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대기록(2)
7회 초.
아웃 하나를 깔끔히 잡아낸 강송구가 다음 타석에 들어서는 타자를 조용히 지켜봤다.
-저 친구가 제일 위험하지?
우효의 말에 강송구가 고갤 끄덕였다.
‘평소에는 그 뒤에 나오는 코리 시거도 무섭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저 친구가 제일 위험하긴 하지.’
초구는 바깥쪽 포심 패스트볼.
앞선 이닝보다 조금 더 빠지는 코스였다.
하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슈우우욱! 따악!
-오우! 라이언 클리퍼드의 타구가 아쉽게도 폴대를 넘어가지 못하며 그대로 파울 홈런이 됩니다.
-바깥쪽 포심 패스트볼을 노렸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코스가 조금 나쁘지 않았나 싶습니다.
-라이언 클리퍼드가 아쉬워합니다.
‘예상은 했지만…….’
저런 펀치력이 있어서 조심스러웠다.
그래도 초구가 파울이 된 이상, 이제부터 그가 가슴을 졸이며 공을 던질 필요는 없었다.
상대가 노리는 공이 어떤 것인지 알아낸 이상 이 승부는 이제 투수에게 8할이 넘어온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윽고 2구째 공이 홈플레이트로 날아들었다.
2이닝 정도 사라졌던 컷 패스트볼.
그 공이 날아들자 라이언 클리퍼드가 몸을 움찔 떨며 뒤로 살짝 물러났다.
몸쪽으로 바짝 붙어 날아든 공은 그대로 조던 델가도가 들어 올린 미트에 틀어박혔다.
“스트라이크!”
“이게요?”
“불만 있나?”
“아니요.”
라이언 클리퍼드는 생각보다 몸쪽 존에 후한 주심의 판정에 당혹감을 드러내며 고갤 절레 흔들었다.
마운드에 있던 강송구는 조던 델가도가 만들어준 스트라이크를 보며 속으로 흡족함을 드러냈다.
‘역시……. 중요한 순간에 하나 만들어주는군.’
-실투였지?
‘그래.’
조던 델가도의 프레이밍이 아니었다면 이번 승부는 투 스트라이크가 아니라 1-1이 되었을 것이다.
‘덕분에 더 편하게 승부에 임할 수 있겠어.’
3구째.
다시 바깥쪽.
강송구의 선택은 좌우 로케이션이었다.
어떻게 보면 ‘또?’라는 말이 나올 수 있지만, 오늘 경기 내내 볼티모어의 타자들이 강송구의 좌우 로케이션이 휘둘린 것을 보면 아직도 써먹을 만했다.
슈우우욱! 펑!“
“볼!”
라이언 클리퍼드가 숨을 길게 내뱉었다.
‘몸쪽 커터에 맞춰보자. 장타를 노리지 말고 일단 출루를 노려서 캉의 멘탈을 흔드는 거야.’
다음 공이 몸쪽으로 날아들기를 기다리는 라이언 클리퍼드에게 강송구는 그가 원하는 코스로 공을 던져줬다.
물론, 이번에는 떨어지는 공이었다.
“볼!”
“흡!”
아슬하게 배트를 내밀다 멈추는 데 성공한 라이언 클리퍼드가 소름 돋을 정도로 아슬하게 빠진 강송구의 스플리터 궤적을 떠올리며 입안의 살을 살짝 깨물었다.
‘정신 차리자. 캉의 스플리터도 생각해야지.’
이제 다시 바깥쪽 공이 날아들까?
그런 생각을 하며 라이언 클리퍼드가 타격 자세를 잡기 무섭게 아까보다 훨씬 인터벌을 빨리 가져간 강송구가 곧바로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뭐야?’
당연히 라이언 클리퍼드는 당황했다.
사인 교환도 하지 않고 바로 강송구가 피칭을 이어나간 것이니 말이다.
급히 집중하기 시작한 그의 눈앞으로 강송구가 던진 위닝샷이 날카롭게 날아들었다.
슈우우우욱! 따악!
-하이 패스트볼!
-쳤습니다! 그대로 높게 뜨는 공!
-포수가! 조던 델가도가 달려가서! 잡습니다! 자신의 머리 위로 뜬 타구를 깔끔히 처리하는 조던 델가도!
-캉이 7회 초의 두 번째 아웃도 깔끔히 잡았습니다!
“하이 패스트볼?”
