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그 오브 발할라-2화 (2/208)

# 2

2화. 영웅은 포기하지 않는다 (1)

자비와 치유의 여신, 에이르(Eir)의 신전에서 나오는 데에는 3일이 걸렸다.

해독은 진작 끝이 났지만, 그래도 무기력한 탓이었다. 사실 그 무기력의 대부분은 혼란 때문에 찾아왔다.

“…발할라가 사후 세계가 아니라니.”

터벅터벅,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창을 엮어 서까래로 삼고, 황금 방패로 지붕을 올린 곳? 아니, 여긴 번화한 도시였다.

평화 협상을 하기 위해 부족장의 호위로 갔던 제국 수도보다 더 크고 화려한 도시다. 다만, 여기가 신계라는 걸 증명하듯 종종 보이는 마법물품들이 신기하다.

사실 그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이 있다.

내 담당 발키리, 이라호드가 한 말이 여전히 뇌리에 남은 채다.

‘발할라는 황금으로 돌아가는 곳이에요.’

그녀의 복잡한 설명들은 저 한마디로 끝낼 수 있었다.

뭐라더라? 자본주의라던가?

발키리가 한 말이 여전히 이해되진 않는다.

어떻게 고결한 전쟁과 마법과 천공의 신이신 오딘께서 이런 타락을 보고 계셨단 말인가.

게다가…….

[24시 로키스 패밀리 숍-에이르 병원점]

[아스가르드 최고의 상점에서 즐거운 쇼핑을 하세요!]

룬 문자로 적힌 로키(Loki)라는 글자가 내 신경을 긁어 댄다.

이라호드에게 신신당부를 받았다.

함부로 로키를 비방하지 말라고.

오딘께서는 마법의 신이라는 위명에 걸맞게 시간을 돌리는 대마법을 사용하셨다.

미래를 겪고 오신 오딘께서는 로키를 억압하지 않으셨고, 라그나로크의 괴물이라는 펜릴 역시 억압하지 않으셨다. 대신, 간사하고 비열한 거인 잡종신인 로키에게 신과 거인들 사이에서 중립을 지킬 것을 맹세 받으셨다고.

그 덕에 로키와 그 가족들은 아스가르드(신계)와 무스펠헤임(거인들이 다스리는 불의 땅), 니플헤임(서리와 얼음이 가득한 저승)을 돌아다니며 무역을 했고, 로키스 패밀리는 아스가르드 최고의 상단이 되었다.

그리하여, 예언서에 적힌 라그나로크, 신들의 종말과 다른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그럼에도 라그나로크는 여전히 있을 거라 했나.”

시간을 되돌린 오딘께서는 이제 라그나로크를 대비하여 황금을 모으시고, 여전히 발할라에 전사들을 모집하신다.

머리로는 알아도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후우. 오딘께서는 전사들을 믿지 못하시는 건가…….”

서글펐다.

사악한 로키에게 손을 내미셨다는 것도, 명예를 모르는 거인들과 친밀하게 지내시려 하시는 것도, 전사들의 힘을 믿지 않고 마법에 기대시는 것도.

오딘께서 하시는 고생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그분께서 고생하시는 걸 아는 만큼, 나는 서운했다.

그 서운함에 11억 크로나라는 빚이 차지하는 비율은 아주 낮았다.

정말로 아주 낮다.

대충 8할 정도다.

* * *

지옥으로 가야 할 운명을 뒤튼 값이 10억 코로나. 그리고 에이르의 자비에 대한 성금이 1억 코로나다.

모든 것이 황금으로 돌아가는 발할라인 만큼 나는 돈을 벌어야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데 무턱대고 돈을 번다? 불가능한 일이다.

이라호드가 건넨 쪽지를 펼쳐 보았다.

[돈을 버는 첫 번째 방법. 일자리를 구한다.]

“일자리라…….”

나라고 태어나자마자 전사였던 건 아니다.

전사가 되기 전 나는 여러 품을 팔며 생활했다. 삼촌이 전쟁터에서 가져오는 물건들 덕에 그리 힘든 생활은 아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내 눈길을 끄는 룬 문자가 적혀 있는 상점이 있다.

[숯불 세흐림니르 구이]

세흐림니르라. 영원히 부활하는 멧돼지의 이름이 바로 세흐림니르다.

발할라에 왔음에도 에이르의 신전에서는 나에게 희멀건 죽과 푸르딩딩한 풀을 주었다. 전사에게 어울리지 않는 음식들이었다.

꼬르륵, 배가 울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고 상점으로 향했다.

딸랑딸랑.

“엇! 어서 옵쇼!”

움찔, 몸을 떨었다.

나는 부족 전사 중에서도 창술을 인정받아 전사단을 이끌었다. 늑대 가죽을 뒤집어쓴 전사단의 이름은 울프헤딘. 베르세르크(광전사) 중에서도 정예들만이 모인 전사단이었다. 그런 만큼 신체 조건이 좋은 놈들도 상당히 많았다.

