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이닝이터(2)
투수에게 가장 중요한 지표 중 하나는 이닝이다.
그건 데드볼 시대가 지나고 라이브볼 시대가 찾아왔음에도 딱히 달라지지 않은 진리에 가깝다.
투수의 분업화가 이루어져 이제는 오프너가 심심치 않게 보이는 현대의 야구에서도 이닝을 길게 소화해 주는 이닝이터의 효용성은 그 어떤 투수보다 중요했다.
그렇기에 ‘이닝이터’라는 말이 생겼다.
물론, 많은 공을 던질 수 있다고 이닝이터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제아무리 고무 같은 팔과 강철로 만들어진 어깨를 가지고 있는 투수라도 일정 개수의 공을 던진 순간부터 공의 구속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일정한 퀄리티를 유지하며 오래 던질 수 있는 투수가 이닝이터가 되기에 가장 유리하다.
그렇다고 공을 빠르고 오래 던질 수 있는 능력만 있다고 모두가 이닝이터가 되는 것은 아니다.
9이닝을 소화해도 한 경기에 10점씩 실점하면 그건 이닝이터가 아니라 그냥 패전처리 투수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닝이터’라는 말이 붙을 수 있는 투수는 그 리그에서 몇 되지 않는다.
-쳤습니다!
-라스베이거스 웨스트스타즈! 10회 초에 드디어 점수를 만들면서 드디어 0의 행진이 멈췄습니다.
-2 대 0으로 달아나는 라스베이거스!
10회 초.
드디어 점수가 나왔다.
지긋지긋했던 균형이 무너진 것이다.
그리고 찾아온 10회 말.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타자들은 예상을 넘어선 ‘이닝이터’가 마운드에 오르자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홀리카우…….”
“우리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지금 캉이 마운드에 오르는 거야? 뭐가 부족해서? 오늘 9이닝을 무실점으로 소화했잖아! 이미 자기 업무를 다 끝낸 공무원이랑 다를 게 뭐가 있느냐고!”
그래, 이미 오늘 강송구는 자기 몫을 다 보여주었다.
7이닝만 소화해도 ‘와 저 투수 이닝이터다!’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 현 메이저리그의 상황인데, 강송구는 그것을 한참 넘어서 10회 말에도 마운드에 오르고 있었다.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홈팬들은 물론이고 오늘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중계진도 경악에 빠졌다.
[댓글창]
-강송구 10회 말 입갤ㅋㅋㅋㅋㅋㅋ
-???: 점수가 나올 때까지 마운드에 오르면 알아서 승리 투수를 만들어주겠지.
-???: 송구야……. 우짜노 여기까지 왔는데…….
-ㅋㅋㅋㅋㅋㅋ 미쳤넼ㅋㅋㅋ
-아니;; 무슨 기록이 달린 경기도 아니잖아? 왜 강송구가 연장전까지 뛰는 거야? 뭐야? 더블헤더인 거야?
-아무리 투구수가 넉넉해도 9이닝을 뛴 투수다. 당연히 체력적인 부담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라스베이거스가 미쳤네;
한국 야구팬들도 난리가 아니었다.
그런 가운데 10회 말의 선두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4번 타자 로간 브라보가 타석에 들어섰다.
‘어떻게든 점수를 만든다.’
로간 브라보는 배트를 짧게 쥐며 생각했다.
큰 타구는 버리고 일단 출루를 노린다.
야구에서 홈팀이 정규이닝 마지막 이닝은 9회 말에 공격할 기회를 얻는 것은 경기장까지 찾아준 홈팬들이 마지막까지 역전의 기대를 한 채 경기를 볼 수 있도록 하려는 장치다.
10회 말도 똑같았다.
여기서 딱 3점만 만들면 된다.
그렇게 되면 휴스턴은 환상적인 역전승을 거둠과 동시에 저 망할 투수에게 시즌 첫 패배를 안기게 된다.
홈팬들이 긴장 어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로간 브라보는 숨을 크게 내뱉었다.
‘충분히 지쳤을 거다.’
9이닝을 소화한 투수였다.
체력의 한계가 찾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 다르게 91마일의 컷 패스트볼이 우타자 바깥으로 흘러갔다.
펑!
미트에 틀어박힌 공의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이제 10회 말인데 구위가 떨어지지 않았다고?’
로간 브라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구속도 앞선 이닝과 비슷했다.
처음으로 상대가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슈우우욱! 펑!
“스트라이크!”
초구에 압도당한 로간 브라보는 연이어 날아든 너클커브에 배트를 내밀 생각을 하지 못했다.
