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그 오브 발할라-24화 (24/208)

# 24

24화. 영웅은 용서치 않는다 (2)

투기장의 커다란 정문 옆.

좁디좁은 개구멍을 지나, 그나마 허리를 펴고 들어갈 수 있는 문을 통해 입장했다. 그 문 위에 적힌 Over 500이라는 글자에 사뭇 흐뭇해하면서.

하지만 그 기분은 진입과 동시에 박살 났다.

“어, 저 새끼 그거 아니냐?”

“맞네, 맞아. 늪지머니 조아요, 그거네. 큭큭!”

덩치 큰 투사 둘이 키득거리며 날 비웃었다. 눈살을 구기자, 놈들이 껄껄 웃는다.

“새끼 저거 눈빛 봐라! 아이고, 무서워라!”

“어디 U500에서 막 올라온 놈이 저따위로 눈을 떠?”

U500이나 O500이나 멍청한 놈들은 똑같이 멍청한 모양이다.

나는 당장 창을 잡아챘다.

그리고 녀석들의 뱃가죽을 찢어 버리려는 찰나, 까악- 익숙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까악? 오디슨! 무슨 일로 왔냐악!”

“…칫.”

“으응?”

작게 혀를 차자, 메르키가 고개를 갸웃했다.

날 비웃던 두 놈은 여전히 저들끼리 낄낄대는 중.

저 멍청한 자식들은 방금 제 뱃가죽이 터지기 일보직전이라는 걸 몰랐나?

어떻게 이렇게 선명한 살기를 무시하지? 내가 살기를 뿜어도 아무런 해가 없다고 여기기엔 저들의 기세가 너무 미약하다.

기세를 완전히 숨길 수 있는 강자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런 작자들이 O500에 있을 리 없다.

결국 쭉정이다.

저런 놈들을 죽여 봐야 명예롭지도 못하다.

창을 쥔 손에서 힘을 뺐다.

“메르키, O500도 네가 관리하는 건가?”

“음, 최하위와 하위는 사실 크게 싸움이 자주 일어나지 않으니. 딱히 부담은 없다.”

…메르키가 전에 일처리를 하는 걸 언뜻 보았는데.

녀석은 복잡하기 그지없는 글자와 숫자가 수두룩 빽빽한 서류를 산더미처럼 처리했다.

그게 부담이 안 되는 일이라니.

혀를 내둘렀다.

“대단하군.”

“까악까악!”

기쁘게 웃는 메르키에게 피식 웃어 보이고, 용건을 꺼냈다.

“싸움을 주선해다오.”

“싸움이라… 흠, 좋아. 그렇다면 O500 데뷔전을 서둘러 준비해 보지. 다만 U500과 달리 O500은 상호 동의하에 벌어지는 싸움이기에 주선에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닥.”

U500처럼 괴물들이 잔뜩 있는 곳은 아니라, 이 말인가?

뭐, 사람과 싸우는 것이 괴물들과 싸우는 것보다 어렵다.

괴물들은 기술이 부족하다.

하지만 발할라의 전사들은 다들 적을 죽이는 법을 배운 이들이다. 거기다 세흐림니르나 헤이드룬 미드를 이용해 신체 능력까지 끌어올렸으니, 어지간한 괴물보다 훨씬 어려운 상대다.

그리고 싸움은 어느 정도 어려움이 있어야 재밌다.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시시덕거리던 투사 둘이 메르키에게 다가갔다.

“아이고, 메르키 공! 그리 어렵게 잡을 필요 있겠습니까? 제가 애송이에게 한 수 보여 주겠습니다. 흐흐.”

“아니, 아니죠. 메르키 공! 제가 이놈보다 훨씬 화려하게 저 애송이를 가르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조잘거리는 작자들.

나는 싸늘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자신들의 승리를 확실시하고 날 도마 위의 생선처럼 보는데…….

그다지 기분이 좋진 못하다.

찌를까?

고민하는 찰나, 메르키가 까악- 소리를 질렀다.

“그만! 이건 1 대 1 결투다! 둘이서 아무리 그래 봐야, 소용이 없닥!”

“칫, 그러면 어쩔 수 없지… 가위바위보로 할까?”

“그래, 가위바위보 하자.”

가위바위보- 하고 손을 흔들며 장난질을 하는 놈들.

딱히 그럴 필요는 없다.

“…메르키.”

“으, 으응?”

메르키가 살짝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미안하다는 표정이었다. 어느샌가 나는 까마귀의 표정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2대1도 괜찮다.”

내 말에 가위바위보를 하던 두 녀석이 허-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저 새끼가 U500 조지고 올라왔다고 O500이 우스운가 본데……?”

“별 같잖치도 않은 놈이…….”

투덜대는 녀석들에게 인상을 구겼다.

저 자식들은 싸움을 하려는 게 맞나?

“불만이 있다면…….”

쾅! 으르렁거리며 창을 수직으로 세워, 바닥을 때렸다.

