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터스의 하인-296화 (296/298)

296편

<-- 전면전 -->

산맥 넘어로 들려오는 요란한 굉음 소리를 뚫으며 우리는 다급하게 이리엘의 함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리엘은 우선 엘에게 함선을 활성화시키라는 지시를 내린 뒤. 앞장 서서 함선 후방에 기이한 캡슐들이 잔뜩 매달려있는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여긴...”

천천히 숨이 옅어지는 리니아를 품에 안은 나는 이리엘이 안내해준 커다란 방을 돌아본다. 이리엘은 한쪽 벽에 마련된 단말기를 두드려 초록빛 액체가 가득 담겨있는 하나의 캡슐을 우리 앞으로 이동시킨다.

“옷을 벗겨줘.”

그리고 이어지는 이리엘의 부탁에 나는 조심스럽게 리니아의 겉옷을 벗겨간다. 그 사이에 이리엘은 리니아에게 호스가 이어진 마스크를 씌우고 여러 가지 센서가 붙은 감지기를 그녀의 몸 이곳저곳에 붙인다.

“캡슐에 넣어.”

“알았어.”

간단한 조치가 끝나자 나는 리니아를 우리 앞으로 이동되어온 캡슐안에 넣는다. 이리엘은 다시 단말기 앞으로 돌아가 몇 개의 단추를 신속하게 눌렀다.

“이제 된 거야?”

단말기에는 현재 리니아의 몸상태에 대한 다양한 데이터들이 크고 작은 그래프로 표시되어 떠올랐다. 이리엘은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단말기의 화면을 주시하며 몇 가지의 단추를 신중하게 눌렀다.

“상황이 더 이상 악화되지 않을 거야.”

그리고 그 한마디와 함께 급하게 몸을 돌려 방을 떠나려한다.

“자... 잠깐! 치료는?!”

나는 그런 그녀를 붙잡고 리니아의 치료에 대해 물었다. 하지만 이리엘은 자신을 붙잡은 내 손을 뿌리치며 매정하게 말한다.

“그건 나중에. 지금은 더 급한 일이 있어.”

“더 급한 일이라니!!”

심각한 부상을 입은 리니아를 무시하는 그녀의 행동에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진다. 하지만 이리엘은 그런 내 외침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방문을 열며 말한다.

“지금 떠나야 해. 안그러면 모두 죽어.”

“뭐...?”

콰아아앙!!

내 탄성이 끝나기도 전. 요란한 굉음과 함께 함선이 크게 요동친다. 그러자 이리엘은 나에게 자세한 설명을 해줄 시간조차 없다는 듯 급한 발걸음으로 함교를 향해 달려간다. 나또한 뭔가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을 직감하고 그녀를 쫓아 함교로 달려갔다.

“우왓!!”

단순한 지진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함선이 마구잡이로 요동친다. 제대로 서 있을 수 없는 흔들림에 이리엘을 쫓던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하지만 그런 나와 다르게 이리엘은 복도에 따라 마련된 손잡이를 잡고 능숙한 몸놀림으로 큰 문제없이 함교로 향한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이리엘처럼 복도의 손잡이를 붙잡고 몸을 일으킨 나는 비틀비틀 함교로 향해 걸음을 옮겨나갔다. 이 세계를 파멸시킨다는 아리엘의 포격이 이곳에도 떨어진 것일까. 밖에 보이지 않은 함선속에서 밖의 상황을 알 수 없었던 나는 로터스에게 사념을 보낸다.

“로터스...”

하지만 그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로터스?!”

그러자 뒤늦게 로터스에 대한 걱정이 밀려들어온다. 이 유적지에 봉인된 로터스. 그가 이 무시무시한 포격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아무리 괴물같은 재생력이 가진 그였지만 모든 것을 박살낼 기세로 쏟아지는 아리엘의 화력을 버텨낼 리가 없었다.

-아아... 끝장났군..

그때 힘없는 로터스의 사념이 들려왔다.

“로터스? 괜찮은건가?”

-아니. 박살나버렸다. 이건 좀 살아남기 무리같군...

“그게 무슨 소리야?!”

믿을 수 없는 로터스의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쳐버린다. 그와중에 간신히 함교까지 도착한 나는 함교의 문을 열었다.

“뭐... 뭐야...”

그러자 함선이 뒤흔들고 있던 진동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유적지 전체가 산산조각난 지반과 함께 지하로 가라앉고 있었다. 지하에서 거대한 폭발이 있었는 듯 갈라진 균열에는 하늘 높이 화염이 치솟아 오르고 있었고 유적지 전체를 휘감고 있던 로터스의 촉수도 그 화염에 매말라가면서 지하로 파묻혀간다.

“타메르씨!! 유적지가... 갑작스럽게 쾅하고!!”

마구잡이로 흔들리는 함선 때문에 벽에 매달려있는 티에르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울상인 얼굴로 소리친다.

“오히려 다행이야. 탑이 무너지는 덕분에 함선은 자유로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이리엘은 침착함을 유지하며 함선을 조종하고 있었다. 그녀는 크게 기울어지는 함선의 수평을 맞추며 엔진의 출력을 빠른 속도로 올리기 시작한다.

