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터스의 하인-291화 (291/298)

291편

<-- 전면전 -->

“휘유... 조금 위험했습니다. 아찔했네요.”

건재한 수정에 시선이 팔린 사이. 안도의 한숨이 섞인 레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쑤셔 박혀있던 총알을 빼낸 레오는 손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입을 연다.

“그 분이 없었으면... 수정은 박살났겠죠.”

레오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린다. 감각을 날카롭게 세워보지만 레오를 제외한 또다른 존재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자존심이 강한 에페리아가 약속을 어기고 직접 실력을 행사할 가능성도 없었다.

아무리 고민해도 해결되지 않을 의문을 뒤로하고 이리엘은 묵묵히 새로운 탄환을 장전할 뿐이었다.

“포기하세요. 이미 절반 이상 완성되었습니다. 벌써 다 끝나가는걸요.”

이미 다 끝났다는 듯이 레오는 여유로운 걸음으로 탑 가운데로 걸어간다. 정확히 나와 이리엘 사이에서 여유를 부리는 레오의 모습에 나는 대검을 바닥에 질질 끌며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선다.

“그래... 그렇게 보이는 군.”

레오의 말대로 수정은 짙은 보랏빛을 품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수정구 주변에서는 수정구에 붙잡혀 있는 인간의 영혼들이 명확히 보이는 형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미 수정구가 영혼으로 다 채워져가고 있는 모습처럼 보였다.

“이리엘! 탑을 부숴!!”

시간이 촉박하다고 생각한 나는 이리엘의 차선책보다 마지막 도박을 하기로 선택한다.

“에스멜라다. 포격 개시.”

이리엘은 고맙게도 내 외침에 아무런 이의 없이 그대로 임무를 수행해준다. 그녀가 누군가에게 교신을 보내자 거리가 떨어져있는 유적 옥상에서 여러줄기의 화염들이 치솟아오르며 이쪽을 향해 유탄들을 쏘아보낸다.

“이건 무슨 의도입니까?”

탑을 붕괴시키려는 나와 이리엘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못하겠다는 듯이 레오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리엘또한 내 행동이 큰 효과가 있을지 의심하는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도 침착하게 나를 주시하며 다음 명령을 기다린다.

콰광! 콰과광!!

두 세발의 유탄이 마탑의 측면을 때리는 순간. 균형을 잃은 마탑이 순식간에 붕괴되어 나가기 시작한다. 그런 나와 이리엘의 행동이 한심하다는 듯이 짧게 한숨을 내쉰 레오는 가볍게 도약하여 무너지는 마탑에서 벗어나 다시 수정에 매달리려한다.

“이걸 기다렸지.”

그 순간. 나는 내 몸에 흐르는 광혈의 피를 오른쪽 눈에 집중시킨다. 키르비르가 나에게 전해준 새로운 힘. 눈동자가 불타오르는 듯한 격동이 느껴짐과 동시에 천천히 시간의 흐름이 느려지기 시작한다.

“당신이 어떻...”

나를 바라보는 레오의 눈이 멍청하게 휘둥그레진다. 하지만 레오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 정지된 것처럼 느려진 시간 덕분에 경악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레오의 얼굴 표정을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흥!”

좀 더 구경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많지 않았다. 부서지는 탑의 파편을 밟고 도약한 나는 허공에 뛰어오른 레오의 멱살을 움켜쥔다. 그리고 그의 몸을 발판 삼아 수정을 향해 다시한번 힘껏 도약해나갔다.

“크읏...!!”

눈동자가 불타오르던 통증이 점점 더 커지며 그대로 눈을 터트릴 것 같아진다. 방해꾼인 레오를 무력화시켰지만 마지막까지 방심할 수는 없었다. 눈에 집중된 광혈의 힘을 유지하며 수정 가까이까지 접근한 나는 대검을 힘껏 움켜쥔다.

“이걸로 네 목적도 끝이다!!”

광혈의 힘으로 인해 시간이 정지된 이상 그 누구도 날 막을 수 없었다. 에페리아를 상대로 최초로 얻어낼 승리를 직감하며 나는 번쩍 들어올린 대검을 그대로 내려꽂아 수정을 박살내려 했다.

뻐억!!

하지만 그 순간 내 앞으로 뛰어오른 검은 그림자가 섬광같은 움직임으로 내 팔과 가슴을 강하게 가격한다. 갑작스러운 방해로 수정을 두조각 내기는커녕 힘껏 움켜쥐었던 대검조차 놓쳐버린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웅얼거린다.

“어떻게?!”

오른쪽 눈은 여전히 타오르는 듯이 아팠다. 시공을 지배하는 광혈의 힘이 유지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 순간 나는 뒤늦게 눈치채버린다. 천천히 부숴지는 마탑으로 떨어져내리는 내 모습을 내려보는 검은 그림자의 눈동자 또한 나와 비슷하게 붉게 빛나고 있었다.

“너... 너는...”

기이한 검은 그림자가 나와 같은 힘을 쓰고있다는 사실보다 나는 또 다른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두 눈을 휘둥그레 뜬다. 천천히 실루엣이 선명해지는 검은 그림자. 나는 그런 검은 그림자의 정체를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네... 네이?!”

죽었다고 생각했던 그녀. 그녀가 내 앞에 서서 차가운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내가 넋을 잃자 눈에 모여있던 광혈의 힘이 흩어지며 주변 세상이 천천히 정상의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네이!!”

무너지는 마탑으로 떨어지며 나는 네이를 향해 힘껏 손을 내뻗는다. 하지만 수정에 매달려있는 그녀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얼굴로 나를 조용히 응시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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