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레코드 브레이커(3)
최재빈.
대구 페가수스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던 그는 이번 스토브리그에서 유망주 셋과 트레이드가 되어 창원 스왈로스의 선수로 뛰게 되었다.
나쁘지는 않았다.
많은 부분이 부족한 대구 페가수스에서 이번 시즌에 우승 확률이 가장 높은 창원 스왈로스로 왔으니까.
팀의 분위기도 좋았다.
선수들 모두가 하나의 팀처럼 뛴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다 좋음에도 최재빈에게는 딱 하나 창원 스왈로스와 맞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건 팀의 타격 성향이었다.
창원 스왈로스는 대체로 강공을 선호한다.
그럴만한 것이 상위 타선부터 하위 타선까지 모두가 한 방을 때려낸 저력이 있는 타자들이었다.
하지만 필요하면 4번 타자도 번트를 댈 수 있는 유연한 작전능력도 보여주고 있는 팀이었다.
‘왜 내가 번트 같은 걸 해야 하냐고?’
최재빈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주일 전 경기에서 더그아웃에서 낸 번트 사인을 무시하고 타격해서 홈런을 만든 뒤에 유정길 감독과 면담까지 했지만, 만족할만한 결과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뭐? 홈런이 아니었으면 2군으로 잠깐 내렸을 거라고?’
아무튼.
그런 껄끄러운 사건 뒤에 최재빈의 타격감은 조금 떨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최재빈. 타석에 들어섭니다.
-4회 초! 투 아웃의 상황에서 최재빈 선수와 강송구 선수의 승부가 시작됩니다.
최재빈이 타석에 들어선 순간.
강송구의 피칭이 시작됐다.
초구는 바깥쪽에 걸치는 체인지업.
오늘 던진 공 중에서 가장 느린 공이었다.
“스트라이크!”
“...”
103km/h의 체인지업.
너무 느려서 변화도 제대로 걸렸는지도 모를 느린 공을 잠깐 바라본 최재빈이 두 눈을 찌푸렸다.
‘뭐지? 실투인가?’
처음에는 그저 실투라고 생각했다.
투수들이 종종 어처구니없는 공은 던지고는 했으니까.
마운드에 있는 근육 덩어리도 가끔은 실수를 하겠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금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몸쪽 낮은 코스였다.
그것도 111km/h의 슬라이더였다.
“스트라이크!”
“씨팔.”
103마일의 패스트볼도 아니고.
111마일의 커터도 아니었다.
103km/h의 체인지업과 111km/h의 슬라이더였다.
‘내가 어린이 야구라도 하는 건가?’
고개를 절레 흔든 최재빈.
그가 다시 배트를 꽉 쥐고 타격 자세는 잡았다.
‘오늘 홈런 하나를 꼭 만들어야겠어.’
마운드에서 기계처럼 공을 던지는 저 투수를 상대로 무조건 점수를 만들어야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슈우우욱! 따악!
“파울!”
100km/h대의 공이 날아온 뒤.
다음에 날아든 것은 133km/h의 패스트볼.
앞서 던진 두 공과 30km/h 차이가 나는 구속 차이에 제대로 타이밍을 잡지도 못했다.
-카운트가 좋지 않습니다.
-오늘 강송구 선수는 구속 차이를 활용한 완급 조절로 스왈로스의 타선을 잘 잡아내고 있습니다.
-대단한 투수입니다. 모든 공을 자유롭게 다루는 것 같아요. 구속의 차이로 생긴 변화로 타자들을 잡아낸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말씀드리는 순간 4구째 승부.
4구째.
강송구가 선택한 것은 바깥으로 빠지는 패스트볼.
구속은 129km/h로 타자가 배트를 휘둘러도 쉽게 안타를 만들 수 없는 빠지는 코스로 공을 던졌다.
따악!
“파울!”
오우우우우!
아깝다! 아! 진짜!
파울 홈런을 본 스왈로스의 원정팬들이 내뱉는 탄식에 가까운 함성에 최재빈이 혀를 슬쩍 내밀었다.
‘이거 조금만 코스가 좋았으면 홈런인데.’
아쉬웠다.
조금만 타구에 힘이 들어갔거나 코스가 몰려서 더 정확히 배트에 맞았다면 무조건 홈런이었다.
그렇기에 최재빈은 더욱 두 눈을 반짝였다.
‘좋아…. 100km/h든! 130km/h든! 어떤 공이라도 처리해준다. 내가 원하는 코스로만 와라.’
이윽고 강송구가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5구째.
강송구의 손이 휘둘러졌다.
부웅!
공이 붕 뜬 것 같은 느낌.
최재빈은 강송구의 손을 떠난 공을 보자마자 커브란 것을 확신하고 배트의 타이밍을 조금 늦췄다.
그리고 힘차게 스윙을 가져갔다.
하지만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강송구의 커브는 더 크고 느리게 날아들었다.
그리고 고은 최재빈의 배트를 피해서 박진수의 미트에 포물선을 그리며 정확히 틀어박혔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삼진! 삼진입니다!