“로터스!!”

이미 불바다가 된 유적지를 내려다보며 나는 다시한번 로터스에게 사념을 보낸다. 그러자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이 희미한 사념이 들려왔다.

-네 가슴속의 알... 사실 거짓말이었다. 약간의 최면과 환각을 이용하면 간단한거지. 크크큭...

“잠깐... 너 설마...”

-나는 여기까지인 것 같군.

마치 자신의 끝을 예견한 것 같은 불안한 로터스의 말투에 나는 당황한다. 절대로 죽지 않는 불사신 같았던 로터스. 키르비르를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강자가 로터스였다. 그런 그가 죽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미안한다. 키르비르를 꼭 구해주길 바란다.

그 말을 끝으로 로터스의 사념이 끊어져버린다.

“로터스...? 로터스!!”

나는 다시 한번 그의 사념을 듣기 위해 그를 불러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익숙한 그의 중저음의 사념이 아닌 유적지가 붕괴되는 요란한 굉음뿐이었다.

뒤흔들리는 선체의 균형을 붙잡으려는 이리엘의 조종덕분에 함선은 천천히 안정을 되찾아간다. 하지만 간신히 안정을 되찾은 함선과 다르게 내가 살아왔던 유적은 로터스의 거대한 신체와 함께 끝도없이 지하로 가라앉아간다.

“말도 안돼...”

키르비르와 함께 했던 마탑. 네이와의 추억이 담겨진 꽃밭. 모두와 함께했던 숙소와 수많은 지식과 지혜가 잠든 중앙도서관까지. 모든 것이 화염속으로 가라앉아간다. 그 모습을 내려보던 내 다리에 힘이 풀려버린다.

“모든게...”

내 모든 기억과 추억이 담긴 유적지 뿐만이 아니었다.

네이는 에페리아의 손에 죽어서 인형처럼 그녀의 지시를 따르는 언데드가 되었다.

키르비르는 에페리아의 꾀에 속아 넘어가 저항할 수 없이 그녀의 지시를 따르게 될 것이다.

로터스. 그 또한 에페리아가 꾸민 끔찍한 계획에 희생량이 되어버렸다.

모든 것은 빌어먹을 에페리아의 계획대로. 그녀의 비열하고 사악한 계획대로 되어버린 것이다. 이제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그녀가 모든 것을 앗아가버린 것이다.

“회피기동.”

조용히 불타는 유적지를 응시하던 이리엘은 짧게 한마디를 내뱉은 후 거대한 함선의 선체를 크게 비튼다.

“회피이라뇨? 무엇을...”

갑작스런 이리엘의 통보에 티에르는 당황한 얼굴로 묻는다. 하지만 그런 티에르의 질문에 대답해주는 것은 함교 전체를 뒤흔드는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섬광이었다.

“뭐... 뭐야!”

“으아앗!!”

강한 섬광에 모두들 짧은 비명을 지른다. 다행히도 섬광은 오래지속되지 않았다. 한순간 함교를 가득 채웠던 섬광은 순식간에 흩어져 사라져버린다. 하지만 섬광이 흩어진 후. 다시 들어나는 유적지의 모습에 우리는 모두 말문이 막혀버린다.

“아... 아아....”

말 그대로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강렬한 섬광의 정체는 산맥 넘어에서 보이던 전함 디에스 이레에서 쏘아낸 커다란 빛의 창이었다. 유적지 중심에 직격으로 떨어진 빛의 창은 중앙탑을 비롯한 거대한 유적 구조물을 말 그대로 증발시키고 유적지가 있는 지반 자체를 완벽한 평지로 만들어버렸다.

“더 떨어질 거야.”

이리엘의 말을 증명하듯 유적지 곳곳에는 빛의 창이 곧 떨어질 거라는 것을 예고해주는 작은 빛무리가 하늘에서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저런게 더 떨어진다면...”

단 일격에 중앙탑과 그 탑을 지지하고 있던 거대한 유적 건조물을 증발시키고 그 거대한 건물이 지어져있던 단단한 지반을 순식간에 평지화 시킨 무지막지한 화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아리엘의 전함인 디에스 이레는 이 세계 전체를 평지화시키려는 듯 사방에. 특히 유적지를 감싼 거대한 산맥에는 수십발의 빛의 창을 조준하고 있었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태초의 세계를 만들려는 듯한 무지막지함에 모두들 할 말을 잃어버린다.

“마계로 갈 거야. 모두들 원하는거 아니야?”

더 이상 그 무엇도 살아갈 수 없는 우리가 살던 세계를 뒤로하고 이리엘은 함선을 움직여 창공을 향해 점차 빠르게 엔진을 가속해나간다.

“마계로...”

이리엘의 말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어자피 이제 곧 파괴될 이 세계에서는 더 이상 그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래... 이대로 끝낼 수 없어. 그 빌어먹을 에페리아 녀석에게 당한채로 끝낼 수는 없어.”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에페리아가 저지른 만행을 떠올리며 이를 간다.

“마계라면 저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을꺼에요. 제 클론을 만드는 에페리아의 의도도 알아보고 싶네요.”

