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연패스토퍼 MK-2(5)
8회 말.
마이크 마조네가 마운드에 올랐다.
그는 아까 전 자신감이 넘치던 때와 다르게 조금은 경직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이상하다.’
그래, 이상했다.
분명히 오늘 그는 최고의 컨디션을 자랑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느낌이 좋지 않았다.
‘마치 뭔가 발목을 잡은 기분이야.’
개인주의적인 생각이 아니었다.
팀원이 발목을 잡는다는 뜻도 아니었다.
그냥…… 모든 상황이 좋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엔 0 대 0의 상황에서 두 투수의 멋진 투수전처럼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점점 체력이 떨어지며 제구력이 흔들리고 있는 마이크 마조네였다.
‘반대로 저 괴물은 아직도 흔들릴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문제겠지.’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저런 거대한 몸뚱이를 보면 마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저런 덩치는 미국에서도 보기 드물었다.
‘NFL하는 친구가 저런 덩치를 가졌었지.’
숨을 길게 내뱉는 마이크 마조네.
그가 다시 경기에 집중했다.
타순은 7-8-9로 이어지는 하위타선.
이번 이닝은 조금 쉬어가는 느낌이 강했다.
‘천천히 풀어나가자. 9회 말에 라스베이거스의 상위 타선을 상대하려면 조금은 체력을 아껴야 해.’
아직 나이가 어렸기에 완벽한 완급 조절은 어려웠다. 하지만 오늘 컨디션이 좋은 마이크 마조네는 체인지업의 비중을 더 늘리며 차근차근 아웃을 잡아냈다.
-마이크 마조네! 오늘 정말 끝내주는 체인지업을 던지고 있습니다. 벌써 15번째 삼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젊은 에이스가 이번 이닝도 순조롭게 끝낼 것 같습니다.
-말씀드리는 순간 내야 땅볼을 유도하면서 아웃! 두 번째 아웃까지 깔끔히 처리하는 마이크 마조네!
‘그래, 이렇게 풀려야지.’
마이크 마조네가 주먹을 꽉 쥐었다.
악력은 충분했다.
힘이 빠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평소보다 투구가 조금 많았기에 체력이 조금 소모되어서 제구를 잡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하위 타선을 상대로는 걱정이 없었다.
그가 가진 구위는 아직도 쌩쌩했다.
8회 말까지 왔음에도 라스베이거스의 하위타선을 상대로 충분히 위력적이었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오늘 경기 16번째 삼진.
완벽에 가까운 피칭을 한 뒤에 마이크 마조네가 주먹을 불끈 쥐며 천천히 마운드를 내려갔다.
하지만 그 기쁨은 잠깐이었다.
거대한 거인이 마운드에 오르기 무섭게 마이크 마조네는 다시금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껴야 했다.
9회 초.
라스베이거스의 에이스.
강송구가 마운드에 올랐다.
* * *
9회 초.
8-9-1로 이어지는 타순.
강송구가 마운드에 오르기 무섭게 인디언스의 8번 타자 요르디스 발데스가 타석에 들어섰다.
요르디스 발데스는 골드 글러브를 4회나 수상한 뛰어난 수비력을 갖춘 유격수이지만, 통산 타율은 고작 2할 4푼이고 7시즌을 뛰면서 때려낸 홈런은 고작 48개뿐인 타자다.
요르디스 발데스가 그리 타격이 뛰어나지도 않으면서 메이저리그에서 계속 살아남고 있는 이유는 뛰어난 수비력을 갖춘 내야 유틸리티 자원이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런 요르디스 발데스는 지금 상황에서 강송구에게 조금은 쉬어갈 수 있는 쉼터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 상황임에도 강송구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천천히 조심스럽게 피칭을 이어나갔다.
1구는 바깥족 포심 패스트볼.
2구째는 몸쪽 스플리터.
3구째는 바깥쪽 너클 커브.
계속해서 타자를 몰아친 강송구는 4구째에 숨겨놨던 싱커를 꺼내며 요르디스 발데스를 찍어눌렀다.
따악!
“아웃!”
유격수인 카디안 스타우트가 자신에게 굴러오는 공을 깔끔히 처리하면서 9회 초의 첫 번째 아웃을 잡아냈다.
이어지는 9번 타자와 승부.
삼루수인 데이비드 도넬리가 타석에 들어섰다.
앞선 요르디스 발데스와 비슷한 스타일의 타자인 그는 최대한 배트를 짧게 잡고 오래 공을 볼 생각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데이비드 도넬리에게 강송구는 초구부터 너클볼을 던지며 그의 머릿속을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어주었다.
-아! 여기서 너클볼이 나오네요. 저런 공이 나오면…… 타자는 할 수 있는 게 몇 없을 것 같습니다.
-저 너클볼이 나온 뒤에 이어서 날아드는 공을 보세요. 너클볼 다음에 컷 패스트볼이에요. 이어서 뚝 떨어지는 커브를 던지고 마무리로 체인지업……. 타자가 멍하니 투수가 공을 던지는 모습만 구경하다가 물러갑니다.