-투수가 선택한 것은 77km/h의 슬로우 커브!
-강송구 선수가 삼진을 잡아내면서 이번 이닝도 정말 깔끔히 막아냈습니다!
전광판에 뜬 77km/h라는 구속.
최재빈은 허탈한 표정으로 전광판을 잠깐 보다가 마운드에서 내려가는 강송구를 보고 고개를 절레 흔들었다.
* * *
6회 초.
강송구가 마운드에 오르는 순간.
관숭적의 관중들은 물론이고 더그아웃에 있는 선수들과 코치진들까지 모두 그를 바라봤다.
지금까지 그의 기록은 5이닝 무피안타 3볼넷 0실점.
모두의 시선이 쏠릴만한 기록이었다.
특히나 스왈로스의 선수들은 더 강송구를 의식하며 경기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절대 점수를 내줄 수 없어.’
‘우리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이라고?’
‘아직 기회는 많아…. 무조건 막아야 해.’
‘한 시즌에 노히트 노런을 두 번이나 기록하는 대기록의 희생양이 될 생각은 없다.’
강송구는 그러거나 말거나 덤덤히 로진백을 들어 올려서 손에 골고루 묻히는 데 집중했다.
-여기까지 잘도 왔네.
우효는 그런 강송구를 보며 고개를 절레 흔들었다.
‘생각보다 수월히 5이닝을 삭제했지.’
-그래서 이제 남은 이닝은 어떻게 할 거야? 두 번이나 타순이 돌았고 각 타자와 세 번째 승부부터는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네 공을 모두 파악하고 있잖아.
작은 고슴도치의 걱정에 강송구는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딱히 걱정할 것은 없다.’
그가 지금까지 완급 조절을 하며 온몸을 비틀 듯이 피칭을 한 이유가 있었으니까.
타석에는 오늘 단 하나의 출루도 없는 김형필이 근엄한 표정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강송구가 이번 경기에서 처음으로 전력투구를 하며 김형필을 밀어붙였다.
‘상위 타선을 빠르게 잡아낸다.’
슈우우욱! 펑!
“스트라이크!”
135km/h의 컷 패스트볼.
오늘 경기 내내 100~130km/h 사이의 공만 보던 김형필의 눈앞에 강송구가 꺼낸 것은 오늘 경기에서 가장 빠른 컷 패스트볼이었다.
“진짜…. 좆같이 던지네.”
김형필이 거친 말을 내뱉었다.
그것도 타석에서 그대로 말이다.
박진수는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타자라면 배트를 부러트리고 마운드로 달려가서 투수의 멱살을 잡았을 거야.’
하지만 김형필은 그렇게 못했다.
마운드에 있는 떡대를 보아라.
‘저게 곰이지 사람인가?’
그저 짜증을 참으며 어떻게든 안타를 때려내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김형필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슈우우욱 펑!
“스트라이크!”
그리고 이번에는 128km/h의 싱커가 춤을 췄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정확한 코스.
김형필의 머릿속이 헝클어졌다.
‘원래 이렇게 빠른 공이 아닌데….’
감각이 이상해지는 느낌.
130km/h가 140km/h로 느껴졌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슈우우욱! 펑!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바깥쪽 코스가 제법 많이 늘어났다.
많이 빠져나갔다고 생각하는 코스를 주심이 잡아준다.
김형필이 허탈하게 포수의 미트를 바라봤다.
원래라면 배트를 휘두르지 않았을 코스였지만…. 앞선 이닝에서부터 주심이 저 코스를 잡아주고 있었다.
제법 빠지는 바깥쪽 낮은 코스를 말이다.
‘씨팔…. 빨리 AI심판을 도입하라고…. 무슨 2030년대에 아직도 투수가 존을 가지고 장난칠 수 있는 거야?’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지나간 일인 것을 말이다.
터덜터덜 타석에서 물러나는 김형필.
그를 보며 우효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진짜 바깥 존이 언제 이렇게 넓어진 거야?
‘톰 글래빈과 비교하면 허접한 수준이다. 톰 글래빈은 단 1이닝 만에 주심을 구워삶으며 스트라이크 존을 가지고 놀았는데…. 난 5이닝이 다 지나서야 바깥쪽 낮은 코스를 활용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으니까.’
-진짜로 오늘 기록 하나 세우는 거 아니야?
우효의 호들갑에 강송구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아직 방심할 수 없다.’
마지막 타석까지 절대 방심할 수 없었다.
* * *
조금은 고요한 대전 호크스 파크.
기자석에 앉아있는 한 남자가 차분한 표정으로 오늘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남자의 이름은 김주찬.
제법 이름이 알려진 스포츠 기자로 제법 양질의 기사를 쓰면서 야구팬들에게 제법 많이 알려진 기자였다.
‘대단하다. 저런 수준 높은 피칭을 할 수 있는 선수가 한국에도 있었다니.’
7회 초.