다른 구종은 많이 봤지만, 강송구가 로간 브라보를 상대로 너클커브를 던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집중해!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어!”
“로간! 로간! 로간! 로간!”
홈팬들이 내지르는 환호성.
순간적으로 로간 브라보의 머릿속에는 요기 베라의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란 명언이 떠올랐지만, 사실 그는 누구보다 2 대 0으로 벌어진 점수를 쉽게 따라가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따악!
-높게 떠오르는 공! 공은 그대로 좌익수의 글러브에 들어가면서 캉이 10회 말의 첫 번째 아웃을 잡아냅니다!
-날카로운 체인지업이었습니다.
터덜터덜.
외야 플라이로 끝난 로간 브라보의 타석.
뒤를 이어 들어선 휴스턴의 타자는 로간 브라보처럼 강송구에게 손쉽게 아웃을 헌납했다.
10회 말의 투 아웃 상황.
이제 남은 아웃은 단 하나.
휴스턴의 6번 타자인 켈빈 구티에레즈가 마지막 남은 기회를 잡기 위해서 악착같이 강송구의 공을 커트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나온 강송구의 위닝샷은 켈빈 구티에레즈가 때려낼 수 없는 공이었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하이 패스트볼로 마무리를 짓는 캉! 경기가 끝났습니다! 라스베이거스가 10회 초에 만든 2점을 지키며 휴스턴과 경기에서 승리를 가져갑니다!
-10이닝 완봉승! 캉이 라스베이거스에게 정규시즌 1승과 구단 최초의 10이닝 완봉승 기록을 안겨줍니다.
그렇게 경기가 끝났다. 하지만 더그아웃의 분위기는 마냥 기뻐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모두 알고 있다.
자신들이 점수를 일찍이 만들었다면 강송구가 10회 말에 마운드에 오를 일은 없었을 테니까.
터벅터벅.
조용히 더그아웃으로 들어온 강송구.
그의 표정은 1회 말의 마운드에 올랐을 때와 단 하나의 변화도 없이 무덤덤했다.
* * *
[강송구, ‘10회 말까지 마운드에 오른 이유? 앤디 요스트에게 모욕을 준 마이크 라모스와 휴스턴에게 승리의 기쁨을 주기 싫어서 억지를 부렸다.’]
[라스베이거스 웨스트스타즈의 구단 역사 최초로 10이닝 완봉승을 기록한 강송구!]
[미키 스토리 감독, ‘난 감독으로서 많이 부족한 사람이다. 남은 경기에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만들 생각이다.’]
[몇몇 전문가들 강송구의 10이닝 피칭에 ‘후반기에 좋지 않은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 밝혀.]
[라스베이거스의 팬들 ‘타이탄이 강림했다!’라며 압도적인 에이스의 활약에 기뻐하다.]
[라스베이거스에 타이탄이 등장하다!]
다음날.
라스베이거스의 라커룸에 선수들이 모였다.
그들은 주장인 랜디 에드워즈를 바라보고 있었다.
“솔직히 어제 경기는 최악이었어.”
랜디 에드워즈의 말에 몇몇 선수가 고갤 끄덕였다.
그래, 정말 최악이었다.
선발 투수의 미덕은 딱 9이닝을 깔끔히 소화하는 것이지 10이닝까지 무식하게 던지는 것이 아니었다.
“팀워크가 전혀 맞지 않았지.”
타격에서 흐름이 계속 끊겼다.
“영웅이 되고 싶은 마음……. 나도 잘 알고 있어. 나도 젊은 시절에는 클러치 상황에서 시원하게 스윙을 때렸으니까. 하지만 필요하다면 팀을 위해서 희생할 필요도 있어.”
그 말을 하고는 랜디 에드워즈가 잠깐 말을 멈췄다.
그리고 씩 웃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뭐……. 그건 팀워크라는 허상을 부르짖는 이상주의자들이 내뱉는 말이고, 사실 이기면 된다. 이기면 없던 팀워크도 생기고 기세를 타기 시작하면 절로 합이 맞아가지.”
물론, 이기면서도 팀워크가 맞지 않는 팀도 있다.
감독의 전술이나 성향과 다른 선수가 있다면 이기고 있음에도 팀워크가 맞지 않으니까.
“우리는 어제 이겼다. 저기 앉아서 다음 상대의 자료를 바라보고 있는 캉이 10이닝을 소화해서 만들어줬지.”
젊은 선수들이 강송구를 힐끗 바라봤다.
