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그 오브 발할라-3화 (3/208)

# 3

3화. 영웅은 포기하지 않는다 (2)

“어서 오세요! 피가 튀는 전투가 벌어지는 곳, 오딘 투기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방긋방긋 웃는 귀여운 인상의 발키리가 나를 반겼다.

그녀가 말한 투기장의 이름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딘 투기장? 이 투기장의 주인이 오딘이시란 말이오?”

“네, 고객님. 당연하죠. 전쟁과 분노의 신이신 오딘이 아니라면, 누가 이런 멋진 투기장을 가질 수 있겠어요?”

과연.

오딘이 아니라면, 같은 전쟁의 신이며 결투와 법의 신이신 오딘의 아들, 티르나 이 투기장을 운영할 수 있을까? 투사들이 1대1로 싸우라는 법은 없으니, 티르께서 이곳의 주인인 것도 이상하리.

“…이곳의 주인이 오딘이시라면, 종종 싸움을 보러 오시겠군?”

“네, 아예 오딘 님을 위한 전용석도 있으니까요.”

두근두근.

심장이 갈빗대를 뚫고 나올 정도로 뛴다.

오딘께서 내 싸움을 보시다니! 까마귀들을 부려 전달받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렇다면… 싸우겠소! 내 싸움을 오딘께 보여 드리리다!”

뜨거운 신앙을 고백했다.

발키리는 방긋 웃던 얼굴을 싸늘하게 바꾸고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투사 지망이었어? 저리 꺼져!”

“으음… 그게 무슨…….”

“이쪽은 손님들이 들어가는 곳이라고! 당장 꺼져!”

귀엽던 발키리가 한순간에 마녀가 되었다.

나는 전사를 무시하는 발키리의 태도에 무어라 한 소리를 하려 했지만…….

“오늘도 귀엽네, 괴르.”

“어머나, 오늘도 오셨어요?”

“그래, 오늘도 Top100 두 장!”

“꺅! 멋져! Top100 두 장이면, 20만 크로나예요!”

아까 내게 투기장의 정보를 알려 준 이들이 다가왔기에 얌전히 물러나기로 했다.

…그것보다 20만 크로나?

남창이 되라던 크레네가 말한 금액을 빼면, 숱한 일터에서 내건 일당 중 최고가 10만 크로나였다.

하루 일당을 이 투기장에 모조리 바친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비리비리해 보이는 놈인데… 생각보다 대단한 전사인가?

나는 터덜터덜 걸었다.

목적지는 커다랗고 멋진 정문의 옆, 허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 개구멍이다.

* * *

개구멍 안쪽은 투기장 외관에서는 상상도 되지 않을 정도로 낡고 허름한 곳이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 이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나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제각기 무어라 중얼거리는 걸로 봐서는, 아마 싸움을 앞두고 오딘께 기도라도 올리는 모양이다.

안경을 쓴 까마귀가 깍깍 말한다.

“뭐야, 신입인가?”

“음, 그렇소.”

“말투하고는… 깍깍. 그보다 등록부터 하지. 이름은?”

안경 쓴 까마귀가 검은 깃털 펜으로 내 이름과 주 무기, 하계에서의 전공 따위를 물었다.

나는 그 질문에 성실히 답했다.

특히나 전공을 읊을 때는 가슴을 쭉 펴고 자랑스러워하기도 했다.

“깍깍! 아직 온 지 얼마 안 됐군, 그래?”

“음. 3일 됐소.”

“깍깍깍! 딱 봐도 그쯤 되어 보인다. 대충 병원에서만 지냈겠지.”

말하는 까마귀라, 보통 놈이 아니다 싶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잘 아는 걸까?

깜짝 놀랐다.

혹시 이 안경 쓴 까마귀가 오딘의 두 까마귀 중 하나인가?

까마귀를 훑어보았다. 그러자 까마귀가 깍깍 웃는다.

“후긴도, 무닌도 아니다.”

“내 생각을 읽은 거요?”

“깍깍, 멍청이들의 얼굴만 봐도 안다. 그것보다… 준비해라! 10분쯤 후에는 네 차례이니.”

