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죄는 미워하되 휴지통은 미워하지 말라(3)
급소를 맞은 마이크 라모스가 정신을 차렸다.
다행히 2회 초 수비를 위해 필드로 나설 수 있었고, 타구도 그가 있는 방향으로 날아들지 않았다.
나쁘지 않았다.
교체되지 않고 저 망할 동양인 투수에게 복수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마이크 라모스는 지금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길!’
애초에 몸에 맞은 공이 나온 순간부터 그는 강송구가 고의로 자신을 맞춘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아니, 고의가 분명했다.
주심이나 다른 이들은 모르지만, 직접 타석에 서서 마운드에 선 투수를 보는 타자는 자신에게 날아든 공이 고의인지 아니면 실투인지를 알 수 있었으니까.
‘개자식…….’
다시금 몸쪽 근처로 공이 날아들면 마운드로 달려가야겠다고 생각한 마이크 라모스가 숨을 크게 내뱉었다.
아직도 미묘한 통증이 느껴진다.
그래서 더 짜증 났다.
‘그래도 조금 쉴 수 있겠지.’
하지만 그 생각도 잠깐이었다.
“마이크! 수비하러 나가야지.”
눈을 감고 앉아 있던 마이크 라모스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부른 선수를 바라봤다.
“뭐?”
“2회 말이 끝났어.”
“벌써?”
고개를 돌리니 무덤덤한 표정으로 마운드를 내려가는 강송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이크 라모스는 그 모습이 묘하게 얄밉게 보였다.
* * *
-3회 말! 캉이 마운드에 오릅니다.
-이번에도 오른손으로 공을 던지는군요.
-캉은 1이닝 이상을 왼손으로 던진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단 1이닝만 왼손으로 던졌음에도 그 누구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있습니다.
-타자는 8이닝 동안 톰 글래빈을 상대하다가 갑자기 랜디 존슨을 상대하는 기분을 느끼게 되죠.
-하지만 오늘은 묘하게 캉이 왼손을 일찍 꺼냈죠?
-맞습니다. 그 부분이 조금 특이한 것 같습니다.
3회 말.
강송구가 마운드에 올랐다.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타자들이 그런 강송구를 보며 조금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이번에도 왼손이 아니야.”
“그러면 계속 오른손으로만 던지는 거야?”
“모르지. 저러다가 갑자기 왼손을 꺼낼지도 모르는 거야. 야구에서 ‘무조건’이란 없는 법이니까.”
“하지만 자료를 보면 캉은 왼손으로 1이닝 이상을 소화하지 않으니까……. 어쩌면 오늘 경기에서 더는 왼손으로 던지지 않을 수 있지.”
“그러면 나쁘지는 않지.”
아무리 강송구가 오른손으로 압도적인 제구력과 무브먼트를 보여주고 있지만, 90마일 초반과 100마일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라고 할 만큼 대단했다.
휴스턴의 타자들은 90마일 초반의 패스트볼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패스트볼을 노려봐야겠다.”
“그렇지. 조금만 실투가 나와도 바로 때려낼 수 있는 공이 패스트볼이니까.”
하지만 막상 타석에 들어서면 생각했던 것과 다른 느낌의 패스트볼이 날아들었다.
퍼엉!
“스트라이크!”
바깥쪽에 절묘하게 걸친 패스트볼.
타석에 들어섰던 케스턴 히우라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미트에 틀어박힌 공을 잠깐 바라봤다.
‘이 공이 스트라이크라고?’
조금 빠졌다고 생각한 코스였으나 강송구가 그간 쌓아온 제구력이 좋다는 이미지와 헤이든 존스의 프레이밍에 주심이 완벽히 속았다.
‘미치겠군.’
물론, 이게 끝이 아니었다.
슈우욱! 펑!
타자의 배트가 허공을 갈랐다.
동시에 배트를 피한 공이 다시금 포수가 내밀은 미트에 깔끔히 틀어박혔다.
타석에 선 타자를 제외하면 누가 들어도 좋은 깔끔한 가죽 때리는 소리였다.
동시에 강송구는 작게 고갤 끄덕였다.
‘패스트볼을 노리는 건가?’
조금 노골적인 코스로 패스트볼을 찔러넣었음에도 케스턴 히우라가 배트를 내밀었다.
그렇다면 이번에 응징을 해줄 차례였다.
‘패스트볼을 노리는 타자에게 던지면 가장 효과적인 구종을 꺼내 들어야지.’