“허용되는 룰을 모두 사용해서 이긴다. 그러면 팀워크는 절로 따라온다. 영웅이 되고 싶으면 시원하게 휘둘러.”
욕심은 독이 된다.
하지만 적당한 욕심은 그 어떤 약물보다 선수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도핑이라고 봐도 좋았다.
랜디 에드워즈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꾸준한 성적을 기록하며 라스베이거스의 첫 프랜차이즈 스타가 된 이유는 이런 욕심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덕분일까?
어제 경기와 다르게 오늘 경기에서 라스베이거스의 타자들은 휴스턴의 투수들을 신나게 두들겼다.
-넘어갑니다!
-화끈한 라스베이거스! 어제 경기와 다르게 어마어마한 장타력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점수는 11 대 3까지 벌어집니다!
-휴스턴 애스트로스가 어제 경기와 다른 의미로 라스베이거스에 압도당하고 있습니다.
앤디 요스트를 조롱하는 인터뷰를 했던 마이크 라모스는 어제 경기는 물론이고 오늘 경기에서도 침묵했다.
덕분에 앤디 요스트는 오늘 경기 내내 묘한 미소를 지으며 통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9회 말까지 압도적인 점수 차이를 유지한 라스베이거스는 휴스턴 원정 2연전을 모두 승리하며 마이크 라모스와 휴스턴에게 제대로 복수를 해주었다.
그리고 며칠 뒤 SNS에 마이크 라모스가 분노에 찬 표정으로 더그아웃에 놓인 쓰레기통을 발로 차는 장면이 퍼지며 모두의 조롱을 받은 것은 작은 이슈일 뿐이었다.
* * *
분위기가 좋았다.
휴스턴과 2연전을 모두 쓸어 담은 라스베이거스는 제대로 탄력을 받았는지 최근 8경기에서 6승 2패를 기록하며 지구 1위 자리를 다시 탈환했다.
강송구는 콜로라도 로키스와 인터리그에서 등판해서 8이닝 2실점의 호투를 보여주며 승리를 거두었다.
동시에 쿠어스 필드가 왜 투수들의 무덤이라 불리는지를 생생히 경험할 수 있었던 시리즈였다.
그 강송구가 한 경기에서 2실점을 허용했다.
우효도 ‘저 공이 홈런이 된다고?’를 외쳤을 정도로 제법 많은 장타가 나와 놀란 것 같았다.
쿠어스 필드이기에 나온 실점이기도 했지만, 몇몇 전문가들은 앞선 경기에서 10이닝을 소화한 여파가 이번 경기에서 드러난 것이 아니냐는 말을 하기도 했다.
물론,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완벽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강송구도 쿠어스 필드에서는 어쩔 수 없는 한 명의 투수였다.
아무튼, 긴 원정이 끝났다.
다시 홈으로 돌아온 라스베이거스.
하루 쉬고 다음 날부터 시작되는 볼티모어 오리올스 3연전의 경기를 위해서 강송구도 숙소에서 쉬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현관 벨을 눌렀다.
찌르르르릉!
소파에 앉아서 쉬고 있던 강송구와 오랜만에 샤인머스캣을 배불리 먹던 우효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택배 시켰어?
‘딱히 시킨 게 없다.’
강송구가 의아한 표정으로 현관문을 여니 문 앞에 팀 동료인 C.J 포스터가 서 있었다.
“아! 캉……. 혹시 쉬는데 방해한 거 아니지?”
“딱히……. 일단 들어와.”
강송구의 말에 C.J 포스터가 미안함이 가득한 얼굴로 강송구의 숙소에 발을 디뎠다.
C.J 포스터를 거실 소파로 안내한 강송구는 냉장고에서 시원한 맥주 하나를 꺼내주었다.
“아, 고마워. 여기까지 오는데 땀을 많이 흘렸거든.”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온 거야?”
강송구의 물음에 C.J 포스터가 긴장 어린 표정으로 숙소까지 찾아온 이유를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캉, 내게 컷 패스트볼을 가르쳐줘.”
그 부탁에 강송구와 우효가 묘한 표정이 되었다.
C.J 포스터는 컷 패스트볼이 필요 없을 정도로 뛰어난 싱커와 커브를 갖춘 투수였다.
그런 투수가 갑자기 찾아와서 컷 패스트볼을 가르쳐달라고 하니 뭔가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이유가 뭐지? 넌 딱히 컷 패스트볼을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강송구의 물음에 C.J 포스터가 답했다.
“확실하게 5선발에 안착하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