“둘 다 덤벼라! 이 자리에서 박살을 내 줄 테니!”

녀석들이 움찔 몸을 떨었다.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낸다.

“이 새끼가!”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놈이!”

흥- 콧방귀를 뀌었다.

“당장, 무기를 들어라! 말로 지랄하지 말고!”

“그, 그러면 내가 못 할 줄 알고?!”

그리고 들어 올리는 무기라는 게, 뭐? 글라디우스?

제국병의 제식 무기?

“전사의 긍지도 없는 쓰레기 같은 새끼!”

으드득! 이를 갈고 창을 내질렀다.

쐐애애애액!

“억! 이 미친 새끼! 진짜로……!”

채앵!

공기를 가르고 날아간 창이 안경다리에 막혔다. 흠칫 몸을 떨 때, 후우- 한숨 소리가 들렸다.

“까악까악! 진정해락!”

메르키가 제 안경을 내밀어 내 창격을 비껴 냈다.

얇은 안경다리에 창을 비껴 내는 기술이라니!

“허…….”

그 움직임이 내 가슴을 진탕시켰다.

“…메르키? 넌 왜 여기에서 투기장 관리인이나 하는 거지?”

“까악, 그건… 으음, 다음에 이야기하자.”

그 움직임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오묘한 이치가 담겨 있었다.

메르키가 겨우 안경으로 힘껏 찌른 창을 튕겨 낼 수 있는 실력자라니? 대체 왜 직접 싸우지 않는 걸까.

의문이 무럭무럭 자랄 때, 메르키가 푸득거리며 상황을 정리했다.

“그보다, 모두 진정해라! 특히 오디슨!”

얼굴을 구기고 창으로 녀석들을 가리켰다. 그놈들은 움찔 몸을 떨었다.

“쯧, 저 긍지도 없는 것들이 문제다.”

“까악! 그만!”

메르키가 소리치고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안경을 고쳐 쓰는 메르키의 눈빛에 창을 내렸다.

그제야 메르키가 진정된 목소리로 묻는다.

“까악! 정말로 2대1로 싸울 셈인가?”

“그래. 저 멍청한 놈들에게 전사의 싸움을 가르쳐 주겠다.”

“...후우, 알았다. 그러면 내가 오디슨과 레티아르, 데릭손의 경기를 잡겠다.”

메르키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글라우디스를 쓰던 멍청이 레티아르, 그리고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던 덩치 데릭손은 다시 입을 열고 조잘댔다.

“2 대 1이라니! 너무 시시하지!”

“맞아, 2 대 1이라니. 메르키 공, 1대1대1이 어떻소? 그게 더 나을 텐데, 흐흐.”

“저놈을 치우고, 우리 둘이 싸워 보자 이거지? 응?”

킥킥 웃던 레티아르가 날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넌 어떠냐, 애송이?”

“별 상관 없다. 다만, 한 가지는 추가했으면 좋겠군.”

한 가지? 메르키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이 경기를 그냥 경기로 끝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저 멍청이들을 통해 O500에 경고할 셈이다.

“항복은 없다.”

남을 건드릴 때에는 목숨을 걸어라!

그게 바로 진짜 전사의 태도다.

* * *

오래 기다리지 않아서 좋다.

경기는 단 하루 만에 열렸다. 메르키가 말하기를, 나에 대한 관심이 높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그 광대짓도 뭔가 도움이 되긴 했다는 건가?

“후우.”

한숨을 내쉬고, 건틀릿을 슬쩍 건드렸다.

-끄그그…….

나지막한 소리.

딱히 불편하지는 않지만, 씻을 때도 벗지 못한다. 간지럽다거나 하진 않는다. 하지만 약간 찝찝하다.

[오, 이 선수. U500에서 꽤나 화제가 된 선수죠?]

[예, 광고도 하나 찍었죠.]

[그 덕에 여성팬들이 굉장히 늘었는데요… 그보다, 오늘 구도, 꽤 재밌지 않습니까?]

사회자와 해설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제는 그들이 목소리만 있는 존재가 아님을 안다.

스피커라는 걸 통해서 말하고 있다는 걸 광고를 촬영하며 배웠다.

[1대1대1. 사실상 2대1의 구도로 갈 것 같네요.]

[레티아르 선수와 데릭손 선수는 가끔 듀오를 이루기도 하니까요.]

[게다가 레티아르 선수와 오디슨 선수의 갈등도 선명하죠.]

[예, 레티아르 선수는 제국 노예 검투사 출신으로 투기장 경험이 리그 수준에 비해서 굉장히 많은 편이죠. 그래서 독특한 전략이 나오기도 하구요. 그에 반해 오디슨 선수는 그 제국과 맞서 싸웠거든요.]

[투사 출신과 전사 출신이 맞붙습니다!]

끼이이익- 쇳소리와 함께 철창이 열렸다.

나는 밝은 햇볕으로 걸어 나갔다.

눈이 부셨다. 꺄아아아- 하는 환호가 들려온다.