마지막 강송구의 선택은 그저 높은 코스로 들어가는 90마일짜리 포심 패스트볼이었다.
라이언 클리퍼드는 허탈한 표정으로 잠깐 마운드를 바라보다가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어서 코리 시거와 승부에서 8구 승부 끝에 삼진을 잡아낸 강송구가 마운드를 내려왔다.
이제 남은 아웃 카운트는 단 6개.
777 베가스 그라운드가 조금씩 알 수 없는 묘한 긴장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 * *
[라스베이거스 웨스트스타즈 8vs0 볼티모어 오리올스]
[인터넷 중계방]
-ㅋㅋㅋㅋㅋㅋㅋ 볼티머오 쉑ㅋㅋㅋㅋ 또 실점이야?
-그만 실점해에에에에에에에에에
-캬 답은 정배였구연ㅋㅋㅋㅋㅋ 애국 배팅은 승리한다! 강송구 사랑한다!
-진짜 미쳤다; 이제 딱 6개 남았네;
-강송구! 그는 신이야! 그는 신이야!
-AL 동부 최강의 타선을 상대로 그냥 혼쭐을 내주넼ㅋㅋㅋ 알동부 빠는 야알못들 입 꾹 닫았죠?
-90마일짜리 포심 패스트볼도 하나 공략 못 하는 놈들이ㅋㅋㅋㅋㅋㅋ 뭐? AL 동부 최강 타선?ㅋㅋㅋㅋ
-마! 양키스도 강송구에게 안타 하나는 뺏었다!
이제 남은 아웃 카운트는 단 6개.
7회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송구는 8점 차이라는 든든한 점수 차이를 받으며 마운드에 올랐다.
8회 초.
라스베이거스의 야수들이 굳은 표정을 지었다.
오히려 마운드에 있는 강송구의 무덤덤한 표정이 더 편안해 보일 정도였다.
모두가 강송구에게 시선이 쏠렸다.
마운드에 선 강송구는 뜸을 들이지 않고 8회 초의 첫 타자를 상대로 초구부터 몸쪽에 89마일짜리 포심 패스트볼을 던지며 자신의 강심장을 증명했다.
“캬……. 그래, 남자라면 저래야지.”
“멋지다.”
“저 상황에서 그대로 몸쪽으로 89마일짜리 공을 꽂아 넣네……. 저건 진짜 난 놈이야.”
“저 멋진 눈빛을 봐……. 분명히 오늘 경기 남은 타자들의 정보를 머릿속에서 정리하고 있을 거야.”
“그렇겠지. 모두가 캉의 제구나 뛰어난 구위에 집중하고 있지만……. 사실 캉의 진짜 장점은 상대방의 정보를 이용하는 뛰어난 피칭에 있으니 말이야.”
모두가 반짝이는 눈으로 강송구를 바라본다.
하지만 이들은 알까.
강송구는 지금 모두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고슴도치 한 마리에게 조금 전에 ‘더블 파인애플 하와이안 피자’를 사주겠다고 말한 참이었다.
-그거 맛있는 거야?
‘나도 모른다. 그래도 네가 좋아하는 파인애플이 듬뿍 들어갔으니 맛있지 않겠어?’
-으음……. 조금 기대가 된다!
고슴도치가 이걸 먹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강송구는 오늘 경기를 깔끔히 끝내고 우효에게 줄 피자를 잠깐 생각하며 머릿속을 잠깐 어지럽히던 잡념을 털어냈다.
이어지는 승부.
강송구의 2구째 선택은 높은 코스로 파고드는 컷 패스트볼이었다.
그리고 결과는 높게 떠오른 공과 살짝 금이 간 배트를 들고서 전력으로 1루로 뛰는 타자의 모습이었다.
“아웃!”
-캉! 8회 초의 첫 번째 아웃을 깔끔히 잡아냅니다.
-이제 남은 아웃 카운트는 단 5개!
-정말 무서운 활약을 보여주고 있는 캉!
8회 초의 두 번째 타자이자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5번 타자인 마이크 가드너가 타석에 들어섰다.
준수한 5툴 플레이어지만, 그 오각형의 크기가 다른 5툴 플레이어보다 아주 작은 타자.
한마디로 뚜렷한 약점이 없지만, 반대로 그만한 강점이 없는 무난한 타자라는 뜻이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강송구가 가장 잡아먹기 쉬운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초구는 바깥쪽 커브.
