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땅의 요정 송구!(5)
4회 말.
무적일 것 같은 저메인 쇼메이커가 흔들렸다.
호크스의 1번 타자.
김국도가 볼넷으로 출루한 것이 시작이었다.
서른이라는 나이와 잦은 부상으로 약해진 어깨에 금방 피로가 쌓인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150대 초반의 구속이 나오던 것과 다르게 60구 정도를 던진 4회 말부터는 140대 중반의 패스트볼이 나왔다.
그런데도 저메인 쇼메이커는 무너지지 않았다.
볼넷으로 출루한 김국도를 희생번트로 2루로 보낸 뒤에 오늘 경기에서 3번 타자로 나선 이진모가 제구가 흔들려 가운데로 몰린 저메인의 패스트볼을 때려서 1사 1,3루의 상황을 만들었다.
-위기입니다!
-1사 1,3루에서 타석에는 오늘 경기 4번 타자로 배치된 박진수 선수가 들어섭니다.
이어지는 4번 타자와 승부.
박진수가 자신의 타석에서 큰 스윙을 가져갔지만 내야 뜬공으로 허무하게 물러났고.
2사 1,3루 상황에서 다시 한번 나온 볼넷.
그리고 찾아온 2사 만루의 상황.
6번 타선에 배치된 이주혁이 풀카운트 승부 끝에 삼진을 허용하면서 좋은 기회를 날리게 되었다.
-호크스가 만루의 찬스를 날립니다!
-정말 좋은 기회였는데…. 아 이렇게 4회 말이 끝나나요? 이건 호크스에게 너무 좋지 않은데요.
-그렇습니다. 이런 찬스는 꼭 잡아야 하는데….
-이런 부분이 왜 호크스가 지금 리그 중하위권에 있는지를 증명해주는 것 같습니다.
-김효곤 선수가 빠진 것도 이런 순간에서는 정말 아쉽네요. 클러치 상황에서는 그 어떤 선수보다 믿음직스러운 선수가 바로 김효곤 선수거든요?
-그렇죠.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라는 말처럼 오늘따라 김효곤 선수의 빈자리가 느껴지는 호크스의 타선입니다. 정말로 꽉꽉 막힌 느낌이에요.
프로야구팬들 사이에 통용되는 말 중에서 이런 말이 있다. ‘위기 뒤에 기회가 찾아온다.’ 안타를 맞거나 만루 상황이 되더라도 이를 잘 막아낸다면 흐름을 바꾸고 분위기를 역전시킬 수 있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말이다.
그리고 지금 수원 나이츠가 ‘만루’라는 위기를 넘기며 4회 말을 깔끔히 막아냈다.
당연히 기회를 놓치면 찾아오는 것은 위기.
5회 초.
마운드를 오르는 강송구를 호크스의 홈팬들이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지켜봤다.
-귀중한 찬스를 날렸네.
‘그렇지. 저메인 쇼메이커가 어깨 수술의 후유증으로 몇몇 경기에서 제구력의 난조가 찾아온 경우가 있었다고 자료에서 나오기는 했는데…. 이렇게 내 눈으로 보게 될 줄 몰랐군.’
-그것보다 기세가 확 넘어간 느낌인데…. 잘 넘길 수 있겠어? 지금 저쪽 타자들 눈빛이 장난이 아니야.
자신을 바라보는 나이츠의 타자들.
그들의 눈이 아까와 다르게 승부욕으로 가득했다.
자신을 마운드에서 끌어내리려는 것이다.
‘물론이다.’
자신 넘치는 강송구의 대답을 듣고 우효가 잠깐 머뭇거리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무슨 할 말이 있나?’
-그 두리안은 취소해줄 거지?
‘아, 당연하지. 농담이었다.’
-우효오옷! 그럼 그렇지! 난 믿고 있었다고!
인성 파탄자도 아니고 어찌 동물에게 고약한 냄새가 나는 두리안을 먹일 수 있겠는가?
‘뭐, 냄새만 참으면 먹을만한 과일이긴 한데….’
