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한국시리즈(1)
투수는 항상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
언제나 자신의 몸 상태를 잘 파악해야 하며 상대 타자가 자신을 상대로 뭘 준비했는지를 항상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위의 조언들을 메이저리그의 투수들도 가끔은 지키지 못한다.
그리고 지금 마운드에 오른 사뮤엘 힉맨도 그랬다.
그는 지금 자신의 좋은 컨디션을 믿고 평소보다 훨씬 더 체력을 소모하며 공을 던지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자신을 파악했다면, 이번 이닝부터 천천히 완급조절을 하며 체력을 비축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뮤엘은 자기 자신을 믿었다.
그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 믿음이 조금씩 그를 늪에 빠트리고 있다는 사실을 사뮤엘은 몰랐다.
그가 이상함을 느낀 것은 6회 초 마운드였다.
8-9-1로 이어지는 타선.
그렇기에 앞선 두 타자를 쉽게 잡아냈어야 했지만, 지금 그가 6회 초 마운드에서 겪고 있는 상황은 1사 1, 2루였다.
‘몸이 무겁다.’
호크스의 8번 타자가 행운의 안타로 출루를 하자마자 처음 느낌 감정은 갑자기 이상하리만큼 무거워진 몸이었다.
그나마 9번 타자를 상대로 삼진을 잡아내면서 어떻게든 이번 이닝을 잘 풀어나갈 수 있겠다 싶었지만, 호크스의 1번 타자인 김국도가 볼넷으로 출루하면서 다시금 꼬였다.
‘Fxxk!’
그리고 이어지는 상위 타선과 승부.
2번 타자인 이호승이 비장한 표정으로 타석에 들어섰다.
사뮤엘은 그런 이호승을 보며 공을 꽉 쥐었다.
‘저 망할 애송이에게서 병살타를 유도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호크스의 망할 3번 타자를 상대해야 해.’
3번 타자인 김효곤은 그의 천적.
여기서 이닝을 끝내야 경기를 풀어나가는 데 있어서 정말 편할 것이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더그아웃에 앉아 있는 거인을 바라봤다. 자기보다 조금 작은 남자는 덤덤한 표정으로 점퍼를 입고 사뮤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투수가 보는 앞에서 점수를 내주기 싫다.’
작은 경쟁심이다.
그는 저 투수보다 자신이 뛰어나다고 믿었다.
초구는 바깥쪽 커브.
제대로 꺾인 커브에 이호승이 배트를 내밀지도 못하고 멀뚱히 공을 바라볼 뿐이다.
“스트라이크!”
타자의 무릎 높이에 제대로 걸친 커브.
이어서 그는 또 커브를 꺼내 들었다.
‘이번에는 땅에 처박히는 커브.’
2구째로 던진 커브.
아까와 똑같은 커브에 이호승이 급히 배트를 내밀었지만, 공은 그가 생각한 것보다 더 떨어졌다.
“스-윙! 스트라이크!”
순식간에 투 스트라이크가 된 상황.
이호승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삼진도 나쁘지는 않지만……. 여기서 몸쪽 패스트볼을 던지고 바깥쪽에 걸치는 체인지업으로 병살타를 유도한다.’
사뮤엘이 숨을 크게 내뱉었다.
3구째는 몸쪽 패스트볼.
조금 깊게 들어가서 볼 판정을 받았지만, 사뮤엘은 딱히 그 부분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바깥쪽에 다시 조금 빠지는 패스트볼을 던진 사뮤엘은 6구째에 체인지업 사인을 내고 자세를 잡았다.
이걸로 병살을 유도해서 이닝을 끝낸다.
사뮤엘이 빠르게 팔을 휘둘렀다.
제대로 손가락에 걸친 체인지업.
그는 확신했다.
오늘 경기에서 가장 끝내주는 체인지업이라고.
저 애송이가 때려낼 수 없는 공이라고.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이호승이 잠깐 레그킥을 하려다가 멈칫한 뒤에 조금 늦은 타이밍에 배트를 휘두른 것이다.
꼭 체인지업을 노렸다는 것처럼 말이다.
따아악!
-쳤습니다!
