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불운(1)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메이저리그도 이제 5월이 지나 6월에 도달했다.
한창 순위 경쟁으로 바쁠 시기.
라스베이거스 웨스트스타즈는 무난한 승률을 기록하며 지구 1위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팬들의 분위기는 썩 좋지 않았다.
[강송구 2경기 연속 승리 못 챙겨.]
[시애틀전 7이닝 1실점 시즌 첫 패배를 기록!]
[텍사스전 8이닝 1실점의 호투에도 승리가 없는 강송구.]
[라스베이거스 2위인 시애틀과 1경기 차이!]
[강송구,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원정 3연전 두 번째 경기에 출격 준비 완료!]
-점수 좀 만들어라! 아니; 어떻게 15이닝 2실점 하고 두 경기 모두 무승인 건 너무한 거 아니냐?
-미쳤넼ㅋㅋㅋㅋ 아니 요즘 강송구 등판할 때마다 왜 이렇게 득점 지원이 지지부진함?
-응, 꼬우면 무실점으로 9이닝 막아.
-다른 경기에선 10점씩 팍팍 때려주던 라스베이거스의 타자들이 강송구만 올라오면 허우적거림;
-강송구 왕따 아니냐?
-저 덩치에 왕따면 그게 더 호러블한데;
-왕따 시켰다가 머리통이 뽕따된다.
“음…….”
강송구도 어렴풋이 알고 있다.
최근 자신이 등판하는 경기에서 라스베이거스의 타자들이 썩 좋은 결과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건 우연이었다.
뭐, 가끔은 그런 우연이 길게 이어지는 일도 있지만……. 강송구는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현대 야구에서 승수는 클래식한 지표였다.
-그런 것 치고는 다음 등판을 너무 살벌하게 준비하는 거 아니야? 클리블랜드에 무슨 원한이라도 있어?
우효의 말에 강송구가 손에 들린 자료를 내려놨다.
평소보다 훨씬 많은 양의 자료가 강송구의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우효는 요즘 맛 들인 프라이팬에 바짝 익힌 파인애플을 입에 넣으며 고갤 흔들었다.
-이러다가 다음 경기도 승수를 못 챙기는 거 아니야?
우효의 농담에 강송구가 덤덤한 표정으로 턱을 쓸었다.
정말 그럴까?
적어도 다음 경기는 승리를 챙길 수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강송구가 다시금 손에 들고 있는 자료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클리블랜드 3연전 두 번째 경기.
강송구는 또 승리를 거머쥘 수 없었다.
[강송구, 9이닝 1실점 호투에도 시즌 두 번째 패배!]
[라스베이거스 1 대 0로 무력하게 지다.]
[흔들리는 클리블랜드의 투수들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한 라스베이거스 타선!]
그리고 3경기 연속 강송구의 무승이 이어졌다.
우효는 강송구가 시즌 두 번째 패배를 기록하자 묘한 표정을 지으며 강송구에게 물었다.
-너 왕따냐?
그 물음에 강송구가 눈을 찌푸렸다.
저 요망한 고슴도치가 내뱉는 독설에 평소에도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던 강송구가 순간적으로 우효의 중성화 수술을 머릿속에 떠올렸을 정도였다.
뭐, 사실 그런 말이 나올 만한 상황이었다.
3경기 연속 무승.
노디시전 한 번과 시즌 두 번의 패전.
하지만 최근 3경기 성적만 놓고 본다면 24이닝 3실점에 ERA 1.13을 기록하고 있었다.
사실 최소한 한 경기에서 승리를 가져와도 이상할 것이 없는 성적이었다.
-우효호호홋! 드디어 너도 운빨이 다 떨어졌구나! 내 생각에 한국에서 너무 운이 좋았다! 그때 운을 모두 소진해서 이제 고통을 받는 거야! 우효호호홋!
그렇다기에는 경기 내에서 야수들에게 수비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은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저 잠깐 있는 흔들림일 뿐이다.’
강송구는 굳건히 마음을 다잡았다.
다음 등판인 뉴욕 양키스 원정.
다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 * *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3연전에서 위닝시리즈를 가져간 라스베이거스는 이어진 신시내티 레즈와 홈 3연전에서도 위닝시리즈를 가져가며 최근 6경기 4승 2패의 성적을 기록했다.
그리고 홈 경기가 끝나기 무섭게 라스베이거스의 선수단은 비행기에 올라 뉴욕으로 향했다.
“다른 도시와 차원이 다르네.”
“괜히 뉴욕이 아니지.”
화려한 것으로 치자면 라스베이거스도 부족함이 없는 멋진 도시였지만, 뉴욕도 그 나름의 멋이 있었다.
뉴 양키 스타디움 근처에 있는 호텔에 짐을 푼 라스베이거스의 젊은 선수들은 뉴욕에 갓 상경한 촌뜨기처럼 멍하니 뉴욕의 전경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런 감상도 잠깐이었다.