준비라. 저쪽 한편에 줄지어 있는 무기를 쓰면 되는 건가?

슬쩍 눈치를 보자니, 까마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쪽에서 가져오면 된다.”

하계에서 쓰던 삼촌이 남긴 창과 울프헤딘의 상징이던 늑대 가죽이 없는 게 아쉽다.

그래도 나쁜 물건은 아니었다. 허름한 이곳으로 볼 때 썩어 가는 창일 수도 있다 여겼거늘.

“자, 마지막으로…….”

“음? 뭐가 더 남았소?”

“김치!”

“김치? 김치가 뭐요?”

찰칵, 소리와 함께 빛이 뿜어져 나왔다.

조심스레 눈을 뜨자니, 까마귀가 내 초상화를 들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 초상화를 그린 거지? 그것도 저렇게 빠르게?

“대단하군……! 정말 빛과 같은 속도였어. 흠, 그런데, 이렇게 멍청한 표정 말고, 좀 더 멋지게 그려 주지 그랬소?”

“깍깍깍! 귀찮아! 그냥 저기 앉아나 있어라!”

아무래도 새로 초상화를 그려 줄 것 같진 않았다.

자리에 앉아 근처에 있는 이들에게 슬쩍 말을 걸어 보았지만, 그들은 퀭한 눈으로 나를 보더니 쯧쯧 혀를 차기만 했다.

뭐가 문제지?

어깨를 으쓱이고 손에 익지 않은 창을 만지작거릴 때, 내 이름이 불렸다.

“오디슨!”

나는 벌떡 일어나, 추레하고 침침한 방에서 밝은 빛이 이끄는 곳으로 나아갔다.

너른 공간이 떡하니 튀어 나왔고, 수많은 의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개중 채워진 의자는 몇 개 없었다.

[제3경기장에서 펼쳐질 경기는… 물푸레나무 부족의 ‘붉은 늑대’ 오디슨! 그리고 그 상대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거대한 목소리에 흠칫 놀라고 있자니, 그 목소리가 다시 이어진다.

상대에 대한 소개다. 그리고 상대 쪽의 철창문이 드르륵- 소리와 함께 열렸다.

“…허.”

헛숨을 흘렸다.

전투를 앞두고 흥분으로 들끓던 심장이 싸늘하게 식었다.

의문의 목소리가 상대를 계속해서 소개했지만, 들을 생각도 들지 않는다.

“내 상대가 고작…….”

뀌이익, 소리치는 멧돼지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날 무시한 까마귀에게 한마디 따져야겠다.

나는 퉤- 손바닥에 침을 뱉었다. 투기장에서 제공하는 창을 움켜쥐었다.

선수필승.

멧돼지를 향해 돌격한다!

* * *

“얼음도끼 이그나르라…….”

에이르 병원 앞 사거리에 위치한 식당, 숯불 세흐림니르 구이의 주인인 이그나르는 테이블을 닦다 상념에 잠겼다.

옛 별명을 들은 탓일까? 이제는 손에서 놓은 도끼의 감촉을 되새겼다.

“아니… 싸움은 이제 지겨워.”

이그나르는 고개를 저었다.

낮에 본 멍청이를 떠올리고 피식 웃었다. 그 역시 그랬던 때가 있다.

젊고 혈기 넘치며 투기를 줄줄 흘리고 다니는 전사. 그랬던 때가 있었다.

문득, 가게 한편에 자리한 TV로 시선을 옮겼다.

[네, 이번 경기는 Under 500 경기입니다.]

[화려하고 신적인 경기 사이에 껴 있는 Under 500도 나름의 매력이 있죠?]

[그렇죠, 나름 배울 것도 있고 말입니다.]

이그나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Under 500 경기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발할라에 있는 540개의 방 중 500번째 이하 방을 가리키는 말. 그러니까 대부분의 신입들이 자리하는 곳이며…….

“대부분의 인간들이 자리한 곳이지.”

이그나르는 그곳에서 패배에 패배를 거듭했다.

전설적인 영웅, 얼음도끼 이그나르는 패배의 쓰라림을 그때 배웠다.

무수한 패배 속에서 싸움에 신물이 났다. 그래서 온갖 잡일을 해서, 이렇게 발할라에 자리 잡았다.

