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편
<-- 반항 -->
리니아가 방안에 들어간 후. 이리엘은 리니아가 설계하고 자신이 약간 수정한 휴대용 이능력 억제장의 제작을 엘에게 명령한다. 함선 내부의 중형 군수시설은 신속하게 부품을 만들어 한치의 오차없이 설계도 대로 물건을 제작해낸다.
완성된 이능력 제어장치가 방안에 도착한 것은 이리엘이 엘에게 명령하고 고작 몇 분이 지났을 때였다. 장치는 손쉽게 만들어냈지만 동력을 책임질 마법석은 이리엘이 만들 수 없었다. 마법석이 들어갈 속이 텅 빈 장치를 이리저리 둘러보던 이리엘은 리니아가 나오기만을 기다린다.
“차... 찾았어!!”
마침 그 때. 이리엘의 개인실 문이 벌컥 열리며 얼굴이 잔뜩 상기된 리니아가 이리엘을 향해 뛰어온다.
“그거... 그거있잖아! 오라방이 만든 약!”
“타메르의 약...?”
리니아의 말에 이리엘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리엘은 타메르가 만들었던 푸른 알약을 기억해낸다. 남성과 성관계를 할때까지 마구잡이로 발정하는 위험한 약이었다.
“그거라면 키르비르에게 잠깐이나마 빈틈을 만들 수 있을 거야. 그리고...”
키르비르를 향한 복수의 계획을 세우던 리니아는 문뜩 이리엘이 들고 있는 이능력 제어장치를 발견한다. 이미 설계도 대로 완성된 제어장치의 모습에 리니아는 환히 웃으며 품안에서 마법석을 꺼낸다.
“이걸로 녀석의 마력을 무력화 시키고...”
“하지만 너도 힘을 못쓰게 될 거야.”
하지만 이능력 제어장의 단점은 리니아의 마력까지 봉쇄해버린다는 것이었다. 서로의 마력이 봉쇄된 상황에서 체구도 비슷한 키르비르를 힘으로 제압하기는 상당히 힘들 것이다.
“헤헷... 그거 있잖아. 그거 좀 빌려줘.”
하지만 리니아는 그것도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가볍게 이리엘의 옆구리를 찌르며 말한다. 그런 리니아의 제스쳐를 이해못한 이리엘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거... 조금 하드한 거 있잖아... 수갑이랑 전기충격기...”
“그걸 어떻게 안거야?”
별로 밝히고 싶지 않은 자신의 사생활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리니아의 모습에 이리엘은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의문을 표한다. 그런 이리엘의 질문에 리니아는 이리엘이 잠깐 빌려줬던 켈레브라의 리볼버를 보여준다.
“그 녀석이 그렇게 입이 가벼울지 몰랐는데.”
리니아가 밝혀준 사실에 이리엘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잠시 빌려줬던 켈레브라의 리볼버를 다시 되돌려받는다.
“성적인 부분에서는 꽤나 가볍더라.”
“하아... 그런 놈이란 걸 잠깐 잊고 있었어.”
리니아의 말에 이리엘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해버린다. 이리엘은 리니아에게 돌려받은 리볼버를 마치 혼내듯 실린더부분을 탁자에 두드린다. 그러자 고통을 느끼는 듯 리볼버는 가볍게 진동한다.
“하여튼 빌려줄 수 있겠어?”
“문제 없어.”
작게 한숨을 내쉰 이리엘은 켈레브라의 리볼버를 홀스터에 갈무리 해 넣는다. 그리고는 탁자위에 리니아가 요구했던 수갑과 전기충격 막대를 꺼내둔다.
“헤헤헷... 상태 좋아보이는데?”
수갑과 전기 충격기를 챙긴 리니아는 시험삼아 전기 충격기를 작동시켜본다. 푸르스름한 전류가 은은히 감겨있는 막대는 간헐적으로 스파크를 일으키며 자신의 위험성을 사방에 알려준다.
“진짜로 할 거야? 뒷감당은?”
“어설프게 한다면 뒷감당을 걱정해야겠지. 하지만 확실히 혼을 내면... 상하관계가 뒤바뀔걸?”
