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뉴욕 6연전(3)
승부는 이미 기울었다.
하지만 양키스 더그아웃의 분위기는 변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늘 경기에서 어떻게든 저 괴물에게 흠집을 남길 생각이었다.
“단 1점이야. 다른 것은 다 필요 없어! 단 1점!”
“집중해! 집중!”
“양키스가 연속 이닝 무실점 기록의 희생양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난 절대 인정 못 해! 몸에 공이 맞아서 쓰러져도 상관없으니까 어떻게든 출루해!”
양키스의 홈팬들이 내뱉는 응원을 들으며 양키스의 선수들도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한심한 경기를 보여줄 수 없어. 우린 양키스야.’
‘팬들의 말이 맞아. 기록의 희생양이 될 수 없어.’
‘딱 1점만 얻자. 져도 좋으니까.’
선수들의 눈빛이 활활 타올랐다.
이기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어떻게든 1점을 얻겠다는 평소라면 ‘느그가 프로가?’라며 욕을 먹을 생각을 하고 있음에도 양키스의 타자들은 이상함을 느끼지 않았다.
당연했다.
상대가 달랐으니까.
저 괴물을 상대로 1점을 뽑아낸다는 것은 이번 시즌 최초가 된다는 뜻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번 시즌 6월 초까지 강송구에게 점수를 빼앗은 팀은 아직 메이저리그에서 단 한 팀도 없었다.
그걸 최초로 기록하게 된다는 뜻이었다.
당연히 양키스의 타자들에게 그런 기록은 어떻게 보면 마지막 자존심과 같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오늘 경기에서 꼭 1점만이라도 빼앗고 싶은 걸지도 몰랐다.
경기는 계속 진행되었다.
점수는 계속해서 3 대 0을 지켰고.
4회 말.
강송구가 마운드에 올랐다.
드디어 타순이 한 바퀴 돌았다.
타석에는 1번 타자 베니야민 발레리가 들어섰다.
앞선 타석에서 삼진을 허용한 그는 이번 타석에서 어떻게든 출루를 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 같았다.
‘극단적으로 홈 플레이트에 바짝 붙었군.’
마치 몸쪽으로 붙는 공이 날아들면 그냥 몸에 맞고 출루라도 할 생각인 것처럼 보였다.
초구는 바깥쪽 슬라이더.
강송구의 오른손에서 뻗어 나온 슬라이더가 적극적으로 스윙에 들어간 베니야민 발레리의 배트를 피했다.
부우우우웅!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초구부터 슬라이더를 던진 강송구는 연이어 바깥쪽 코스로 변화구를 던지다 마지막 스트라이크를 잡는 순간에는 몸쪽 깊은 코스로 포심 패스트볼을 찔러넣었다.
당연히 베니야민 발레리는 그 공을 공략할 수 없었다.
너무나도 깔끔한 코스였으니까.
-오늘 캉이 유난히 삼진을 많이 잡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컨디션이 그만큼 좋다는 뜻일까요?
-그것도 있지만……. 최근 양키스의 타선이 이유 모를 부진을 계속 이어나가고 있는 것도 원인인 것 같습니다.
-확실히 능력은 확실한데 이상하리만큼 부진한 타자들이 양키스에 몇몇 있죠.
다음 타자는 가빈 럭스.
양키스의 희망인 그가 타석에 들어섰다.
홈팬들은 그가 안타를 하나 때려주길 기도했다.
따악!
-라인 드라이브성 타구입니다!
-아! 캉이 오늘 경기 첫 안타를 맞는군요.
-역시, 가빈 럭스! 저력이 있는 타자입니다.
‘다음부터는 가빈 럭스를 상대할 때 바깥쪽 커브는 조심해야겠어. 바깥쪽 커브에는 귀신같이 반응하는군.’
강송구는 가빈 럭스가 바깥쪽으로 빠지는 커브를 던질 때 빠르게 반응한 것을 떠올렸다.
그건 게스 히팅이 아닌 변화구를 지켜보면서 쳤을 때 나오는 반응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역시……. 메이저리그! 쉽지가 않지.
우효도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작은 고슴도치의 말이 옳다.
메이저리그는 역시 쉽지 않았다.
다음 타자는 앤드류 본.
더 쉽지 않은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이번 시즌 모든 부분에서 가빈 럭스보다 아쉬운 부분이 많지만, 타격이라는 부분 하나만 놓고 보면 오히려 가빈 럭스보다 더 많은 포텐셜을 갖춘 선수였다.