강송구의 생각을 읽은 우효가 고갤 끄덕였다.
-그래, 체인지업이지.
이윽고 강송구의 손에서 빠져나간 공.
케스턴 히우라는 조금 가운데로 몰린 코스로 날아드는 공을 보고 자신 있게 배트를 휘둘렀다.
‘아!’
순간 공이 잠깐 멈췄다.
동시에 떨어지기 시작하는 공.
케스턴 히우라가 휘두른 배트 밑으로 빠지던 공이 ‘틱!’ 소리와 함께 투수 앞으로 빠르게 굴러갔다.
강송구는 바로 자신에게 굴러온 땅볼을 처리해서 미트를 내밀고 있는 일루수에게 공을 던졌다.
그리고 이번 타석과 비슷한 장면이 3회 말에 두 번이나 더 나오면서 그대로 이닝이 끝이 났다.
* * *
빠아악!
배트가 비명을 질렀다.
더는 못 버티겠다는 단말마를 내뱉으며 반으로 갈라졌다.
공은 빠르게 내야를 굴렀다.
그 광경을 대기 타석에서 보던 마이크 라모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이를 꽉 물었다.
‘왜 저 공을 못 때려내는 거야?’
투수임에도 수비가 탄탄한 강송구가 다시금 1루로 공을 던지며 깔끔히 아웃을 잡아냈다.
4회 말의 투 아웃 상황.
다시금 만나게 된 강송구와 마이크 라모스.
마이크 라모스는 숨을 길게 내뱉었다.
‘저 정도 구속이면 시원하게 홈런을 때려낼 수 있다.’
자신감이 절로 붙었다.
첫 타석에서 봤던 왼손과 지금 그와 마주한 오른손의 구속은 크게 보면 10마일 차이가 난다.
자신감이 없을 수 없었다.
그 대단한 조던 힉스의 104마일짜리 패스트볼도 때려낸 선수가 바로 마이크 라모스였다.
‘90마일 근처의 공은 식은 죽 먹기지.’
다시 자신감이 차오른 마이크 라모스.
그가 타석에 들어서기 무섭게 자신 있는 표정으로 배트를 들어 올렸다.
-아! 마이크 라모스가 홈런을 예고합니다!
-하하하! 정말 이 선수는 경기 외적인 부분에서도 이슈가 많지만, 이런 경기 내적인 부분에서도 관중들의 관심과 집중을 불러일으키는데 도가 튼 선수인 것 같습니다.
-마이크 라모스의 예고 홈런! 과연 캉은 어떤 공을 던지며 마이크 라모스를 상대할지 기대됩니다.
우효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그런 마이크 라모스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파이어 에그가 터져야 정신을 차릴 놈이네.
‘뭐…… 내버려 둬. 즐기시게.’
-쯧쯧……. 떡 줄 놈은 생각도 않는데 아주 시원하게 김칫국부터 들이켜는 게 대단하다! 정말 대단해!
기대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타석에 들어선 마이크 라모스가 과연 강송구가 던지는 공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까.
제대로 불이 붙은 타자를 상대로 투수가 찬물을 뿌리며 무시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활활 타는 눈빛을 한 마이크 라모스를 보던 강송구가 너클볼 그립을 쥐고 자세를 잡았다.
“저 친구가 좋아하는 홈런을 칠 수 있게 피홈런이 많이 나오는 너클볼을 던져주지.”
이윽고 강송구의 손을 떠난 너클볼.
몸쪽으로 꺾여 들어가는 너클볼을 본 순간 마이크 라모스는 알 수 없는 위기감을 느꼈다.
강송구의 너클볼이 나비처럼 흔들리며 70마일의 구속으로 마이크 라모스의 엉덩이에 날아들었다.
퍽!
급히 급소를 막았던 마이크 라모스가 당혹감을 드러내며 자신의 몸에 맞고 떨어진 공을 바라봤다.
“히트 바이 피치!”
주심의 콜에 강송구가 모자를 슬쩍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게 고개를 숙이지 않고 그저 모자를 살짝 벗을 뿐이었다.
남들이 보면 그냥 평범한 사과로 보일 수 있지만, 두 번이나 강송구에게 당한 마이크 라모스는 확신했다.
저 새끼가 고의로 던졌다고.
하지만 마운드로 달려갈 수 없었다.
너클볼이었다.
제구가 잘 안 된다는 공.
