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화이트 카드
-옴뇸뇸.
작은 고슴도치가 사과 조각을 하나 비웠다.
오랜만에 자신에게 부여하는 힐링.
우효는 사과 조각 하나를 다 비우고는 슬픈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렇게 좋은 카드를 퍼주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 이러다가 관리직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거 아니야?
도대체 저 인간은 왜 저렇게 운이 좋을까?
지금까지 단 한 번의 실패가 없었다. 덕분에 우효에게 주어진 포인트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이러다가 저 자식이 내 노후 자금까지 모두 홀라당 까먹는 건 아니겠지?
매일 사과 한 조각과 포도 두 알을 먹는 황홀한 노후생활을 꿈꾸는 우효에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재앙이었다.
-어쩌면 하루에 사과 한 조각도 못 먹는 불운한 삶을 살게 될 수 있어! 우…. 우효오옷!
하지만 어쩌겠는가?
저 괴물 같은 인간은 운이 너무 좋은데.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수 없어.
방법이 필요했다.
저 괴물을 엿 먹일 좋은 방법이 말이다.
그래, 카드 선택을 할 때…. 그 방법을 쓰자.
치사하고 지랄 맞은 방법이지만…. 어쩔 수 없다.
-내 사과 한 조각과 포도 두 알이 걸려있어!
작은 고슴도치가 주먹을 작게 움켜쥐었다.
자신의 노후를 위해서.
* * *
“좋군.”
강송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그는 5경기에서 3번 등판해서 3번 모두 세이브를 기록하면서 2군에서의 입지를 다잡았다.
하지만 포인트를 쌓는 속도가 크게 줄어서 어쩌면 1군으로 콜업할 시기까지 더 이상의 스펙은 쌓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렇기에 이번 카드 뽑기가 중요했다.
“루비 카드 구매.”
[루비 카드를 구매하셨습니다.]
골드 카드 하나와 이번에 산 루비 카드 하나.
이 두 카드에서 나온 능력이 강송구가 2군의 마운드에서 얻을 수 있는 마지막 카드가 될 확률이 높았다.
‘나머지는 1군에 올라간 뒤에….’
그때 슬쩍 우효가 강송구의 옆에 나타났다.
힐끔.
강송구를 몰래 바라보는 우효.
이 작은 고슴도치가 딱딱히 굳은 표정으로 누가 봐도 어색히 떠듬떠듬 말을 내뱉었다.
-아.정.말.좋.겠.다.
강송구는 그 작은 고슴도치의 어색한 연기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힐끔 바라봤다.
“뭐 원하는 게 있나?”
-하하하…. 아무것도 없어!
의심스러운 우효의 행동.
하지만 강송구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리고 손을 움직여 골드 카드를 선택했다.
[골드 카드를 개봉하시겠습니까?]
“그래.”
그의 앞에 나타나는 50장의 카드들.
강송구는 거침없이 카드를 선택했다.
그리고 황금빛을 뿜으며 회전하는 카드.
우효는 그 모습을 보고 확고한 다짐을 했다.
-내…. 사과 한 조각과 포도 두 알!
['B등급 구종카드'를 획득하셨습니다.]
[구종카드를 사용하셨습니다.]
['스플리터 B등급'을 습득하셨습니다.]
“좋군.”
만족스러운 카드가 나오자 강송구가 작게 웃었다.
새로운 무기가 그의 손에 들려졌다.
이제 남은 것은 루비 카드.
“구속과 관련된 카드가 나왔으면 좋겠는데….”
1군에 올라가서도 지금 스펙으로 잘 해낼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강송구가 원하는 것은 압도적인 성적이었다.
그럭저럭 1군에서 버티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좋은 성적을 만들기 위해서 이제 필요한 것은 느려터진 구속을 어느 정도 프로답게 만드는 것이었다.
‘평균 130대 초반의 구속만 되어도 1군에 올라가서 압도적인 성적을 거둘 자신이 있다.’
그렇기에 이번 루비 카드에서 구속과 관련된 좋은 카드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루비 카드를 개봉하시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인 강송구.
그의 눈앞에 다시 50장의 카드가 떠올랐다.
1개의 황동색.
40개의 은색.
남은 6개의 카드와 2개의 카드에서 각각 황금색과 백금색의 아우라가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무지개색으로 빛나는 카드 하나.
