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그 오브 발할라-9화 (9/208)

# 9

9화. 영웅은 멈추지 않는다 (2)

“가름의 가죽을?”

메르키가 힐끗 시체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본래 가죽을 얻을 때에는 어지간하면 창을 쓰지 않는다. 아무래도 창으로 사냥하면 가죽이 상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지금 가름의 가죽 역시, 상당히 상한 상태다.

어차피 좋은 가죽으로 뭔가를 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음, 케이프(Cape, 단망토)를 만들고 싶은데.”

“케이프라. 그러면 머리까지 깔끔하게 벗겨 내는 게 좋겠군. 아무래도 그쪽이 낫겠지?”

고개를 끄덕였다.

메르키가 깍깍 웃더니 탁탁- 날개로 날 쳤다.

“그보다 얼른 씻으러나 가. 지금 꼴이 엉망이니.”

“…목욕탕이 그리스식은 아니겠지.”

“깍깍! 로마식도 아니니, 걱정 마라!”

승리 수당이 든 가죽주머니를 받아 수배해 뒀다는 목욕탕으로 향했다.

가죽주머니가 꽤 묵직해서 슬쩍 열어 봤더니, 황금빛이 번쩍인다.

하나둘셋……. 천천히 금화를 셌다.

“…21만 크로나?”

떨떠름한 표정으로 금액을 말하고, 다시 세었다.

아무래도 잘못 준 게 아닌가- 싶었다. 그렇지만 뭐 어떤가.

“메르키가 잘못한 거지 내가 잘못한 게 아닌데.”

흐흐- 웃음과 함께 목욕탕에 들어섰다.

목욕탕은 내 불안감을 단번에 날려 버리는 건전한 업소였다.

제대로 운신할 수는 있을까 싶은 영감이 가게를 보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낯익은 목욕 문화가 날 반겼다.

사우나.

증기를 쬐고 물을 끼얹는 방식이다. 로마나 그리스처럼 타인이 목욕 시중을 들어 주는 일은 없다.

뜨끈한 증기에 그간 쌓인 피로가 풀린다. 세흐림니르의 고기를 잔뜩 먹어 회복력 자체는 굉장히 좋아졌다. 하지만 그걸로도 해결되지 않는 피로가 있었다.

정신적인 무언가인가?

“눈이 있었더라면 좋았을걸.”

후끈한 몸에 물을 끼얹으며 생각했다.

고향에서는 사우나를 하고 난 뒤에 몸에다 눈을 뿌렸다. 부족의 아이들이야 덥다, 덥다 하다가 차갑다, 차갑다 하며 도망치기 바빴지만, 익숙해지면 참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걸 보며 부족의 노인들이 껄껄 웃고, 부족의 여인들도 꼬마들의 탱탱한 엉덩이를 보며 놀리곤 했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차가운 걸 그리 싫어하던 녀석들이… 니플헤임의 서릿바람을 견딜 수 있을까?”

가슴 한편이 쓰라렸다.

빌어먹을 제국 놈들.

사우나를 마치고, 옷을 걸치다 멈칫했다.

웃옷은 피와 땀, 그리고 흙먼지로 엉망이 된 데다 훈련 도중 여기저기가 찢어졌다. 사우나를 하며 빨고 말렸지만, 핏물이 제대로 빠지지 않았다. 게다가 훈련 도중 낡고 찢어진 옷은 고칠 방법이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옆집 살던 아슬라 아줌마가 언제나 옷을 고쳐 줬다.

그때, 아줌마가 하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선명하다.

‘얼른 여자 하나 낚아채서 결혼해. 허우대도 멀쩡한 전사가 마을 처녀 가슴팍에 불만 지피고 다니지 말고! 그게 우리 딸이면 더 좋고. 후후.’

아줌마는 딸을 껴안은 채 제국군의 창에 찔려 죽었다. 철통같이 지키던 딸이지만, 제국군의 창을 막기에 아줌마의 몸은 너무 부드러웠다. 모녀를 한 번에 꿰어 놓은 모습을 보고 얼마나 분노했던가.

지금도 손이 떨린다.

고개를 저었다.

복수의 기회가 있다면 모를까, 발할라로 온 내게는 하계에 관여할 수단이 없었다.

“…이건 버려야겠군.”

바지의 상태도 영 아니지만, 그래도 상의보단 낫다.

속옷과 바지만 입고 목욕탕을 나선다.

멍하니 앉아 있는 영감을 보고 말을 걸었다.

“이보시오, 노인장.”

“으응? 왜 그러나?”

“대장간이 어디에 있지?”

내 말에 영감이 손가락을 쭉 뻗는다. 목욕탕 출구 쪽이다.

“가게를 나가서, 쭉 걸어가면 곧장 공방거리임세.”

“그렇소? 고맙수다.”

“…그런데 그 꼴로 거리로 나가는 건가?”

나를 보며 말하는 영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 될 게 없지 않은가? 영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도 젊을 적에는 저랬는데…….”

그 말에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젊음이 넘치는 이 몸을 보고 왕년을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끼익- 문을 열고 나섰다.