어쩌겠는가.
저렇게 싫어하는데.
그렇게 대답을 하고 타석으로 시선을 돌리니 이번 이닝의 선두 타자가 타석에 들어서고 있었다.
4번 타자 김성기.
그를 보며 강송구가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그의 손에 들린 그립은 당연히 싱커였다.
* * *
치사했다.
그리고 아주 더러웠다.
거친 말로는 좆같았다.
강송구의 싱커는 충분히 저 아름다운 찬사를 받을 정도로 뛰어난 공이었다.
슈우우욱! 따악!
“아웃!”
-이번에도 병살타입니다!
-오늘 경기에서만 병살타가 두 번이나 나옵니다! 그것도 나이츠의 타선에서 말이죠!
-아…. 여기도 호크스의 타선처럼 이상하리만큼 안 풀리는 느낌입니다. 특히나 저 하드한 싱커가 밑으로 떨어지는 걸 보면 타자들의 입에서 비속어가 나올 것 같아요.
-어쩌면 투수에게는 최고의 칭찬일 수 있겠네요.
-맞습니다.
“시팔…. 공을 아주 더럽게 던지네.”
강송구.
그는 병살타를 치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타자를 슬쩍 눈으로 살피고는 다시 승부에 집중했다.
5회 초의 마지막 아웃을 남겨둔 상황.
하지만 그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이어지는 승부.
타석에 들어선 나이츠의 타자가 이를 꽉 문다.
‘진짜…. 좆같은 공이네.’
거친 욕설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싱커의 위력은 더 커졌다.
패스트볼과 커터, 스플리터 사이에 섞여서 떨어지는 싱커는 나이츠의 우타자들에게 절망과 같았다.
덕분에 강송구는 여유롭게 위기를 넘기고 마지막 타자를 잡아낼 마지막 카운트를 하나 남기고 있었다.
분명히 타석에 선 타자도 고교 시절에는 상도 좀 받고 봉황기 결승에도 가본 저력이 있는 선수였다.
솔직히 그와 같은 능력을 갖춘 선수들이 프로야구 내에서 제법 많은 숫자를 자랑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타자도 이런 지랄 맞은 공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더 짜증 나는 공은 이게 처음인 것 같은데? 아…. 방법이 없나?’
타자가 허무한 내야 땅볼을 친 순간.
마지막 아웃 카운트가 잡혔다.
이닝이 끝난 것이다.
‘오늘 저 공은 진짜 못 친다.’
타자는 생각했다.
싱커 때문에 패스트볼을 노리기도 어려워졌다고.
마운드를 내려가는 강송구가 흐르는 땀을 닦았다.
-오…. 제법인데? 고생했어.
‘상위 타선은 싱커의 타이밍을 따라잡은 것 같다. 아무래도 6회 초부터는 볼 배합을 바꿔야겠어?’
-안 바꿔도 충분할 것 같은데?
‘1점 차 승부가 될 가능성이 큰 경기야. 단 하나의 실수도 허용되지 않게 조심해야지.’
강송구의 조심성에 우효가 고갤 끄덕였다.
마운드에 다시 올라선 저메인 쇼메이커.
그가 5회 말의 첫 선두 타자인 이호승을 상대했다.
우효는 첫 타석에서 인상 깊은 활약을 보여준 이호승을 떠올리며 작은 기대감을 보였다.
-하나 만들 수 있을까?
‘모르지.’
-왜?
‘내가 5회 초에 조금 흔들리면서 저메인에게 쉴 수 있는 시간을 좀 줬거든.’
덕분에 병살타로 가볍게 이닝을 끝내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어느 정도의 시간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구만!
‘그래서 기대하지 않는 거다.’
따악!
하지만 강송구의 생각과 다르게 휴식을 가진 저메인의 구위는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146km/h의 구속이 나왔다.
투구수가 70구를 좀 넘은 상황이라서 그런 것일까?
저메인의 구위와 제구가 다시금 흔들렸다. 그리고 그런 저메인의 초구 강하게 때려낸 이호승이었다.
