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편
<-- 후유증 -->
허겁지겁 숙소로 돌아온 나는 방문이 부숴진 키르비르의 방앞에서 거칠어진 숨결을 진정시킨다. 그리고 주먹을 움켜쥐고 벽을 두드리며 내가 왔다는 사실을 안에 있는 키르비르에게 알린다.
“들어간다.”
들어가겠다는 말을 해보지만 방안에서는 아무런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나는 부숴진 방문의 파편을 넘어 조심스럽게 그녀의 방안으로 들어선다.
“키르비르?”
방안은 텅비어 있었다. 그녀가 없다는 사실에 나는 기겁하며 방안을 다시한번 둘러보지만 키르비르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젠장!!”
짤막하게 욕을 내뱉은 나는 왠지모를 불안감을 느끼며 허겁지겁 그녀의 방안에서 뛰쳐나온다. 그리고 그녀의 흔적을 찾아보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하지만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었던 나는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로터스를 부른다.
“로터스!! 혹시 키르비르를 보지 못했나?!”
-키르비르라면... 무너진 탑쪽으로 간것을 확인했다.
다행히도 로터스는 키르비르의 행적을 알고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는 황급히 로터스가 말한대로 키르비르를 따라 그녀의 탑을 향해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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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비르의 탑이 무너진 곳. 피폐한 회색빛 잔해들이 가득한 그곳에 도착한 나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본다. 무너진 회색 잔해들 사이로 튀어나온 가구들의 파편들과 불타다 남은 책들의 잿가루가 허공에 휘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부스럭..
멀지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부스럭거리는 소리. 그 소리를 확인한 나는 소리를 쫓아 황급히 걸음을 옮겨간다.
“키르비르!!”
무너진 벽돌 파편을 넘어가자 그 건너편에 있는 키르비르를 찾을 수 있었다. 무너진채로 산산조각난 잔해들 위에서 주저앉은채 뭔가를 꼼지락거리는 키르비르. 그런 그녀를 부르며 나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간다.
부스럭.. 부스럭...
내가 가까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시선조차 던지지 않으며 주저앉은채 무언가에 집중하는 키르비르. 그런 그녀의 행동에 의아함을 느낀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가 하는 행동을 바라본다.
부스럭 부스럭..
그녀는 땅을 헤집고있었다. 장갑이나 아무런 보호장구도 끼지 않은 맨손으로 투박한 바위와 잿더미가 가득한 땅을 헤집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땅을 헤집을때마다 그녀의 작고 고운손에 조금씩 상처가 새겨지기 시작한다.
“.....”
그런 그녀를 막고싶었지만 무언가를 찾는데 집중하고 있는 절실한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자니 그녀를 막을 수가 없었다.
“아....”
그때 키르비르는 짧막한 탄성을 지른다. 그리고 시커먼 잿더미속에 파묻힌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것을 집어든다. 그것은 낯설지 않은 문양이 새겨진 유리조각이었다. 분명... 네이가 애용했던 찻잔의 표면에 새겨진 문양과 비슷한 문양이었다.
“....”
그런 유리조각을 이리저리 돌려보던 키르비르는 조용히 미소지으며 또다른 조각을 찾기 위해 다시금 잿더미속으로 손을 움직여나가기 시작한다.
콰악.
나는 그런 그녀의 손목을 움켜쥔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해줬다.
“그녀는 죽었어.”
“무슨 소리야?”
내 말에 키르비르는 되려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에게 되묻는다. 그런 키르비르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다시금 그녀에게 말해준다.
“네이는 죽었다고.”
단호한 내 말에 키르비르는 오히려 조용히 미소짓는다.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미소. 나에게는 그런 그녀의 미소가 쓰라리게 느껴져왔다.
“헛소리야. 네이가 죽을 리가 없잖아? 돌아올꺼야...”
그리고 다시 잿더미가 가득한 땅을 향해 상처투성이의 손을 내뻗으며 땅을 헤집어가기 시작한다.
“이것들만 다 모으면... 다시 돌아올꺼야...”
그녀의 눈은 뭔가에 홀린듯이 넋이 나가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평정을 잃고 붙잡을 수 없는 희망을 붙잡기 위한 절박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말도 안돼지.. 응.. 당연히 말도 안돼. 네이가 죽을 리가 없잖아? 응? 그렇게 강한데... 아하핫...”
