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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터스의 하인-170화 (170/298)

170편

<-- 후유증 -->

마녀가 사라진지 하루가 지났다. 나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양손에 하나씩 포도주 두병을 들고 유적지 뒤편에 자그마한 꽃밭을 향해 걸어간다.

네이가 좋아했던 작은 꽃밭. 비록 꽃가루 알레르기 때문에 그녀와 즐겁게 놀아주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정말로 좋아했던 꽃밭이었다. 그 꽃밭 한가운데에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작은 무덤이 있었다.

“나왔어. 네이.”

나는 서슴없이 꽃밭속으로 들어간다. 걸음을 옮길떄마다 꽃가루가 피어오르며 내 코와 눈을 간질인다. 하지만 그녀를 잃어버린 슬픔 앞에서 그런 고통따위는 보잘것 없을 뿐이었다. 꽃밭 한가운데에 있는 무덤 근처까지 걸어간 나는 무덤 앞에 박혀있는 기다란 봉앞에 걸터앉는다.

포옹.

그리고 가져온 포도주의 병뚜껑을 딴다. 그러자 내 기분과 전혀다른 산뜻한 소리가 울려퍼진다. 실없이 웃음을 살짝 흘린 나는 한병을 그녀의 무덤앞에 내려둔다. 그리고 다른 한병의 병목을 붙잡고 입가로 가져가 술병을 기울인다.

“좀 고급술로 마련해주고 싶었지만... 이곳에는 이것밖에 없는 걸 어쩌냐... 우선 지금은 이걸로 목을 축여줘.”

크게 포도주를 한모금 마신 나는 그녀의 무덤앞에 내려뒀던 포도주병을 들어 그녀의 무덤위에 뿌려준다.

“다음엔 더 좋은 술을 준비해줄게...”

그녀의 무덤위에 포도주한병을 전부 쏟아버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향한 슬픔이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마음의 평정을 되찾기 위해 나는 내가 가져온 포도주병을 다시금 기울인다.

“하아...”

한번에 절반이상 들이킨 포도주병을 꽃밭아래 내려두며 하늘을 바라본다. 더 이상 귓가로 활기찬 네이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거대한 족쇠를 내 심장에 달아둔듯한 무거운 감각이 가슴속에 가득했다.

만약에 다시 한번 네이를 만날 수 있다면...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이번엔 그녀가 확실히 들을 수 있도록 말해줄 것이다. 나는 너를 사랑했다고. 진심으로 사랑했었다고. 하지만 이제 모두 허황된 기대며 실현 불가능한 꿈일 뿐이었다.

“하아...”

답답한 가슴을 풀어보려는 듯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한숨을 짜내 내쉬어본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네이 뿐만이 아니었다. 키르비르또한 여전히 혼수상태. 로터스의 말로는 가벼운 정신적 충격과 마력억제로 인한 평균치 이하의 마력 때문에 회복이 느리다고 했다. 하지만 그리 치명적이지는 않는 일이며 기다리면 오늘 중으로 의식을 차릴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키르비르에게는... 뭐라고 설명하지?”

언제나 붙어다녔던 그녀들.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네이가 더 이상 없다는 사실을 키르비르가 어떻게 받아드릴까. 키르비르는 쉽게 그녀의 죽음을 받아드리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나는 머릿속으로 차오르기 시작하는 복잡한 생각을 잠재우기 위해 다시금 술병을 기울인다.

빠악!

“커헉!!”

하지만 그 순간 예고없이 뒤통수에 가해진 충격에 미처 마시지 못한 술을 코와 입으로 뿜어내버린다. 코와 목이 욱씬거리는 고통에 몸을 움찔움찔 떨면서 나는 나를 공격한 인물을 찾아본다.

“젠장할... 누구냐?!”

“아직도 궁상이냐?”

등 뒤를 돌아보자 거기에는 꽃밭 위에서 푸른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팔짱을 단단히 끼고있는 시란이 주저앉아 있는 나를 내려보고 있었다.

“지금 이건... 무슨뜻이지?”