왜 익숙하지도 않은 일을 하느냐고? 발할라에서 매년 걷는 수명세를 못 내면 차디찬 얼음의 땅, 니플헤임으로 가야 하니까. 그래서 대다수의 인간들은 싸움을 포기하고, 발할라에서 상업이나 농업 등에 종사했다.

발할라의 전사도 저승은 여전히 두려웠다.

TV 속에서 경기가 시작됐다.

이그나르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저 멍청한 새끼!”

TV 속에는 낮에 와서 구걸했던 거지 신입이 떡하니 비쳤다.

발할라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놈이 투기장에 나선다? 분명 끔찍한 패배를 겪으리라.

해설자와 아나운서도 그렇게 예상했다.

[으음, 신입 투사인 오디슨은 이번이 첫 경기네요.]

[네, 게다가 발할라에 도착한 지 겨우 3일 차… 어떻게 될까요?]

[솔직히 말하자면… 승산은 매우 낮습니다. 뭐, 제가 해설은 아니지만… 경기를 무진장 봤잖습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게다가…….]

[예, 상대가 바로 그 칼리돈의 멧돼지거든요.]

칼리돈의 멧돼지.

그리스 쪽에 있는 칼리돈이라는 나라의 왕이 아르테미스를 빼고 모든 신에게 제사를 올리자, 분노한 아르테미스가 풀어놓았다는 신수(神獸)다.

눈에는 광기가 맴돌고, 몸의 털은 모두 창날로 써도 될 정도로 두껍고 날카로우며, 엄니는 코끼리의 상아만 한 데다, 덩치가 황소처럼 크다는 괴물이다.

[아… 올림포스 쪽에서 협찬한 돼지군요?]

[예. 아르테미스 축산에서 심혈을 기울여 양산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슈퍼마켓에서 칼리돈(豚)을 찾으시면 맛보실 수 있다네요.]

[전설 속의 멧돼지라니… 저도 한번 먹어 보고 싶네요.]

광고성을 띤 멘트가 흘러 나가고, 경기가 시작됐다.

“멍청한 짓을 하는 건 아니겠지?”

이그나르가 설마- 하는 심정을 담아 말을 하자마자 멍청한 짓이 펼쳐졌다.

오디슨이 냅다 돌격한 것이다.

무모한 짓이다. 숱한 그리스 영웅들이 참가하고도 쉽사리 잡지 못한 괴물 멧돼지에게 먼저 덤벼들다니!

너무나 무모하고 어이없는 짓거리에 이그나르는 경악했다.

‘저 젊음과 투기라면… 혹시?’

꿀꺽 침을 삼켰다.

창을 쥔 모양새가 보통이 아니다. 눈에 서린 투지가 펄펄 끓는다.

이그나르 역시 뛰어난 전사인 만큼, 오디슨의 돌격을 슬쩍 보고도 평가할 수 있었다.

굉장히 능숙한 모습이었다.

‘…정말로, 저렇게 무모한 짓으로 이겨 낼 수 있을까?’

만일.

만에 하나.

혹여나… 오디슨이 이긴다면?

“그러면… 나도 해낼 수 있을지도…….”

이그나르는 열망을 담아 오디슨의 공격을 바라보았다.

그림 같은 창격. 허공에 올곧은 수직선을 그리며 창이 멧돼지를 찔렀다.

뀌이이이이이익!

거대한 비명이 울렸다.

[오!]

해설자가 감탄을 토했고, 이그나르의 눈이 번쩍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뀌이이이이익!

[꺅!]

[아… 저건, 힘이 부족했네요. 힘이… 하.]

[어! 저거 저러면 안 되는데요?!]

투지가 안 좋게 작용했다.

창에 찔린 칼리돈은 광분했고, 제 상처를 무시하고 오디슨을 들이박았다. 오디슨은 그 와중에도 창을 꽉 쥐고 있었고.

그 결과…….

[아… 저거…….]

[으, 엄청 아프겠는데요? 윽! 지금 수십 번은 밟혔죠?]

[경기 중단해야죠!]