리니아는 스파크를 일으키는 전기 충격기를 살펴보며 자신의 입술을 혀로 훑는다. 단순히 장난을 준비한다고 하기에 너무 사악한 리니아의 모습에 이리엘은 살짝 걱정을 한다. 하지만 이미 도구들과 장치까지 준비된 상황. 이제와서 리니아를 막을 수가 없었다.
“약은 어떻게 할껀데?”
리니아의 보복을 위해서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은 바로 타메르의 약이었다. 이리엘의 말에 리니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이리엘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켈레브라가 그것도 말한거야? 하아...”
확신이 가득한 리니아의 미소에 다시한번 깊은 한숨을 내쉰 이리엘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몇 분 후. 두 알의 푸르스름한 알약이 담겨있는 작은 병을 가져온다.
“헤헤헷. 켈레브라라는 녀석이 점점 더 마음에 들어가는데?”
“난 점점 더 싫어지는 것 같아.”
만일을 위해 몇 개의 알약을 더 챙겼던 이리엘이었다. 켈레브라는 그런 사실까지 리니아에게 일일이 말해준 것이다. 이리엘이 가져온 약까지 챙긴 리니아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병 안에 담긴 약을 살펴본다.
“헤헤헷. 자기가 가르쳐준 능력으로 한번 당해보라지.”
병안에 담긴 알약을 꺼내든 리니아는 키르비르에게 배운대로 가볍게 마력을 운용해 공간을 왜곡시킨다. 그녀가 왜곡시킨 공간 안에 갇힌 알약은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산산히 으깨져버린다.
하지만 가루가 된 약은 흩어지지 않고 리니아가 손 끝에 유지하고 있는 왜곡된 공간안에 머물고 있었다. 가볍게 심호흡을 하여 신중하게 정신을 집중시킨 리니아는 천천히 손끝을 움직여나간다.
“조오아... 좋아!”
왜곡된 공간이 리니아의 의지대로 변형되며 가루가 된 약이 흩어지지 않고 리니아가 원하는 곳으로 움직여나간다. 가볍게 자신의 몸 주변으로 한 바퀴 정도 가루가 된 약을 움직여보던 리니아는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공간을 압축시켜 가루가 된 약을 다시 알약으로 뭉쳐버린다.
“헤헷. 뭐에 당했는지도 모를걸? 두고 보자고!”
다시 뭉친 알약을 병안에 담은 리니아는 키르비르가 부를 때가 기다려진다는 듯이 싱글 싱글 웃으며 알약이 담긴 병을 가볍게 흔들어본다. 이리엘은 아무말 없이 그런 그녀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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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전의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다가왔다. 간단한 요깃거리를 찾으러 식당으로 갔을 때 우연히 마주친 키르비르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잠시 자신의 방에 오라는 제스쳐를 보낸다. 리니아가 보기에 너무나도 건방진 그녀의 모습에 겉으로는 이를 갈며 분한척을 했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물건은 모두 준비되었고...“
리니아는 로브아래에 꽁꽁 숨겨둔 물건들을 확인해본다. 허리띠에 매어져있는 수갑. 곧바로 손잡이를 움켜쥘 수 있도록 로브 안감에 고정시켜둔 전기충격기. 안쪽 호주머니에 약병과 품안에 이능력 억제장치까지.
“후우...”
키르비르의 방에 들어서며 리니아는 살짝 긴장된 얼굴로 가볍게 심호흡을 한다. 그런 리니아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침상에 걸터앉은 키르비르는 자신이 마시던 물컵을 그녀에게 흔들어보인다.
“뭐야. 또 컵을 띄워보라고?”
“아니. 그건 이미 쉽잖아.”
퉁명스럽게 한마디 내뱉은 키르비르는 다짜고짜 물컵안에 남은 물을 그녀에게 뿌린다. 그런 갑작스런 키르비르의 행동에 리니아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반사적으로 전방으로 손을 뻗어 가볍게 손목을 비튼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리니아의 전방의 공간이 왜곡되며 그녀를 향해 뿌려진 물은 기이한 각도로 휘어져 바닥을 촉촉하게 적신다.
“생각보다 습득속도가 빠르네.”
손쉽게 공간을 왜곡시켜 물보라를 피해낸 리니아의 모습을 보고 키르비르는 솔직한 감탄을 터트린다.