9회 초의 두 번째 아웃도 깔끔히 잡아낸 강송구.
그는 덤덤한 표정으로 마지막 아웃만 생각하고 있었지만, 777 베가스 그라운드를 찾은 라스베이거스의 팬들과 오늘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몇몇 야구팬들은 강송구가 과연 노 히터에 도달할 수 있을지를 궁금해했다.
인디언스의 정규이닝 마지막 타자가 될 수 있는 프레디 레노가 타석에 들어왔다.
‘와……. 노 히터를 앞두고 있는데도 떨지를 않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일반적인 투수라면 조금이라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일만한데 저 동양인 투수는 변화가 없었다.
그냥 로봇이 공을 던지는 것 같았다.
문제는 그 로봇이 끝내주는 공도 던진다는 점이었다.
-초구부터 강하게 들어가는 캉!
-몸쪽으로 파고드는 컷 패스트볼이었습니다. 진짜 저 커터는 좌타자들에게는 지옥과도 같을 것 같습니다.
-저런 커터를 몸쪽으로 찔러 넣고서 바깥쪽에 쓸만한 변화구 하나 던지면 타자는 순식간에 투 스트라이크까지 헌납할 수밖에 없습니다.
-타자들에겐 정말 치가 떨리는 피칭이겠네요.
-맞습니다.
슈우우욱! 펑!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프레디 레노를 깔끔히 삼진으로 잡아낸 강송구.
그가 위닝샷으로 삼은 공은 체인지업이었다.
9이닝 1볼넷 17K 무실점.
오늘 경기 강송구는 17K 노 히터를 기록했다.
물론, 이 기록이 제대로 인정을 받으려면 9회 말에 팀 타선의 도움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다.
천천히 마운드를 내려가는 강송구.
그를 향해서 경기장을 찾은 3만여 명의 홈팬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냈다.
구단 첫 노 히터에 가장 근접한 투수에게 찬사를 보내지 않은 야구팬은 없었다.
이제 강송구의 대기록은 타자들에게 달렸다.
그때 거대한 박수 소리가 잠깐 경기장을 뒤덮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마이크가 마운드에 올랐다.
반대로 강송구는 더그아웃에 앉아서 조용히 기다렸다.
팀이 득점을 내줄 것을 기대하면서.
* * *
‘후……. 미치겠네.’
아까와 모든 것이 달랐다.
분명히 8회 말까지만 해도 마이크 마조네에게 마운드는 편히 올라갈 수 있는 언덕이며, 홈플레이트는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 놓인 과녁판과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강송구가 기어코 노 히터의 조건을 완벽히 갖추기 무섭게 마이크 마조네는 큰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마운드가…… 갑자기 높아 보인다.’
동네 언덕 수준이던 마운드가 이제 그의 눈에는 히말라야산맥보다 더 높아 보였다.
문제는 가까운 과녁 같았던 홈플레이트는 아까와 다르게 상당히 먼 거리에 놓인 것처럼 보였다.
포수가 들어 올린 미트가 너무 작게 보였다.
‘진정하자……. 진정하자.’
마이크 마조네가 이를 꽉 물었다.
그리고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서 평소의 루틴보다 조금은 더 길게 로진백을 만졌다.
그 모습을 보기 무섭게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포수인 루이스 캠퍼사노가 주심에게 타임을 요구했다.
“잠깐 마운드에 좀 갔다 오겠습니다.”
“빨리 갔다 와.”
주심이 고갤 끄덕이기 무섭게 루이스 캠퍼사노가 빠르게 마운드로 향했다.
입을 가린 루이스가 뭔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의 마이크 마조네를 보며 물었다.
“갑자기 왜 그래?”
“뭐가?”
“갑자기 루틴이 바뀌었잖아.”
“내가?”
“그래, 네가.”
“별거 아니야. 그냥 생각할 게 있어서 그런 거야.”
“혹시 어디 아파?”
“아니야.”
마이크 마조네가 고갤 흔들었다.
어디 아픈 것은 아니었다.
그저 큰 부담감을 느끼고 있을 뿐이다.
루이스 캠퍼사노는 뾰로통한 마이크 마조네의 모습을 보고는 고갤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아프지 않으면 다행이지.”
“…….”
“넌 우리 팀의 에이스야. 지금 여기에서 시원하게 두들겨 맞아도 아무도 널 욕하지 않아. 그러니 크게 부담가지지 말고 천천히 풀어나가자. 알겠지?”
“빨리 꺼져.”
“큭큭……. 그래, 이래야 마이크 마조네지.”
고갤 끄덕이는 마이크 마조네의 모습을 확인한 루이스 캠퍼사노가 빠르게 홈플레이트로 돌아갔다.
더 늦었다가는 뿔난 주심의 불리한 판정을 받아야 했기에 급히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아까보다 표정이 더 좋아 보이는 마이크 마조네를 보며 루이스가 팡팡 미트를 두들겼다.
