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5화. 영웅은 기대지 않는다 (1)
익숙해지는 게 두렵다.
살아 있음에 놀라워하는 기분이 없어질까 두렵다.
패배에 젖은 전사는 더 이상 싸울 수 없다.
“후우.”
삼촌이 그랬다.
삼촌은 한 번의 패배를 이겨 내지 못했다.
외팔이가 아니라, 외다리로도 전장에서 싸우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제 몸을 앗아간 패배에 이를 갈았다. 그들은 대단한 전사는 될 수 없었다. 그래도 지독한 전사는 될 수 있었다.
그러니 나는 차라리 지독한 전사가 되리라.
전쟁터에 심장을 맡긴 채 싸움을 찾아 떠도는 광전사가 되리라.
패배를 털어 내고 아드득 이를 갈았다.
이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정신이 들어요?”
“음, 신관님. 또 신세를 집니다.”
주사라는 것을 놓을 때마다 변태처럼 음흉하게 웃는 여신관.
그녀가 내 곁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렇게 멀쩡한 표정일 때는 참 예쁜 아가씨다.
“이라호드 양이 방금 전까지 있다가 갔어요.”
여신관의 말에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나 말고도 다른 이들도 담당한다 하던가? 미안해졌다.
바쁜 와중에 일거리를 늘렸군.
“그보다, 싸우는 거 봤어요.”
“아…….”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였다.
여신관이라고 한들 발할라에 오랫동안 기거한 이다. 싸움을 보는 눈이 없을 리가 없다.
내 욕심에 스스로 몸을 갉아먹고, 초록색 원숭이와 드잡이질 하는 추잡한 개싸움을 봤다니.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추잡한 싸움이었소.”
“킥킥, 오디슨 씨는 정말 그림으로 그린 듯한 전사네요.”
무슨 의미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할 때 여신관이 어깨를 으쓱인다.
“아직 하계 물이 안 빠졌다구요.”
“음…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소만, 그게 꼭 빠져야 하는 거요?”
“아뇨, 그럴 필요 없어요.”
여신관이 답지 않게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곳은 황금이 지배한다 해도 발할라니까요.”
투쟁과 야만의 땅. 여신관이 속삭인다.
피가 끓고 소름이 돋았다.
그래, 여긴 발할라다.
투쟁과 야만이 이를 드러내고 피를 갈구하는 곳.
내 방식은 틀리지 않았다.
“아, 그리고 이번에는 패배가 아니라 무승부예요. 수당도 전보단 좀 많을걸요?”
“음… 알고 계셨소……?”
“킥킥, 주먹을 꼭 쥐고 절대 안 푸는데 어떻게 몰라요? 에이르 병원에서도 사실 당장 금화 몇 개 얻자고 작은 돈에 달려들진 않아요.”
아까보다 더 부끄러워졌다.
* * *
11억 8천만 크로나. 3천만 크로나가 추가로 빚이 되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일이라.”
투기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건 흥분되고 재밌다.
하지만 비단 그것만으로 더 위로 갈 수 있을까? 미래에 대한 답답함이 심장을 옥죈다.
“일.”
무슨 일을 해야 하지?
내가 이그나르처럼 안면을 바꿔 가며 손님을 상대할 수 있을까?
손님이 왕이다, 로마 놈들에게도 친절해라. 그러면 널 직원으로 써 주겠다.
일자리를 구하러 다닐 때 들은 소리를 바탕으로, 이그나르에게 으스댔었다. 그에 이그나르도 곧장 말투를 바꿔 가며 날 상대했고.
애송이라도 손님이라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야 한다고?
힘들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터덜터덜 거리를 걸었다. 언제나처럼 낮이 아니라, 밤이었다.
가게들은 마법 램프로 휘황찬란하게 거리를 밝혔고, 거리의 사람들은 술에 취한 채 비틀거렸다. 거리의 구석에는 꾀죄죄한 거지꼴을 한 이들이 죽은 눈을 하고 주저앉아 있기도 했다.
저들은 이 발할라에 적응하지 못한 이들이다.
“…음.”
무심코 걷다 보니 유난히 화려한 마법 램프가 설치된 곳에 닿았다.
[여성 전용 힐라스 목욕탕]
남창이 여성에게 시중을 드는 창관이다.
음흉한 제국 놈들이야 저게 문화니 전통이니 으스대겠지만,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나라고 여자를 안아 보지 못한 건 아니다. 난 훌륭한 전사였고, 그 씨를 받고자 하는 이들이 부족에 수두룩했으니.
“뭘 그렇게 뚫어져라 봐요?”
“…크레네.”
싱그러운 물 냄새가 나는 여자.
풍만한 몸과 부드러운 미소가 공존하는 인간 같지 않은 느낌을 풍기는 여자다.
그녀가 어느샌가 내 곁에 서서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싸우는 거 봤어요.”
“후우… 그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은데…….”
“킥킥, 당신이라면 그럴 줄 알았죠. 근데 그거 알아요? 당신 생각보다 당신 싸움은 굉장했다는 거?”
