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그 오브 발할라-1화 (1/208)

# 1

1화. 영웅은 죽지 않는다

전사한 전사들의 전당, 발할라(Valhalla).

발할라는 신계에 위치한 거대한 저택이다. 창을 엮어 서까래로 삼고, 황금 방패로 지붕을 올린 곳. 그곳에는 540개의 문이 있고, 각 문마다 한 번에 800명의 전사가 드나들 수 있는 곳이다.

그 수많은 전사들이 왜 필요한가? 장차 다가올 종말을 대비하기 위함이다.

43만하고도 2천의 용사들은 전설로 남은 왕과 영웅들로 이뤄져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단련하기 위해 계속해서 싸우며,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부활하여 다시 싸운다. 그렇게 단련된 전사들이야말로 종말의 때에 사악한 거인들에 맞설 수 있다.

무수한 전설 속 용사들과 겨뤄 보고 싶은가? 자신이 역사상 가장 강한 전사임을 증명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발할라로 가라.

스스로에 대한 증명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아름다운 발키리(Valkyrie)의 시중을 받으며, 영원히 부활하는 멧돼지 요리를 먹고, 신성한 염소의 젖에서 나온 벌꿀주로 목을 축인다.

왕보다도 화려한 생활을 꿈꾸는가?

그렇다면 발할라로 가라.

모든 전사들이 꿈에 그리는 그곳으로 가라.

전쟁터에서 스스로를 증명한다면, 발키리가 그대를 발할라로 이끄리라.

* * *

푸욱!

섬뜩한 소리가 울린다. 창이 피육을 뚫는 소리다.

열다섯 살쯤 되었을까? 주근깨가 선명한 병사가 제 가슴팍에 박힌 창을 쳐다보았다. 녀석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엄마…….”

주르륵, 유언이 피와 함께 흘렀다.

병사가 바닥에 꼬꾸라진다.

쳇, 나는 혀를 찼다.

“…전쟁터에서 엄마를 찾다니.”

어이없는 놈이다.

무기를 들고 전쟁터에 섰으면, 그걸로 이미 전사다. 그런데 유언으로 저딴 소리를 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울렁-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요동쳤다. 지독한 어지럼증에 창을 바닥에 박고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젠장할.”

피를 너무 흘렸나? 아니, 아니다. 이전에 이보다 피를 많이 흘렸을 때도 멀쩡했다.

그렇다면……?

문득 삼촌이 떠올랐다.

‘오디슨, 이 삼촌이 돌아오지 않걸랑, 발할라에서 발키리와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거라. 흐흐.’

전장으로 향하기 전, 삼촌은 언제나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삼촌은 훌륭한 전사였다. 창을 다루는 기술은 부족 최고였고, 전장에서는 한 마리의 미친 늑대처럼 날뛰었다. 게다가 오딘께 무한한 신앙을 보내기도 했다.

외팔이가 되어 돌아오기 전까지는.

팔을 잃은 삼촌은 말린 버섯을 씹으며 세월을 보냈다. 불구가 된 전사들이 늘 그렇듯.

삼촌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오디슨? 오디슨! 당장 나를 창으로 찔러라! 이렇게 죽을 순 없다! 나는 발할라에 가서 영웅들과 자웅을 겨뤄야 한단 말이다!’

그 부탁에 어쩔 수 없이 창을 잡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삼촌은 말을 바꿨다.

‘오, 오디슨? 설마… 이 삼촌을 죽이려는 건 아니겠지? 삼촌은 늙고 병든 데다가 팔도 하나 없단 말이다! 오디슨, 나를 살려다오!’

정신병이었다.

나는 고민했다. 전사로서의 삼촌과 피폐해진 삼촌, 둘 중 어느 쪽의 편을 들어야 하는가. 몇 날 며칠간 끙끙 앓으며 고민했다.

고민의 답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왔다.

삼촌이 죽어 버린 것이다. 그는 전사들에게 어울리는 피비린내 나는 전장이 아니라 똥 냄새가 나는 침상에서 혀를 길게 늘어뜨리고 죽었다.

