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그 오브 발할라-23화 (23/208)

# 23

23화. 영웅은 용서치 않는다 (1)

“크헉, 크허허헛! 크하하하하핫!”

탕탕탕! 테이블을 치며 웃어 재끼는 이그나르.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 빌어먹을 자식을 쥐어 팰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만 웃지?”

“하지만, 크흑, 크하하하하! 저것 좀 보라고!”

이그나르가 손가락질하는 것은 티브이. 그 화면에는 내 얼굴이 가득하다.

내가 봐도 멍청한 표정을 짓고, 떨떠름한 웃음을 머금는다. 그러고는 검은 건틀릿을 낀 손을 내밀어 엄지를 치켜든다.

[늪지머니, 조아요!]

“크하하하하하학! 크학! 크하하핫!”

아, 젠장. 죽고 싶다.

어색하기 그지없는 말과 이상하기 짝이 없는 춤. 늑대 탈을 뒤집어쓴 놈들 사이에서 뻑뻑한 몸짓을 해 보이는 내 꼴이 슬프다.

나는 헤이드룬 미드를 확 들이켰다.

“제길, 밍밍한 술 같으니.”

짜증을 부리자, 어후- 하고 숨을 고른 이그나르가 내 어깨를 툭툭 친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그건 술이 아니야, 음료수지.”

“…제기랄!”

내가 들이켠 것은 벌꿀주다.

무알콜이라는 이상한 이름이 붙은.

[청소년도 튼튼하게!]

[무알콜! 헤이드룬 미드!]

무알콜이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건 술이되 술이 아닌 기괴한 음료수였다.

힘이 늘어난다는 느낌은 있지만…….

“이봐, 동생.”

“동생?”

눈살을 구겼다. 이그나르가 히죽대며 말한다.

“17살밖에 안 된 놈이 반말이나 찍찍하고 말이야……. 난 무려 100살이 넘었다고.”

흐흐 웃는 이그나르.

내 나이를 알게 된 후로 계속 이런 식이다.

나는 짜증을 부리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검은 가죽의 차가운 감촉에 열 받았던 머리가 식나 싶었지만…….

-끄흐르으끄흐르으으으…….

기괴한 소리가 들려왔다.

“젠장할. 귀 쪽으로는 이제 손도 못 대겠군.”

“큭큭, 그거 아직도 해주 못 했냐?”

벌꿀주를 마시면서 묻는 이그나르. 놈이 캬- 소리를 냈다.

부럽다. 나도 술다운 술을 마시고 싶건만.

이 발할라에서는 19살 이전에는 술을 마실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왜 이런 밍밍하기 짝이 없는 술은 마실 수 있는 건지 의문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해주할 돈이 없어.”

수많은 사건이 있었던 그날을 떠올렸다.

* * *

“빚?”

“그래, 11억 8천만 크로나. 그 채권을 내가 샀거든. 우리 늪지머니에서 네 빚을 관리하는데 말이야…….”

펜리르가 어깨를 으쓱이고 말을 이었다.

“막 발할라 진입 후, 한 달간의 이자 면제 기간이 끝났어. 그런데 내가 보니까, 이자가 쌓이면 이거 답이 없겠더라고.”

한 달에 이자만 295만 크로나야.

펜리르의 말에 눈썹을 와락 찌푸렸다.

이자가 거의 300만 크로나라고? 빚더미에 깔려 죽고 말리라.

역시 분노를 묻어 두고, 마르스 놈의 후원을 받았어야 했나?

후원금이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저 빚을 까는 데에는 충분히 도움이 될 텐데…….

“솔직히 O500으로 올라갔다곤 해도, 한 달 이자만 300만 크로나라는 건 꽤나 힘들지 않겠어?”

“그건…….”

O500은 좀 더 잘 벌지 않을까? 잠깐 고민할 때, 펜리르가 쯧-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O500 투사들의 평균 수입이 한 달 500만 크로나야. 그것만 해도 풍요로운 이 발할라에서는 보통보다는 잘 먹고 잘사는 편이지. 그렇지만 그 위로 갈 생각 아닌가?”

샛노란 눈동자가 물었다.

여기에서 안주할 거냐고.