“뭐... 뭐야!! 갑자기... 우웃!!”
바락 소리를 지르던 리니아는 갑작스럽게 차오르는 숨 때문에 제대로 말을 마치지 못하고 가슴을 움켜쥔다.
“너무 넓은 공간을 왜곡시켜서 그래. 내가 말했지. 공간왜곡의 마력소모는 왜곡시킨 공간의 제곱에 비례한다고. 너가 안정적으로 왜곡시킬 수 있는 공간은 네 몸의 절반정도의 크기야. 하지만 이번엔 네 몸집만한 공간을 전부 왜곡시켜버렸으니... 마력이 거의 고갈된거지.”
“젠장... 우욱...”
나지막하게 욕을 내뱉으지만 입을 벌리자마자 올라오는 헛구역질에 리니아는 황급히 자신의 입을 가로막는다. 이리엘은 키르비르의 말대로 당황한 나머지 너무 많은 공간을 왜곡시켜버렸다. 그에 따른 과다한 마력소모에 의한 쇼크를 몸이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젠장... 이렇게 되면...’
멋지게 키르비르에게 복수하겠다는 그녀의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몸도 제대로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마력이 고갈된 상황. 공간 왜곡으로 가루로 만들어버린 약을 키르비르에게 몰래 먹이는 정교한 작업은 거의 불가능했다.
‘질 줄 알고?!’
하지만 리니아는 고집을 부린다. 이를 악문 리니아는 조금씩 모여지는 마력을 짜내 억지로 공간을 왜곡시켜나갔다. 키르비르가 눈치채지 못하게 마력을 제어하는 손을 뒤로 숨긴 채 품안에 숨겨놓은 유리병의 공간을 왜곡시킨다.
파삭..
“읏!!”
마력이 부족한 덕분일까. 예전처럼 정교한 제어가 불가능했다. 약만 가루로 만들어버려야 하는데 살짝 제어에 실패한 공간 왜곡은 유리병 전체를 박살내버린다. 알약 두 개 분량의 가루. 알약 하나하나의 약효가 얼마나 센지 짐작할 수 없었지만 그런 것 하나하나 세세히 따지기에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조급해하지 말고 가볍게 심호흡을 해. 어떤 상황이 닥칠지 모르니 마나가 고갈된 순간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는 요령을 배워.”
다행히 키르비르는 리니아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억지로 짜내고 짜낸 마력으로 키르비르 몰래 품안에서 가루가 되어버린 약을 왜곡된 공간으로 빼낸 리니아는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이거나 먹어라 마녀야!!”
리니아의 원래 계획은 키르비르가 눈치채지 못하게 몰래 그녀의 호흡기로 약 가루를 스며들게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력고갈로 제어는커녕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그렇게 오래 시간을 끌 수 없었던 리니아는 마지막 마력을 짜내 키르비르의 얼굴 앞에 가루가 된 약을 흩뿌려버린다.
“흥.”
키르비르는 리니아의 돌발행동에 당황하지 않고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게 손을 휘저어 자신의 앞의 공간을 왜곡시킨다. 리니아가 던진 회심의 약가루는 허무할 정도로 손쉽게 키르비르가 만들어낸 공간속에 갇혀버린다.
“너가 한번쯤은 반항할 거라고는 예상했어. 하지만 유리가루? 저급하고 악질적인데.”
하지만 놀랍게도 키르비르는 약가루를 눈치채지 못한다. 그녀가 왜곡시킨 공간속에 뿌연 약가루보다 빛에 반짝이는 유리가루들이 더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왜곡시킨 공간속에서 반짝이는 유리 가루들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키르비르는 특이한게 없다고 판단하고 왜곡시킨 공간을 풀어 유리 가루들을 허공에 흩어지게 한다.
“오... 이런...”
천천히 흩어져 허공에 녹아드는 유리가루들을 바라보며 리니아는 넋이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이제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옅게 흩어진 유리가루들과 함께 그녀가 만들어낸 약가루도 허공에 천천히 녹아들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IceOfSonic / 저야말로 절 잊지않아 주신걸 감사드려야죠.
임대가르시아 / 언제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간만에 재 등장한 알약. 약은 언제나 옳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