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편
<-- 전면전 -->
-아직 한명남았다.
그때. 로터스의 사념이 고요하게 울려퍼진다. 뜬금없는 간섭해오는 성가신 그의 사념에 에페리아는 인상을 찡그리고 온몸을 긴장시킨다.
“그게 무슨...”
콰아앙!!
그 순간. 지반을 뒤흔들며 치솟아오르는 로터스의 거대한 촉수. 하지만 그 거대한 촉수가 에페리아를 내려치는 것보다 에페리아의 반응속도가 더 빨랐다.
“헛수작!”
콰앙!!
에페리아는 자신을 향해 내려쳐오는 로터스의 촉수를 간단한 폭발마법으로 그대로 터트려버린다. 그 폭발을 견디지 못한 로터스의 촉수가 붉은 살점덩어리로 변해 사방으로 흩어지는 모습에 에페리아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진다.
“흐야아아아앗!!”
하지만 그 붉은 살점 덩어리들 사이에 숨어있는 존재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리엔. 그녀는 오른손에 자신의 신성력을 뭉쳐 새하얀 순백의 건틀렛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대로 에페리아를 향해 떨어져내리며 있는 힘껏 자신의 주먹을 휘둘렀다.
“칫!”
에페리아또한 그 짧은 시간안에 자신의 마력을 갈무리하여 리엔의 접근을 막는 마법의 벽을 만들어냈다.
콰앙!!
불행히도 리엔의 신성력이 휘감겨진 그녀의 주먹은 에페리아의 마법 벽을 뚫어낼 수 없었다.
“란슈씨!”
하지만 리엔의 공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녀가 자신의 몸에 머물러있는 란슈를 부르는 순간. 그의 영체는 에페리아가 만든 마법의 벽을 뚫고 들어와 에페리아의 얼굴만한 커다란 주먹을 휘두른다.
빠악!!
“에페리아님!!”
에페리아의 몸이 튕겨져나오는 것과 동시에 레오의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퍼진다. 그는 황급히 바닥에 쓰러진 에페리아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에페리아를 부축하려하지만 에페리아는 신경질적으로 팔을 휘둘러 자신을 부축하려는 레오를 밀쳐낸다.
“네이! 깨버려!”
그녀는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내고 아직 지지않았다는 듯이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리니아를 붙잡고 있는 네이에게 명령한다.
“막아아아아!!!”
나를 막고 있던 마력의 벽이 사라지자 나는 리니아를 구하기 위해 있는 힘껏 달렸다. 하지만 그런 내 눈앞에서 네이의 팔이 천천히 들어올려진다.
“으읏!!”
전후 사정은 모르지만 리엔은 일단 온몸을 던져 네이의 손목을 붙잡으려한다. 아슬아슬하게 리엔의 손이 네이의 손목에 닿으려는 순간. 네이의 눈이 붉게 충혈된다. 내가 키르비르에게 받았던 그 힘. 어떻게 얻은지 모르겠지만 네이 또한 가지고 있던 힘. 시공간을 제어했던 광혈의 힘이었다.
“안돼!!”
퍼억.
내 비명소리와 가죽주머니를 세게 치는 듯한 소리가 동시에 울려퍼진다.
“끄... 아으...”
리엔의 손이 네이의 팔을 붙잡으려는 순간. 순간이동한 것 처럼 네이의 팔은 어느샌가 이미 리니아의 하복부에 깊게 박혀있었다.
“으... 하윽... 히끅... 끄륵...”
요란한 비명은 없었다. 리니아는 강렬한 쇼크를 받았는지 숨넘어가는 듯한 짧은 비명을 흘리며 몸을 경련시키기 시작한다.
“쳇... 흥이 깨졌어! 돌아가자!”
에페리아가 손을 튕기자 네이는 경련을 일으키는 네이를 쓰레기 버리듯 바닥에 던지며 에페리아의 곁으로 돌아간다. 그 사이에 황급히 리니아에게 다가선 나는 그녀의 몸상태를 확인해본다.
“리... 리니아! 정신차려!!”
리니아는 입에 거품을 문채 눈물과 콧물이 범벅된 얼굴로 온몸을 튕기듯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황급히 그녀의 몸을 살펴보던 리엔은 짧은 비명을 지른다.
“어... 어떻게 이런...”
리엔은 핏물이 가득 번지기 시작하는 리니아의 바지를 황급히 벗겨낸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리니아의 사타구니를 살짝 벌린다. 이미 피투성이가 된 그녀의 음부에서는 산산조각난 유리조각과 함께 유리병에 담겨있었던 것 같은 끈적이는 화학 약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리엔... 빨리 치료를...”
“이물질을 제거하지 않으면... 꺄앗!!”