굉장했다?
멧돼지에게 들이받혀 수십 차례 밟히고, 고블린과 투닥대다 상처 입은 눈에 흙이 들어가 피눈물을 흘린 게?
눈살을 구기고 크레네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보지 말아요. 놀리는 게 아니니까. 그나저나…….”
크레네가 나를 보더니 쯧쯧 혀를 찼다.
“외모를 꾸미는 데 관심이 없다는 건 알겠어요. 근데, 그 꼴은 좀 그렇지 않아요?”
“그 꼴이라니?”
“후우… 거울도 안 봐요? 고블린이랑 싸울 때 수염이고 머리카락이고 다 엉망이 됐잖아요. 쥐가 파먹은 것도 아니고, 그게 뭐야.”
덥석, 크레네가 내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냅다 제 가게로 나를 이끌었다.
창관이라니! 남창이 될 생각이 없는 나는 격렬하게 거부해야 했으나…….
“이리 와요, 응?”
하루 200만 크로나라면 세흐림니르 고기를 산더미처럼 쌓아 두고 먹을 수 있으리라.
문득 든 생각에 인상을 구기면서도 그녀의 손을 쳐낼 수 없었다.
* * *
외관만큼이나 내관도 화려했다. 황금빛이 번쩍이는 복도를 걸으며 나는 혀를 내둘렀다.
도대체 얼마나 돈을 잘 벌길래, 이렇게까지 화려한 건가!
제국을 떠올리면 납득이 되기도 한다. 그놈들의 전쟁에는 숱한 전쟁 상인들이 따라붙었고, 이러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여자들도 꽤나 있었으니까.
“화려하죠?”
“으음… 확실히.”
“근데, 지금 좀 큰일이에요. 아무래도 이쪽 문화권이 그렇게 고루한지 몰랐던 터라.”
적자가 상당히 쌓이는 중이거든요- 하고 크레네가 중얼거린다.
뭐, 남쪽에 있는 도시국가들이나 제국은 난잡한 문화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 쪽은 아무래도 좀 더 고루한 편이다.
특히나 여성에 대해서는 좀 더 그렇다.
그러고 보면 남자들은 첩을 들이면서, 여자들은 다른 남자와 말하는 것도 싫어하는 게 이상하긴 하군.
“자, 여기예요.”
“여긴?”
“뭐, 대기실이죠.”
그녀의 말처럼 의자가 줄지어 놓여 있고, 그 의자의 앞에는 커다란 거울들이 하나씩 있다. 침대처럼 보이는 것도 저 한편에 떡하니 있다.
투기장의 대기실과 비교하면 말도 안 될 정도로 좋은 곳이다.
“…나는 남창이 될 생각이 없소.”
“알아요, 알아. 아직은 이르죠.”
후후- 나지막한 웃음에 눈썹을 구겼다.
아직? 그럼 나중에는 내가 남창이 되겠노라 할 거란 말인가?
“자, 여기 앉아요. 머리랑 수염 좀 다듬어야죠.”
“…이게 의미가 있는 짓이오? 난 어차피 전사인데…….”
“전쟁이라면 무의미하겠죠.”
크레네가 거울을 통해 나를 살피며 말했다. 그녀가 말을 잇는다.
“하지만 당신이 주로 하는 건 투기 경기예요. 투사의 외모에 따라 인기가 나뉘고, 인기가 좋아지면 더 많은 관객이 들겠죠.”
“내 싸움은 언제나 오딘께서 보고 계시오.”
“킥킥… 그래요. 하지만 관객이 많아지면 투기장 수당이 늘어나는 거 알아요?”
사각사각, 어느샌가 꺼내 든 가위로 내 머리를 자르는 크레네.
엉망이 된 머리기에 아예 밀어 버릴까 고민한 나로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수당이 는다니?”
“투기장은 가장 잘 싸우는 투사에게 많은 크로나를 주는 구조기는 하지만… 가장 많은 크로나를 받아가는 건 가장 잘 싸우는 투사가 아니에요.”
“…그럼?”
“가장 인기 좋은 투사죠.”
크레네의 손길은 매우 잽쌌으며, 또 부드러웠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엉망이던 머리카락이 깔끔하게 정리되었으며, 수염이 천천히 깎여 나가는 중이었다.
마법 같은 솜씨에 눈을 깜빡이다, 이야기를 이었다.
“가장 인기 좋은 투사가 가장 많은 크로나를 번다고?”
“네, Top 100, 최상위 100번째 방까지, 그러니까 발할라 최고 투사 8만 명의 투기 경기 수당은 어마어마해요.”
“얼마나?”
“보통 Top 100 경기의 승리 수당이 억 단위일 걸요?”
헉- 숨을 들이켜자, 크레네가 ‘습! 너무 움직이지 말아요’ 하고 경고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어마어마한 수당에 놀라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크레네가 말을 잇는다.