U500에 비해 넓은 경기장. 그리고 U500에 비해 더 많은 관중.

그것들은 내게 딱히 특별한 감흥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반대편에서 나온 레티아르가 내 신경을 건드렸다.

“…제국 놈들의 복장을 하고 다니다니.”

으드득, 저런 미친 제국주의자는 내 생에 처음이다.

주변 부족들은 모두 제국을 적대하거나 경계했으니까. 제국의 문물이 약간이나마 스며들긴 했지만, 그것들마저도 모두가 경계했다.

편안함을 경계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부드러운 털실이 언제 억센 가죽끈이 되어 내 목을 죌지 모르니까.

창을 잡았다.

“흐흐, 애송이. 네 곱상한 얼굴을 완전 박살 내 주지!”

“항복 없는 경기라니. 흐흐, 멍청한 선택이었다구.”

레티아르와 데릭손이 말했다.

레티아르의 무장은 제국식 투구에 제국식 가죽 갑옷, 그리고 글라디우스와 제국식 둥근 방패. 그리고 허리춤에는 그물을 가지고 있다.

그에 반해 데릭손은 훨씬 간략한 무장이다. 바이킹 소드 하나. 그 대신 갑옷이 꽤나 충실하다.

“…꽤나 있나 보군. 미안해할 필요는 아예 없겠어.”

데릭손이 착용한 것은 내가 브라기 중고 상점에서 봤던 통짜 쇠 갑옷이다.

덥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가름의 가죽을 통째로 쓴 단망토를 입은 내가 할 생각은 아니다.

[폴리세 베르소(Pollice Verso), 그러니까 레티아르와 데릭손 듀오의 전술은 언제나 똑같았죠. 풀플레이트아머를 걸친 데릭손이 상대의 공격을 막아 내는 동안, 레티아르가 쇠그물을 던져서 상대를 봉쇄합니다. 그리고 그물에 걸린 상대를 둘이서 처리하는 방식이죠.]

[비겁하다는 의견이 좀 있었는데요.]

아나운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관중들의 야유가 들려왔다.

“우우우! 꺼져라! 제국으로 꺼져!”

“오디스은! 파이팅! 꺄아아아!”

“저 새끼들을 박살 내! 오디슨!”

나는 피식 웃고 두 녀석을 바라보았다. 녀석들의 표정이 험악해진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네, 아무래도 그렇죠. 보통 제국의 검투사 분류 중, 레티아리이(Retiarii)라는 이들이 그물을 들고 싸웠다고 하는데요. 사실 그들은 그물을 이용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제약을 받았습니다. 방패 착용 금지라든가, 혹은 투구를 착용하지 못한다든가 하는 식이죠.]

해설자가 살짝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그런데 레티아르 선수는 투구도 쓰고, 방패도 쓰고, 그물까지 쓰거든요.]

[자, 그런 상황을 오디슨 선수는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 해설자님께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오디슨 선수가 어떤 식으로 그걸 깰까요?]

[보통 그에 대한 대처는 두 가지거든요.]

뭐? 두 가지라고?

난 하나밖에 못 떠올렸는데……?

[힘으로 우악스럽게 밀어붙이거나, 혹은 머리를 쓰는 거죠.]

[아, 그렇다면 오디슨 선수는?]

[예, 머리를 쓰겠죠. 아주 지능적인 선수거든요.]

…음. 나는 당연히 힘으로 찢어 버릴 생각이었다만.

어깨를 으쓱이고 녀석들을 볼 때에 펑- 하는 폭죽 소리가 들렸다.

[아! 이제 경기 시작됩니다!]

“흐흐흐! U500과 O500의 차이가 뭔지 아냐, 꼬맹이?”

데릭손이 쿵쿵쿵, 철갑옷을 입은 채 달려들며 말했다. 철갑옷에 바이킹 소드라니.

영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글쎄…….”

“바로 기본적인 능력이 엄청나게 차이 난다는 것이다! 으아아아압!”

쾅쾅쾅! 데릭손의 발이 바닥을 박살 낼 듯 박찼다. 그가 거의 날 듯 달려왔다. 과연 힘이 대단한 게 틀림없다.

힐끗, 주변을 살폈다.

데릭손이 말을 걸고 발소리를 크게 내는 사이, 레티아르가 조용히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이 덩치를 맞상대하는 틈에 그물을 던지겠다 이건가? 정말…….

하찮은 작전이다.

“U500과 O500의 공통점은 확실히 알겠군.”

“크아아앗!”

부우우웅! 바이킹 소드가 공기를 찢는다.

나는 창을 꼭 쥐고 말했다.

“진짜 전사는 없다는 것.”

실망을 가득 담아 창을 내질렀다.

왼쪽 건틀릿에서 잠깐 검은 연기가 일렁였다.

그리고 창은 늑대의 송곳니처럼,

콰지지직!

“끄아아아아악!”

멍청한 덩치의 팔을 한입 베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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