나는 본인이 지린 똥무더기 위에서 죽은 삼촌을 보며 진리 하나를 깨우쳤다.

고민은 시간 낭비다.

“…그래, 버섯을 너무 처먹어서 그렇든, 피를 너무 흘렸든 무슨 상관이야.”

아주 익숙하고, 아주 쉬운 일을 할 텐데.

창을 뽑아 들고 내 일을 위해 어지러움을 참아 냈다. 몸 상태가 안 좋다고 해도, 이 일은 간단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전쟁터에서 전사가 할 일은 아주 간단하다.

적을 죽이는 것.

그리고 나는 전사다.

“뭣들 하는가! 당장 저놈을 죽여!”

꽥꽥거리는 고함.

어이가 없다. 내가 잠깐 멈췄다고 우습게 보는 건가? 이 ‘붉은 늑대’ 오디슨을?

소리친 놈은 딱 봐도 뺀질거리게 생겼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기름을 발라 넘긴 머리카락. 힘없는 몸에 걸친 은빛 철갑옷이 아깝다.

기사.

약한 주제에 말로 전쟁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오만한 멍청이들이다. 이전 세대에는 나름 싸울 줄 아는 놈들이 기사가 됐다고 하던데, 지금은 아니다. 이해할 수 없는 변화다.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무어라 말한다.

“하, 하지만… 저놈은 악마입니다! 저놈에게 죽은 게 20명을 넘었어요!”

“에잇, 이 무식한 놈들! 지금 저놈은 독에 중독됐단 말이다!”

웃음이 나온다.

“흐흐흐.”

고민은 역시 시간 낭비다.

다른 일을 하고 있자면, 저렇게 누군가가 친절히 고민에 대한 해답을 내놓지 않은가?

가소롭다.

“겨우…….”

엉망이 된 시선 속에서 얼굴을 붉힌 채 소리치는 놈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온 세상이 흘러내리는 듯한 기괴한 광경이지만, 놈의 얼굴에 서린 공포는 선명하다.

“독 따위로 전사를 꺾을 수 있을 줄 알았는가아아!”

가슴속에 들어찬 답답함을 내뱉고, 그대로 달렸다.

다리가 풀린 탓에 시체를 밟고 넘어질 뻔하기도 했다. 하지만 놈들의 앞에 도착하는 건 순식간.

한 무리의 적들이 양 떼처럼 웅크린다.

“어, 어어?!”

“오, 오지 마!”

창을 들고 전쟁터에 나온 놈들이 할 말이 아니다.

흥- 콧방귀를 뀌고서 창을 휘둘렀다.

“끄아아악!”

창두가 병사 하나의 눈 사이에 길을 텄다. 눈가를 부여잡고 비명을 지르는 멍청이.

창을 내질렀다. 창을 회수하고, 창대로 덤비는 놈의 골통을 후려친다.

“아, 악마다! 악마야! 붉은 머리의 악마란 말이야!”

“안 돼… 안 돼! 나, 난 죽기 싫어!”

이게 병사라고? 이게 군인이라고? 이게 전사라고?

허! 어림도 없는 소리.

이놈들은 그저 양 떼일 뿐이다. 늑대 한 마리에 유린당하는 멍청하고 온순한 가축들.

“전쟁을 모욕하지 마라!”

푸욱!

창두가 도망치는 놈의 목을 꿰뚫었다. 켁켁- 들려오는 단말마의 비명은 연약하기 그지없었다.

그 목에서 뿜어진 피가 뺀질거리는 기사의 얼굴에도 튀었다. 놈은 놀란 토끼처럼 눈을 부릅떴다.

“미, 미친! 한 방울이면 말도 죽어 나가는 독인데!”

“그까짓 술수에 내가 당해 줄 줄 알았나? 응?”

어림없는 소리.

그때, 병사 하나가 ‘으아아!’ 하는 비명과 함께 창을 내찌른다.

마음의 흔들림이 이토록 선명하게 창에 담길 수가 있을까?

