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13화. 영웅은 피하지 않는다 (3)
“오, 오오오! 피할 줄 알았건만!”
손오공이 흥분해 외쳤다.
피할 줄 알았건만, 작고 날카로운 단검을 무려 창촉으로 막아 냈다.
눈이 좋다는 건 진작 알았지만, 언제 저렇게 몸놀림까지 좋아졌단 말인가!
손오공은 주먹을 꽉 쥐고 침을 꼴깍 삼켰다.
단검이 막힌 야른시다는 당황했다.
[어떻게……?]
직선으로 달려들면 녀석이 피할까 싶어 페인트를 섞었다.
좌우로 몸을 움직이고, 눈을 속인 뒤 곧장 뛰어들었다. 그런데 가볍게 막아 낸 것이다.
단검보다 훨씬 다루기 복잡한 창의 끝으로!
[굉장히 빠르긴 하군.]
오디슨의 말에 야른시다가 입술을 짓씹었다.
우연일 거다. 우연이어야만 한다. 그는 계속해서 스스로를 달랬다.
‘‘천둥소리’는 눈으로 따라잡을 수 있는 속도가 아냐.’
공기의 흔들림으로 파악했나? 아니다.
천둥소리는 공기의 저항을 무시하는 축복이다. 무식한 속도를 내면서 공기에 부딪힌다면 오히려 시전자가 박살 난다.
신의 축복은 물리 법칙을 무시한다.
야른시다가 거리를 벌리고 눈을 굴렸다.
오디슨이 쯧쯧 혀를 찼다.
[전사가 겁을 먹다니!]
[빌어먹을, 그놈의 전사 타령!]
야른시다가 짜증을 부리고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콰르릉! 선명하기 그지없는 소리와 함께 맑은 쇳소리가 난다.
채앵!
야른시다가 던진 단검이 오디슨의 창에 튕겨 나왔다.
창대마저도 스테인리스기에 가능한 수법이었다.
[제길… 이봐, 협공한다.]
[야른시다? 정말로, 협공하겠다고? 경기 전에는…….]
[상황이 바뀌었잖아!]
야른시다가 파트너를 다그치고, 협공이 시작됐다.
손오공은 인상을 와락 구겼다.
“저, 저 비열한 놈! 기습으로 하나를 처리하고 협공이라니!”
좌우로 나뉜 둘이 오디슨을 덮쳤다.
야른시다는 단검을 화려하게 놀렸고, 그의 파트너는 묵직한 망치를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협공의 기본도 안 된 공격이었다. 하지만 좌우에서 쇄도하는 공격은 그 자체로 위협적이었다.
오디슨은 창대로 단검을 쳐내며, 묵직하게 날아오는 망치를 주먹이나 발을 이용해 밀어냈다.
묵직한 힘이 담겨 있는 만큼, 밀어낼 때마다 몸이 흔들렸다.
그런 자잘한 빈틈이 단검을 허용했다.
“으음!”
손오공이 인상을 구기며 화면을 노려보았다.
그런 와중에도 신계 연맹 커뮤니티에서는 오디슨의 경기에 대한 글이 넘쳐났다.
[비다르: 봤음? 지금 내가 후원한 신발로 막은 거 봤지? 어?]
[로키: 찌질한 새끼…….]
[아폴론: 저 새끼 저거 칼리돈이랑 싸울 때도 저렇게 싸우지, 망할 놈.]
[아르테미스: 오빠 좀 닥쳐, 제발…….]
[아폴론: 아 왜;;;]
오디슨의 몸에 생채기가 잔뜩 생겼다. 제법 깊은 상처도 있었지만, 오디슨은 여전히 치명상을 피해 냈다.
그렇게 되자, 마음이 급해지는 것은 야른시다다.
[큭!]
신의 힘이라 할 수 있는 속도를 마음껏 꺼내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대가로 고통이 뒤따랐다.
하지만 아프다고 아끼다간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야른시다는 재차 ‘천둥소리’를 시전했다. 그는 몸이 박살 나는 고통에 비명을 토했다.
[크어어억!]
콰르릉!
우렁찬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사라졌다.
[쯧쯧, 또?]
오디슨이 이제껏 밀어내던 망치를 숙이며 피했다. 그리고 그 망치의 궤적이 향하는 곳에 야른시다가 튀어나왔다.
단검을 목에 박아 넣으려 뛰어든 탓이다.
[어, 어어!]
[컥!]