거인 족 혼혈이 아닐까 의심되는 토르손은 그중에서도 으뜸이었다.

2미터가 훌쩍 넘는 키를 가졌던 토르손은 힘 역시 장사였다. 제국과의 전쟁에서 수십 대의 화살에 고슴도치가 되어 죽어 버렸지만.

왜 이런 생각을 하느냐?

눈앞에 있는 사내가 그 토르손보다 더 장대한 체구를 가졌기 때문이다.

3미터는 되어 보이는 키에 어지간한 여자 허리보다 두꺼운 팔. 아니, 임산부의 허리만큼이나 두껍다.

왜 이런 남자가 일을 하고 있는 거지?

의문이 들었다.

“…나는 물푸레나무 부족의 붉은 늑대, 오디슨이오.”

“물푸레나무? 그건 어디에 있는 부족이지? 나는 얼음땅 부족의 이그나르다. 흠흠, 어쨌든… 주문은?”

얼음땅 부족의 이그나르? 설마…….

“얼음도끼 이그나르?”

“흐, 흐흐흐… 오랜만에 듣는 별명이군.”

“당신이 정말로 얼음도끼 이그나르요? 거인을 일격에 쳐 죽였다는?”

“…음, 그 이야기는 그만하지. 주문이나 해.”

이그나르가 불편하다는 듯 팔짱을 끼며 말했다. 거인을 일격에 쳐 죽인 전설이 불편할 일이 뭐가 있는가?

전설 속의 전사를 정말로 만났다는 흥분에 당장 한판 붙어 보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꼬르륵, 뱃속 거지는 당장 밥을 달라 울었다.

“…으음. 일단, 밥 한 끼 주겠소?”

“밥? 무슨 밥?”

“요 며칠 제대로 먹질 못해서 말이오.”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이그나르가 나를 위아래로 살핀다.

눈살을 좁힌 이그나르가 두터운 입술을 열었다.

“너, 크로나는 있냐?”

“…아니, 아직은 없소.”

나는 식당에서 쫓겨났다.

“퉤! 거지새끼가 당당하게 들어오고 지랄이야, 재수 없게!”

“아니, 이게 무슨 짓이오! 같은 전사끼리!”

“흥! 전사는 개뿔! 뒤지기 싫으면 꺼져, 인마!”

“이그나르, 이보시오, 이그나르!”

탕탕탕, 식당 문을 두들겼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젠장, 밥 한 끼도 못 주나? 전설 속의 영웅이 짠돌이였구만!”

잰 체하는 말투를 버리고 나도 침을 퉤 뱉었다.

이 근방에 식당이 여기뿐인 줄 아나.

발길을 옮겼다.

* * *

“빌어먹을. 전사끼리 돕고 살겠다는 이가 단 하나도 없다니.”

인정이 메마른 곳이라는 걸 알고, 일을 하겠노라 말한 적도 있다.

그런데 돌아오는 건 곤란하다는 표정뿐.

그들은 내게 하나같이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로마 놈이 가게에 들어오면 어떻게 할 텐가.’

나는 전사의 긍지를 걸고 답했다.

‘머리통을 쪼갤 거요.’

그리고 모두가 나를 내쫓았다.

설마, 제국 놈들에게 굴복한 건가? 눈살을 구겼다.

“제국 놈들에게 친절하게 대할 수 있겠느냐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우리 부족의 미래를 꺾어 버린 놈들이다. 그런 놈들에게 친절? 여러 번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게다가 여긴 발할라라고! 빌어먹을! 제국 놈들이 있을 리가 없잖아!”

쿵! 벽을 치자, 뾰족한 목소리가 들린다.

“이봐요! 뭐하는 거예요!”

“으, 으음! 어… 그게…….”

“남의 가게 문 근처에 서성이다 벽을 때리다니… 뭐하는 사람이에요, 대체?”

“흠흠, 미안하게 됐소이다. 너무 화가 나는 일이 있어서…….”

고개를 숙이자, 여자가 흐응- 하고 콧소리를 냈다.

슬쩍 고개를 들어보니 그 여자의 외모가 눈에 들어왔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에 유려한 얼굴, 아름다운 어깨선과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

나는 넋을 놓고 그녀를 보았다.

“제국이니 어쩌니 하는 걸 보니, 이쪽에 온 지 얼마 안 됐죠?”

“음, 3일 정도 됐소.”

“아직까지 하계 물이 덜 빠질 만도 하네요. 아차, 내 이름은 크레네예요.”

“아. 나는 물푸레나무 부족의 붉은 늑대, 오디슨이오.”

킥킥, 크레네가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꼭 음악 같았고, 그녀의 몸에서는 싱그러운 물 냄새가 났다.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고, 눈가에는 그… 티와즈 루(ᛏ) 룬인가요?”