나는 주정뱅이 같은 창을 낚아챘다.

“어, 어어어……!”

공포에 얼어붙은 병사.

나는 손에 잡힌 창을 비틀었다.

창을 빼앗기지 않으려던 병사가 앞으로 튀어나오고, 허공에서 한바퀴 돈 창이 제 주인을 노린다.

푸욱!

“컥……!”

“으어, 으어어……?”

기사의 눈동자에 병사의 목을 뚫고 나온 창두가 비친다. 기사가 꿀꺽 침을 삼켰다. 그 뺀질거리는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놈은 지휘관의 자존심도 없는지, 곧장 양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하, 항복하겠다!”

웃긴 소리.

나는 창을 회수한 뒤 곧장 던졌다.

쐐애애애액! 푸욱!

“끄, 끄르륵… 비, 겁한…….”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보는 놈에게 퉤- 침을 뱉어 줬다.

항복? 가당치도 않은 소리다. 비겁? 먼저 시작한 게 누군데?

야만인은 포로 대접을 못 해 주겠다며 학살한 건 제국이 먼저다. 게다가 그때 죽은 수천 명의 부족민 중 전사는 단 하나도 없었다.

부족 간의 전쟁으로 전사들이 모조리 전장으로 향했을 때, 제국은 부족을 공격했다.

부족의 여인들은 제국군의 노리개가 되었고, 부족의 노인들은 가죽이 벗겨져 제국의 책 표지가 되었다. 부족의 어린아이들을 모조리 구덩이에 밀어 넣고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이기도 했다.

“악마… 악마다! 도, 도망쳐!”

기사놈이 죽어 나자빠지자 병사들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전장의 까마귀보다도 용기 없는 놈들이다. 아니, 까마귀들은 이 전쟁을 오딘께 보고해야 할 의무라도 있지. 이놈들은 명예도, 긍지도 없는 쓰레기 같은 것들이다.

그보다… 악마라.

“…흐흐.”

누가 악마인가?

먼저 평화 협정을 깬 건 제국이다. 먼저 포로 인정을 하지 않고 모조리 죽인 것도 제국이다.

전사들은 원한을 잊지 않는다.

우리는 진노했다.

전쟁을 끝내고 끔찍한 참상을 목격한 즉시, 제국을 쳤다.

제국 변방의 도시 두 개를 개박살 내고, 부족민의 넋을 기리기 위해 수만 명의 제국민을 오딘께 산 제물로 바쳤다. 주술사가 없는 탓에 질보다 양으로 밀어붙였다.

그럼에도 우리의 분노는 여전했다.

허나 전투를 거듭할수록 몸은 지쳐 가고, 정신은 피폐해졌다. 이윽고 하나둘 죽어 나자빠졌다.

이제 남은 전사라고 한들 수십 정도일까?

그래도 우리는 끝까지 제국과 싸울 것이다.

팔이 없다면 다리로, 다리가 없다면 어깨로 들이박고, 머리만 남았다면 날카로운 송곳니를 그 목덜미에 박아 주리라.

“윽…….”

독이 전신에 퍼진 모양이다. 몸을 가누기가 힘들다.

“여기까진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죽음이 지척에 있다.

최후의 최후까지 제국 놈들에게 얕보이는 건 사양이다. 삼촌이 남긴 유품, 숱한 전장을 함께 해 온 창을 꼿꼿이 세웠다.

눈을 부라렸다. 도망치는 놈들의 등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이 정도로 전공을 세웠으면 발할라에 갈 만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전투 중 발키리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는 없다.

혹시 발할라의 43만 2천 명 정원이 가득 찬 걸까?

고민은 언제나처럼 별 의미가 없었다.

“…삼촌, 아무래도 좀 있다 보겠네. 킥킥… 나도… 발할라로 가긴 글렀나 봐. 흐흐.”

눈앞이 어두워진다. 이제 패주하는 놈들의 등조차 보이지 않는다.

풀썩, 등에 딱딱한 바닥이 느껴진다. 피로 물든 바닥은 약간 축축했다.

피비린내가 코를 찌른다.