내일 있을 경기.
그들의 1선발 투수가 마운드에 오르는 날이었다.
최근 경기력은 좋지만, 이상하리만큼 강송구가 등판하는 경기에서는 썩 좋은 경기력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 극단적으로 말해서 단 1점의 점수도 못 만들었다.
‘좋지 않지.’
‘캉은 팀의 에이스야. 팀의 에이스에게 타선의 부진으로 승리를 안겨주지 못하면 분위기가 가라앉을지도 몰라.’
‘캉이야 이런 상황에 흔들리는 투수는 아니지만, 이런 분위기가 계속 이어지면 캉이 등판하는 경기는 징크스처럼 타선이 가라앉을 수 있어. 이번에 끊어야 해.’
타자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번 경기만큼은 달라야 했다.
그렇게 뉴욕의 밤이 깊어갔다.
다음날.
시간은 빠르게 지나 경기 시각이 다가왔다.
구단이 제공한 버스를 타고 뉴 양키 스타디움에 도착한 라스베이거스의 선수단은 일찍 경기를 준비했다.
물론, 그건 양키스의 선수단도 마찬가지였다.
상대는 최근 3경기에서 승리가 없는 선수였지만, 현재 AL에서 가장 많은 승수를 쌓은 투수이기도 했다.
“좋아. 친구들! 오늘 상대는 라스베이거스의 타이탄이다. 이번 시즌 누구보다 먼저 10승을 찍은 투수지만, 지난 3경기 동안 승리가 없는 투수다.”
뉴욕 양키스의 젊은 감독.
블레이크 버니타가 선수들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하지만 우습게 볼 수 없다. 그 괴물이 지난 3경기에서 경기당 평균적으로 허용한 점수는 고작 1점이니까.”
그래, 그게 강송구였다.
최근 3경기에서 무승.
하지만 그가 기록한 세부적인 기록을 보면 승리를 쌓지 못한 게 이상할 정도였으니까.
“오늘 삼진을 당해도 좋다. 어떻게든 저 망할 괴물에게 한 점만 만들어라. 나머지는 우리 투수진이 어떻게든 해줄 테니까. 오늘 경기는 분명히 단 1점으로 갈릴 것이다.”
라스베이거스의 타선은 오늘 부진할 것이다.
다른 팀들처럼 저 괴물에게 1점을 빼앗는다면 충분히 승리를 가져올 가능성이 컸다.
“리그 최강의 투수라고 생각하고 덤벼. 하지만 머릿속으로는 항상 기억해라 저런 괴물도 사람이다. 그 대단한 트라웃도 타율 4할을 넘긴 시즌은 딱 한 번뿐이었으니까.”
그 말이 끝이었다.
하지만 선수들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블레이크 버니타 감독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런 선수단을 쭉 둘러보고 라커룸을 빠져나갔다.
‘느낌이 좋군.’
다른 구단도 저 괴물에게 승리를 빼앗아왔다.
뉴욕 양키스도 다른 구단처럼 할 수 있었다.
지구 3위.
와일드카드 경쟁을 위해서는 꼭 승리가 필요한 상황에서 만난 라스베이거스의 괴물을 떠올리며 블레이크 버니타 감독이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 * *
1회 초.
양키스의 1선발.
아드리안 모레혼이 마운드에 올랐다.
그는 이번 시즌 13경기 6승 4패 ERA 2.87을 기록하며 양키스의 에이스에 어울리는 활약을 보여주고 있었다.
지난 시즌과 다르게 확실하게 득점 지원을 받으면서 5월 말부터 시작된 양키스의 반등에 큰 주축이 되고 있었다.
“오늘 공 끝이 좋은데?”
“쉽지 않겠네.”
“아드리안의 패스트볼은 20~80스케일에서 70점은 받을 수 있는 좋은 구종이지.”
압도적인 스터프.
그 뒤에 나오는 플러스-플러스급의 커브.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삼진을 허용한 라스베이거스의 선두타자인 조쉬 마이어스가 혀를 내두르며 더그아웃에 들어왔다.
“어때?”
“컨디션이 제일 좋은 날인 것 같은데?”
“그 정도야?”
“초구 타격을 할 때 타이밍을 완벽히 잡았는데도 배트가 밀린 거 봤잖아.”
“좋지 않네…….”
몇몇 젊은 선수들이 얼굴을 굳혔다.
컨디션이 좋은 아드리안 모레혼이라면 쉽게 공략하기 어려울 테니 말이다.
아드리안 모레혼은 남은 타자를 상대로도 자신이 왜 양키스의 에이스인지 확실히 보여줬다.
“커브의 궤적이 미쳤군.”
“타자들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졌어.”
“저 커브가 진짜 미쳤다니까?”
오늘 경기를 보기 위해 경기장을 찾은 기자들이 혀를 내두르며 아드리안 모레혼을 칭찬했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은 또 바뀌었다.
