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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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 네이르. 내 두 딸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런 기억이 내 머릿속에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깊숙이 각인되어있었다. 내가 경험하지 않은 일임에도 분명한 수많은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새록새록 떠오른다.
어린 타이와 네이르와 같이했던 추억들. 내가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그런 추억들이 머릿속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환각이나 착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그녀들과 같이했던 과거의 추억들은 그 어느때보다도 생생하고 확연하게 느껴져왔다. 그 순간 그녀들이 했던 말과 투정. 그리고 그런 그녀들을 사랑스럽게 안아주던 순간하나하나가 선명히 느껴져왔다.
“아빠. 무슨 생각해?”
“아... 아니야..”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내 목 위에 목마를 탄 네이르는 재미있다는 듯이 내 머리를 주무른다. 수인족이라서 그런지 내가 조금이라도 한눈을 팔면 마치 고양이처럼 날렵한 그녀는 눈깜짝한사이에 내 몸을 타고 올라가 내 목위에 딱하고 자리잡고 앉는것을 좋아했다.
워낙 가벼운 그녀라서 움직이거나 걷는데 지장은 없었지만 행여나 네이르가 떨어질까 속으로 노심초사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헤헤헤... 아빠. 새치생겼어.”
“나도... 뭐... 늙었으니까...”
네이르의 말에 움찔 놀란 나는 태연하게 대답하며 슬쩍 내 검을 꺼내본다. 검또한 과거에 사용하던 육중한 대검이 아니었다. 날렵한 검신을 가진 얇은 도. 내 얼굴이 비춰보일만큼 섬뜩하게 갈려진 검날을 통해 내 얼굴을 확인해본다.
“진짜 늙었군...”
10년? 그정도의 시간이 지난 미래의 내모습일까. 입가와 이마에는 중후한 주름이 두어개 그려져있었다. 과거 난폭하거나 흉악한 모습은 풍화되어 세월에 깍여 부드러움과 적절히 조화된 묘한 얼굴이었다.
“네이르가 다 뽑아줄께! 아빠 젊게 만들어줄꺼야!”
“부탁하마.”
네이르는 재미있다는 듯이 내 머리에 달라붙어 붉은 머리카락사이에 듬성듬성난 흰머리를 뽑아간다. 하지만 가끔씩 심하게 따끔거리는 것이 흰머리만이 아니라 생머리까지 그대로 뜯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많은게 없어졌군.”
네이르를 목에 얹은채로 나는 느긋하게 숙소 근처를 한바퀴 돌아본다. 뒤늦게 깨달은 것이었지만 없어진 것이 많았다. 키르비르의 마법의 흔적은 이미 세월에 풍화되어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녀들이 있었던 흔적은 있었지만... 아쉽게도 그녀들을 볼 수 없었다.
“로터스까지... 없어질 줄이야.”
유적 곳곳에 남아있는 거대한 흉터들은 로터스의 촉수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 흉터의 주인공인 로터스는 보이지 않았다.
“...”
언제나 이곳에 있어야할 존재가 사라지자 말로 표현못할 씁쓸함과 아쉬움이 묻어나온다. 나는 한동안 거대한 촉수가 움직였던 빈자리를 응시하다 등을 돌린다.
“이건... 도데체 누구의 미래지?”
나와 비슷하지만... 절대 내 미래는 아니었다. 가슴속 깊은곳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이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작게 중얼거린 나는 흘긋 고개를 들어 내 머리카락을 꼼지락거리며 헤헤 웃는 네이르를 바라본다. 그녀는 나를 서슴없이 아빠라고 부르고 있었다. 가식이나 거짓이 아닌 순수한 마음으로 아빠라고 부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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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시간은 훌쩍 지나간다. 기울어지는 해를 바라보며 네이르와 같이 산책을 하고나니 머리가 한결 시원해진것 같았다.
“....”
실제로 진짜 시원해진것 같았다. 머리카락 사이로 듬성듬성 땜방이 생긴게... 아마도 네이르 짓이겠지.
“에헤헤...”
양손에 간간히 새치가 섞여있는 붉은 머리카락을 한무더기씩 쥐면서 미안하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리는 네이르를 바라보니 화낼마음도 눈녹듯이 사라져버린다. 그저 그녀가 실망하지 않도록 조용히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잘했다고 한마디해줄뿐이었다.
“아빠. 타이랑도 놀아줘!”
숙소 근처로 돌아왔을때 공터에서는 타이가 나를 알아보고 손을 흔든다. 그런 그녀의 손에는 뭉툭한 나무막대가 쥐어져있었다. 그런 그녀를 발견하고 싱긋 웃은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공터로 걸어가 내 몫으로 보이는 나무막대를 하나 움켜쥔다.
“....”
나무껍질이 반들반들해질정도로 오래쓴 나무막대. 슬쩍 타이것을 바라보니 그녀도 내 나무막대와 다를바 없었다. 내가 막대를 움켜쥐자 타이는 살짝 긴장한듯 표정을 경직시키며 나를 향해 나무막대의 끝을 들이댄다.