아아, 일어서야 하는데… 제국 놈들이 내가 쓰러진 걸 보면, 다시 덤벼들 텐데.

아, 이렇게 죽는가?

아직 복수가 덜 끝났는데. 나의 적, 제국이 아직도 멀쩡한데. 그 빌어먹을 귀족들과 황제의 머리를 창에 꿰어 죽은 부족민들을 달래야 하는데…….

끈적이는 미련에 눈물이 날 것 같다.

눈앞이 깜깜해지기 직전, 하늘이 밝아졌다.

무언가 내게 날아온다.

새? 아니, 커다란 새.

아니다.

“…발키리?”

목을 쥐어짜 뱉은 말. 그 한마디를 끝으로 의식이 점차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다.

아, 이대로 죽는 건가……?

그리고 내가 죽음에 이르기 직전,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웅은 죽지 않아요.”

* * *

“헉!”

놀라 벌떡 몸을 세웠다.

눈을 끔뻑였다.

“난… 죽은 게 아닌가?”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손아귀에 담긴 힘은 내가 상상했던 죽음과는 너무나 달랐다.

그때, 곁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흠흠.”

흠칫 놀라 진원지를 피해 굴렀다.

“…반응 속도 한번 빠르네요.”

“이 목소리는…….”

낯익은 목소리에 눈살을 구겼다. 내 뇌리에 스치는 기억이 있다.

“발키리?”

“뭐, 그렇죠. 천사나 발키리나. 둘 중 편한 걸로 부르면 돼요.”

“정말… 발키리가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여긴…….”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닥도, 벽도, 천장도 새하얗다. 방금 전까지 내가 누워 있던 침대의 이불 역시 눈부실 만치 하얗다.

이토록 하얀 것이 눈 말고도 또 있단 말인가? 침을 꼴깍 삼켰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삐삐- 소리를 내는 석판. 검은 판 위에는 초록색 선이 어지럽게 그려진다.

그뿐인가? 언젠가 귀족의 저택을 털 때 보았던 유리가 무려 창문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내 팔에 연결된 투명한 지렁이 같은 것에는 물이 흐른다.

“…정말 발할라인가.”

인세에는 존재할 수 없는 물건들이 로키가 전달한 난쟁이들의 물건 같지 않은가?

궁니르, 묠니르, 스키트블라트니르 등. 신화 속 수많은 신물(神物)들이 이러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멍하니 주변을 살피자니 발키리가 입을 열었다.

“일단, 당신의 담당 발키리는 저예요.”

“내 시중을 든단 말인가?”

황금을 녹인 듯한 아름다운 금발과 천혜 절경을 보는 듯 아름다운 얼굴. 시리듯 푸른 눈동자까지.

아이에게 먹일 젖이 약간 부족하지 않을까 싶지만…….

“시중? 흥, 어림도 없는 소리!”

발키리가 정색했다. 나는 눈살을 구겼다.

“무한히 부활하는 멧돼지 고기를 뜯고, 젖 대신 벌꿀주가 나오는 염소에게서 짜낸 벌꿀주를 마시고 발키리의 시중을 받는 것 아니었나?”

“쯧쯧,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 건지……. 요즘 그런 짓 하다가는, 몰매 맞아요. 미투 달아 드려요?”

나는 눈을 끔뻑였다. 이 발키리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쯧쯧- 발키리가 혀를 차더니, ‘아! 맞다’ 하고서 박수를 쳤다.

“일단은 안정이 중요하니까, 딱 하나만 알려 드릴게요.”

“음? 딱 하나……?”

“네, 여기 이 시설 보이죠?”

발키리의 말에 새하얀 방을 둘러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료비는 본인 부담이에요.”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하자니, 발키리가 어깨를 으쓱이고 말을 이었다.

“쉽게 설명하자면…….”

발키리가 살짝 뜸을 들인다.

“당신, 지금 빚쟁이라는 거죠.”

방긋 웃는 발키리.

나는 훗날 그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알게 되었다.

의료 보험도 안 될 줄이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