황동색의 카드 옆에 같이 붙어서 더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등급의 카드.
강송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아몬드 카드는 구종 전용 특성이 나왔던 카드였다.
그와 비슷한 수준의 다른 특성이나 스킬만 나와도 1군을 씹어먹기에 문제가 없을 것이다.
‘운이 정말로 좋아.’
이윽고 무지갯빛을 내는 카드를 클릭하려는 강송구.
그 순간 작은 고슴도치가 두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빠르게 튀어 올라서 카드를 선택하는 강송구의 손에 몸통박치기를 시도했다.
-우효어택!
덕분에 그의 손은 무지개 카드가 아닌 그 바로 옆에 있는 황동색 카드를 클릭하게 되었다.
그 모습을 보며 강송구가 처음으로 눈을 찡그렸다.
“무슨 짓이지?”
-으하하하! 네 녀석의 운! 이 몸의 몸통박치기로 바뀌었다! 더는 네놈의 폭거를 가만히 볼 수 없다!
강송구는 처음으로 ‘저 작은 고슴도치에 된장을 발라서 구워버릴까?’라는 생각을 했다.
황동색의 카드가 빙빙 돌자 우효는 더 환히 웃으며 자신의 승리를 자축하고 있었다.
-네 녀석의 운도 끝이다! 크하하하! 역시 내 선택은 옳았어! 감사합니다! 야구의 신이시여!
그때였다.
카드가 멈출 때가 되었는데도 이상하리만치 카드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회전을 시작했다.
아니, 오히려 회전속도가 더욱 올라갔다.
우효는 크게 웃다가 점점 웃음을 지웠다.
-뭐…. 뭐야?
황동색 빛의 사이로 새하얀 빛이 조금씩 흘러나왔다.
그리고 강송구는 눈앞에 떠오르는 알람을 볼 수 있었다.
[‘특별한 브론즈 카드’를 뽑으셨습니다.]
[축하합니다!]
[특별 이벤트를 달성했습니다. 악운으로 ‘브론즈 카드’가 ‘화이트 카드’로 교체되었습니다.]
이윽고 새하얀 빛이 그의 눈을 완전히 가렸다.
[화이트 카드를 개봉합니다.]
[‘파이어볼러-진(眞)’을 획득하셨습니다.]
우효는 경악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서…. 성장형 특성? 말도 안 돼!
반대로 강송구는 씩 미소를 지었다.
정말 최고의 상황이 찾아온 것이었다.
“최고군.”
[파이어볼러-진(眞)]
-종류: 성장형 특성
-효과: 구속이 3km/h가 증가합니다.
-잠겨있습니다.
-잠겨있습니다.
-잠겨있습니다.
현재 성능은 그렇게 압도적이지 않지만, 저 잠겨있는 효과가 열린다면 대단한 성능을 자랑한다.
그걸 알기에 강송구는 환히 웃을 수 있었다.
‘거기다 내 약점인 구속을 보완해주는 특성이다.’
설마 일이 이렇게 풀리다니.
강송구가 더욱 흡족하게 웃었다. 항상 덤덤하던 그의 표정에 처음으로 환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반대로 우효의 표정은 아예 절망으로 물들었다.
-도…. 도대체 저 운은 뭐란 말이야!
자신이 방해했음에도 기어코 저 또라이는 엄청난 특성을 뽑아버렸다.
점점 자신의 아름다운 노후가 사라져가는 것을 느낀 우효가 풀썩 주저앉아 현실을 부정했다.
-내 사과 한 조각…. 내 포도 두 알….
* * *
4월 초에 한국 프로야구가 개막했다.
그리고 대전 호크스는 시즌 초에 좋은 성적을 보여주며 1위로 치고 올라갔다.
[대전 호크스의 약진! 시즌 초부터 선두에 오르다!]
[대전 호크스는 어떻게 강해졌는가?]
[박진수의 영입이 훌륭했던 이유!]
[시즌 초 타율 5할을 넘어선 박진수의 저력! 그를 놓친 아홉 구단의 배가 너무나 아프다!]
탄탄한 불펜진과 건실한 내야수들.
그리고 기본은 해주는 외야수들.
선발진이 많은 이닝을 소화하지 못하는 것이 작은 옥의 티였지만, 시즌 초에 그것을 지적하는 전문가들은 없었다.
하지만 4월 말.