나는 그녀에게 얻어맞은 머리를 매만지며 그녀에게 살벌한 목소리로 묻는다. 나와 시란은 서로 이런 장난을 칠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적이라고 말해도 충분할 사이. 갑작스럽게 나를 공격한 시란의 태도에 나는 험악한 분위기를 유지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그러자 자연스레 나보다 키가 작은 시란은 인상을 찡그리며 나를 올려다본다.

“키만 더럽게 큰놈이군.”

그녀는 나를 올려다보며 뒷목이 불편한지 뒷목을 주무르며 말을 이어나간다.

“고작 여자하나 죽었다고 질질 싸는거냐?”

으득.

나는 한동안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녀를 노려본다. 너무나도 화가나 아무말도 나오지 않았다. 사람이 죽은지 하루가 되었다. 그런 사람의 무덤앞에서 저런 말이 나온다는 사실에 기가 차지도 않았다.

“뭐야? 화나?”

그러자 시란은 오히려 삐딱한 태도로 피식 웃으며 나를 도발한다. 그리고 작게 한숨을 내쉰 뒤 아무말도 못하고 몸만 바들바들 떨고있는 나를 노려보며 말을 이어간다.

“하지만 너와 네이라는 너희들만의 관계만 생각하지 말고... 제 3자들의 의견도 좀 생각해주지? 지금 내가 널 어떻게 생각하는 지 알아?”

“....”

그녀의 물음에 침묵으로 답변한다. 그러자 시란은 그럴줄 알았다는 듯이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내뱉는다.

“역겨워.”

“...역겨워?”

“그래. 겨우 여자하나 죽었다고 질질짜고있는 네 모습을 보니 역겨워서 어제 먹은게... 아. 먹은 것은 없지? 하여금 속이 뒤집힌다.”

“뭐...?!”

더 이상 참지못한 분노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내진다. 나는 다짜고짜 그녀의 멱살을 움켜쥐고 그녀의 몸을 들어올린다. 하지만 시란은 여전히 싸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너의 검에 죽은 사람이 몇이지? 너가 네 손으로 로터스에게 바친 여자가 몇 명인지나 알고있냐? 지금 내 눈엔 너의 등에 달라붙어있는 원혼들이 똑똑히 보이거든? 그들은 모두 웃고있어. 너의 불행을 즐기며 말이지. 그 누구도 널 동정하고있지 않단 말이야.”

“....”

“너의 검에 죽은 사람의 동료들을 생각해봤냐?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을 생각해봤냐고. 괴물에게 자신의 반려를 빼앗긴 사람의 고통을 상상이나 해봤냐?”

“하지만...”

“넌 이기적인 새끼야. 너의 것만 중요하지 남의 것은 생각도 하지 않지? 안그래?”

“그래 젠장할!!”

계속되는 그녀의 도발에 발끈한 나는 목에 핏대가 서도록 큰 소리로 외친다.

“그래. 난 이기적인 새끼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의 죽음은 정당해! 내가 가진 물건이 남이 가진 물건보다 소중하다!! 하지만 하나만 확실하게 하지. 이 베히모스에서는 양육강식의 세계야. 나에게 죽은 사람은 모두 나보다 약한...”

“그럼 네이도 약해서 죽었네?”

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 시란은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태연한 목소리로 말한다.

“와... 네이도 약해서 죽어버렸으니 슬퍼할 필요가 없잖아? 양육강식이라며? 자기가 약해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면 죽어야지.”

“아니야. 그녀는 약하지 않아.”

시란의 말에 나는 몸을 바들바들 떨며 반론한다.

“그럼 왜 죽었어? 너가 말하는 이론이랑 맞지 않잖아? 양육강식이라며? 그럼 마녀에게 죽은 사람은 마녀보다 약한거네. 그건 슬퍼해야할 일이 아니야. 아주 당연한거야.”

콰악!!

그녀의 멱살을 움켜쥔 내 손에 더욱 강한 힘이 들어간다. 옷이 구겨지며 가볍게 자신의 숨통을 조이자 시란은 살짝 인상을 찡그리면서 나를 노려본다.