주의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바비가 사인을 보냈다.
‘몸쪽 승부라…….’
조던 델가도라면 바깥쪽 공을 던지며 살살 타자의 신경을 긁었겠지만, 바비 데 프랑크는 전혀 다른 볼 배합을 강송구에게 추천하고 있었다.
그게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성향이 다를 뿐.
‘이런 볼 배합도 나쁘지 않군.’
초구는 몸쪽 커터.
앤드류 본이 몸을 움찔 떨었다.
2구째도 몸쪽 공.
이번에는 포심 패스트볼이었다.
앤드류 본이 힘껏 배트를 휘둘렀다.
하지만 강송구가 던진 94마일의 포심 패스트볼은 배트를 스쳐 포수의 미트에 안착했다.
“스-윙! 스트라이크!”
주심의 우렁찬 콜.
앤드류 본이 두 눈을 찌푸렸다.
모처럼의 기회였다.
1루에 주자가 나가 있는 상태.
그는 어떻게든 주자를 진루시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다르듯이 그는 결국 강송구가 낮게 제구한 체인지업에 속고 말았다.
틱!
배트에 공이 빗맞는 고리.
앤드류 본에게는 그 무엇보다 듣기 싫은 소리였다.
이윽고 그가 이를 꽉 물고 1루로 달렸다.
물론, 라스베이거스의 내야진이 더 빨랐다.
깔끔한 더블 플레이로 이닝이 끝났다.
-완벽한 더블 플레이!
-캉이 주자를 내보내기 무섭게 더블 플레이로 베이스를 깔끔히 지워버립니다!
-체인지업이 진짜 제대로 들어갔습니다.
-정말 환상적인 타이밍에 나온 체인지업이었습니다.
4회 말이 끝나고 찾아온 5회 초.
양키스가 본격적으로 불펜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 * *
양키스는 3 대 0이란 점수 차이를 유지하고 싶었다.
평소라면 강송구의 압도적인 피칭에 압도당해서 ‘그냥 포기하고 다음 경기 준비하자.’라고 빠르게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야구란 그렇게 이성적인 것이 아니었다.
혹시나 하는 작은 기대감.
그것 하나만으로 야구 감독은 순식간에 바보가 된다.
양키스의 감독인 아론 본.
그가 5회 초를 깔끔히 막은 불펜 투수를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오늘 경기를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5회 말.
강송구가 다시 마운드에 오르자 꽉 쥐어졌던 주먹을 풀고 초조한 표정으로 손톱을 깨물었다.
‘왜 저런 공을 공략하지 못하는 거야?’
확실히 공략하기 어려운 공이다.
하지만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독보적인 공이냐고 묻는다면 그는 단호히 고개를 흔들 수 있었다.
‘그 대단한 랜디 존슨의 슬라이더도 아니며, 리베라의 컷 패스트볼도 아니고, 브루스 수터의 스플리터도 아니다.’
하지만 강송구가 가진 강함은 남달랐다.
그는 타고난 에이스였다.
그것도 슈퍼 에이스.
슈우우욱! 펑!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선두타자는 4번 타자인 라파엘 디버스.
이 선수도 가빈 럭스처럼 다저스에서 직접 데리고 온 최고의 장타자였다.
거기다 가빈 럭스처럼 비싼 값을 톡톡히 해주고 있는 선수였기에 양키스의 홈팬들이 보내는 응원도 더욱 크게 들려왔다.
아무튼. 지금 양키스에게 필요한 것은 안타다.
그는 라파엘이 멋지게 출루를 해줄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 기대감은 곧 저물었다.
-내야 높이 뜨는 공!
-그대로 공을 잡아내면서 캉이 5회 말의 첫 번째 아웃 카운트를 가볍게 잡아냅니다.
-다음 타자는 켄 그니아즈도프스키.
-앞선 타석에서는 삼진으로 물러났던 켄 그니아즈도프스키 선수입니다.
다음 타자는 켄 그니아즈도프스키.
앞선 타석에서 너클 커브로 삼진을 잡았던 그를 상대로 이번에는 몸쪽 낮은 코스로 빨려 들어가는 스플리터로 다시 한번 삼진을 잡아내는 캉입니다!
5회 말도 다를 것은 없었다.
두 눈은 번쩍인 것과 다르게 양키스는 상당히 무력하게 강송구에게 이닝을 넘겨주고 있었다.