쿵! 아군의 공격을 맞은 야른시다가 바닥을 나뒹군다.
야른시다의 파트너는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다.
투기장에서 당황하지 않은 것은 단 한 사람이었다.
[싸움을 앞두고 한눈팔지 마라!]
쐐애애액!
오디슨의 외침과 함께 창이 날아들었다.
야른시다의 파트너가 흠칫 놀라 망치를 가로로 들어 창격을 막으려 하지만…….
퍼억!
[끄르륵……!]
창은 마치 뱀처럼 망치 자루를 교묘하게 피해 그 목을 꿰뚫었다.
피거품을 내뿜으며 꼬꾸라지는 투사.
오디슨은 바닥을 구르는 야른시다 곁으로 다가섰다.
야른시다가 신음을 뱉으며 묻는다.
[어떻게 피했지……? 안 보일 텐데…….]
오디슨이 눈을 끔뻑이더니, 창을 번쩍 들어 올렸다.
[보이던데.]
야속한 말이었다.
야른시다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그가 손을 들며 외쳤다.
[항복!]
[항복할 생각 하지 말라며?]
[어, 어억! 끄아아악!]
오디슨은 항복을 무시하고 야른시다의 머리통에 창을 박아 넣었다.
야른시다가 그대로 쓰러져 부들부들 떨었다.
툭 내뱉은 그 말에 TV를 보던 손오공이 부르르 떨었다.
U500에서 나올 수 없는 경기였다. 그런데도 한다는 말이 뭐?
“재미없다? 재미없다고오?! 끽끽! 우끼끼이이익!”
펄쩍펄쩍 뛰며 난동 부리는 손오공.
그 말이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었다.
“젠장! 저 새끼, 진짜 괜찮은 놈이잖아?! 저렇게 눈이 좋은 놈이… 내 여의봉을 쓴다면?”
반대였다.
꿀꺽 침을 삼킨 손오공이 허리춤에 걸어 둔 면봉 크기의 여의봉을 만지작거렸다.
투선이되 싸울 수 없는 그는 대리만족을 얻고 싶었다.
“…빌어먹을 발할라 후원 제도. 왜 신물(神物)을 못 보낸다는 거야?”
사실 발할라에서는 신물을 받고 싶었지만, 다른 신계에서 막은 거다. 손오공 같은 놈이 튀어나올까 봐 말이다.
어떻게 하면 여의봉과 비슷한 느낌의 물건을 사용하는 걸 볼 수 있을까?
손오공의 뇌리에 한 가지 방법이 번뜩였다.
“저팔계! 야! 저팔계! 이 돼지 새끼야!”
크게 고함을 치자, 초가집의 지붕이 들썩일 정도였다. 바로 옆방에 있는 동생을 부르는 거라곤 상상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꿀꿀, 왜 그랭, 사형.”
“너, 태상노군 영감쟁이랑 친하지? 응?”
저팔계가 고개를 갸웃했다.
“태상노군은 왜 찾앙? 형 그 영감 싫어하자넝!”
“이 자식이, 형 말에 토를 달기는 왜 토를 달아! 어쨌든!”
“꿀꿀, 난 체해도 토하지 않는 사람이양!”
후우- 한숨을 내쉰 손오공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언젠가 태상노군에게 들은 말을 살짝 바꿔 말했다.
“야! 네가 사람이냐? 돼지지!”
“꿀꿀! 반인반수니까 사람 아닌강?”
저팔계의 말에 손오공이 멈칫했다.
저팔계는 본래 선계의 장군이었는데 술에 취해 월궁항아를 덮치려다 지상으로 추방당했다. 그리고 그때 돼지의 태내로 들어가는 바람에 돼지 인간이 되어 태어났다.
즉, 저팔계는 사람이었다.
“젠장할!”
“그보다 태상노군은 왜 찾앙?”
“…그 영감쟁이, 너랑 친하지? 상보심금파를 만들어 줬잖아.”
“아무래도 사형보다야 친하징?”
“그럼 그 영감… 분명 팔괘로를 가지고 있단 소리지?”
팔괘로(八卦爐). 태상노군의 보패다.
단약을 구워 내는 화로지만, 팔괘의 기묘한 힘으로 신물을 생산해 낼 수도 있다.
저팔계가 지닌 쇠스랑, 상보심금파가 바로 팔괘로에서 만들어진 물건이다.
“그야 당연하징. 그 양반 보패(寶貝, 보배)인데.”
손오공이 진중한 태도로 말했다.
“훔치자.”