-높게 떠오르는 고오오옹!
-넘어……. 넘어! 넘어어어어어! 갑니다! 이호승의 쓰리런!! 마운드를 철옹성처럼 지키던 사뮤엘 힉맨이 여기서 이렇게 쓰리런으로 선취점을 허용합니다!
-제대로 체인지업을 노린 것 같았어요. 제대로 노렸죠?
-맞습니다. 체인지업을 제대로 노렸어요.
이호승의 쓰리런.
그가 홈런을 때리는 순간 호크스의 더그아웃이 평소보다 훨씬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효곤이한테 번트 자세를 잡으면서 투수 좀 흔들어보라고 전달해. 아웃을 당해도 좋아.”
“차라리 강공이 좋지 않을까요?”
“강송구가 3점 이상을 실점할 것 같아? 차라리 지독하게 상대 투수를 괴롭히면서 불펜을 빠르게 꺼내 들게 해서 다음 2차전에서 더 유리한 위치를 잡아야지.”
“알겠습니다.”
6회 초에 갑자기 터진 3점 득점.
홈런으로 멘탈이 하얀 재처럼 타버린 사뮤엘 힉맨의 앞에 천적인 김효곤이 타석에 들어섰다.
평소의 이중일 감독이 지금 타이밍에 사뮤엘을 내리고 불펜을 꺼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데빌스의 더그아웃은 조용했다.
강송구는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승부처는 여기였군.’
-그런데 이호승이 어떻게 홈런을 때린 거야? 제대로 걸린 체인지업이었잖아.
우효의 물음에 강송구가 고개를 흔들었다.
‘전력투구를 계속 이어가면서 체력을 크게 소모한 사뮤엘의 팔이 평소보다 조금 내려와 있었다.’
-팔?
‘그래, 그래서 체인지업을 던질 때와 패스트볼을 던질 때 투구폼에 차이가 생겼어. 아무리 좋은 체인지업이라도 패스트볼을 던질 때와 투구폼이 다르면 얻어맞을 수밖에 없지.’
-그렇구만!
‘뭐, 페드로 마르티네스라면 달랐겠지만…….’
사뮤엘 힉맨의 체인지업은 페드로 마르티네스의 써클 체인지업 같은 공이 아니었다.
물론, 투수의 실수도 있었지만 강송구는 이호승의 선구안에 제법 큰 점수를 주었다.
‘좋은 타자야. 타격만 어떻게 한다면 리그 최고의 타자가 될 능력이 충분해.’
중요한 순간에 때려주는 클러치 능력도 있었고, 최근에 제법 선구안도 좋아지면서 성적이 잘 나와주고 있었다.
수비도 좋고 내야에서 멀티로 뛸 수 있는 선수.
그렇기에 이번 포스트시즌에 이호승이 얼마만큼 활약하느냐에 따라서 호크스의 한국시리즈의 향방도 달라질 것 같았다.
‘거기다 젊은 선수가 성장하기에 포스트시즌만큼 좋은 환경이 없지. 오늘의 이호승과 내일의 이호승은 다를 거야.’
따악!
그러는 사이에 김효곤이 번트 자세를 풀고 다시금 백투백 홈런을 때리며 사뮤엘 힉맨의 고개를 푹 숙이게 했다.
그 모습을 보며 강송구가 고갤 끄덕였다.
‘일단 1차전의 승리를 가져왔군.’
* * *
[강송구 플레이오프 1차전 완봉승!]
[선취점을 만든 이호승! 환상적인 쓰리런에 호크스의 타선이 폭발하다!]
[7 대 0으로 이긴 1차전! 기세를 탄 호크스와 제법 불펜을 많이 소모한 데빌스!]
[이중일 감독, ‘2차전 선발은 김기륭’]
[데빌스의 2차전 선발투수는 위장선발? 젊은 유망주를 선발로 예고한 이중일 감독!]
[김동식 감독, ‘2차전 선발은 토리 파커. 이번 경기에서 확실한 승리를 원한다.’]
플레이오프 1차전의 승리가 끝나고 다음 날에 시작된 2차전은 1차전과 다르게 타격전으로 흘렀다.
