이 말을 잇는다. 시린 칼날처럼 단호한 목소리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갈라진 목소리에는 작은 웃음기가 서렸다.
로키가 눈썹을 씰룩였다.
로키는 의형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몸이 떨렸다. 두렵기 짝이 없는 웃음기다.
“전쟁. 그 그리운 이름을 다시 부를 수 있겠지…….”
옛일을 추억하듯 작게 웃는 오딘. 얼굴의 주름이 옅어졌다.
그 덕에 노인은 청년처럼 보였고, 청년의 표정은 아이처럼 천진난만했다.
모든 신들은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되새겼다.
회귀 후, 얌전해졌다고는 해도 오딘은 오딘이다.
그의 본질은 마법도, 전쟁도, 바람도, 주술도 아니다.
광기.
미쳐 날뛰는 광인이야말로, 아스가르드의 왕인 오딘의 참된 모습이었다.
지금은 그저 그 본성을 억누르고 있을 뿐.
그 본성이 터져 나오면, 아스가르드는 또다시 야만의 시대가 되리라.
모두는 한참이나 침묵했다. 하지만 영원한 침묵은 없는 법.
꿀꺽, 침을 삼킨 티르가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 일은 여기에서…….”
“잠깐!”
토르가 폐회사를 던지려는 티르를 막았다.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말한다.
“보상은? 결국, 이번 일은 배후가 있든 말든, 우리 측의 관리 소홀로 일어난 일 아닌가?”
“…보상이라.”
티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법적으로도 오디슨은 보상을 받아야 할 입장이었다.
그것도 신들의 보상을.
“…그렇다면 그에게 치료비를 제하고 1억 크로나를 전달하여…….”
“치료비는 당연한 소리고, 또 그건 너무 적지.”
“그럼?”
토르가 씨익 웃으며 품에서 물건 하나를 꺼냈다. 그에 티르가 흠칫 놀랐다.
과한 보상이었다.
“룬스톤을?”
“난 그놈이 꽤 마음에 들거든. 이 룬스톤의 힘을 얼마나 끌어낼는지…….”
토르가 테이블 위에 룬스톤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기대되는군.”
티르가 입을 꾹 다물었다. 개인 소장품이니 뭐라 할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신계 전체의 보상을 따로 지급해야 하리라.
“…거기에 더해 무상 치료와 함께, 이번 승리에 대한 수당을 추가 지급하도록 하지.”
“좋군.”
토르가 껄껄 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