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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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선을 관리하는 인공지능 엘의 도움을 받아 또다른 의료실에 기절한 이리엘을 눕힌 나는 조용히 이리엘의 얼굴을 내려본다. 무슨 악몽이라도 꾸는 건지 그녀의 얼굴은 고통스럽게 뒤틀려있었다.
“이리엘의 상태는?”
-상처부위는 치료 완료. 신체는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결국 정신적 쇼크 때문에 못 일어난다는 뜻이었다. 조용히 이리엘을 내려보던 나는 내 곁에 서있는 키르비르를 돌아본다.
“그 능력은 뭐지?”
방금전 살점덩어리와 싸울때 키르비르가 했던 조언을 떠올린 나는 키르비르에게 묻는다. 그러자 키르비르는 심각한 얼굴로 팔짱을 낀채 나를 바라본다.
“꼭 알고 싶어?”
그녀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분명 범상치 않은 힘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강력한 힘이 아무런 대가를 원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강한 능력을 가진 힘은 그만큼 큰 위험을 부담하는 것이 이 세계에 변하지 않은 이치였다.
“그거.”
키르비르는 내 손목을 가리킨다. 그러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손목을 확인해본다. 원래 내 손목에는 키르비르가 했던 일종의 의식으로 붉은 띠가 그려져있었다. 하지만 처음엔 두 줄이었던 붉은띠가 지금은 한줄밖에 남아있지않았다.
“이거 뭐야... 왜이래?”
하나로 줄어든 띠의 모습에 당황한 나는 손으로 띠를 문질러본다. 그러나 손목에 새겨진 붉은 띠는 단순히 문지른다는 행위만으로는 지워지지 않았다.
“그거 사실 내 피의 일부야. 그리고 그게 네 몸과 동화되어 버린거지.”
“네 피? 그게 광혈의 저주와 무슨 관련이 있다는거야?”
“내 몸에도 광혈의 저주가 서린 피가 흐르니까.”
키르비르는 말대신 행동으로 자신의 말을 증명해보인다. 살짝 소매를 젖힌채로 그녀가 자신의 팔을 들어올리자 그녀의 팔에 나와 비슷한 붉은 문양들이 떠오른다.
“그건...”
“너의 세계의 말로 표현하면 광혈의 저주. 우리 세계의 말로 표현하면 혼돈의 힘. 나도 가지고 있어.”
“하지만 넌...”
“그렇게 강한 힘은 아니야. 오리지널은 아니니까. 그러니까 폭주하거나 이성을 잃을 가능성도 없으니까 걱정마.”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너무나도 손쉽게 말하는 키르비르였다. 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지만 키르비르는 관심없다는 듯이 걷어올린 소매를 다시 내려 자신의 팔을 감춘다.
“그러면 너도 광혈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는거야?”
내 물음에 키르비르는 고개를 가로 젓는다.
“뭘 들은거야? 오리지널이 아니라니까. 약간의 힘은 빌릴 수 있지만 너와 같이 무지막지한 능력을 가지는 건 아니야. 하지만...”
잠시 말을 멈춘 키르비르는 다시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간다.
“그 피가 너의 몸과 동화되면 말이 달라지겠지.”
“나의 몸과?”
“넌 나와 다르게 오리지널이잖아. 몇 방울 밖에 안되는 피지만 큰 변화를 일으키긴 충분해. 그 피에 담긴 광혈의 저주의 사용법이 네 몸에 각인되는 거야. 방금 전 그 눈처럼.”
“.....”
키르비르의 설명을 들은 나는 하나 남은 붉은 띠를 매만진다.
“그럼 이건...”
“또 다른 힘이야. 우리 아버지가 일깨웠던 힘이지.”
키르비르는 그늘진 얼굴로 이야기를 꺼낸다. 조용히 손끝으로 이리엘이 누워있는 침상을 톡톡 두들기던 키르비르는 힘겹게 입술을 뗀다.
“왠만하면 그 힘만은 깨우지마.”
“강력한 힘인가?”
“그것도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네 몸이 견뎌내지 못해서그래.”
“내 몸이?”
키르비르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래뵈도 체력이나 지구력엔 자신이 있었다. 그런 내 몸이 견뎌낼 수 없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네 몸엔 이미 두 가지의 힘이 담긴 피가 모여있어. 하나는 웨폰 마스터의 피. 타이와 네이르의 아버지로 세상 모든 무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했던 사람의 피지.”
“.....”
“또 하나는 최초로 마계를 정벌한 사람인 초대 마왕.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눈을 가진 자의 피. 허상과 실상, 진실과 거짓을 뛰어넘어 시간과 공간까지 초월한 것을 보고 현실화 시킬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의 피야.”
“일단 그 힘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알겠어. 근데 그게 왜 너의 아버지의 피까지 깨우지말라는 뜻이 되지?”
내 물음에 키르비르는 피식 웃으며 답한다.
“그 힘들은 하나하나가 몸에 큰 부담을 줘. 우리 아버지도 3개의 힘을 몸 안에 담고 유지시키는 것이 한계야. 4개의 힘이 한 몸에 모이면... 무슨 재앙이 벌어질지 몰라.”
“하지만 너의 아버지의 힘까지 딱 합하면 3개잖아. 근데 무슨 문제가 있어?”
“네가 이제 깨달을 힘은 무시하는거야?”
“.....”