“한 번 공연음란죄로 잡힌 후로는…….”

나지막한 영감의 회한 어린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 내용은 알 수 없었다.

뭐, 흔히 있는 노인들의 수다이리라. 왕년에는 말이야- 하는 믿을 수 없는 소리들.

“…부족의 노인들도 왕년에는 모두 전설적인 전사였지.”

피식 웃고 걷는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오디슨! 그 외침에 고개를 돌리자, 불쾌한 얼굴이 보였다.

“정말 대단하더군!”

“…이그나르.”

얼음도끼 이그나르.

전사의 긍지를 팔아먹고 내게 바가지를 씌운 놈이다.

“이그나르! 이 염치없는 장사치 같으니!”

“어, 어어?! 뭐, 뭐야!”

나는 냅다 이그나르에게 덤벼들었다.

퍽! 내 주먹이 놈의 얼굴에 처박혔다.

“억! 이 자식이……!”

이그나르가 주먹에 맞고 흐르는 코피를 닦아 냈다.

“피?! 너 이 새끼!”

그가 인상을 와락 구기더니 달려들었다.

막싸움이 시작되었다.

* * *

과연 전설 속의 전사라는 걸까?

이그나르의 주먹은 매서웠다. 하지만 난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이그나르가 ‘으악! 항복’ 하고 외쳤다.

이 투닥거리는 싸움의 승리는 내 몫이었다.

“정의는 승리한다!”

“정의는 개뿔……! 퉷!”

피를 뱉은 이그나르가 내게 삿대질했다.

“이 무식한 놈… 갑자기 무슨 짓이야?!”

시퍼렇게 멍든 눈을 붙잡은 채 투덜대는 이그나르.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나에게 바가지를 씌우고 무사할 줄 알았더냐?”

“젠장! 바가지라니! 내가 이래 봬도 엄청나게 정직한 사람이라고!”

흥! 웃긴 소리.

“정직하다는 놈이 양도 적고, 가격도 비싸게 받아?”

“뭐라고? 주변에 우리 집보다 싼 데가 어딨다고!”

“투기장!”

내 외침에 이그나르가 눈을 끔뻑였다.

역시 할 말이 없겠지.

“투기장 식당의 세흐림니르 수육은 5천 크로나였다!”

“…그걸 먹었다고? 너 괜찮냐?”

“흥! 투기장의 음식이 안 좋은 거라고 속일 셈인가?”

“아니, 그게 아니라 투기장에 있는 암묵적인 룰 중 하나거든.”

세흐림니르 수육은 시키지 마라.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눈살을 살짝 구겼지만, 문득- 그 메뉴를 주문할 때마다 흠칫 놀라던 주방 아줌마들이 떠올랐다.

날 놀란 눈으로 쳐다보던 투사들의 얼굴도 생생히 기억난다.

“…음, 별다른 이상은 없던데…….”

“맛은 괜찮든?”

“맛이 없기야 하지만… 어차피 회복력을 얻으려고 먹는 거 아닌가?”

내 말에 이그나르가 아이고- 하고 고개를 저었다.

“회복력을 얻으려고 먹으면, 뭐… 참고 먹을 수도 있겠지만. 기왕이면 맛있는 게 좋지, 자식아.”

“전사가 되어서 식사 투정이라니……. 믿을 수가 없군.”

“그게 투정이라고 할 정도였나? 어쨌든 투기장이 싼 건 당연한 거야. 그쪽에서는 자기네들이 도축해서 파니까. 게다가 최하급 투기장에서 파는 세흐림니르 고기는 제일 안 좋은 부위라고. 내 식당에서 파는 거에 비하면 원가가 반값도 안 돼!”

투기장 식당이 싼 것과 직접 도축하는 게 무슨 상관이지?

본래 고기는 직접 도축해서 먹는 거 아닌가? 이그나르의 억울한 표정에 마음이 흔들린다.

…저놈은 나쁜 놈인데…….

“젠장할. 아직까지 자본주의 마인드가 안 박혔군.”

“자본주이? 뭐?”

“으휴, 함부로 폭력을 쓰는 거에 대한 참교육을 해 줘야 하는데……. 쯧, 내가 아쉬운 쪽이니까, 오늘은 봐준다.”

이해하지 못할 말을 내뱉는 놈이다.

눈살을 와락 구기고 이그나르를 노려보았다.

“근데, 너. 여긴 어떻게 알고 왔지?”

“흥, 나도 투사였거든? 싸움에서 이긴 투사가 뭘 하는지 정도는 잘 안다고.”

목욕 아니면 여자지.

히죽 웃으며 말하는 이그나르.

전설 속의 전사이니만큼, 투사였다는 건 거짓말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막싸움을 할 때 느낀 바로는…….

“전사의 독기가 다 죽었던데.”

이그나르는 평화에 젖었다.

그가 한숨을 내쉰다.

“알아. 그래서 왔으니까.”

“…그래서 왔다?”

“그래. 멧돼지랑 싸울 때 기가 막히게 밟히는 것도 봤고, 고블린이랑 싸우는 것도 봤지. 그리고 오늘 경기도 봤고 말이야.”