토리 파커의 호투를 기대했던 호크스는 4.1이닝 7실점으로 무너진 그들의 선발투수를 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한숨이 나오는 것은 호크스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데빌스의 더그아웃도 분위기가 썩 좋지 않았다.
젊은 투수인 김기륭이 5이닝 2실점의 호투를 보여줬으나 6회 초에 마운드에 오른 데빌스의 중계 투수인 김병준은 내야진의 실책 3개로 크게 무너지고 말았다.
[댓글]
-이게 플레이오프라고?
-수준이 무슨 대전 호크스와 부산 티탄즈의 경기를 보는 것 같은데?ㅋㅋㅋㅋㅋ
-아니; 내야진 탄탄하던 데빌스가 왜 이러냐? 갑자기 쟤들 왜 저렇게 공을 흘려?
-와; 또 놓쳤다!
-뭔가 이상해……! 작년에 내야 수비가 엉망이던 호크스는 단 하나의 실책도 없고, 작년에 최고의 내야진을 가진 데빌스는 실책이 벌써 4개임ㅋㅋㅋㅋㅋㅋㅋ
-앜ㅋㅋㅋㅋ 이게 무슨 플레이오프냐고? 그냥 개그시리즈 아니냐구요?ㅋㅋㅋㅋㅋ
-스왈로스: 엌ㅋㅋㅋㅋ 이번 시즌 우승할 수 있겠는데?
-진짜……. 데빌스 언제 호크스와 같은 수준까지 떨어진 거냐? 이게 맞는 판단이냐?
-진짜 발전했다고 느껴도 한국은 한국이구나……. 메이저리그랑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네.
따악!
“쳤다!”
그리고 찾아온 8회 초.
역전 2타점을 만들어낸 이호승이 주먹을 움켜쥐며 2루 베이스를 밟고 소리를 내질렀다.
“좋았어어어어어어!”
동시에 우효는 챱챱챱 아몬드를 입에 쑤셔 넣고 있었다.
-쟤 갑자기 왜 저래?
‘미친 거지.’
-미쳤다고?
우효의 되물음에 강송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을야구의 대표적인 클리셰.
이번 가을의 미친 선수는 ‘이호승’이었다.
* * *
‘미친 선수.’
가을야구의 대표적인 클리셰다.
인기선수나 실력이 출중한 선수가 아닌 모두가 기대하지 않았던 선수가 갑자기 폭발해서 3안타를 때려내거나, 결정적인 상황에서 홈런을 날린다.
가을이란 계절의 특이성일까?
진짜 가을에만 미치는 선수가 따로 있는 것일까?
솔직히 그건 아무도 모른다.
대표적인 미친 선수는 지금 호크스의 상대인 데빌스의 우익수인 기성준이었다.
2026시즌.
17타석에서 타율은 0.571에 ops는 1.647을 기록하면서 준플레이오프부터 흔들리던 데빌스를 한국시리즈까지 끌고 간 선수가 바로 기성준이었다.
물론, 그 기성준은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발목을 다쳐서 시즌 아웃이 되었고 데빌스의 준우승으로 26시즌이 끝이 났다.
그리고 지금 준플레이오프부터 조금씩 타격이 살아나던 이호승은 이번 플레이오프에서 제대로 미쳤다.
[3차전에서 홈런만 2개! 폭주하는 이호승! 이번 플레이오프 3차전까지 17타수 9안타 타율 0.529를 기록!]
[3차전의 승자는 데빌스! 11 대 10의 아슬한 승리!]
[가을의 사나이 이호승! 그는 누구인가?]
[무너진 마운드! 충격에 빠진 데빌스]
[작년 리그 1위에 가까운 내야 수비는 어디로 갔는가? 실종된 데빌스의 탄탄한 내야진]
3차전은 데빌스가 승리했다.
자신들의 홈에서 승리를 확정 짓고 싶었던 호크스는 아쉽게도 한국시리즈 진출을 4차전으로 미뤄야 했다.
그리고 찾아온 플레이오프 4차전.
마운드에 오른 호크스의 투수는 노장인 박철준.