“오늘은 타이가 꼭 이길꺼야.”
어린 용기와 집념이 기특했던 나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한손으로 막대를 쥐고 타이를 향해 겨눈다. 그와 동시에 타이는 어린 외모에 걸맞지 않게 재빠르고 날렵하게 나에게 달려든다.
“읏...”
어린 외모에 걸맞지 않는 날카로운 움직임에 나는 당황한다. 하지만 당황한 나와 다르게 내 몸은 익숙하다는 듯 아주 침착하게 타이의 공격을 받아낸다.
따닥!
허공에서 재빠르게 두 번 부딪히는 서로의 나무막대. 타이는 자세를 낮춰 재빠르게 공격해오지만 나는 여유롭게 한손으로 그녀의 공격을 가뿐하게 차단해나갈 뿐이었다.
“흐름...”
시란의 조언덕분일까. 타이의 행동이 눈에 보였다. 타이는 어떻게든 자신의 검을 휘둘러 자신만의 흐름을 만드려고 애쓰고있었다. 하지만 내 막대는 그런 타이의 의도을 아는지 여유롭게 그녀의 흐름에 끼어들며 능숙하게 검의 흐름을 끊어버린다. 오기가 생긴듯 타이는 이를 악물고 더욱 격하게 검을 휘둘러나간다.
따악! 딱!
점점 막대가 부딪히는 소리가 격해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
따악!
무리하게 휘두른 듯한 타이의 막대와 내 막대가 허공에 맞물린다. 그 순간 타이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서린다.
“이야아아압!!”
파악!
손목을 비틀어 내 막대를 살짝 옆으로 흘려낸 타이. 그녀는 나를 향해 한보 내딛으며 발도자세를 취한다.
“...!!”
시란이 시도했던 것과 비슷한 모습.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나또한 그녀와 비슷한 발도자세로 재빠르게 자세를 수정한다.
“으쟈쟈쟛!!”
타이는 온힘을 다해 있는 힘껏 나무막대를 발도한다. 하지만 그녀와 다르게 나는 아주 여유롭고 부드럽게 발도를 해나간다. 나를 갈라버릴 기세로 휘둘러진 타이의 나무막대와 다르게 내 막대는 여유롭고 천천히 그녀를 향해 쇄도해간다. 하지만 그런 우리들의 막대는 허공에 정확히 격돌해버린다.
콰앙!!
“....”
어마어마한 기세로 쇄도해오던 타이의 나무막대는 그 기세 그대로 허공으로 튕겨져나가버린다. 푸른 창공을 빙글빙글 돌던 그녀의 막대는 바로 그녀의 등뒤에 초라하게 툭 떨어져버린다.
“아아..”
“괜찮았다.”
충격에 견디지 못해 막대를 놓쳐버린 자신의 손을 멍하니 바라보며 타이는 힘없는 신음을 흘린다. 그런 타이 몰래 시큰거리는 손목을 매만지며 짦막하게 그녀를 칭찬한다. 하지만 자신의 회심의 한수가 통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타이는 멍하니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만 있을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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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게 미묘하게 달랐다. 아무도 남지 않은 숙소 안에서 비이상적으로 어색한 고요함을 느끼며 침대에 누워있던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본다. 옆방의 침상까지 끌어와 어거지로 2인용 침대를 만든 침대 위에는 나를 중심으로 좌우로 타이와 네이르가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네이르는 마치 고양이처럼 몸을 둥글게 만채로 내 곁에 찰싹 붙어있었고 타이는 내 팔을 베고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내 목덜미를 감싸안은채 잔잔한 숨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그녀들은 나를 아빠라고 부른다. 하지만 정작 그녀들이 엄마라고 부를 존재는 보이지 않았다.
“...설마...”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네이르를 바라본다. 자고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움직임에 반응하듯 가볍게 쫑긋거리는 작고 아기자기한 고양이 귀. 마치 그녀와 닮았다. 마계에서 온 수인종족중 하나인 네베르족의 네이.
곧이어 나는 고개를 돌려 타이를 바라본다. 마치 나를 닮은 듯한 붉은 머리카락과 선해보이는 동글동글한 인상을 가진 타이. 확실하지 않았지만 미묘하게 네이의 잔재가 남아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
나는 그녀들이 꺠지않게 주의하며 조심스럽게 침상에서 몸을 일으킨다. 묘한 기대감과 희망으로 가슴이 격하게 뛰기 시작한다. 어두운 밤중에 자리에 일어선 나는 뭐에 홀린듯 미묘한 확신을 가진채 네이와 함께했던 꽃밭을 향해 걸음을 옮겨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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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환상속에서도 널 다시보지는 못하는군.”