“그렇소. 오딘의 아들이신 전쟁의 신, 티르를 의미하는 룬이지.”

“전사 출신이니 만큼, 몸도 탄탄해 보이고… 일자리 구했어요?”

고개를 저었다. 크레네가 빙그레 웃었다.

“그럼 여기는 어때요? 제가 발할라 지부 지점장을 맡고 있는 가겐데…….”

“여기?”

그제야 나는 고개를 들어 간판을 볼 수 있었다.

알 수 없는 문자로 적힌 간판 아래, 작게 룬 문자가 적혀 있었다.

[여성 전용 할리스 목욕탕]

나는 입을 열 수 없었다. 크레네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하루에 200만 크로나도 벌 수 있어요.”

그 수염만 깎으면 말이에요- 하고 말하는 크레네.

나는 얼굴을 붉히고 버럭 화를 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수염이 그리 중요한가요?”

“그, 그게 아니라… 여기는……!”

어이가 지나치게 없으면 말문이 막힌다더니, 지금 내 꼴이 딱 그 모양이었다.

어버버-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 크레네가 매력적인 웃음을 지으며 내 가슴팍을 살며시 쓸어내렸다.

윽!

“여, 여기는……! 남창을 파는 창관이잖소!”

“어머, 창관이라뇨? 잠깐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뿐이에요. 그리고 이쪽 일도 아무나 못하는 거랍니다?”

“무슨! 나는 전사요, 전사! 이만 가겠소!”

버럭 화를 내고 돌아서 다리를 옮기자, 크레네가 외친다.

“혹시나 일자리 못 찾으면 와요! 야성적인 미남이라니, 당신은 여기에 꼭 필요한 인재예요!”

“헛소리! 다시는 볼일 없을 거요!”

내 말에 크레네가 까르르 웃는다.

“글쎄요? 그건 두고 봐야 알죠.”

무언가를 안다는 듯한 말투. 나는 인상을 구기고 부지런히 발길을 옮겼다.

지금 내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 * *

한참을 걷다 도착한 곳은 내가 꿈에 그리던 발할라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거대하기 그지없는 건물. 마찬가지로 거인족이라도 들 수 없을 것 같은 창이 기둥 대신 자리 잡았고, 산처럼 웅장한 황금 방패가 지붕으로 올려진 곳.

주변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은 알프(Álfr)가 나오는 경기 없나?”

“미친 놈. 알프 속살이 보고 싶으면 선인장이나 사서 키워라.”

“쯧, 너 아직도 그거 믿냐? 꽃집 주인이랑 알프랑 눈 맞았다는 헛소문?”

“솔직히 알프 속살을 보겠답시고 매일같이 투기장을 찾는 네놈보단 낫지.”

알프? 브리튼에서 엘프니 뭐니 하는 요정족을 말하는 건가?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실례하오.”

“어… 어어… 아니, 안 사요.”

“뭘 팔려고 온 게 아니오. 이 발할라… 아니, 투기장에 알프가 나온다는 게 사실인지 묻고 싶어 왔소.”

“아하! 그거야 사실이죠. 알프만 나옵니까? 드베르그(=드워프, 난쟁이)도 나오고, 전설적인 괴물들도 나오지.”

“허… 알프뿐만 아니라 드베르그까지?”

알프는 신묘한 요술을 부리는 데다 어마어마한 수명을 지녀, 모두가 무기술의 대가라는 종족이다. 그리고 드베르그는 공예나 예술로 유명하다.

하지만 내게는 하늘을 떠받치는 것이 4명의 드베르그(노르드리, 수드리, 아우스트리, 베스트리)라는 점이 중요하다.

하늘을 들고 있는 작자들이라니!

드베르그들은 뛰어난 무기와 거인족에 비견될 힘을 지닌 자들이다.

게다가 전설적인 괴물? 추악한 트롤이나 세계수를 갉아먹는 거대 다람쥐 라타토스크와 싸워 볼 수 있다고?

전사의 심장이 쿵쾅거린다.

그때,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가 한마디 덧붙인다.

“요툰(거인)들도 가끔 나온다는 걸 빼먹으면 안 되지.”

나는 곧장 거대한 투기장의 정문으로 향했다.

우람한 통나무를 그대로 창대로 쓴 창이 X자로 서 있는 곳.

발할라에 도달한 전사들이 늘 꿈꾸는 장소가 여기에 있다.

이라호드가 건넨 쪽지에도 이곳에 대한 말이 있다.

[돈을 버는 두 번째 방법. 투기장에서 싸운다.]

[PS. 당장 투기장에 가는 건 바보 짓! 명심할 것!]

이라호드가 그 아래 달아 둔 말은 무시했다.

전사가 싸움을 피한다는 건, 술꾼이 공짜 술을 거절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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