이때까지 에페리아가 만든 자신의 클론을 대면해왔던 타이는 별 고민없이 마계로 간다는 사실을 환영한다.

“그 분이 어떤 분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어린 리니아씨에게 어떻게 그런...”

에페리아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던 리엔이었지만 에페리아가 리니아에게 지워질 수 없는 큰 상처를 입혔다 사실에 순수한 분노를 표했다.

“어자피 이젠 돌아갈 곳도 없네요.”

별생각이 없어보이는 티에르는 단순히 지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 마계로 간다는 우리의 뜻을 가볍게 받아들여버린다.

모두가 찬성하자 이리엘은 주저없이 함선의 엔진을 가동시킨다. 그러자 함선이 크게 흔들리며 함선 주변의 공간을 뒤틀려진다.

쿠웅!!

곧이어 묵직한 충격음과 함께 뒤틀려진 공간을 향해 급가속한 함선은 그대로 뒤틀려진 공간에 충돌한다.

콰드득!!

그러자 불안정하게 뒤틀려진 공간이 산산조각나서 깨어지며 이리엘의 함선은 난생 처음본 낯선 공간으로 들어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깊은 어둠만이 가득한 칠흑의 공간. 그런 공간속에서 선명히 보이는 회색빛 기이한 덩어리들이 이리저리 뒹엉켜 사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키이잉.

그런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이리엘은 예고없이 스위치를 눌러 함선 외부를 보여주던 화면을 그대로 꺼버린다.

“차원의 틈새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빛조차 침식당해 사라지는 공간이니까...”

“그럼... 회색빛 덩어리들은 뭔데?”

“몰라.”

내 질문에 이리엘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한다. 그녀조차도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에 나는 살짝 놀란다.

-영혼...

회색빛 덩어리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다름아닌 시란이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넋이 나간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간다.

-이리저리 뒤엉켜... 본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떡이 된 영혼이야...

“그런게 어째서 차원의 틈새에 있는건데?”

하지만 이어지는 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불안함과 떨림이 가득한 시란의 말투에 우리에게 절대 득이 되지 않은 현상이라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지금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어.”

틈새에서 보이는 회색빛 덩어리는 신경쓸 필요없다는 듯이 이리엘은 심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계로 갈 수가 없어.”

“그게 무슨 소리야?!”

이리엘은 신속하게 단말기를 두드려 외부의 풍경을 보여주던 화면에 함선의 상황을 나타내는 데이터를 띄운다. 함선을 보여주는 듯한 그림은 곳곳이 위험을 뜻하는 붉은 빛과 경고를 뜻하는 노란빛이 가득했다.

“함선 수리가 부족했어. 틈새의 침식을 버틸 수가 없어.”

“침식이라니?”

“틈새는 원래 아무것도 존재하면 안되는 공허의 공간...”

타닥.

이리엘이 단말기를 몇 번 두드리자 화면은 함체 곳곳을 보여주는 작은 감시 화면들로 가득채워진다. 그 중 한 감시화면을 발견한 이리엘은 그 화면을 잘 볼 수 있도록 크게 확대를 했다.

“이건...”

화면 속의 복도에는 유적 잔해가 박혀있었던 듯 주먹만한 구멍이 뚫려있었다. 그리고 그 구멍은 보이지 않는 벌레에게 갉아먹히듯 조금씩 그 크기가 커져가고 있었다.

“이 공간에 노출된 물질은 모두 소멸 돼.”

이리엘은 이러한 상황을 대처할 방법이 있는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단말기를 두드려나간다. 그리고 몇 초 후.

쿵..

“꺄앗!!”

작은 진동과 함께 우리가 있던 공간의 조명이 그대로 꺼져버린다. 주변이 어둠에 갇혀지자 티에르는 짧은 비명을 터트려버렸다.

“함선 전력을 모두 방어장에 집중했어. 이걸로 최소한 침식의 진행은 막을 수 있을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이리엘은 더 이상 이 자리에서 할 일이 없다는 듯 미련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함선을 어느정도 수리할 때까지 마계로 진입은 커녕 차원이동도 불가능해.”

“하지만 이런 식으로 시간낭비할 여유는 없다고!”

절망적인 이리엘의 말에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러버린다. 키르비르가 에페리아의 손아귀에서 어떤 꼴을 당하고 있을지 상상이 되지도 않았다. 일분 일초가 아까운 이 순간에 무력하게 이 공간에 남겨져 있어야하는 현실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무리하게 진입을 시도했다가는 차원의 벽도 뚫지 못하고 그대로 산산조각날 거야.”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말하면서도 이리엘은 다른 방법을 찾기 위해 골똘히 고민을 한다. 그리고 잠시후. 그녀는 짧은 신음과 함께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타메르 한 명만은 어떻게든 보낼 방법은 있어.”

“그 방법이 뭔데!!”

여기서 멍하니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던 나는 이리엘의 말에 그 어떤 짓이라도 할 기세로 마계로 진입할 유일한 방법에 대해 물었다.

“대 차원용 미사일. 유도장치와 폭약을 없애면... 타메르 한명정도는 들어갈 공간이 생겨.”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