개소리, 아니 원숭이 소리였다.
신물인 여의봉을 보내지 못한다면, 신물을 복제해 보내겠다는 생각이 어떻게 팔괘로를 훔치자는 생각이 된 걸까?
오직 손오공만이 이해할 수 있는 논리 구조였다.
* * *
“까악! 대단했다, 까악!”
“뭐, 그리 대단할 것도 없더만…….”
“도대체 어떻게 ‘천둥소리’를 파악한 거냐!”
어깨를 으쓱이고 똑같은 소리를 다시 한다.
“보이던데.”
메르키가 눈을 끔뻑였다.
“내 눈에도 안 보이는 게 네 눈에는 보였다고?”
“아니, 몸이 보인 게 아니라, 바닥에 발자국이 갑자기 툭툭 생기던데.”
내 말에 메르키가 입을 쩍 벌렸다.
“거의 동시에 생기는 그걸 보고 알아챘다고?”
“동시에 생긴다고 해도 발에 힘주는 방향에 따라서 발자국이 달라지잖아.”
“그걸 한순간에 파악해서 궤도를 알아챈다고오……?”
그리 말하니 굉장히 복잡한 느낌이다.
눈살을 구기고 고개를 저었다.
“그냥 그것까지 포함해서 감이 잡히더라고.”
“…‘복수의 눈’ 때문인가?”
어? 그러고 보니 그것 때문인가?
확실히 내가 눈이 좋긴 하지만, 눈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파악하기엔 너무 대단한 일이긴 했다.
대단하다는 감각이 없어서 그렇지. 메르키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럴지도. 그보다 그게 그리 대단한 일인가?”
“당연한 소리! 이제까지 U500에서 야른시다를 이기고 O500으로 간 녀석들은 모두 피부를 단단하게 하거나, 회복력을 잔뜩 높여 야른시다의 과부하를 유도했다! 정면에서 ‘천둥소리’를 깬 U500 투사는 네가 처음이다!”
다다다닥! 까마귀가 아니라 딱따구린가 싶을 정도로 말이 쏘아졌다.
눈을 끔뻑이고 있자니, 그 말의 숨은 의미가 파악되었다.
“…그러니까, 즉…….”
히죽, 웃었다.
“더 높은 쪽에서는 야른시다의 ‘천둥소리’를 피해 내는 놈들이 많다?”
“깍? …그건 그렇다.”
메르키의 말에 심장이 뛴다.
야른시다가 생각보다 쉬웠기에 더 그랬다. 만일 그가 상대를 죽이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면 천둥소리를 그런 식으로 쓰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이그나르를 상대할 때의 돌진이 가장 위협적이었다.
겉멋 든 단검술. 화려하고 동작이 크지만, 그다지 위력적이진 못한 단검술.
아마 제 스스로 돋보이기 위해 만들어진 단검술이리라.
전사라는 놈이 광대짓을 하니, 당연히 약할 수밖에.
하지만 상위권은 다르다.
야른시다와는 비교도 안 될 강자들이 수두룩하리라.
꿀꺽 침을 삼키고 입을 여는 순간, 메르키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니다.”
“…뭐? 제일 세단 놈을 이겼는데?”
“투사 중에서야 그렇지.”
까악! 소리친 메르키가 낄낄 웃으며 말했다.
“오히려 괴물 중에서 너와 상성이 나쁜 놈이 있다. 그놈을 이겨야 지나치게 빠른 승급에 대한 질책이 없을 거다!”
“오호라. 나와 상성이 나쁘다고? 대체 어떤 놈이길래?”
“흐흐, 그건 그때의 즐거움으로 남겨 두지. 그보다…….”
힐끔 메르키가 대기실 입구 쪽을 살폈다.
왜 그러지? 고개를 갸웃거리고 대기실 입구를 바라보니…….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오! 이라호드… 오늘 자주 보는군. 날 축하해 주러 왔나?”
내 담당 발키리, 이라호드다.
낮에도 봤는데, 또? 아무래도 내 화끈한 싸움에 매료된 게 아닐까?
히죽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서자,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오디슨.”
아니, 어떻게 된 게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한숨을 입에 달고 사는 걸까?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한숨은 복을 달아나게 한다더군. 웃으며 살지, 그래? 그쪽이 더 예쁘기도 하니.”
“이런 상황에서 성희롱이라니, 쯧.”
이런 상황? 어떤 상황?
눈을 끔뻑이고 있자니, 이라호드가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철컹- 하는 쇳소리가 들렸다.