리엔은 유리조각을 빼내기 위해 손을 집어넣어 보려하지만 녹색빛의 화학 약품에 손이 닿자 짧은 비명과 함께 손을 뒤로 뺀다.
“이건 대체...”
강한 산성을 띄고 있었는지 화학 약품에 닿은 리엔의 손에 붉은 화상자국이 천천히 번져간다.
“살아남아도 살아있는 것 같지 않을걸? 나와 같은 검은 마녀면서 그딴 짓을 하고 다니다니... 생각만해도 역겹네.”
리니아를 조롱하는 에페리아의 목소리에 나는 그녀를 노려본다. 하지만 에페리아는 보란 듯이 바닥에 떨어진 리니아의 마녀모자를 주워든다. 그리고 내가 보는 눈앞에서 그녀의 마녀모자를 그 자리에서 불태워 재로 만들어버린다.
“킥... 마계에서 봅시다. 여러분들~”
손에 남은 재를 허공에 흩뿌린 에페리아는 얄밉게 마지막 인사를 남기며 네이와 레오와 같이 자신이 만든 균열 속으로 여유롭게 사라져버린다.
“함선... 함선으로...”
에페리아를 놓쳤다는 사실에 분해할 여유는 없었다. 이리엘은 내 손을 잡아이끌며 자신의 함선을 가리킨다. 리엔이 치료를 못한다면 그 다음 믿을 만한 것은 이리엘의 기술밖에 없었다. 나는 더 이상 고민할 여유없이 황급히 리니아를 품에 안아들고 이리엘의 함선인 디에그 데그를 향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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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드드득..
회심의 일격으로 에페리아에게 크게 한방 먹여준 로터스는 기분 좋게 자신의 촉수를 회수한다. 유적지 내부를 뒤흔들며 치솟아올랐던 그의 거대한 촉수가 회수되며 그가 봉인된 커다란 홀의 천장이 무너져내린다.
“오랜만이군.”
쏟아지는 잔해 속에서 낯익은 인물이 서있었다. 검은 코트를 몸에 두른채 무표정한 얼굴로 로터스가 봉인되어있는 거대한 기둥을 바라보는 여성. 그녀는 다름아닌 아리엘이었다.
“어떻게 그 거대한 존재를 숨긴거지?”
그녀의 정신을 조작해 자신의 존재를 숨긴 로터스였다. 하지만 대규모 포격을 하면서 센서를 통해 로터스의 존재를 파악한 아리엘은 포격을 가하기전 자신으로부터 존재를 숨긴 로터스를 대면하기 위해 내려온 것이었다.
-정신조작이지.
로터스는 숨길 것이 없다는 듯이 자신이 행한 사실을 그대로 말한다. 정신을 조작했다는 말에 아리엘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진다. 정신적인 공격은 처음 당해본 아리엘에게 이러한 공격에 능숙하게 대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소용없어.”
정신 조작에 의해 자신의 감각이 무력화되었다면 기계를 믿으면 그만이었다. 아리엘은 자신의 오른쪽 눈에 이식한 비슈누의 눈을 통해 로터스의 존재를 확실히 포착한채로 자신의 총을 들어올린다.
-아니. 마지막 한수가 남아있다.
아리엘과 서로의 눈빛이 마주치는 순간 로터스의 눈이 번쩍인다. 그러자 방아쇠를 당기려는 아리엘의 몸이 우뚝 멈춰선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벌어지는 일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눈동자를 휘둥그레뜬다.
-네 몸에 내 씨앗을 집어넣었지. 정신을 지배할 수는 없지만 몸의 자유는 구속할 수 있을거다.
“리셋 프로토콜 실시.”
-그래. 그 몸을 포기하고 복제된 신체를 불러오려는 거냐?
로터스는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자신의 샛노란 눈동자로 아리엘의 눈을 응시한다. 그러자 눈동자의 빛이 천천히 강해지기 시작한다.
-몸은 자유롭게 바뀌지만 기억은 바뀌지 않는법. 네 머릿속에 하나의 각인을 박아주마.
파앗!
로터스의 말이 끝나는 순간. 그의 눈동자가 환한 빛을 내뿜는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리엘은 여전히 그를 노려보고 있었고 로터스또한 조용히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흥. 또다른 네가 오는군.
주변의 공간이 뒤틀리는 것을 느낀 로터스는 붙잡고 있던 아리엘을 촉수로 휘감아 방 한쪽으로 옮겨둔뒤 천천히 일그러지는 공간을 바라본다.
콰아아앙!!
하지만 그 공간에서 튀어나오는 것은 아리엘이 아니라 거대한 미사일이었다. 일그러진 공간을 뚫고 튀어나온 거대한 미사일은 그대로 로터스가 봉인된 거대한 기둥에 처박혀 기둥 전체를 붕괴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