“그녀는 약하지 않았어. 그녀는 단지 나를 지켜주다.. 나 대신 죽은 것 뿐이야. 그녀는 약하지 않아... 절대.”

내 말을 조용히 들어준 시란은 싱글싱글 웃으며 능글맞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간다.

“그럼 니가 약한거네? 응? 와... 네이 참 불쌍하다. 너 같이 약한 놈을 지켜주다 목숨을 잃다니... 아까운 인재였는데...”

“....”

파악.

나는 그녀를 뒤로 밀치며 움켜쥐고 있던 멱살을 풀어준다. 그러자 시란은 잠시 비틀거리다 이내 균형을 되찾고 자리에 바로서서 나를 바라본다. 그런 시란을 노려보며 나는 묻는다.

“목적이 뭐냐? 여기까지 찾아와서 왜 내 성질을 긁는거지? 싸우길 원하는거냐?”

“흐음... 뭐랄까... 너같이 보호만 받아온 나약한 놈이 자신을 보호해주던 여자를 잃자 어미 잃은 개처럼 질질 짜는것이 꼴보기 싫어서라고 해두자.”

“.....”

시란은 일그러진 내 얼굴을 바라보며 뭐가 그리 즐거운지 쿡쿡거리며 웃음을 참아간다. 그런 시란에게 나는 아무말도 반박할 수 없었다.

“너가 이대로 질질 짜고만 있으면 멀지않아 이보다 더 괴롭고 슬픈일이 너를 찾아갈꺼야. 그떄를 기대하라구.”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나에게 등을 돌린채 숙소를 향해 걸어간다. 나는 조용히 주먹을 움켜쥔채 그런 그녀의 등을 노려볼 뿐이었다. 그녀가 내 시야에서 사라져버리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네이의 무덤을 바라본다.

“내가... 내가 너무 약했던 건가...”

키르비르가 나보다 강한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녀의 힘은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최소한 키르비르 다음으로 강한 것은 나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나와 동급이라 생각한 네이를 이긴 전적이 있었으니까. 나는 그 사실에 만족하며 안일하게 살아왔던 것 같았다.

나 혼자서 멋대로 정한 키르비르라는 절대적 기준 아래. 다른 사람에 비해 비교적 쎄다는 나만의 안일한 생각이... 키르비르의 힘을 초월한 또다른 힘은 생각조차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었다. 그녀가 최강인 줄알았다. 로터스와 거의 동급의 힘을 가진 그녀가... 그런 내 태도가 네이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다.

“저... 저기...”

여러 잡념속에 빠져있던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목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티에르. 그녀는 스쳐지나가는 바람에 부드럽게 흔들리는 붉은 장발머리를 흩날리며 조심스럽게 꽃밭안으로 걸어들어온다.

“우익!!”

그리고 몇초후. 그녀는 마치 뜨거운 화상이라도 입은 듯이 움찔 놀라며 짧은 비명과 함께 꽃밭 뒤로 물러선다. 곧이어 그녀는 꽃밭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자 우왕좌왕하며 꽃밭 외곽쪽에서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그런 멍청한 그녀의 행동에 작게 한숨을 내쉰 나는 천천히 꽃밭 밖으로 걸어나온다.

“무슨 일이냐?”

티에르. 그녀는 폭주한 네이와 맞서 큰 부상을 입었다. 실제로 네이의 봉에 의해 관통된 어꼐의 상처는 혼돈의 힘의 영향인지 잘 낫지를 않았고 현재 붕대로 칭칭감은채 자연스럽게 치료되게 만들기 위해 고정시키고 있었다. 뿐만아니라 머리까지 다쳤었는지 그녀는 이마에 새하얀 붕대를 매고 있었다.

“아... 별건 아니구요.”

내가 꽃밭에서 나오자 잠시 우물쭈물 거리던 티에르는 애꿎은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간다.

“시란의 말...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시란?”

“네. 시란은 위로같은 거에 익숙하지 않으니까... 너무 마음에 둘 필요는 없어요.”