아니, 제구를 할 수 없다고 알려진 마구.
그게 너클볼이었다.
너클볼을 던지다 나온 몸에 맞는 공이었다.
고의성이 없었다.
하지만 마이크 라모스는 느끼고 있었다.
상대로 고의로 던졌다는 것을 말이다.
‘씨이이이이이바아아아알!’
마이크 라모스가 1루로 향하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만큼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
멋지게 예고 홈런까지 보여줬다.
이제 남은 것은 홈런을 때리는 것뿐이었다.
아니, 차라리 삼진으로 물러났으면 지금보다 훨씬 비참하지 않았을 것이다.
초구.
그것도 너클볼.
문제는 그 너클볼에 빈볼이 나왔다는 거다.
거기다 우연이 겹친 것인지는 몰라도 1회 말에 스친 급소 근처로 너클볼이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엉덩이에 맞긴 했지만, 순간 공이 급소 근처로 날아들 때 꼴사납게 몸을 움츠렸었다.
그게 마이크 라모스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개자식.”
1루에 선 마이크 라모스는 마운드에 선 강송구를 노려보며 이를 꽉 물었다.
계속해서 속으로 화를 삼키던 마이크 라모스는 이내 숨을 크게 내뱉으며 진정하려 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감정적으로 길게 리드를 가져가는 마이크 라모스.
강송구가 그 모습을 슬쩍 확인하고는 깔끔한 타이밍에 1루로 견제구를 던졌다.
당연히 분노에 사로잡혀 있던 마이크 라모스는 최악의 모습으로 허무하게 견제사를 당했다.
“아웃!”
이번에도 깔끔히 이닝을 끝낸 강송구.
그가 덤덤한 표정으로 마운드를 내려갔다.
그리고 급히 1루 베이스 쪽으로 엎어졌던 마이크 라모스는 입에 들어간 흙과 함께 욕설을 내뱉었다.
“Fxxk!"
* * *
이변은 없었다.
5회 말.
강송구가 휴스턴의 타선에 볼넷 하나와 안타 하나를 내줬지만, 하위 타순을 상대로 삼진을 연속으로 잡아내며 단 한 점도 내주지 않고 이닝을 끝냈다.
라스베이거스에 나쁘지 않은 분위기.
하지만 점수는 아직도 0 대 0이었다.
강송구가 호투를 보여준 만큼이나 라스베이거스의 타자들이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덕분에 더그아웃의 분위기는 조금 가라앉았다.
강송구의 눈치를 보는 타자도 몇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6회 초.
4개의 안타와 2개의 볼넷을 내줬지만, 오늘 경기에서 단 하나의 점수도 내주지 않은 휴스턴의 데이비스 로코세가 던진 공을 선두 타자인 랜디 에드워즈가 깔끔히 때려냈다.
-출루에 성공하는 랜디 에드워즈!
-6회 초에도 좋은 기회를 잡는 라스베이거습니다!
-슬슬 점수를 만들어줘야 합니다. 아무리 캉이 대단한 투수이지만, 0대0의 스코어가 계속 이어지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캉이 대단한 투수여도 사람입니다. 쉼 없이 좋은 공을 던질 수 있는 로봇이 아니에요.
따악!
다시금 나온 단타의 행진.
어느덧 상황은 1사 만루로 변했다.
충분히 기대할 수 있는 상황.
하지만 기대와 다르게 라스베이거스의 타선을 꽉 막힌 변기보다 더 답답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나왔을 점수였지만, 야구의 여신이 배신이라도 한 것처럼 무너져버렸다.
-깔끔한 병살타!
-데이비스 로코세! 대단합니다! 위기 상황에서 병살타를 유도하면서 결국에는 0 대 0의 균형을 유지합니다!
주먹을 불끈 쥐는 휴스턴의 홈팬들.
라스베이거스의 타자들이 깊은 탄식을 내뱉으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더그아웃에 앉아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강송구는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글러브를 들고 일어났다.
6회 말.
다시 마운드에 올라가는 강송구.
1-2-3으로 이어지는 타선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서 우효가 잔뜩 열이 뻗친 마이크 라모스를 보며 물었다.
-성난 멧돼지가 무섭게 노려보는데? 두 번이나 몸에 맞는 공이 나와서 화났나 봐.
우효의 말을 듣고 강송구가 덤덤히 답했다.
‘신경 쓰지 마라. 원래 짐승은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