“무슨 힘일지 짐작도 가지 않지만... 너도 광혈의 저주를 가지고 있는 이상. 너만이 가질 수 있는 힘을 얻을꺼야. 앞에 말한 사람들과 버금가는 힘을...”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문다. 그리고 두 번다시 신경쓰지 말라는 듯이 내 손목에 그려진 붉은 띠를 붕대로 감아버린다.
“너의 아버지의 힘은 뭔데?”
나는 키르비르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린다. 온몸을 뒤덮은 두꺼운 붉은 갑주와 거대한 검을 등에 짋어지고 있는 남자. 말로 표현 못할 위압감과 굳건함이 서린 한쪽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 모습이 선명히 떠올랐다.
“아버지의 힘은... 모든걸 베어내는 검.”
“모든걸 베어낸다고?”
“응. 그 어떤 것이라도... 아버지는 어머니를 되찾기 위해 홀로 마계로 쳐들어왔었어. 그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 차원이나 공간까지 베어내 억지로 찢어내면서까지.”
“....”
키르비르의 말이 과장이나 거짓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 모습과 그 위용을 갖춘 남자라면 키르비르가 말한 힘을 가지고 있어도 전혀 위화감을 느낄 수 없을 것 같았다.
“언니...”
그때 침상에 누워있던 이리엘이 슬픔과 고통에 가득찬 신음소리를 흘린다. 괴로운 목소리로 자신의 언니인 아리엘을 찾는 이리엘의 모습에 나는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그녀를 조용히 내려다 볼뿐이었다.
“이리엘이 깨어나면 잘 보듬어줘.”
그런 이리엘을 바라보던 키르비르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너는?”
“난 방해될 뿐이니까. 이 기회에 둘이 오순도순 이야기나 나눠보라고.”
“....”
그녀는 그말을 남긴채 천천히 의료실 문을 향해 다가간다. 그녀가 다가오자 그녀의 접근을 감지한 문은 자동적으로 옆으로 열린다.
“농담인거 알지?”
자동으로 열린 문이 닫히기 전. 그녀는 살짝 나를 돌아보며 조용한 목소리로 웅얼거린다. 그녀의 말에 대답하기도 전 자동문은 매정하게 문을 닫아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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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이 될 때까지 이리엘은 쉽사리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침상에 누운채 간간히 신음소리를 흘리지만 그녀가 일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곁을 지키며 나는 조용히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린다.
“....”
자신의 언니를 잃은 상실감이 얼마나 클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감은 언뜻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혈육을 잃은 상실감이라...
“언니...?”
이리엘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그녀의 볼에 손이 닿는 순간. 이리엘의 눈꺼풀이 살짝 떨린다. 자신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그녀의 언니인 아리엘 것으로 느껴졌던 걸까. 가느 다랗게 떨리든 눈꺼풀이 힘겹게 올라가며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들어난다.
“이리엘.”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그녀를 부른다. 이리엘은 가느다란 희망이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지만 이내 내가 아리엘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의 슬픔과 공허함이 그녀의 눈을 가득 채웠다.
“언니... 언니는?”
하지만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않은 걸까. 그녀는 나에게 아리엘의 안부에 대해 묻는다. 나는 그녀의 질문에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
이리엘은 울지않았다. 그렇다고 고통스럽게 아리엘의 이름을 울부짖지도 않았다. 단지 이런 슬픔이란 감정이 처음인 듯 멍하니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
“이리엘. 괜찮아?”
어떻게든 그녀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나는 그녀의 상태를 묻는다. 그러자 힘이 풀린 듯이 천천히 나를 향해 돌아본 이리엘은 조용히 대답한다.
“모르겠어.”
“모르겠다니...”
그녀는 여전히 텅 빈 눈동자로 나를 응시한다. 공허함이 가득한 그녀의 눈동자와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이 만나 말로 표현 못할 쓸쓸함과 외로움을 나에게 전해주고 있었다.
“뭔가... 그냥... 아무것도...”
그녀는 말을 제대로 끝마치지 못한다. 자신의 감정을 모르겠다는 웅얼거림을 되풀이 하는 그녀를 보다못한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려준다.
“아...”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던 내 손이 그녀의 볼에 닿자 이리엘은 작은 탄성을 지르며 반응한다.
“타메르.”
잠시 자신의 볼에 닿아있는 내 손을 조용히 바라보던 이리엘은 대뜸 나를 돌아보며 내 이름을 부른다.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아도 그녀가 나를 부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던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작은 몸을 끌어안아준다.
“우... 으우우..”
내 품에 안긴 이리엘은 떨리는 목소리로 작은 울음을 터트린다. 내 옷자락을 꽉 움켜쥐는 이리엘의 작은 손길을 느끼며 나는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토닥여줄 뿐이었다.
“언니... 언니이이...”
끝까지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려는 듯이 내 품안에서 자그마한 울음소리가 새어나온다.
“실컷 울어. 울면 좀 괜찮아 질꺼야.”
“우... 아흐으윽...”
귓가에 속삭여지는 내 말에 이리엘의 감정의 벽이 허물어져버린다. 결국 더 이상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몸을 크게 떨며 터져나오는 울음소리와 눈물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그녀가 가슴에 억누른 모든 슬픔을 토해낼떄까지 나는 아무말없이 그녀를 꼭 끌어안아 주고 있을 뿐이었다.
========== 작품 후기 ==========
0세계0 / ㅎㄷㄷ... 제가 나름 그쪽으로 조예가 깊다고 생각했는데... 새발의 피였네요.
날이 많이 추워졌습니다. 다들 잠잘 때 따듯하게 주무세요. 저처럼 환절감기 걸리시지 마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