티에르의 말에 나는 어색하게 웃는다. 비록 내 머릿속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렸지만 그녀의 말에는 한글자도 틀린 말이 없었다.

“아냐. 시란에게 고맙다고 전해줘.”

“...네?”

티에르는 잘못들었다는 듯이 눈을 휘둥그레 뜬채로 나에게 되묻는다.

“녀석의 말에 틀린 건 없었어. 그래... 모두 내 탓이었던거야.”

“아... 예에...”

티에르는 이런 내 태도는 예상 못했는지 당황하며 말을 잇지못하고 우물쭈물거린다. 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지은다.

“뭐... 그래도 날 찾아와준 것은 고맙다. 그나저나 언제 내려갈꺼야?”

순수히 나를 걱정하여 나를 찾아와준 티에르의 행동에 감사를 표하며 그녀에게 언제돌아갈지에 대해 묻는다. 현재 티에르와 시란은 침입자이다. 하지만 그녀들은 폭주한 네이를 막기위해 힘을 썼었고 유적지에 직접적으로 피해를 가한 사실또한 없었다. 그 덕에 로터스는 티에르의 상처가 회복될때까지 이곳에서 그들이 머무는 것을 허락했다.

“아.. 그게 좀 오래걸릴 것 같아요. 이 상처에 혼돈의 힘이 머물러서 치료가 쉽지 않다네요.”

티에르는 미안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간다.

“죄송해요. 좀더 신세를 지어야할 것 같네요.”

“아냐. 크게 신경쓰지마. 로터스도 허락한 사실이니까... 치료가 다 끝나도 원하면 여기 더 있어도 돼.”

“헤헷. 그럼 신세좀 질께요.”

그녀는 머리를 한번 꾸벅 숙인뒤 귀엽게 미소를 짓는다. 그런 그녀의 사심없는 환한 미소에 나는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느낀다. 그녀의 머리위로 나도 모르게 손이 올라간다.

“으아앗.. 머리는 안돼요!”

살짝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순간. 티에르는 비명을 지른다.

“아직 어지럽단 말이에요. 머릴 만지면 감당할 수 없어요.”

“아. 미안미안.”

나는 나도모르게 행해진 내 행동에 내 스스로도 당황하며 그녀에게 짧게 사과를 한다. 그리고 실제로 현기증이 난듯 살짝 비틀거리는 그녀의 어께를 붙잡아 그녀를 부축해준다.

“자. 일단 돌아가자. 어지럽다면서 왜 여기까지 걸어나온거냐...”

불안하게 흔들리는 걸음으로 비틀거리는 티에르의 손과 어께를 잡아 그녀를 부축해주며 가볍게 그녀를 질책한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녀와 같이 숙소를 향해 걸음을 옮겨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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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도착이다.”

비틀거리는 티에르를 부축하며 타메르는 그녀와 같이 숙소로 돌아왔다. 수많은 방들중 티에르가 지내기 편하게 1층에 미리 마련한 방에 그녀를 데려다준 타메르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그녀를 침대에 조심스럽게 앉힌다.

“헤에... 이럴필요는 없는데... 고마워요.”

티에르는 자신이 하는 말과는 다르게 살짝 상기된 얼굴로 타메르를 바라보며 그를 향한 감사를 표한다.

“고맙긴 무슨..”

그런 그녀의 감사에 그녀를 향해 손을 두어번 흔들어준 타메르는 그녀의 휴식에 방해되지 않게 조용히 방문을 열고 그녀의 방안에서 빠져나온다. 홀로남은 티에르는 여전히 살짝 얼굴을 붉힌채 타메르가 나간 방문을 조용히 바라볼 뿐이었다.

-뭐가 그렇게 기분 좋아?

그때 방 한쪽에 기대어놨던 시란의 검이 살짝 뽑히며 푸르스름한 영체가 모습을 들어낸다. 타메르와 티에르가 같이 방에 들어온 모습을 처음부터 똑똑히 보고있던 시란은 단단히 팔짱을 낀채 티에르에게 해명을 요구하는 자세로 그녀에게 묻는다.