이어지는 2구째는 몸쪽 낮은 너클 커브.
3구째는 뜬금없는 타이밍에 나온 너클볼.
마지막 4구째 몸쪽 높은 코스로 들어가는 포심 패스트볼로 깔끔히 내야 뜬공을 유도하며 아웃.
단 4구 만에 아웃 하나를 더 잡아낼 수 있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끝는 승부.
덕분에 강송구는 체력적 여유를 느끼며 8회 초의 마지막 타자가 타석에 들어서기를 기다렸다.
이번 이닝의 마지막 타자.
6번 타자 루이스 메디나.
볼티모어의 타선 중에서 가장 장타력이 있는 그가 타석에 들어서자 조던 델가도가 바짝 긴장했다.
‘어쩌면 이번 승부가 제일 고비일 수 있어.’
라이언 클리퍼드보다 홈런 파워에 있어서 더 높은 잠재력을 평가받는 타자였으니까.
당연히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강송구는 고민하지 않았다.
몸쪽 컷 패스트볼.
단호한 강송구의 사인에 조던 델가도가 허탈하게 웃으며 조심스럽게 미트를 들어 올렸다.
‘대기록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어떻게 저런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지?’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슈우우욱! 펑!
“스트라이크!”
초구는 스트라이크.
이어지는 2구째는 바깥쪽 커브로 루이스 메디나의 배트를 유인한 뒤에 3구째 다시 몸쪽 스플리터를 던졌다.
이어서 4구째 몸쪽 하이 패스트볼.
따악!
“파울!”
모든 공에 배트가 나간 루이스 메디나.
그가 이어진 5구째에도 배트를 내밀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의 배트가 강송구가 던진 공에 닿지 않고 허공을 갈랐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체인지업.
잠깐 감춰놨던 강송구의 송곳니가 드러났다.
“하! 체인지업이라니.”
“갑자기 던지기 시작한 하이 패스트볼과 커브에 집중하느라 체인지업을 잠깐 잊었어.”
“저건 트라웃이 와도 칠 수 없을 거야.”
“모르지. 그 트라웃이라면 때려낼 수 있을지도.”
볼티모어의 타자들은 강송구가 던진 체인지업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 끝이 난 8회 초.
강송구가 덤덤한 표정으로 마운드를 내려갔다.
* * *
“찰리! 찰리! 내가 보고 있는 게 진짜죠?”
“네, 현실이죠.”
“후우……. 믿을 수가 없네요. 저러면 10년 4억 달러로도 무리가 아닐까요? 캉을 꼭 잡고 싶은데요.”
캐롤 웰링턴의 두 눈이 활활 타올랐다.
“어……. 그러면 돈을 더 투자하면 되죠.”
“그래! 10년 4억 달러가 안 되면 10년 4억 5천만 달러를 쏟아 넣으면 되죠! 그렇게 쉬운 방법이 있었어.”
찰리 브라운은 캐롤 웰링턴의 호들갑을 보며 침을 꿀꺽 삼키고 있었다.
‘그 4억 달러를 다른 선수들에게 투자하면 라스베이거스는 내년에 윈나우로 갈아탈 수 있습니다.’
물론, 그걸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강송구의 몸값이 될 수 있는 10년 4억 달러가 이상하리만큼 아깝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777 베가스 그라운드는 이제 침묵에 빠졌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마운드에 오른 투수를 배려해서 그런 것이다.
두 사람의 시선이 강송구에게 집중되었다.
“후우…….”
캐롤 웰링턴이 더위를 느꼈는지 와이셔츠 단추를 살짝 풀고 다시금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켰다.
찰리 브라운은 머릿속으로 계속 이번 강송구의 피칭이 라스베이거스에 어떤 영향을 줄지 생각했고.
그러는 가운데 8회 말이 끝났다.
이제 마지막 이닝을 막기 위해서 마운드에 오르는 강송구를 보며 두 사람이 두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그 눈빛도 잠깐이었다.
두 사람의 표정이 빠르게 바뀌었다.
아니, 조용히 입을 닫고 있던 777 베가스 그라운드의 홈팬들도 마찬가지였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타이탄! 타이탄! 타이탄! 타이탄!
우렁한 구호가 들려왔다.
그리고 마운드에 도착한 강송구가 들고 있던 글러브를 왼손이 아닌 오른손에 꼈다.
