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그 오브 발할라-15화 (15/208)

# 15

15화. 영웅은 도망치지 않는다 (2)

“오디슨 님? 여왕님께서 기다리십니다. 어서 가시죠.”

여왕? 니플헤임에서 여왕이라 불릴 만한 이는 한 사람뿐이다.

니플헤임의 헬, 그중에서도 엘류드니르라는 궁전에는 지옥과 같은 이름의 여신이 기거한다.

로키의 딸이며 죽은 자들의 여신인 헬(hel).

그녀가 기거하는 궁전에서는 ‘허기’라는 접시에 ‘기아’라는 나이프로 식사를 하며, 문지방은 ‘발을 거는 돌부리’이며, 침대는 ‘병석’이고, ‘어슴프레한 슬픔’을 커튼으로 드리웠다.

주술사가 말하기를 절반은 검은색이고, 절반은 살색인 죽음은 음울하고 험악하게 생겼단다, 라고.

그런 그녀가 나를 기다린다?

아무리 뛰어난 전사라 할지라도 떨지 않고 배길쏘냐.

내가 흠칫하자 병사들을 이끄는 자가 머쓱하니 웃었다.

“아무래도 헬 여왕님께 간다(Go to hell)는 문구는 좀 그렇죠?”

“농담이 아니라 정말… 여러모로 꺼려지는 말이오만…….”

“뭐, 사실, 오디슨 님은 하계에서 올라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러시겠지요. 저는 공포스러운 여왕님을 딱히 아는 바가 없지만, 본래 오딘께서 회귀하시기 전에는 여왕님이 꽤나 무서운 분이셨다면서요? 겪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어깨를 으쓱인 그가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그 이름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강글라티라니…….”

헬에 대한 설명을 할 때에 나오는 그녀의 두 하인 중 하나 아닌가.

‘걸음이 느린 자’ 강글라티, 그리고 ‘걸음이 느린 여자’ 강글로트.

“전 이때가 참 좋아요.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거든요. 하계에서 온 사람들은 저랑 제 와이프를 알고 있더라구요. 그게 얼마나 신기한지.”

후후- 웃는 강글라티.

그 모습에 음울하고 싸늘한 니플헤임의 신화와는 다른 느낌이 물씬 난다. 그에게 ‘걸음이 느린 자’라는 별명이 붙은 건, 수다를 떠느라 천천히 가는 탓이 아닐까?

그때, 이라호드가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잠깐, 잠깐만요.”

“음? 무슨 일이십니까?”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이런 환대라니… 딱히 연락 않고 왔을 텐데…….”

“아, 연락은…….”

슬쩍 내 눈치를 살핀 강글라티가 이라호드에게 속닥거렸다.

이라호드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에게 속삭였다.

두 사람이 날 빼놓고 말을 하니, 소외된 느낌이 물씬 풍겼다.

이럴 땐 야른시다를 놀리는 게 제 맛이지.

슬쩍 시선을 돌려보니…….

“…도망쳤군.”

야른시다와 장정들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야기가 끝이 났는지, 이라호드가 꺼림칙한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일단 가요.”

“어딜?”

“지옥으로요. 아무래도 이렇게 환대 받고 무시하겠다, 생각하는 건 아니죠?”

그야 그렇지.

그리고 내 눈으로 ‘죽음’을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안전한 공포는 즐거움이지 않은가.

* * *

군대와 함께 니플헤임의 유일한 도시, 헬에 닿았다.

여신인 헬과 구분 짓기 위해 헬하임이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이건 또 상상과는 다르군.”

이제는 상상이 들어맞는 게 더 이상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차갑고 음울한 죽음의 땅. 내가 그리 상상하던 헬하임은 차갑긴 하지만 음울한 느낌은 그리 많이 들지 않았다.

여기저기 삐죽삐죽 솟은 굴뚝에서는 짙은 회색 연기가 연이어 뿜어졌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군대를 보고 황급히 피했다.

그렇다고 해도 공포가 도시를 삼킨 느낌은 아니다.

“멀리서 본 공방거리와 비슷한 느낌인 것 같은데…….”

“발할라의 공방거리요? 뭐, 비슷하다면 비슷하죠. 헬하임이나 공방거리나 불을 굉장히 많이 쓰는 곳이니까요.”

“불을?”