키르비르는 마치 나의 동의를 구하듯이 반복적으로 나에게 물어온다. 나는 그런 그녀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로터스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그녀는 내면에서부터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혼자 키득키득 웃으면서 잿더미의 땅을 헤집는 그녀는 절대로 정상이 아니었다. 마치 현실을 외면하여 도망치듯 그녀는 네이와 연관된 무언가를 애타게 찾고만 있었다. 그것을 모두 찾으면 네이가 돌아올 것이라고 굳게 믿으며...
딸랑...
땅을 파헤치는데 온 정신을 쏟고있는 키르비르를 바라보던 내 귓가로 낯익은 소리가 울려퍼진다. 그것은 바로 네이가 달고다니던 방울. 나는 그 방울소리의 진원지를 바라본다.
키르비르의 새하얀 은백발 머리카락사이에서 빛을 반사시키며 자신의 존재를 표출하고 있는 은색방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분명 네이가 목에 달고다니던 은색방울이었다. 키르비르는 그런 네이의 방울을 자신의 머리끈과 연결시켜 자신의 머리를 묶는데 같이 묶어두고 있던 것이다.
“.....”
나는 예고없이 손을 뻗어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방울을 잡아당긴다.
스르륵...
그러자 자연스레 그녀의 머리카락을 묶고있던 머리끈또한 같이 풀려지며 뒤로 매어놨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땅을 헤집는 키르비르의 눈을 가린다.
“뭐... 뭐하는거야!!”
갑작스런 내 행동에 당황한 키르비르는 자신의 눈을 가리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나를 노려본다. 하지만 무덤덤한 얼굴로 그런 그녀를 마주바라보며 나는 방금 빼앗은 방울을 그녀의 눈앞에 흔들어보인다.
딸랑...
그러자 방울에서는 청아하지만 주인을 잃은 쓸쓸함이 가득한 방울소리가 고요히 울려퍼진다. 키르비르는 조용히 내 손에 쥐어진 방울을 바라본다. 평정을 잃은 그녀가 내 손에 쥐어진 방울의 정체를 파악하기에 오랜시간이 필요했다. 고요한 방울소리가 허공에 산산히 흩어질 무렵이 돼서야 키르비르는 그 방울의 정체를 깨닫는다. 곧이어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손에 어째서 네이의 방울이 쥐어져있는지를 의아해한다.
“네이는 죽었어.”
그런 키르비르를 바라보며 나는 마지막 말뚝을 박듯이 단호한 목소리로 현실을 그녀에게 직시시킨다. 그녀는 네이의 죽음을 외면하기 위해 가장 큰 증거인 방울을 눈앞에서 없에기 위해 머리끈으로 묶어다녔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방울을 그녀의 눈앞에 들이댄 이상 그녀는 더 이상 현실을 도피할 수 없을 것이다.
“......”
그러자 키르비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다. 그리고 분노인지 슬픔인지 모를 감정을 담아 주먹을 꽉 움켜쥔채 몸을 부르르 떨기시작했다.
투둑..
그녀의 손안에 움켜쥔 찻잔조각의 날카로운 부분이 그녀의 손바닥을 파고들기 시작하며 붉은 핏방울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왜... 왜...”
곧이어 자그마한 키르비르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나는 그런 그녀의 목소리에 집중하기 위해 살짝 자세를 낮춘다. 하지만 그 순간...
짜악!!
볼에서 느껴진 화끈한 감각과 함께 시선이 억지로 옆으로 돌아가버린다.
“.....”
나는 화끈거리는 내 볼을 매만지며 천천히 시선을 돌려 키르비르를 바라본다. 어느정도 각오는했지만 이렇게 볼을 때린다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나를 노려보는 키르비르는 붉게 달아오른 눈시울로 입술을 꽉 깨물고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너란 놈은... 맨날 날 방해해야만 직성이 풀리는건데!!!”
그녀는 갈라진 목소리로 바락 소리를 지른다. 그런 그녀의 외침에 나는 무덤덤하게 대답한다.
“너가 아무리 그런다해도... 네이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 너가 더 잘 알고 있을텐데?”
“하지만... 나는... 나는...”
어떻게보면 냉담하다고 할 수 있는 내 한마디에 키르비르는 자신의 머리를 감싸안은채 그 자리에 힘없이 주저앉는다.
“단지 꿈을 꾸고 싶었어... 잠시나마 환상속에서... 지내고만 싶었다고...”
그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웅얼거리며 얼굴을 자신의 무릎속에 파묻는다.
“깨고 싶지 않아... 그냥... 영원히 꿈꾸고 싶어...”