‘흔들린다.’
4회 말을 막아낸 저메인이 이번에도 흔들렸다.
어쩌면 어깨가 탈이 난 것일 수 있었다.
-오…. 투수가 흔들린다!
우효가 두 눈을 반짝인다. 작은 고슴도치는 빨리 저 외국인 투수가 무너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샤인머스캣에 영혼을 판 이상한 고슴도치.
우효의 저주가 통한 것일까?
따악!
이번에도 큰 타구가 만들어졌다.
그제야 저메인이 있는 마운드로 포수가 타임을 걸고 올라가서 투수를 진정시켰다.
분명히 투 스트라이크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쫓기는 쪽은 투수였다.
‘정면 승부? 아니면 거르고 다음 타자?’
자신이 저메인이라면 거르는 선택을 할 것이다.
이호승은 한방을 가진 타자니까.
차라리 8-9번 타자를 상대하는 것이 편할 것이다.
하지만 투수의 선택은 승부였다.
길게 숨을 내뱉는 저메인 쇼메이커.
그가 있는 힘을 다해서 팔을 휘둘렀다.
거의 150km/h에 근접한 공.
‘가운데로 살짝 몰린다!’
이호승이 배트를 빠르게 휘둘렀다.
그는 아까처럼 허무하게 물러나지 않았다.
이윽고 들려오는 타격음.
따악!
이호승은 그 공을 보기 무섭게 시원한 스윙을 가져가면서 큰 타구를 만들어냈다.
-꽤 깊은 타구.
-담장 앞에서 잡힐 것 같은데…. 어?
-더 멀어요. 점점 더 멀어요. 중견수가 급히 따라가지만…. 공이! 공이 공이이이이이! 넘어갑니다!
-홈런! 홈런입니다!
-중견수의 머리를 넘어가는 공! 이 타구는 담장을 넘어서 홈런이 되었습니다!
-오늘 경기 처음으로 터지는 솔로포! 그리고 이호승 선수의 시즌 첫 번째 홈런이 터졌습니다!
제대로 터진 홈런.
-와우! 도와준 값을 하는데?
‘이미 수비만으로 제값을 해줬지.’
이호승이 만든 홈런을 보며 강송구가 고갤 끄덕였다. 설마 여기서 이렇게 홈런이 나올 것이라고는 그도 예상치 못했다.
빠르게 베이스를 돌고 더그아웃으로 들어온 이호승을 향해서 호크스의 선수들이 큰 환호를 보내줬다.
“나이스! 나이스!”
“오늘 호승이가 하나 만드는구나!”
“일단은 1점으로 시작하자!”
“좋아! 좋아!”
우효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하고 웃었다.
-그래도 홈런을 쳤다고 축하는 해주네.
‘다른 선수의 홈런도 좋아해 주지 않는 팀이면 해체해야지.’
그렇게 이호승의 솔로포로 점수는 1대0이 되었다.
마운드에 있는 저메인 쇼메이커의 표정이 조금은 구겨진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화풀이를 하듯이 빠르게 5회 말의 타자들을 싹 쓸어서 잡아내었다.
그의 스플리터가 무섭게 떨어졌다.
그리고 호크스의 남은 타자들이 발레리나처럼 빙글빙글 돌며 시원하게 삼진을 허용했다.
그렇게 끝이 난 5회 말.
다시금 마운드에 오르는 강송구.
그는 수원 나이츠의 더그아웃을 슬쩍 보고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승부가 어느 정도 기울었다.’
이번 이닝.
아무래도 가지고 있는 모든 무기를 다 써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로진백을 들어 올렸다.
‘병살타 하나 더 잡으면 깔끔하겠어.’
땅의 요정 송구에 어울리는 피칭.
강송구는 그 모습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6회 초가 시작되었다.
* * *
[호크스! 수원 나이츠를 홈에서 격파하다!]
[팀의 2대1 승리를 이끈 강송구! 7이닝 무실점 호투로 다시금 토종 에이스의 면모를 선보이다!]