반짝이는 은빛 팔찌가 고급스러워 보인다.
* * *
언제나 싸늘한 니플헤임. 오늘은 조금 달랐다.
갑자기 엄청나게 바빠졌다.
발할라의 수천, 수백 배 규모의 망자(亡者)들이 기거하는 얼음의 땅에 훈풍이 불어닥쳤다.
“서둘러라!”
“어서 움직이지 못할까?!”
갑작스레 다그치는 감독관들. 니플헤임의 망자들은 겁을 먹고 움츠러들었다.
개중에는 물푸레나무 부족 사람들도 있었다.
“토르손, 이게 무슨 일이라니?”
“아, 아슬라 아줌마.”
덩치는 크지만 얼굴은 너무 순박한 남자, 토르손이 자재를 옮기다 말고 어깨를 으쓱였다.
볼을 긁적이더니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게 아슬라 아줌마의 귓가에 속삭인다.
“저도 깜짝 놀랐는데요, 그 국서라는 양반이 온대요.”
“국서? 국서가 뭔데?”
“그게… 여왕의 남편요.”
아슬라 아줌마의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어머머- 어머머! 연이어 탄성을 내뱉은 아슬라 아줌마가 짝! 토르손의 등짝을 때렸다.
“어머! 어머머! 어쩌니, 어째!”
“으, 아파라… 왜 그래요, 아줌마?”
“으휴! 이 바보 같으니. 네가 그러니까 영 인기가 없지. 오디슨이라면 바로 알아들었을 텐데! 여왕님이 얼마나 콩닥콩닥 하실까! 그분의 남편이 되실 분이 대체 누구실까? 응? 궁금하지 않니?”
오디슨이라는 이름에 토르손의 얼굴에 우울이 감돌았다.
순박한 눈가에 습기가 차올랐다.
‘…대장, 대장은 여전히 제국과 싸우는 중이야?’
이제껏 니플헤임을 다 뒤졌지만, 결국 울프헤딘의 대장이었던 오디슨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제국과 여전히 싸우고 있는 걸까? 얼마나 힘들까.
토르손은 오디슨을 홀로 두고 니플헤임으로 온 자신의 처지가 처량했다.
“…토르손? 얘, 토르손! 쯧… 이 아줌마가 잘못했어. 또 오디슨 생각하니?”
“네, 오디슨 대장이라면 잘 해낼 것 같지만…….”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눌 때, 지옥의 관리인이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오디슨? 지금, 오디슨이라고 했나?”
갑작스러운 말에 두 사람이 흠칫 굳었다.
지옥의 관리인들은 모두가 노예 관리인이다. 얼음 조각이 붙은 채찍을 휘두르는 감독관.
얼음 채찍에 맞은 적은 없지만, 맞는 사람은 보았다. 살점이 뜯겨져 나가고, 뼈가 훤히 보일 정도로 위력적이다.
“크흠! 묻지 않나!”
토르손이 눈을 데굴데굴 굴릴 때, 아슬라 아줌마가 대뜸 대꾸했다.
“오디슨은… 우리 옆집에 살던 얘예요. 그 애 생각이 나서 그만…….”
“흐음, 너희 부족이 물푸레나무 부족은 아니겠지?”
“어?”
아슬라가 깜짝 놀라자, 관리인이 흠칫 몸을 떨었다.
설마- 하는 마음에 입술을 달싹인다.
“…물푸레나무 부족의 붉은 늑대, 오디슨?”
“어어어?”
토르손과 아슬라 아줌마가 입을 쩍 벌렸다.
지옥의 관리인이 그 이름을 대체 어떻게 아는 거지?
토르손이 당장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대장, 대장이 어디 있는지 아는 겁니까?!”
“어, 어어! 이 손 놔! 놓으라고!”
곰만 한 덩치가 갑자기 자신을 붙잡자 놀라 관리인이 그 손을 떨쳐 냈다.
하지만 토르손과 아슬라 아줌마의 간절한 눈빛을 떨쳐 낼 순 없었다.
결국 그가 입을 열었다.
“크흠! 오디슨은… 이제 곧 올 거다.”
그 말에 토르손과 아슬라 아줌마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결국, 오디슨마저 이 차가운 지옥으로 오는가! 두 사람은 오디슨에게 미안해 차마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크흡, 대장……!”
“아이고! 오디슨, 아이고오!”
괜한 오해였다는 게 밝혀지기까지는 한참이나 시간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