오디슨은 창에 매달린 채 바닥에 갈리듯 질질 끌려 다녔다. 게다가 광분한 멧돼지의 발에 어마어마하게 밟혔다.

팔다리는 기괴하게 일그러졌고, 온몸은 새빨간 페인트를 부운 듯 피 칠갑이 되었다.

“젠장, 처음부터 믿지도 않았다, 거지새끼.”

삑- 이그나르가 TV를 껐다.

덤으로 아르테미스 축산은 야심차게 발할라 진출을 꿈꿨지만, 충격적인 폭력성을 본 발할라 거주민들이 광돈병을 의심하면서 사업을 철수하게 되었다.

* * *

“헉!”

놀라 벌떡 몸을 세웠다.

눈을 끔뻑였다.

“난… 죽은 게 아닌가?”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손아귀에 담긴 힘은 내가 상상했던 죽음과는 너무나 달랐다.

그때, 곁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흠흠.”

낯익은 상황에 슬쩍 고개를 돌려 보니, 역시나.

언짢은 표정의 이라호드가 서 있었다.

팔짱을 끼고 짝다리를 짚은 채 서 있는 아름다운 발키리와 눈치 마주쳤다.

이라호드가 짜증을 토해 낸다.

“내가 적어 준 거 안 봤어요?”

“…음.”

할 말이 없다.

이라호드가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은 신계예요, 신계. 하계와는 전혀 다른 법칙이 있단 말이죠.”

“…내가 그럴 줄 알았나.”

고개를 떨궜다. 멧돼지를 얕보던 전사의 자존심이 와장창 박살 났다.

“후우, 어쨌든. 내가 돈을 벌라고 한 건 그런 다른 법칙에 어느 정도 적응하라는 말이었어요.”

“…끙, 다른 법칙이라니……. 그걸 먼저 말해 줬어야지.”

“쯧, 아직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 거죠. 자요, 이거 받아요.”

이라호드가 얇은 책을 건넸다.

이토록 얇은 책이 있다니? 양피지도 아니고 파피루스도 아닌, 신기한 재질로 된 책이다.

그 책의 제목은,

[발할라에 처음으로 도착한 전사들을 위한 안내서]

굉장히 유용해 보였다.

슬쩍 얇은 재질을 조심스레 넘겼다.

[세흐림니르]

[영원히 부활하는 멧돼지로서, 그 고기를 먹으면 뛰어난 회복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헤이드룬]

[젖 대신 벌꿀주를 생산하는 염소입니다. 그 벌꿀주를 마시면 강인한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힘을 못 이겨 뼈가 박살 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흐림니르의 고기와 함께 섭취합시다.)

…허.

“이런 게 있다면, 진작 말을 해 줘야 할 거 아닌가?”

“흥.”

이라호드가 콧방귀를 뀌었다.

“크로나는 있구요?”

아니, 없다.

나는 눈썹을 구기며 책을 훑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 새순 색깔의 얇은 재질을 발견할 수 있었다.

뜯어진 책장인가- 했는데, 아니었다.

그 연둣빛 얇은 것에는 자필로 쓴 전언이 담겨 있었다.

[신입에게 까먹지 말고 곧장 반드시 지급할 것! 반드시!]

[-발키리 장, 시그룬.]

그 쪽지를 쥐고 이라호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썹을 구기고 책을 훑었다.

“어머, 이 축복이라는 거 참 좋아 보이지 않아요? 네? 에이르 님의 축복인 ‘의료 보험’을 받으면, 글쎄 병원비가 절반이래요.”

딴청을 피우는 이라호드를 지긋이 바라보자니, 그녀가 내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곧 어깨를 으쓱였다.

“저는 가 봐야겠어요. 바쁘거든요.”

“…’곧장, 반드시’ 지급하라던 게 이제야 왔네?”

“호호, 그럼, 이만!”

발키리가 잽싸게 흰 방을 나섰다.

그 모습에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래도 내 발키리가 못 미덥다.

“아! 협탁에 투기장 패배 수당 있으니까 확인해 봐요. 그럼 진짜 가요. 안녕!”

발키리가 남긴 말에 나는 곧장 침대 옆을 보았다.

그곳에는 작은 주머니가 하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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