이번 이닝의 마지막 타자.
브라이스 하퍼가 깊게 숨을 내쉰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는 저 괴물을 상대로 안타 하나도 쉽지 않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양키스는 오늘 경기에서 어떻게든 강송구를 상대로 점수를 뽑아내야 했다.
‘쯧……. 현재 팀의 상황만 아니라면 천천히 승부에 임하고 싶었는데 말이야.’
모든 것이 타자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
거기다 자신이 타석에 들어서자 강송구가 갑자기 오른손이 아닌 왼손으로 공을 던졌다.
강송구의 양손 글러브를 바라보던 브라이스 하퍼는 왼손을 꺼내든 투수를 보며 침을 삼켰다.
슈우우욱! 펑!
“스트라이크!”
초구부터 심상치 않았다.
몸쪽 깊게 넣은 포심 패스트볼.
99마일의 압도적인 구속.
노쇠화된 브라이스 하퍼가 건들기 힘은 공이었다.
하지만 경험이 가득 쌓인 노장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인내하기 시작했다.
강송구는 그런 브라이스 하퍼가 가장 까다로웠다.
‘이빨이 빠져도 발톱은 남은 늙은 호랑이.’
이빨이 빠져도 호랑이는 호랑이다.
발톱이 달린 앞발을 사람에게 휘두르면 사람은 ‘사람이었던 것’으로 변하겠지.
그렇기에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오랜만이군.’
등 뒤에서 경고음이 들린다.
물론, 그건 착각이다.
하지만 등줄기가 살짝 서늘해졌다는 것은 사실이다.
우효도 갑자기 스위치가 올라간 강송구를 보며 쫑알쫑알 떠들던 입을 꾹 닫았다.
오늘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승부터가 지금이라는 사실을 야구의 요정도 깨달았으니까.
2구째는 몸쪽 컷 패스트볼.
포심 패스트볼과 비슷한 구속으로 파고든 컷 패스트볼을 보며 브라이스 하퍼가 혀를 내둘렀다.
변형 패스트볼이든.
포심 패스트볼이든.
지금의 브라이스 하퍼가 공략하기에 어려운 공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렇기에 브라이스 하퍼는 자신이 원하는 코스로 날아들 패스트볼을 기다렸다.
하지만 강송구는 그가 원하는 코스로 쉽게 공을 던져주지 않고 있었다.
‘브라이스 하퍼에게 거의 유일하다 싶은 핫존에 어설픈 공을 넣을 생각은 없다.’
늙은 생강이 맵다고.
강송구는 아까와 다르게 이번 승부에서는 직접 볼 배합을 가져가며 천천히 카운트를 늘려갔다.
-카운트는 이제 2-2의 상황.
-캉이 제법 신중하게 공을 던지고 있습니다.
-앞선 이닝에선 굉장히 공격적으로 스트라이크 존에 공을 찔러넣던 캉이였는데……. 이번 타석에서만큼은 정말 차근차근 돌을 쌓아 올리는 것처럼 공을 던집니다.
-브라이스 하퍼도 굉장히 끈질깁니다.
-계속해서 공을 커트하고 있습니다.
7구째.
이번에는 바깥쪽 낮은 코스.
강송구가 가장 잘 던질 수 있는 코스에 꽂아 넣은 커브에 브라이스 하퍼가 침을 꿀꺽 삼켰다.
주심의 성향에 따라 스트라이크를 받을 수 있는 공이었기에 그는 살짝 긴장했다.
하지만 주심은 이번에 그의 편이었다.
“볼!”
풀카운트까지 온 승부.
그가 숨을 깊게 내쉬었다.
드디어 온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원하는 코스.
‘몸쪽 높은 코스.’
강송구가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그의 왼손에서 빠져나오는 공.
‘온다!’
몸쪽 높은 코스로 날아든 포심 패스트볼.
그가 노리던 코스로 노리던 공이 날아든다.
100마일도 무섭지 않았다.
‘계속해서 지켜보면서 적응했으니까.’
하지만.
결과는 그가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부우우웅!
시원하게 허공을 가른 배트.
공은 포수의 미트에 파고들었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완벽한 패배에 브라이스 하퍼가 혀를 내두르다가 묘한 경기장 분위기에 전광판을 보고 피식 웃고 말았다.
[103마일]
“Fxxk.”
이러니 질 수밖에 없지.
고개를 절레 흔든 하퍼가 더그아웃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