마이크 마조네는 아까보다 편안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마운드가 조금 높게 느껴졌다.
당연히 홈플레이트도 비슷하게 멀었다.
‘후우…… 천천히 처리하자.’
9회 말의 첫 타자는 조쉬 마이어스.
1-2-3의 타순으로 이어지는 라스베이거스의 선봉대장인 그가 봉붕 배트를 휘둘렀다.
초구는 바깥쪽 패스트볼.
아까보다 제구가 되지 않았지만, 마이크 마조네는 위력적인 구위로 찍어누르며 스트라이크를 가져왔다.
9회 말의 첫 번째 아웃을 잡아낸 마이크 마조네가 주먹을 움켜쥐며 처음으로 크게 포효했다.
하지만 그 감정표현을 이제 멈춰야 했다.
라스베이거스의 두 번째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카디안 스타우트.
유격수이면서 지난 시즌에 3할이 넘는 타율을 기록한 카디안은 올해도 다른 선수들과 다르게 처음부터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라스베이거스의 팬들에게 단단히 눈도장을 찍었다.
그가 타석에 들어서자 마이크 마조네는 타석에 꽉 들어찬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후우……. 어떻게든 잡아내야 한다.’
그렇게 다짐을 하고 초구를 던진 마이크 마조네.
카디안은 조용히 초구를 지켜봤다.
-와우!
-놀랍네요. 9회 말인 상황에도 포심 패스트볼의 구속이 97마일이 나왔습니다.
-마이크 마조네! 지난 시즌과 다르게 올해는 정말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말씀드리는 순간 2구째 승부!
-이번에도 지켜본 카디안 스타우트입니다.
카디안 스카우트는 기다렸다.
좋은 공이 날아들기를 말이다.
강송구는 그런 카디안을 보며 조용히 고갤 끄덕였다.
‘신중하군. 느낌이 좋아.’
-그래?
그렇다고 불리한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무리 3할 타자라도 한 투수와 10번 상대를 하면 7번인 무조건 질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강송구는 야구가 무조건 타자가 불리한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때마침 카디안 스타우트가 타석에 살짝 가까이 붙으며 뭔가를 노리는 것 같은 모습을 보여줬다.
바짝 긴장하는 마이크 마조네.
강송구와 우효도 조용히 그 광경을 지켜봤다.
그리고 이어진 5구째 승부.
빠악!
카디안 스타우트는 마이크 마조네가 깔끔하게 스트라이크 존에 찔러넣은 83마일의 체인지업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시원스럽게 배트를 휘둘렀다.
마치 그 구종을 예상한 것처럼.
강송구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체력이 고갈되면서 패스트볼과 체인지업을 던지는 투구폼이 완벽히 일치하지 않게 되었다. 이건 마이크 마조네의 잘못이 아니라 그를 너무 믿은 인디언스의 감독 잘못이 크다.’
카디안 스타우트는 그 차이를 빠르게 파악하고 5구째에 승부에 들어가서 큰 타구를 만들었다.
빠르게 1루로 달리는 카디안 스타우트.
777 베가스 그라운드를 찾은 홈팬 몇몇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그제야 카디안 스타우트가 외야로 쭉 뻗어 나가는 타구를 확인하고는 주먹을 번쩍 들어 올렸다.
-넘어갔습니다!
-경기를 끝내는 끝내기 홈런! 카디안 스타우트가 오늘 경기의 종지부를 찍습니다! 그리고 캉의 노 히터를 지켜냅니다!
-대단합니다! 카디안 스타우트! 역시 라스베이거스의 해결사는 남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선수들이 모두 뛰쳐나갔다.
홈플레이트 앞에서 카디안을 기다리는 선수들.
고개를 푹 숙이며 더그아웃으로 빠르게 빠져나가는 마이크 마조네와 다르게 홈플레이트를 밟은 카디안은 다른 라스베이거스의 선수들과 승리의 기쁨을 나누었다.
오늘 경기의 마무리를 장식한 홈런을 때린 카디안에게 처음에는 많은 관심이 쏠렸지만, 곧이어 메이저리그 두 번째 등판 만에 노 히터를 기록한 강송구에게 시선이 몰렸다.
“끝내주는 피칭이었어.”
“캉! 진짜 최고야!”
“노 히터야! 노 히터!”
“으하하하하! 이겼다고 이겼어!”
“완벽한 연패 스토퍼였어.”
모두의 축하를 받은 강송구.
하지만 그의 시선은 다른 곳에 있었다.
[축하합니다.]
[메이저리그에서 첫 ‘노 히터’를 기록하셨습니다.]
[보상으로 ‘특성 퀘스트 완료권’x1을 획득하셨습니다.]
[현재 누적 포인트는 2,067포인트입니다.]
대기록을 세운 투수에게 주는 시스템의 보상.
포인트는 예전과 달리 정말 짜게 줬지만, ‘노 히터’ 보상만큼은 한국에서와 다를 것이 없었다.
강송구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