“예, 헬하임의 망자들은 자신의 업을 청산하기 위해 모두 연금 공장에서 일한답니다.”

강글라티의 말에 눈을 반짝였다.

연금술. 온갖 것들을 뒤섞어 황금을 얻어 내기 위한 기술이라 들었다.

부족에서야 황금이 별 가치가 없었지만, 제국은 달랐다. 제국 귀족 중에서는 연금술에 전 재산을 쏟아부었다가 폭삭 망한 이들이 몇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망하고 난 뒤에 화를 내며 마녀니 뭐니 온갖 주접을 떨어 댔지.

“멍청이들이 속아 넘어가는 사기인 줄 알았건만.”

“뭐, 하계에서는 사기죠.”

강글라티가 어깨를 으쓱였다.

“연금에 필수적인 재료는 바로, 세계의 찌꺼기… 침전물이니까요.”

“…내가 치우는 찌꺼기들이 황금 덩어리라고?”

“아뇨, 그건 아닙니다. 찌꺼기를 처리하고 나면 그 사체를 가지고 여러 가지 가공을 해야 황금이 나오죠.”

한 마리에서 나오는 황금은 정말 얼마 안 돼요.

강글라티의 설명에 이라호드가 슬쩍 끼어들어 덧붙인다.

“그래서 말했잖아요. 봉사 활동 200시간, 사실 200시간이 안 될지도 모른다고.”

“으음? 그런 말을 들은 것 같긴 한데…….”

“찌꺼기 하나 처리할 때마다 1시간씩 줄어요. 200마리 처리하면 곧장 돌아가는 거구요.”

오호, 그런 식이란 말인가?

두 사람의 뉘앙스가 찌꺼기라는 것들은 어떤 종류의 괴물인 것 같다. 청소를 해야 하나 걱정하던 나에겐 잘된 일이다.

그럼, 잘 싸우는 이들은 빨리 돌아가겠군.

흠흠, 강글라티가 헛기침을 했다.

“너무 서두르지는 마십시오. 반가운 얼굴들도 있을 터이니.”

그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우리는 헬하임의 중심부, 짙은 잿빛의 궁전에 닿았다.

엘류드니르의 거대한 정문이 갑작스런 죽음처럼 소리 없이 열렸다.

* * *

화려함은 없었다.

하지만 고급스러움이 서려 있었다.

황금빛이 찬란한 곳은 아니었지만, 짙은 회색으로 꾸며진 궁전 내부는 황금과는 다른 아름다움을 뿜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헬의 두 하인을 모두 만나는 영광을 얻었다.

“여보! 왜 이렇게 늦었어요? 네? 여왕님께서 얼마나 기다리신 줄 알아요? 도대체 터미널까지 얼마나 걸린다고 한세월이 걸리냐구요. 여왕님이 목이 빠지실 뻔하셨어요! 아, 그건 농담이에요. 여왕님은 언제나 고귀하고 기품 있으시거든요.”

강글로트는 이 궁전의 집사장이라고 한다.

집사라고 하면 보통 남자를 떠올리지만, 아무래도 모시는 주인의 성별이 여성이다 보니 여집사가 더 편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여자는 아무래도 집사에는 어울리지 않는 거 같은데.

말이 이렇게 많아서야…….

고개를 저었다.

“아참! 오디슨 님? 여왕님께서 기다리세요. 자! 서두릅시다!”

강글로트는 서두르자 하면서도 이런저런 잡담을 계속했다. 걸음을 걷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말을 거는 탓에 나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헬하임의 여왕인 헬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녀가 얼마나 고생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덕에 내 머릿속의 헬이 훨씬 더 부드러운 인상이 되었다.

단순하게 말이 많아서 집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던 내 말은 무의미해졌다. 주인에 대한 긍정적 생각을 주인을 만나기 전부터 심어 주다니.

강글로트는 굉장히 훌륭한 집사였다.

“자, 그러면 들어가세요. 호호.”

“…그냥 들어가면 되는 건가? 뭐… 어디의 누구가 입장하십니다, 하는 건?”

“어머, 예식에도 식견이 밝으셨군요. 하계에서는 그런 짓을 꽤나 한다고 들었지만… 여기에서는 그렇게 겉멋 들고 불편한 짓을 할 이유가 없어요. 왜냐면…….”

강글로트가 빙그레 웃었다.