나는 조용히 자세를 낮춰 주저앉은 키르비르의 손을 매만진다. 그러자 움찔 몸을 떤 키르비르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본다. 이미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한가득 맺혀있었다.
“꿈을 꾸기만해서는 아무것도 변하지않아.”
“....”
내 한마디에 키르비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자신의 손을 잡고있는 내 손을 바라본다. 로터스의 말대로 네이의 죽음이 그녀를 망가뜨리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강한 그녀를 믿으며 그녀가 결국엔 현실을 수용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그녀에게 진실을 속삭이는 일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 속에는 한가지 걱정거리가 남아있었다. 그건 바로 로터스가 말해줬던 키르비르의 정신병. 바로 극단적인 의존증. 지금 그녀의 상태로 보아 네이가 그녀의 큰 버팀목이 되어줬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런 네이가 사라졌으니 키르비르가 망가져가는 것은 당연했다.
“돌아가서... 조금만 더 쉬자.”
자리에 웅크려앉아있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일으켜세운다. 그러자 키르비르는 아무런 저항없이 내 손길에 따라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멀뚱멀뚱 자신의 손을 붙잡고있는 내 손을 바라보는 키르비르를 대신해 조심스레 그녀의 붉어진 눈시울을 닦아준다.
“돌려줘.”
그러자 키르비르는 코맹맹한 목소리로 나에게 명령한다. 그리고 나에게 내밀어진 그의 손을 잠시 조용히 바라보던 나는 흘끗 내 손에 쥐어진 네이의 방울을 돌아본다. 키르비르의 시선은 그 방울에 고정되어있었다. 아마도 이 방울을 달라는 것일까...
“여기.”
잠시 주저하던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방울을 건낸다. 그러자 키르비르는 찻잔조각이 박혀 피투성이가 된 손을 내밀어 내가 건낸 방울을 받는다. 그런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다 못한 나는 방울을 받아든 피투성이가 된 그녀의 손목을 붙잡는다.
“뭐.. 뭐야?”
자신의 손목을 붙잡는 내 행동에 당황한 키르비르는 반사적으로 짧게 소리를 지른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은 나는 피투성이가 된 그녀의 손을 붙잡고 옷의 소매자락을 찢어 그녀의 손을 닦아준다.
“거참... 더럽게도 세게 쥐었구만...”
그녀의 손이 꺠끗해질수록 내가 찢어낸 옷자락은 그녀의 피를 머금고 붉게 물들어갔다. 통증을 느끼는 듯 키르비르는 살짝 인상을 찡그리지만 내 손을 떨쳐내거나하는 저항은 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에 묻은 피를 전부 닦아낸 나는 새롭게 핏물이 베어나오는 그녀의 상처를 깨끗한 옷감으로 단단히 묶어 흘러나오는 피를 지혈시킨다.
“읏...”
지혈을 위해 힘껏 옷감을 조이자 키르비르는 짧게 신음을 흘린다. 다행히도 옷감을 힘껏 조여놓은 덕분이었는지 옷감을 살짝 붉게 물들이던 핏물은 더 이상 베어나오지 않게된다. 그 상태를 확인한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손을 놓아준다.
“이걸로 괜찮을 꺼야.”
“...응.”
내 말에 짧게 대답한 키르비르는 조심스럽게 치료가 끝난 자신의 손을 매만진다. 곧이어 그녀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남기지 않은채 내 곁을 스치고 숙소를 향해 걸어간다.
“....”
나는 아무말 없이 그런 그녀를 뒤쫓는다. 하지만 내 앞에 앞서 걸어가는 키르비르의 어께는 그 어느때보다도 힘없어보였다. 모든 것을 잃은 듯이 축 처진 어께. 과거처럼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녀가 아니었다.
“젠장...”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의 상태가 걱정되었던 나는 그녀가 들리지 않을 자그마한 목소리로 짧게 욕을 흘린다.
========== 작품 후기 ==========
봉식이의 대출노트 / 해피해야죠. 모두가 해피해지려 소설을 읽는거잖아요?
Solar Eclipse / 엌ㅋㅋ.. 하지만 많이 바뀔듯.. 스토리를 대대적으로 바꿀 계획이거든요.
오리콘 / 연관이 있겠죠. 당연히~
실버링나이트 / 그렇죠. 히로인은 죽지않아요. 죽어도 부활하죠. 그것이 히로인
유운처럼 / 으음... 그 반대죠. 타메르가 네이를 죽이려는 순간 네이의 각성. 그러면 비극.
라시아이언 / 누.. 누구의 심장요? 자신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