나는 이를 갈며 말했다.

“나는 발할라 최고의 전사가 될 거요!”

“그래, 그런 포부. 그런 포부 좋아. 아주 좋아.”

짝짝짝, 펜리르가 박수를 쳤다.

조롱하는 것인가? 아무리 멸망의 늑대라고 할지라도 나는 그런 조롱을 참고 견디는 사람이 아니다.

눈살을 좁히고 그를 바라보자니, 펜리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조롱하거나 하는 건 아니야.”

“그렇다면?”

“진지하게, 그런 포부를 좋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래서 말인데…….”

펜리르가 혀로 입술을 적시고 말을 이었다.

“난 오디슨, 너의 가능성을 굉장히 높게 보고 있어.”

“…그렇소?”

“그렇고말고!”

짝! 박수를 친 펜리르가 종이 뭉치를 건넨다.

나는 뭣도 모른 채 그 종이 뭉치를 받았다. 그리고 그 최상단에 적힌 룬문자를 읽었다.

“광고모데르 계약서?”

광고모데르가 대체 뭐지? 고개를 갸웃했다.

펜리르가 설명을 시작했다.

“내 회사, 늪지머니의 광고 모델이 되어 주는 대신에 이자를 면제해 주겠다는 이야기야.”

“…으음?”

“계약 기간은 딱 1년. 그사이에 네 수입이 모델료보다 커지고, 네가 더 이상 모델을 하고 싶지 않다면 그대로 끝. 아니면 계약을 연장할 거고.”

좋은 이야기다. 그런데 ‘너무’ 좋은 이야기다. 지나칠 정도로 내가 유리한 이야기다.

혹시나 이 광고모데르라는 게 뭔가 엄청나게 힘든 일인가?

슬쩍 이그나르를 바라보았다.

펜리르의 위압감이 줄어든 탓일까? 이그나르는 아까보다 훨씬 상태가 나아졌다.

“이그나르? 이 광고모데르라는 게 대체 뭐지?”

“…과, 광고 모델 말인가……? 그, 네가 받고 있는 후원과 비슷한 거다.”

“후원과?”

고개를 갸웃하자, 이그나르가 심호흡을 하고 말을 이었다.

“후원은 네 싸움에 슬쩍 신이 끼어든 형태지만, 광고는 좀 달라. 네가 나서서 이게 좋습니다- 하는 일이고, 또 그 광고 대상의 얼굴이 되는 셈이야.”

“…으음, 목숨을 걸어야 하는 그런 일인가?”

“아니, 전혀.”

단호한 답변이지만, 자세한 설명을 하긴 힘든 모양이었다.

이그나르가 으음- 침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딱!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너 우리 가게에서 TV로 본 거 있잖아. 그 신발 광고.”

“으음? 신발 광고라면?”

“네가 신고 있던 신발을 신고 용암 위를 걸어가는 그거.”

그러고 보니, 티브이에서 그런 걸 보기도 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바로 광고야.”

“…용암 위를 걸어야 한단 말인가?”

내가 버틸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하자, 이그나르는 짜증이 나는지 가슴팍을 퉁퉁 쳤다. 대체 뭐가 문제지, 저 녀석은?

펜리르가 끼어들었다.

“그런 건 아니고, 대충 정해 주는 대사를 하고 정해 주는 몸짓을 하기만 되는 일이다. 위험한 건 없어.”

“그래, 그렇지! 아, 죄송합니다. 반말을 하려던 게 아니라…….”

“됐다. 얼음미끼, 이그나르.”

얼음미끼라는 말에 기분이 상한 모양이다. 이그나르가 입술을 삐죽였다.

털이 숭숭 난 아저씨가 입술을 삐죽이는 광경은 영 보기 좋지 않았다.

어쨌든 이그나르와 펜리르의 말에 따르자면 이렇다.

내가 위험하지도 않고 그렇게 힘들지도 않으면서, 이자를 면제받을 수 있는 그런 일이라는 것 같다.

그렇다면? 안 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역시 의문이 남는다.

“…으음, 왜 이렇게 잘해 주시오?”

“그야 네가 누이의… 아니, 누이가 나한테 부탁했거든. 네가 잘될 거니까 좀 신경 써 달라고.”