“근데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돈을 버는 사람은 따로 있어요. 99번째 방의 여주인이라고 불리는 여자죠.”
“99번째 방이라면…….”
“네, Top 100의 하위권이죠. 하지만 그녀는 전투 발키리로서 굉장히 아름다운 미모를 가지고 있답니다? 그런 만큼 그녀의 경기에는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리죠. 그녀의 승리 수당은 최소한 10억 크로나일 걸요?”
10억 크로나.
내 운명을 비틀고, 에이르 신전의 신세를 지며 쌓인 빚이 순식간에 사라질 금액이다.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자, 크레네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수염을 싹 깎으니… 정말 잘생겼네요. 당신이라면 99번째 방의 여주인처럼 될 수도 있을 거예요.”
“…놀라운 일이군.”
“물론, 좋은 토대가 있어야겠죠? 우리 가게에서 일을 하는 건, 그 좋은 토대가 될 수 있어요.”
속닥거리는 목소리에 침을 꼴깍 삼켰다.
크레네가 귓가에 숨을 불어넣으며 계속 나를 유혹한다.
하루 200만 크로나 정도면 당신도 어마어마한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어요- 그 달콤한 목소리에 마음이 동한다.
남창이라.
생각해 보면 제국 놈들은 돈을 내고 하는 짓거리를 난 돈을 받고 하는 거 아닌가?
솔깃하다. 침을 꼴깍 삼키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밋빛 미래를 꿈꿨다.
잠깐 눈을 감으면, 탄탄대로에 올라탈 수 있다.
“자, 그럼 오디슨… 프로필부터 작성해 볼까요?”
“으, 으음… 난 아직 하겠다고 한 적이…….”
“일단 나이가 어떻게 되죠?”
사람 말을 정말 안 듣는 여자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나저나 나이? 갑자기 나이는 왜 묻는 거지?
나이에 대한 건 비밀도 아니다.
눈살을 구기며 대답을 꺼냈다.
“17살이오.”
“네?”
“태어난 지 17년이 지났단 소리요.”
크레네가 입을 쩍 벌리고 경악했다.
왜 그러는 거지?
고개를 갸웃하자, 그녀가 떨떠름한 미소를 지었다.
“전 탈락 드릴게요.”
“음?”
“미안해요, 오디슨. 나이가 너무… 으음, 오디슨이 여기에서 일하면 이쪽 지점이 영업 정지라구요! 덤으로 전 차가운 감옥에 갇히구요.”
방긋 웃는 크레네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 있다.
대체 뭐가 문제지? 유혹을 하다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 그런지, 괜히 짜증이 난다.
눈살을 구기고 그녀를 쳐다보자, 그녀가 으윽- 하고 신음을 흘렸다.
“자! 일단 나가요!”
“아니, 이게 무슨…….”
“제발! 돈 줄 테니까 당장 나가요! 안 들키게!”
폭풍처럼 움직이는 크레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거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내 손에는 5만 크로나가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여전히 발할라에 익숙하지 않다.
* * *
터덜터덜 걸어서 향한 곳은 투기장이었다.
시끌벅적하고 화려한 거리를 벗어나 투기장에 닿았다. 그곳은 낮의 흥분과 열기가 싹 사라진 고요한 곳이 되어 있었다.
거대한 창을 한번 보고, 개구멍으로 향했다.
“깍? 무슨 일이냐?”
“전에 말했잖소. 잘 곳이 없으면 이곳에서 자도 된다고.”
“깍깍, 그거야 그렇지만… 잘 곳이 없다니. 신기하군.”
입가를 이죽였다.
“빚쟁이한테 잘 곳이 어딨겠소, 이 발할라에.”
“까악? 아직도 빚쟁이냐?”
“흥, 돈이 없는걸.”
무승부로 인해 받은 5만 크로나와 크레네가 어째서인지 모르게 쥐어 준 5만 크로나.
전 재산인 10만 크로나의 절반을 투자해 여관에 묵을 생각은 없었다.
이걸로는 모조리 고기를 사 먹을 예정이다.
두고 봐라, 빌어먹을 고블린.
다음에는 내가 놈을 박살 내리라.
“까아악? 비다르 님의 사자가 가지 않았나?”
“비다르 님? 복수의 신이신 그?”
“그래, 비다르 님께서 널 후원하시기로 하셨다.”
후원? 그것도 신께서?
눈을 끔뻑이고 있자니, 까마귀가 퍼더덕 날개를 홰쳤다.
“이쪽에서 연락을 해야겠군. 아무래도 엇갈린 것 같으니.”
까마귀가 ‘참, 재수도 없는 놈이란 말이야’ 하고 중얼거리고 뭔가를 들고서 깃털을 바삐 움직였다.
그리고 부르르- 어디선가 떨리는 소리가 났다.
“까악, 가자. 비다르 님께.”
“내가… 신을 대면한다고?”
“그래, 그렇다.”
멍하다.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내가 신을? 꿈만 같다.
그 몽롱함은 신께서 내게 축복을 내리실 때까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