“이 궁전의 주인께서는 그 자체로 고귀하시니까요.”

자신의 품위를 꾸며 내야 하는 하계의 왕들과는 다르다, 이건가?

비다르를 뵐 때도 사실 그러했지. 별다른 절차가 없었다.

그 당시에는 얼어 있어 이상하다고 못 느꼈지만.

“과연. 알겠소.”

어전으로 발을 딛는데, 이라호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예요?”

“발키리님은 따로 대기하시죠?”

“…전 오디슨의 담당 발키리거든요?”

“그렇다고 해도…….”

강글로트와 이라호드가 서로 기싸움을 했다.

그것도 잠시였다.

“강글로트, 오게 두거라.”

서늘한 한기가 느껴지는 목소리.

강글로트가 몸을 멈췄고, 이라호드가 슬쩍 눈치를 살피고 내 뒤에 따라붙었다.

나는 어전의 문을 지나쳤다.

손톱으로 이뤄진 왕좌, 그곳에 죽음의 주인이자 죽음 그 자체가 앉아 있었다.

주술사들의 말처럼 그녀는 절반은 검고, 절반은 살색이었다.

검은 드레스에 검은 머리칼을 늘어뜨린 그녀는 가녀리지만, 눈길을 뗄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서늘한 한기가 느껴지는 얼굴은 험악하다기보다는 슬퍼 보였다.

“…오디슨.”

그녀가 말을 걸기 전까지, 나는 그녀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헬이 나지막이 나의 이름을 불렀을 때, 나는 비로소 무례를 저질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 그, 무례를…….”

“아니, 당신은 그래도 돼.”

어째서?

나는 눈을 끔뻑였고, 헬의 시선은 이라호드에게 닿았다.

이라호드는 그 시선에 곧장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다.

“망자들의 주인이시며, 세계를 유지하시는 고귀한 죽음 여왕께 미천한 발키리가 인사 올립니다.”

“응, 오랜만이야.”

짧은 인사에 싸늘한 공기가 어전을 가득 채웠다.

크흠, 꽤 불편하군.

“그, 나를 어찌 찾으셨소?”

“언제나 주시하고 있으니까.”

“아, 음…….”

아무래도 헬은 말을 잘하는 편은 아닌 모양이었다. 머쓱한 표정을 짓자, 헬이 입을 몇번 벙긋거리다 말을 꺼냈다.

“…멀리서 오느라 고생했어. 일단… 식사부터 할까?”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이라호드는 배를 쓰다듬으며 울상을 지었다.

그녀가 비프로스트에서 야금야금 먹은 게 적은 양이 아니었으니까.

낯선 흔들림에 그녀가 권하는 간식을 먹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근데 괜찮을까? 저승에서의 식사라니.

* * *

엘류드니르의 식사는 괜찮지 않았다.

지나칠 정도로 훌륭했다.

‘허기’라는 접시에 ‘기아’라는 나이프를 쓰는 식사라고? 그건 헬하임의 빈곤함을 강조하는 문구가 아니었다.

“으음! 이것 참… 대단하군!”

그 어떤 이도 허기지게 할 법한 음식이 접시에 담겨 나왔고, 그 어떤 이도 게걸스레 먹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훌륭한 맛을 자랑했다.

허기와 기아는 바로 그걸 의미한 게 아니었을까?

“입맛에 맞아?”

“물론이오! 내 평생, 이런 훌륭한 음식은 처음이외다!”

“후후…….”

적포도주를 마시며 웃는 헬.

싸늘한 얼굴에 스치는 웃음은 아름다웠다.

멍하니 그녀를 보자니, 그녀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흠흠, 그보다… 200시간이랬나?”

“아, 말이 200시간이지… 실제로는 좀 더 준다고 들었소.”

“그렇지. 그런데… 딱히 줄일 필요가 있을까?”

그 말에 나는 눈썹을 구겼다.

“그게 무슨 뜻이오?”

“그냥, 휴가 왔다고 생각하고 지내도 돼.”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순 없소.”

“어째서?”

“나는 전사니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러고 싶지 않았다.

싸움을 앞두고 도망친다니, 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였다.

“전사라…….”