“헬께서?”

눈을 동그랗게 뜨자, 펜리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착각하지 마라. 누이가 그러긴 했지만, 누이의 부탁 때문이 아니니까.”

“그렇다면?”

펜리르가 씩 웃었다.

날카로운 이빨들이 보였지만, 아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아까는 살벌한 늑대의 웃음이었지만, 지금은 장난을 꾸미는 악동 같다.

“가능성. 더 위로 올라갈 것 같다는 가능성에 투자하는 거지. 지금이 아니면 훨씬 비싸게 계약해야 할 것 같다고 할까?”

그 말에 나는 살짝 우쭐했다.

눈앞에 있는 남자가 누군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바로 그 멸망의 늑대가 아닌가? 무력으로 따지자면 신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이다.

그런 이가 나의 성장 가능성을 높게 본다니.

전사로서 무한한 영광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계약하겠소.”

“흐흐, 좋아! 그럼 광고부터 찍으러 갈까? 아니면 계약을 다음 달로 할까? 지금 당장 광고가 어떤 건질 모르잖아? 계약을 미루고 싶다면, 지금 이자를 내놓으면 돼.”

살짝 고민했다.

그의 말대로 나는 아직 광고가 어떤 것인지 잘 모른다.

한 달이나 더 발할라에서 지내다 보면 익숙해질 터, 한 달 뒤로 미루는 게 나을 것 같다.

날 인정해 준 멸망의 늑대를 실망시킬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아쉽지만, 건틀릿은 못 사겠다.

“한 달 뒤로 하겠소.”

“좋아, 그러면 일단 이자를 내놓으라고.”

“잠깐! 기다리시오. 우선은 이 건틀릿을 벗고…….”

건틀릿을 잡아당겼다. 그와 동시에 약지에서 찌릿하는 느낌이 들었다.

응? 이 느낌은?

-끄그극, 끄기끼키키키!

펑!

검은 안개가 왼손에서 치솟았다. 기괴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억지로 건틀릿을 벗으려 했다.

허나 벗겨지지 않는다!

-끄히히히끼히히히히히!

“으, 으윽! 외, 왼손이……!”

내 통제를 벗어나 멋대로 움직이는 왼손. 나는 황급히 오른손으로 왼손을 눌렀다.

펜리르가 허, 참- 하고 눈을 끔뻑였다.

지금 그럴 때가 아니잖아!

“이, 이보시오! 이게 왜……?”

“아, 그거… 저주 걸린 물건이었나 보네요. 확실히… 생긴 거에 비해서 사장님이 너무 낮게 가격을 매겼다 했어요.”

그렇구나-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점원.

미친 작자 같으니!

“지금 그런 소리를 할 때가 아닌 거 같소만!”

“해주하시게요? 그거 악령이 붙은 타입이라, 해주에 대충 천만 크로나 정도 들 것 같은데…….”

뭐라고?

“천만 크로나?! 그런 돈이 어딨소!”

“그럼 어쩔 수 없죠.”

뭘 어쩔 수 없단 건가! 이 비열한 사기꾼들!

펜리르를 슬쩍 보았지만,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 저주나 주술 같은 건 아예 몰라.”

아, 제기랄!

왼손이 마구 요동치는데, 이 상황에서 O500의 경기를 해 나갈 수 있을까?

U500이라도 어려우리라.

이를 악물고, 점원에게 따지려는 순간, 점원의 말이 다르게 다가왔다.

‘’악령’이 붙은 타입이라, 해주에 대충…….’

악령? 악령이면, 영혼이라는 소리 아닌가?

그러고 보니, 왼손에서만 유독 검은 연기와 함께 기괴한 소리가 들려온다.

그렇다면 혹시……?

정신을 집중해 변이술을 발휘했다. 찌릿하는 감각과 함께 악령이 사그라들고, 검은 털이 숭숭 돋았다.

됐다! 그것도 엄청나게 잘됐다!

어마어마한 힘이 내 몸에서 느껴졌다.

창을 들고 휘두르면 바윗덩어리라도 박살 낼 수 있을 법한 힘.

…이건.

저주가 걸린 물건이라고 했던가? 해주를 해야 쓸 수 있다고?