-언블리버블! 미쳤습니다! 캉이 9회 초의 마지막 이닝에 아껴왔던 왼손을 꺼내 들었습니다!
-이 선수는 쇼가 뭔지를 알고 있습니다! 보세요 라스베이거스의 홈팬들이 내지르는 함성을요!
동시에 볼티모어의 더그아웃은 그야말로 묘지에 매장된 시체들처럼 입을 꾹 닫았다.
‘하필이면 마지막 이닝에 왼손이라니?’
‘100마일이라고! 100마일!’
‘하필 여기서 좌완이라고?’
나쁘지는 않았다.
7-8-9로 이어지는 타선에서 7번 타자인 애들리 러치맨과 8번 타자인 데븐 롱은 좌타자였으니까.
좌우 놀이를 좋아하는 감독이 보면 오히려 해볼 만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강송구의 왼손은 달랐다.
직접 본 타자들도 그렇고 영상으로 강송구의 왼손을 조사한 볼티모어의 타자들도 강송구의 왼손만큼은 경계했다.
그만큼 강송구가 가진 왼손의 의미는 달랐다.
그런 왼손이 마지막 이닝에서 나왔다.
그것도 퍼펙트게임을 남겨둔 9회 초에 말이다.
모든 스킬을 사용한 강송구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타석에 들어선 애들리 러치맨.
그가 긴장한 표정으로 좌타석에 들어섰다.
“스트라이크!”
초구는 제구를 신경 쓰지 않은 거친 100마일짜리 포심 패스트볼이었다.
“Fxxk.”
애들리 러치맨은 강송구의 좌완에서 나온 100마일짜리 포심 패스트볼을 본 순간 욕설을 내뱉었다.
특히 앞선 8이닝 동안에 90마일의 공에 익숙해진 타자에게 10마일 차이가 나는 이 공은 그야말로 절대 때려낼 수 없는 마구에 가까운 공이었다.
“스트라이크!”
2구째는 101마일짜리 컷 패스트볼.
허탈했다.
작은 희망이 날아간 느낌.
물론, 이게 끝이 아니었다.
강송구는 애들리 러치맨의 기분을 진창까지 빠트리는 체인지업을 던지며 삼진을 잡아냈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하나가 순식간에 삭제되었다.
이어서 8번 타자 데븐 롱의 타석.
그도 다를 것이 없었다.
강송구가 공을 던지자.
주심이 스트라이크를 외쳤다.
-그냥 전지전능한 신인데?
우효는 혀를 내두르며 고갤 흔들었다.
물론, 그런 감상은 잠깐뿐이었다.
이 작은 고슴도치는 파인애플이 잔뜩 들어간 하와이안 피자가 무엇인지 상상하기 바빴으니까.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두 개의 아웃이 사라졌다.
이제 남은 아웃 카운트는 단 하나.
거인과 같은 강송구를 보며 타석에 들어선 볼티모어의 9번 타자인 조쉬 뉴트론이 침을 꼴깍 삼켰다.
초구는 우타자 몸쪽에 바짝 붙는 패스트볼.
“스트라이크!”
이어지는 2구째.
우타자 몸쪽에 바짝 붙는 컷 패스트볼.
“스트라이크!”
그리고 마지막 3구째.
100마일에 가까운 구속의 폭력에 휘둘리던 타자에게 안식을 찾아주는 마지막 위닝샷은 체인지업이었다.
그리고 주심의 콜이 들려왔다.
“스트라이크 아웃!”
잠깐의 고요함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고요함 뒤에 어마어마한 함성이 폭발음처럼 모두의 귀를 때리기 시작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777 베가스 그라운드가 거대한 함성에 흔들렸다.
동시에 뛰쳐나오는 라스베이거스의 선수들.
“으하하하! 미쳤어! 미쳤다고!”
“캉! 캉! 캉!”
“이리와! 우리 슈퍼에이스!”
“센디 쿠팩스가 기록한 14k 최다 탈삼진 퍼펙트를 아득히 넘어버렸다고 이 괴물아! 17k 퍼펙트야! 17k 퍼펙트!”
“메이저리그 통산 25번째 퍼펙트게임이라고! 메이저리그 통산 25번째에에에에에!”
모두가 기뻐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 통산 25번째 퍼펙트게임을 기록한 강송구의 시선은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도 잠깐이었다.
덤덤했던 표정이 지워지고.
강송구가 누구보다 환히 웃었다.
“완벽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