꽃밭에 도착한 나는 맥이 탁풀리며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내 기억속의 꽃밭과 정확히 일치했다. 자욱히 피어있는 이름모를 수많은 꽃들과 푸른 잔디.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마련된 자그마한 무덤까지.
“....”
하지만 달라진점이 딱 하나 있었다. 그녀의 무덤앞에 비석이 하나 세워져있다는 것. 유적의 벽돌을 어색한 솜씨로 깍아만든듯한 비석에는 삐뚤삐뚤한 글씨로 이 무덤의 주인의 이름이 써져있었다.
“네이... 늬에르.”
늬에르... 내가 모르는 이름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네이의 이름은 그냥 네이 하나였다.
“엄마의 진짜 이름이에요.”
“헛...!!”
등뒤에서 들려오는 차분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나는 뒤를 돌아본다. 거기에는 어린 타이가 아닌 성숙한 여성이 되어있는 타이가 서있었다. 그녀는 사무적인 얼굴을 지우고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긴다.
“네베르족은 미래를 약속한 사람에게만 자신의 진짜 이름을 알려준데요. 늬에르. 그것이 우리 엄마의 진짜 이름이에요.”
조용히 꽃밭으로 걸어들어간 타이는 언제 가져온지 모를 포도주병의 뚜껑을 따고 붉은 포도주를 천천히 무덤에 뿌린다. 나는 그런 그녀의 행동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후. 포도주병이 깔끔히 비워지자 타이는 그런 포도주병을 들고 꽃밭에서 걸어나온다.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이지?”
나는 그녀에게 지금 이 낯설면서 묘하게 익숙한 상황에 대해 묻는다. 내 기억은 분명 아니었다. 하지만 단호히 내 기억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었다. 순간순간이 너무나도 선명하고 확실히 기억되었다.
“제 아빠의 기억이에요. 저희와의 추억. 행복했던 시절에 대한 기억이죠.”
타이는 빈 포도주병을 씁쓸히 바라본다. 그리고 이네 짧게 한숨을 내쉬며 아련함과 그리움이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다른 세상의 아빠. 아니... 저희들의 아빠가 될 수 있었던 사람... 그게 당신이었어요.”
“....”
그녀의 말에 나는 넋을 잃은 듯 찬찬히 타이를 살펴본다. 그녀의 몸에 베인 묘한 차잎 향기. 나와 비슷한 꽃가루 알레르기. 거기다 광혈의 저주까지. 네이와 나 사이에 딸이 태어났다면... 타이와 비슷할 거라는 확신이 뒤늦게 생기기 시작한다.
“이 세계에서 나는... 네이와 결혼을 한건가?”
“그렇게됬으니.. 저희들이 태어난거겠죠.”
“아빠...”
그때 서있는 타이의 곁에서 어린 타이와 네이르가 졸린 눈을 비비며 걸어온다.
“어디갔었어?”
졸음에 취해 비틀비틀 나에게 걸어온 타이는 내 다리에 잘싹 달라붙어 꽉 끌어안는다. 그런 그녀와 다르게 어린 네이르는 내 옷자락을 붙잡고 낑낑거리며 내 몸을 타고 올라와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내 목위에 걸터앉아 목마를 타버린다. 그리고 내 머리위에 작은 몸을 기댄채 꾸벅거리며 졸기 시작한다.
“....”
나는 내 다리에 달라붙은 타이를 조심스럽게 떼어내 품에 안는다. 그러자 타이는 내 가슴에 파고들어오려는 듯 몸을 꼼지락거리기 시작한다. 그런 어린 타이의 모습에 나를 바라보던 타이는 자신도 모르게 작은 웃음을 흘린다.
“저도 저렇게 귀여울때가 있었네요.”
“이 아이들이... 아니.. 너가 나의 딸이라고?”
내 물음에 타이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리고 아쉬움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정확히 다른 세상에서의 딸이죠.”
“다른 세상...”
나는 타이가 한 말을 작게 중얼거리며 내 품에 안긴채 편안한 얼굴로 새근거리는 어린 타이를 바라본다. 남의 아이가 같지 않았다. 마치 진짜 내 아이처럼 편안하게 잠든 타이의 얼굴을 보고있으니 모든 근심과 걱정이 사라짐을 느낀다.
“조금... 이기적인 부탁일지 모르겠지만... 네이. 만날 수 있을까?”
조용히 어린 타이의 얼굴을 내려보던 나는 조심스럽게 타이에게 묻는다. 그러자 타이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대신... 부탁이 있어요.”
========== 작품 후기 ==========
Solar Eclipse / 더 많은 것을 우려낼 것입니다. 전 평행세계를 아주 좋아하거든요.
유운처럼 / 감사합니다!!
abcbbq / 하지만 오리지날에서는 특별한 관계가 읍썼잖아요? 이젠 다릅니다!
BrightBiz / 허허헛.. 감사합니다!
후우... 피곤하고 졸려...
언제쯤 이 피로에서 벗어날 수 있ㅇ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