이번 시즌 가장 괴물 같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는 라스베이거스의 타이탄이 마운드에 올랐으니까.
“캉이 마운드에 올랐군.‘
“괴물이지.”
“라스베이거스가 이번 시즌에 월드시리즈에 진출에 성공한다면, 그 지분 중 절반은 저 투수의 몫일 거야.”
슈우우욱! 팡!
미트에 꽂히는 기분 좋은 소리에 연습 투구를 받아주던 조던 델고도의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컨디션이 아주 환상적이네.’
저벅저벅.
그때 뉴욕 양키스의 1번 타자이자 현재 AL 동부에서 가장 뜨거운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오! 드디어 메이저리그에서 만났네! 가빈 럭스! 시범경기와 어떤 부분이 다를지 궁금한데?
우효의 감탄에 강송구가 타자를 바라봤다.
가빈 럭스.
LA 다저스의 슈퍼 유망주였던 선수이자.
다저스에서 6번의 올스타와 4번의 실버슬러거를 기록하며 팬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은 스타였다.
양키스와 FA 계약한 첫해인 이번 시즌에도 그는 자신의 명성에 어울리는 활약을 보여주고 있었다.
‘타율은 고작 0.257이지만, 준수한 출루율과 장타력으로 팀의 승리에 제법 많은 도움이 되고 있지.’
전성기와 비교하면 많이 부족했다.
하지만 가빈 럭스는 아직 6월 중순임에도 15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베테랑의 저력을 보여줬다.
‘방심할 수 없다.’
강송구의 1회 말은 오른손이었다.
그가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초구는 바깥쪽에 잘 제구된 패스트볼.
가빈 럭스는 수비 시프트가 왼쪽에 쏠려 있음에도 자신 있게 배트를 휘둘렀다.
따악!
“파울!”
뉴 양키 스타디움을 가득 채운 홈팬들이 가빈 럭스의 초구 타격이 파울이 되자 아쉬움이 가득한 탄성을 내질렀다.
이어지는 승부.
강송구는 제대로 제구된 패스트볼에 깔끔히 배트를 가져간 가빈 럭스를 보며 다음 공을 준비했다.
‘조금 어렵게 가야겠어.’
굳이 쉬운 공을 줄 필요 없다.
그건 조던 델가도도 똑같이 생각했다.
2구는 몸쪽 싱커.
수비 시프트는 아까와 조금 달랐다.
가빈 럭스는 현란하게 움직이는 라스베이거스의 야수들을 보며 두 눈을 찌푸렸다.
‘땅볼을 유도할 생각인가?’
싱커나 스플리터가 나올 확률이 높은 상황.
하지만 그는 조금 망설였다.
‘캉이 오른손으로 던질 때는 수비 시프트를 걸고 다른 공을 던져서 헛스윙을 유도하기도 했는데 말이지…….’
과연 그의 선택은 어떨까?
그가 배트를 조금 헐겁게 잡았다.
슈우우욱! 펑!
“볼!”
자신이 좋아하는 코스에 떨어지는 싱커를 보며 가빈 럭스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배트를 내밀었다면 무조건 아웃이었군.’
확실히 참는 게 답이었다.
3구째.
강송구의 선택은 너클볼이었다.
“스트라이크!”
“쯧…….”
가빈 럭스가 두 눈을 찌푸렸다.
이건 어쩔 수 없었다.
견적이 나오지 않는 공이었다.
‘여기서 너클볼이라니…….’
강송구가 던질 수 있는 구종을 모두 떠올린 그가 혀를 내두르며 잠깐 타임으로 시간을 벌었다.
이어지는 4구째 승부.
그는 다음 공으로 떨어지는 변화구를 생각했다.
‘캉이라면 여기서 유인구를 하나 던지겠지.’
그가 이번에는 배트를 꽉 쥐었다.
하나 큰 걸 때리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강송구가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몸쪽 하이 패스트볼?’
상대는 오른손이었다.
고작 90마일의 포심 패스트볼.
‘날 너무 우습게 보는군!’
가빈 럭스가 몸을 살짝 눕히며 배트의 각도를 조절해 몸쪽으로 날아드는 높은 공에 대비했다.
그는 확신했다.
이 각도로 배트를 내밀면 강송구가 던진 패스트볼은 홈런이 되어 뉴 양키 스타디움의 외야를 넘을 거라고.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다르게 강송구가 던진 공은 가빈 럭스의 시야에서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아!’
정확히는 멈췄다가 사라졌다는 뜻이었다.
‘체인지업!’
틱! 소리와 함께 움직이는 라스베이거스의 내야수들.
투수 정면으로 향했기에 강송구가 가볍게 공을 잡아 일루수가 들고 있는 미트에 정확히 연결했다.
“아웃!”
1회 말의 첫 번째 승부를 깔끔히 잡아낸 강송구.
그가 덤덤한 표정으로 로진백을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