그 선발진의 붕괴가 성적에 큰 영향을 끼쳤다.
[7위까지 떨어진 대전 호크스! 그 이유는?]
[DTD를 증명한 호크스! 선발진 붕괴에 깊게 한숨을 내뱉는 호크스의 김동식 감독.]
[무엇이 문제인가? 용병 투수까지 흔들리는 호크스!]
[선발 유망주 서길윤! 3.1이닝 6실점으로 강판. 4월의 마지막 경기에서도 기어코 패배를 기록하는 호크스]
덕분에 지금 감독실에 앉아있는 김동식 감독은 깊은 두통을 겪고 있었다.
답이 없었다.
“꼭, 누군가 저주라도 하는 것 같군.”
분명히 시즌 시작 전에는 좋은 전력이었다.
확고한 1~3선발을 갖췄고.
불펜진은 리그 최고였다.
타선의 공격력도 훌륭했다.
세대교체를 한 외야진도 준수한 수비를 보여줬다.
내야는 당연히 탄탄한 수비를 보여줬고.
하지만 지금 성적은 리그 7위였다.
“설마…. 선발진이 이렇게 흔들릴 줄이야.”
다른 구단의 용병 투수와 비교해서 성적은 좀 떨어지지만 긴 이닝을 소화해주던 두 용병이 이번 시즌에는 처참한 수준의 이닝 소화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덕분에 리그 최고 수준인 불펜진이 시즌 초부터 자주 마운드에 올랐고, 내구력이 약한 승리조 불펜투수 한 명 부상으로 빠지자 투수조 전체가 엉망이 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유일하게 선발진 중에서 좋은 성적과 더불어 긴 이닝 소화 능력을 보여주던 토종 에이스 하명진이 한 달을 3군으로 내려가게 되었다는 점도 큰 문제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큰 부상이 아니라는 점.
그 정도일 것이다.
이제 1군 로스터에 투수 자리가 두 명이나 비었다. 그리고 2군에서 두 명을 끌어올려야 한다.
김동식 감독이 조용히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네, 선배님.
“김 감독, 소식은 들었지?”
-들었습니다. 그렇게 좋지 않습니까?
“명진이가 한 달은 빠져야 한다더군.”
-그나마 다행이군요. 그것보다 제게 전화를 주신 것을 보니…. 아무래도 콜업 때문이시죠?
“하위 선발을 책임져줄 수 있는 선발투수 하나와 7회에 팀의 승리를 지켜줄 승리조 불펜투수 하나.”
-안주민은 지금 올리셔도 문제없습니다. 5선발로 뛰기에도 적합하고…. 거기다 구위가 있어서 셋업맨으로도 준수한 성적을 보여줄 겁니다.
“그 친구 말고 다른 친구는?”
-강송구가 있습니다.
김동식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송구.
시범경기까지 제법 좋은 성적을 거둬서 그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느린 공을 던지는 투수.
하지만 그 투수의 공은 너무 느리다.
“그 친구는 구속이 너무 느려…. 적어도 130대 초반의 구속이 나오지 않는 이상에야 1군에서 유의미한 성적을 만들기엔 많이 부족할 거야.”
아직 고양이 손을 빌릴 정도로 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말은 뜻밖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 친구 구속이 빨라졌습니다.
“뭐?”
-최고 134km/h의 구속이 나오고, 평균 129~131km/h의 구속이 나옵니다. 1군에 올려도 쉽게 맞지는 않을 겁니다.
그 말에 김동식 감독이 고민에 잠겼다.
과연 강송구가 지금 올라와서 잘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고민은 짧았다.
“강송구의 2군 성적과 영상자료를 보내주게. 아무래도 내가 직접 확인을 해봐야겠어.”
-알겠습니다. 선배님.
잠시 후 그의 이메일로 파일이 하나 올라왔다.
김동식 감독은 그 파일을 한참을 살피다가 다시 김유진 2군 감독에게 전화했다.
-네, 선배님.
“강송구. 콜업시키지.”
-콜업 날짜는 5월 1일이시죠?
“그래.”
-알겠습니다.
“그래, 계속해서 수고해주게.”
그렇게 통화를 끝낸 김동식 감독.
그가 지끈거리는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퇴근하고 집에서 소주 한 잔과 뜨끈한 조갯국이라도 먹어야 잠이 잘 올듯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