이번 시즌에 6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면서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여준 그는 이번 준플레이오프 4차전 마운드에 올라서 회광반조가 온 늙은 무림고수처럼 공을 던졌다.
결과는 7이닝 3실점의 호투.
은퇴하기 전 마지막 등판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나온 박철준의 호투는 조금은 안일한 마음이 생기던 젊은 선수들의 마음을 다시금 다잡게 했다.
그리고 9회 초.
4 대 3의 상황에서 마운드에 호크스의 마무리인 곽민준이 터벅터벅 걸어 올라왔다.
박철준의 마지막이 될 수 있는 승리를 챙겨주기 위해서 그가 굳은 표정으로 피칭을 시작했다.
하지만 너무 마음만 앞선 것일까?
첫 타자를 상대로 볼넷을 내주었다.
-좋지 않은 신호입니다.
-9회 초의 첫 타자를 볼넷으로 내보내는 곽민준 선수! 조금 어깨에 힘이 과하게 들어간 느낌입니다.
이어지는 다음 타자와 승부.
곽민준이 이를 꽉 물고 공을 던졌다.
분명히 공은 빨랐다.
하지만 빠르기만 할 뿐이었다.
-쯧쯧……. 저거 완전 어깨에 뽕이 가득 찼네.
우효가 혀를 찼다.
마운드에 오른 마무리 투수인 곽민준의 어깨에 힘이 가득 들어간 것을 바로 파악한 것이다.
그때 강송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야! 어디 가게?
호크스의 불펜.
강송구가 좌완용 글러브를 끼고 나타났다.
그리고 호크스의 홈팬들이 그 모습을 보고 작게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강송구다!”
“뭐야? 강송구가 왜 불펜에 나와?”
“갑자기 몸을 푼다고?”
슈우우욱! 펑!
좌완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속구.
그제야 모두 깨달았다.
혹시나 하는 상황이 오면 강송구가 마운드에 오른다.
강송구가 몸을 푸는 것을 데빌스의 선수들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미친 새끼.”
“자기가 무슨 선동열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거야?”
그리고 마운드에서 흔들리던 곽민준도 강송구가 몸을 푸는 모습을 보고 이를 꽉 물었다.
‘내일 선발인 투수가 불펜에서 몸을 풀고 있다. 곽민준! 정신 차리자. 지금 이게 무슨 추태야?’
무사 1, 2루의 상황.
곽민준이 숨을 크게 내뱉고 초구를 던졌다.
자신이 던질 수 있는 최고의 공.
몸쪽 컷 패스트볼이었다.
따악!
그리고 들려오는 타격음.
순식간에 삼루수인 이호승이 자신을 향해 튀어 오르는 땅볼을 잡은 뒤에 3루 베이스를 밟고 2루로 공을 던졌다.
-2루! 그리고 1루까지!
-삼중살! 트리플 플레이가 나왔습니다!
-이호승 선수! 그리고 김효곤 선수! 마지막으로 이진모 선수로 이어지는 환상적인 수비가 나왔습니다!
-경기가 이렇게 끝납니다! 트리플 플레이! 삼중살로 경기가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경기를 끝내는 삼중살.
내야 수비진의 침착한 수비가 만들어낸 승리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곽민준이 노장의 승리를 지켜낸 것을 확인하고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좋았어!!”
오랜만에 승리를 기록한 노장 박철준이 환히 미소를 지으며 두 팔을 번쩍 들었다.
더그아웃에 있던 선수들이 모두 뛰쳐나갔다.
홈팬들은 환호성을 내질렀으며, 김효곤과 박진수는 자리에 주저앉아 눈물을 글썽였다.
대전 호크스의 모든 이들이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강송구는 알 것 같았다.
2006년 이후로 24년 만에 진출한 한국시리즈였다.
얼마나 간절했을까?
-그래! 이거야! 최!강!호!크!스!
우효는 언제 만들었는지 모를 고슴도치용 호크스 야구점퍼를 입고 환호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 모든 광경을 눈에 담은 강송구.
그가 덤덤히 중얼거렸다.
“이제 한국시리즈군.”
드디어 한국시리즈가 코앞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