이그나르가 머리를 벅벅 긁더니 말을 이었다.

“적어도 너는 중간에 포기할 것 같지 않으니까. 게다가 느슨해진 나도 너랑 같이 싸우면 옛날의 그 마음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말인데, 너…….”

잠깐 머뭇거리더니, 눈을 꾹 감고 말한다.

“나랑 듀오 짜지 않을래?”

듀오? 눈을 끔뻑이자니, 이그나르가 듀오란 것에 대해 설명한다.

2명이 한 조가 되어 투기 경기에 나가자는 소리라고.

“…어째서지?”

“그야, 아까도 말했잖아? 내 뭉툭해진 이빨을 날카롭게 하기 위해서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째서 다시 싸울 생각을 하느냐는 거다. 가게를 멀쩡히 내고 있다는 건, 딱히 싸울 필요가 없다는 의미더군.”

“…그거야 그렇지.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데에는 가게만 운영해도 충분해.”

“그런데 왜지? 왜 가게를 포기하고…….”

“가게를 포기하긴 무슨! 알바 쓸 거야!”

꽥!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지른 이그나르다.

그는 쯧- 혀를 차고 머리를 긁고, 괜히 주변을 둘러본다.

답답한 마음에 대답을 재촉하려 하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올 거야.”

눈을 끔뻑였다.

아내와 아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지?

“…설마, 니플헤임에 있는 이를 데리고 올 수 있단 건가?”

“그래, 돈은 좀 많이 깨지지만.”

그 말에 나는 문득 부족민들을 떠올렸다.

전사의 일이 적을 죽이는 거라면, 전사의 의무는 부족을 지키는 것이다.

나는 전사의 일을 잘했을지는 몰라도, 의무는 저버렸다.

그 책임감은 언제고 내 심장을 옥죄고 있었다.

그런데 이 발할라로 데리고 올 수 있다?

“…허.”

헛숨을 흘리자, 이그나르가 눈살을 구겼다.

“몰랐냐?”

“몰랐다. 어쩐지… 전사 같지 않은, 전사의 흔적도 없는 이들이 있더라니…….”

주방에 있던 아줌마들, 그리고 목욕탕의 영감.

둘 모두 평화에 젖어 전사로서의 면모가 풍화됐다고 여기기 힘든 이들이었다.

아예 흔적조차 없었으니까.

그런데 본래라면 니플헤임에 있어야 하는 이들이다?

침을 꼴깍 삼켰다.

아슬라 아줌마, 아줌마의 딸 라드게리타, 주술사 할배, 뒷집 꼬맹이들.

내 부하들, 토르손과 다른 울프헤딘들.

…삼촌, 그리고 어머니.

눈가가 후끈해지는 감각을 숨기려 얼굴을 구겼다.

그리고 이그나르의 멱살을 잡았다.

“어떻게?”

“젠장! 이것 놔 봐. 이 어리바리한 새끼한테 붙은 발키리는 대체 누구야? 이딴 기초도 안 가르치고 발할라에 풀어놓다니…….”

쯧, 혀를 찬 이그나르가 내 손을 떨쳐내고, 설명을 시작했다.

* * *

니플헤임의 사자들을 발할라로 데리고 오는 건 딱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비용이 많이 든다는 점을 제외하면 어려운 점은 없었다. 운명에 대한 값을 지불하고, 새로운 육체를 제공해야 한다.

새 몸의 가격은 5천만 크로나. 비싸다.

비싸지만, 새로운 몸인 만큼 납득하지 못할 금액은 아니다.

“육체의 가격은 그러려니 하겠지만…….”

쯧, 혀를 찼다.

내 운명의 값도 아직 지불하지 못했으니까.

데리고 오려는 이들이 나에 비견되는, 아니 나의 10분의 1이라도 되는 가격을 가지고 있다면?

죽어라 싸움을 해도, 부족민 전체를 데리고 올 순 없으리라.

“…영원한 싸움이 있는 곳이니 언젠가는 물푸레나무 부족의 모두를 데리고 올 수 있을까?”

이그나르가 혀를 내둘렀다.

“…부족 모두라니. 무식한 생각을 하는군.”

“난 무식하지 않다.”

“그래, 무모하다 하지.”

입술을 삐죽인 이그나르가 재차 투덜거린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이그나르에게 묻는다.

“그런데, 너와 듀오를 짜면 내게 무슨 이익이 있지?”

“그야…….”

이그나르가 어- 하고 말을 고른다.

“믿을 만한 동료가 생긴다?”

“꺼져.”

이놈을 믿느니, 로키를 믿지.

놈을 재치고 가려는데, 어깨를 붙잡는다.

힐끗 녀석을 보니, 떨떠름한 웃음을 지은 채다.

“고기, 고기를 좀 내주마.”

“좀?”

“…젠장, 훈련하는 동안 계속!”

히죽, 웃음을 지었다.

그 지독한 맛의 세흐림니르 수육을 안 먹어도 된단 거지?

“앞으로 잘 부탁하지.”

“젠장할 놈의 자본주의.”

그 이해할 수 없는 단어가 어쩐지 좋아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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