강송구는 두 개의 아웃을 잡아내고 7회의 마지막 타자를 상대로 땅볼을 유도해서 아웃을 잡아냈다.
그가 깔끔히 이닝을 정리하기 무섭게 관중석이 다시금 환호성으로 물들었다.
‘아티스트군.’
오늘 강송구는 팔색조에 어울리는 기교파 투수의 완전체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주찬 선배! 오늘 진짜로 기록 하나 나오는 거 아니에요? 와! 진짜 미쳤는데요?”
“모르지. 언제 무너질지.”
“네? 저렇게 잘 던지는데요?”
“어쩔 수 없어. 구속이 느린 투수는 구위나 제구 중 하나가 어긋나는 순간부터 빠르게 무너지니까.”
“그렇다면….”
“8회나 9회 초에 무너질 수 있다는 거지.”
말은 그렇게 내뱉었지만.
사실 김주찬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위기는 있을 것이다.
앞서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던 경기랑 비교해서 타자의 수준 차이가 상당했으니까.
하지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보다 지금 가장 큰 문제는 타선이다.’
아직도 점수는 0대0의 상황.
이러다가는 강송구가 9이닝을 모두 막고도 승리투수가 될 수 없는 상황이 될 수 있었다.
7회 말.
스왈로스의 불펜이 바삐 움직였다.
그리고 6이닝 무실점을 기록한 선발 데니스 카밀이 내려가고 필승조 불펜인 이기준이 마운드에 올랐다.
140대 중후반의 포심과 140대 초반의 컷 패스트볼을 던지는 투 피치 투수로 뛰어난 구위로 상대를 찍어누르는 피칭을 즐기는 젊은 투수였다.
그리고 타석에는 대타자가 들어섰다.
-김동식 감독의 선택은 이호승 선수군요.
-오늘 단 하나의 안타도 만들지 못한 김효곤 선수를 대신해서 이호승 선수가 대타로 투입됩니다.
중압감이 상당할 3번 타순.
대타자인 이호승이 타석에 들어섰다.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그 광경을 지켜보던 강송구는 어쩌면 이번 이닝에 점수가 나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얼굴에 확신이 가득하군.’
저건 공 하나를 노리고 타석에 올라서는 것이다.
그리고 보통 투수가 바뀐 뒤에 타자가 노릴만한 것은 어설프게 들어오는 상대의 초구뿐이었다.
그것도 가운데로 몰린 패스트볼.
따아아악!
-쳤습니다!
-제법 타구가 날카롭습니다!
-중견수의 키를 넘어서 담장에 맞고 떨어지는 공! 이호승 선수는 2루까지 도착합니다!
-대타 카드가 완벽히 먹혀든 호크스!
-가운데로 몰린 이기준 투수의 포심 패스트볼을 제대로 노려친 이호승 선수입니다!
와아아아아아!
홈팬들이 열띤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2루에 안착한 이호승을 보며 김동식 감독은 4번 타자인 이진모에게 사인을 냈다.
고개를 끄덕인 이진모.
그가 타석에 들어서기 무섭게 번트 자세를 잡았다.
-보내기 번트인가요?
-아무래도 오늘 경기…. 단 1점으로 승부가 갈릴 것이라고 김동식 감독은 판단한 것 같습니다.
-말씀드리는 순간 이기준 선수의 초구!
슈우우욱!
빠르게 날아드는 이기준의 초구.
이번에도 조금 몰린 것 같은 패스트볼이었다.
그리고 그 공을 보기 무섭게 번트 자세를 풀고 이진모가 빠르게 타격 자세로 바꿔서 배트를 휘둘렀다.
따악!
-페이크 번트 슬래시입니다!
-쳤습니다! 공이 살짝 빗맞았지만…. 유격수의 키를 넘겼어요! 거리가 조금 애매한데요…! 이호승 3루를 지나서 홈까지! 홈까지! 홈까지! 그대로오오오오 세이프!
-강윤재 포수가 비디오 판독을 요구합니다. 자기는 확실하게 잡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아슬아슬한 타이밍의 홈 승부였다.
그리고 잠깐의 비디오 판독 시간.
주심이 조용히 헤드셋을 착용하는 것을 이호승은 침을 꿀꺽 삼키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이 완벽한 타이밍에 홈을 훔쳤다고.
그리고 곧 주신이 헤드셋을 벗더니 두 팔을 벌렸다.
-세이프! 세이프입니다!
-이호승 선수가 더 빨랐다는 판정입니다!
와아아아아아아!
드디어 나온 선취점.
“좋았어! 으하하하!”
“드디어 하나 나왔다! 하나 만들었어!”
고작 1점이었지만, 호크스의 더그아웃은 만루 홈런을 때려낸 것처럼 떠들썩했고.
“아….”
“후우! 안 풀리네.”
반대로 스왈로스는 순식간에 만루 홈런을 내준 것처럼 크게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리고 더그아웃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송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승리투수 요건이 갖춰졌다.’
이제 남은 이닝은 단 2이닝.
그의 두 눈이 차분히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