슬쩍 점원 뒤에 걸린 팻말로 눈길을 보냈다.

[가끔 저주가 걸린 물건이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저주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으니, 잘 살펴보시고 구매하시길 바랍니다.]

[해주는 카운터에 문의해 주세요.]

…비열한 작자들.

시가의 신, 브라기? 아니, 완전히 사기의 신이다.

후우, 한숨을 쉬고 물었다.

“으드득, 해주 비용이 천만이랬소?”

“뭐… 악령 타입은 최저가가 그 정도예요. 다른 곳에서는 천오백만은 받을걸요?”

“…됐소, 그냥 계산해 주시오.”

진짜요? 그거 저주 때문에 쓸 만한 물건이 못 될 텐데.

중얼거리는 점원.

때릴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이라호드에게 단단히 주의를 받은 바, 그 얼굴을 후려치진 않았다.

부글부글 끓는 속이었지만, 심호흡으로 억눌렀다.

습습- 후우. 습습- 후.

오히려 잘됐다.

악령마저 내 힘이 된다면, 이건 타인에겐 저주지만 나에겐 축복이다.

“200만 크로나예요.”

솔직히 아깝다.

저주 걸린 물건을 200만 크로나나 주고 사게 되다니. 하지만 해주하는 데에 천만 크로나가 들고, 해주하지 않으면 벗을 수가 없다.

망할 놈의 자식들.

나는 승리 수당을 꺼내 던졌다.

휙휙 날아가는 금화지만, 점원은 어렵지 않게 받아 냈다.

이런 일이 흔한 모양이다. 짜증이 와락 치솟았다.

이 사기꾼 같은 작자들!

치밀어 오른 분노를 씹어 삼키고, 씩씩 거친 숨을 가다듬었다.

어찌 됐든, 내게는 이자를 낼 돈이 없어졌다.

슬쩍 펜리르를 보았다. 그는 아까 내게 건넸던 광고모데르 계약서를 흔들고 있었다.

약간은 떨떠름한 표정이다.

“어, 음… 뭐, 계약해야겠네?”

“좋소.”

광고모데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원금을 늘리는 것보다는 낫겠지.

나는 계약서에 서명했다.

* * *

그 당시를 떠올리니, 이가 갈린다.

할 만한 일?

그래, 일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자! 엉덩이를 좀 더 비비드(Vivid)하게 흔듭시당!’

‘아니, 거기에서는 웃으면서 조아용~ 하고 말해야죵!’

‘자기는 얼굴은 잘생겼는데, 왜 이렇게 ‘딱딱’행? 응? 너무 ‘딱딱’한 거 아냥? ‘딱딱’한 게 좋기는 하지마안…….’

감독이라는 놈이 몸을 더듬으며 콧소리를 흘리는 건 끔찍한 경험이었다.

제국의 남색가 자식들에게 느낀 혐오감을 다시 느낄 줄이야.

후우. 정말 힘겨웠다.

감독이라는 작자를 죽을 만치 패고 싶었건만, 그놈의 이자!

벌컥벌컥, 술잔을 들어 벌꿀주를 들이켰다.

“…젠장.”

여전히 밍밍하다.

인상을 와락 구기고 있으니, 한참을 웃던 이그나르가 고기를 먹으며 물었다.

“음음, 근데, 꿀꺽. 앞으로는 어떻게 할 거냐? 저거, 풉… 웃기긴 한데, 은근 인기가 좋다며? 아예 연예계로 나가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 같은데…….”

“연예계? 그게 뭐지? 어쨌든, 나는 광대가 아니다.”

나는 전사다.

불판 위의 고기들을 한 번에 다 집어 입에 쑤셔 박았다. 이그나르가 ‘망할 새끼!’ 하고 외치지만, 나는 우물우물 한입 가득 고기를 씹어 삼켰다.

지금 나는 온갖 울분들을 모조리 씹어 삼킨 상태다. 그 답답한 속을 풀기 위해서 할 일은 단 하나.

“싸울 거다.”

싸움.

O500의 투사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직접 확인해 볼 테다.

나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 어어? 어디 가?!”

“투기장.”

피가 끓는 전투가 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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