“이 세계를 좀먹는다는 찌꺼기를 치워 버리고 싶은 생각도 있소. 전사는 지키는 자요. 그리고 나는 라그나로크에서 이 세계를 지키기 위해 발할라로 가고자 했소. 발할라에 닿은 내가, 라그나로크를 일으킬 놈들을 앞두고 휴가를 즐긴다?”

있을 수 없는 일이외다.

내 말에 헬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들을 과연 찌꺼기라고 불러도 되는 걸까?”

“그게 무슨 소리요?”

“…글쎄, 직접 보면 알걸……?”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직접 볼 텐데, 괜한 선입견을 가질 필요는 없으리라.

당장 가서 보고 싶어졌다.

엉덩이를 들썩이자니, 헬이 나의 마음을 눈치챘다.

“바로 전장으로 가고 싶은 거야?”

나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세계의 찌꺼기는 과연, 헬의 말처럼 찌꺼기라고 평가하긴 힘든 모습이었다.

약간은 뒤틀린 모습. 하지만 동시에 내가 발할라에 닿은 뒤에 겪은, 그 어떤 이들보다 올곧은 자였다.

“비열한 놈들! 나와 겨룰 전사는 없는가! 신의 품에서 썩어 문드러지는 자들이여! 진정한 전사는 없는가!”

거대한 덩치에 팔이 네 개 달린 남자가 외쳤다.

불독의 얼굴을 한 괴물. 하지만 그는 내가 발할라에 와서 본 이들 중 가장 전사다운 남자였다.

“안 돼! 피해!”

“아아아악!”

니플헤임의 일꾼들이 그의 칼날 앞에 쓰러졌다.

불독 얼굴의 전사는 일꾼들이 실어 나르던 시체를 보고 으르렁거렸다.

찌꺼기의 시체. 그는 그 시체의 눈을 감겨 주고서 외친다.

“네까짓 것들이 그래서 발할라에 가지 못한 것이다! 발할라의 전사라 할지라도 비열한 건 마찬가지겠지만!”

저자는 신성모독을 입에 달고 있지만, 진짜 전사였다.

창을 꽉 쥐었다.

그리고 앞으로 나섰다.

“발할라의 전사를 찾는가, 비겁한 자여!”

“하! 비겁? 신들의 품속에 있는 너희들만 할까! 신에게 모든 걸 맡기고 생각하기를 그만둔 자들! 신의 시대를 접고, 인간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인간도 아닌 것이 인간의 시대를 운운하는군.”

“신의 저주가 내 모습을 바꿨다 할지라도, 나는 인간이다! 신에게 기대지 않는 인간!”

신에게 기대지 않는다, 라.

나쁘지 않다. 하지만 나는 그 모습이 마뜩찮았다.

내가 신앙심이 투철해서? 아니다.

“허! 전사가 되어, 피하기만 할 뿐이구나.”

“뭐라?”

“인간의 시대가 되면 뭐가 다르지? 신의 자리에 왕이 들어서는 것뿐이지 않는가! 그리고 그 왕들이 자신을 신이라 부르게 되리라!”

창을 들어 올렸다.

“진정으로 지배받는 게, 속박되는 게 싫다면 인간의 시대를 여니 마니 할 것이 아니다.”

“말도 안 되는 궤변! 인간은 인간의 뜻으로…….”

“속박이 싫다면, 지배가 싫다면! 정면에서 싸워라!”

바닥을 박차고, 놈에게 달려들었다.

놈이 흠칫 놀라 네 자루의 칼을 치켜들었다.

“싸우고 싸워서 신의 자리를 빼앗아라! 모두를 내려다보는 자리에 올라, 세상을 바꿔라!”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저자의 생각이 틀렸다곤 하지 않겠지만…….

“진짜 전사라면……!”

전사답지 못한 태도다.

전사는 기대지 않고, 피하지 않으며, 제 뜻을 관철시켜야 한다.

그런데 이놈은 뭔가?

무리에 기대며, 신과의 정면 승부를 피하며, 꼬마처럼 떼쓰고 있지 않은가!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과 싸우고, 싸우고, 싸워서! 이겨 내도록 하라!”

말로만 인간의 시대를 운운하지 말고.

힘없는 이들을 노리지 말고, 차라리 신을 노려라.

무리를 꾸려 덩치를 불리려 하지 말고, 달려들어 목덜미를 깨물어라.

그 와중에 부딪혀서 깨진다고 할지라도, 그게 바로 전사의 숙명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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