[6이닝 1실점의 호투를 보여준 저메인 쇼메이커. 어깨에 피로를 느껴서 2주 정도 로테이션에서 빠질 것 같다고 밝혀.]
[불운의 나이츠. 병살타만 3개를 치다.]
[튼튼한 내야의 수비력으로 승리를 거머쥔 호크스!]
[김범기 나이츠 감독, ‘타자들이 싱커에 적응하지 못했다. 다음에는 더 많은 준비를 해서 승리할 수 있도록 하겠다.’]
[김동식 호크스 감독, ‘훌륭한 투수전이었다. 불펜을 많이 아낄 수 있어서 정말 좋았고 야수들의 수비력에 만족감을 느꼈다. 정말로 좋았다.’]
-최.강.호.크.스!
-이걸 이기네; 어케 이겼누?
-다시 리그 7위로 올랐다! 6위와는 반 경기 차이! 충분히 5위권이 눈에 들어온다!
-응, 호크스는 그걸로 안됨.
-ㅋㅋㅋㅋ 진짜 가을야구 4천왕 중에서 최약체인 나이츠를 잡았다고 좋아하는 호크스팬들 수듄ㅋㅋㅋ
-오랜만에 보는 명품 투수전이었다. 강속구 투수 vs 강송구 투수의 대결이라서 더 흥미진진했음.
-윗댓글 너 강송구 야리돌림하는거냐?
호크스의 나이츠 홈 3연전.
그 첫 번째 경기의 승자는 호크스였다.
조금은 승리의 기쁨이 느껴지는 라커룸.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선수분들 죄송합니다. 곧 김명진 사장님께서 라커룸으로 오셔서 여러분들에게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십니다.”
라커룸은 금방 소란스러워졌다.
“사장님? 사장님이 왜?”
“음…. 모르겠네. 왜 오시지?”
“금일봉이라도 주시려나?”
“딱히…. 오늘 경기가 라이벌전이라던가 그런 게 아니잖아? 갑자기 오셔서 금일봉을 준다면 저번에 송구가 노히트 노런을 했을 때 와서 줬어야지.”
그리고 잠시 뒤.
선수들이 모여있는 라커룸으로 들어오는 김명진 사장.
그가 선수들을 쓱 둘러본 뒤에 바로 입을 열었다.
“오늘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오늘 제가 여기에 온 것은…. 고생했다는 의미에서 금일봉을 드리려고 온 것도 있지만, 여러분에게 한 가지를 제안할 게 있어서 이렇게 왔습니다.”
그의 말에 선수들의 눈에 호기심이 서렸다.
잠깐 선수들을 쭉 둘러본 김명진 사장.
그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냥…. 간단한 내기입니다. 전반기 전까지 압도적인 성적이나 한국프로야구에서 역사에 남을 기록을 달성한 한 명의 선수에게 제가 소원을 한 가지 들어주겠습니다.”
그 말에 선수들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그 모습을 보고 김명진 사장이 씩 웃었다.
“그 어떤 소원도 들어주겠습니다. 제가 가진 모든 힘을 다 써서 그 선수가 원하는 모든 것을 말입니다. 아! 너무 어처구니없는 소원은 저도 힘듭니다. 제가 신은 아니라서 말입니다.”
모두가 침을 삼키며 김명진 사장을 바라봤다.
왜 갑자기 저런 제안을 하는 것일까.
궁금증이 극에 달해갈 때 누군가 손을 들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한 선수에게 쏠렸다.
김명진 사장은 그 선수를 보며 웃었다.
“아…. 강송구 선수!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강송구가 물었다.
“역사적인 기록을 여러 개 달성하면 소원도 여러 가지를 들어주시는 겁니까?”
그 질문에 김명진 사장이 시원히 웃었다.
“하하하! 물론입니다. 네!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렇군요.”
“물론…. 그렇게 할 수 있으면요. 강송구 선수는 꽤 자신이 있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김명진 사장의 물음에 강송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망설임 없이 시원하게.
“네, 자신 있습니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김명진 사장.
그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