“벼.. 별 것 아니야!”

시란의 물음에 티에르는 필요이상으로 당황하며 변명한다. 그런 티에르를 바라보는 그녀를 의심하는 시란의 눈매가 더욱 가늘어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작게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푼 시란은 그녀에게 또다른 질문을 던진다.

-혹시나 다시 기억나는 생각은 없어?

“여전히... 머릿속은 맹하네...”

시란의 물음에 티에르는 베시시 웃으며 볼을 긁적인다. 멍청한 웃음으로 흘려넘기려는 티에르와 다르게 시란은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본다. 그런 시란의 기세에 억눌린 티에르는 더 이상 웃음짓지 못하고 죄지은 사람처럼 다소곳한 자세로 고개를 푹 숙일 뿐이었다.

-타메르. 그가 너의 과거와 유일한 연결점이야. 근데 아무 기억도 안난다고?

“응. 입질도 안와.”

-하아... 녀석과 대면하면 뭔가 시원스레 파바박 떠오르기를 바랬는데...

실망한듯 시란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벽에 기댄다.

“하.. 하지만 아무런 수익이 없는건 아니야!”

실망하는 시란을 보다못한 티에르는 용기를 내어 외친다. 그런 그녀의 외침에 시란의 눈이 반짝이며 티에르를 돌아본다. 살짝 기대감이 서린 시란의 시선에 움찔 놀란 티에르는 조심스럽게 자신이 알아낸 수익에 대해 말해준다.

“즈.. 즐거웠거든. 둘이 같이 있는거.”

-......

티에르는 내심 중요한 사실이라고 말한 듯이 보였지만 그런 그녀의 말을 들은 시란의 몸에서 힘이 쭈욱 빠져버린다. 힘없이 처진 어께와 그녀에 대한 한심함에 축늘어진 그녀의 얼굴이 얼마나 그녀가 큰 실망감에 빠졌는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게 단서가 될 수 있잖아? 그.. 그니까.. 내가 기억을 잃기전의 연인이랄까...”

-과거의 연인을 저렇게 낯선사람 대하듯이 대할 수 있냐?

“그.. 그러면 과거의 잃어버린 혈육이 아닐까...?”

-하아.. 혈아.

티에르의 물음에 시란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며 혈이를 부른다. 단순히 자신을 부르는 시란의 부름이었지만 혈이는 그 부름이 뭘뜻하는지 아는지 스스로를 움직여나간다.

촤악.

그녀의 머리카락에 머물던 붉은 빛이 빠른속도로 빠져나간다. 동시에 붉은 빛에 가려져있던 잔잔한 흑진주빛의 흑발머리가 가볍게 찰랑거린다.

-넌 흑발. 타메르란 놈은 적발. 둘이 혈육일 리가 없잖아.

“흐잉.. 그래두...”

실망이 가득한 티에르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시란은 혈이에게 지시하듯 가볍게 손을 휘저은다. 그러자 혈이는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며 그녀의 흑발머리카락을 다시 붉은 빛으로 감싸버린다.

-소설 좀 작작읽어. 우리는 현실에 살고있지 소설속에 사는 것이 아니니까.

티에르를 구박하듯 한마디를 남긴 시란은 다시 자신의 요도속으로 모습을 감춘다. 홀로남은 티에르는 입을 삐쭉내민채 혈이의 힘으로 붉게 변한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만진다.

“흥. 그래도 뭔가 있었어. 그 남자랑은...”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절대 부정하지 않는 티에르는 그 감정을 순수히 믿으며 작게 투덜거릴 뿐이었다.

-그래. 뭔가 있는것 같아.

그런 그녀의 중얼거림에 동조하는 것은 다름아닌 그녀의 몸에 머물고있는 혈이였다. 자신의 뜻에 동조해 주는 사람이 있자 티에르는 밝게 웃으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한다.

“역시 나를 생각해주는 것은 우리 혈이밖에 없어. 그렇지?”

-생명줄을 공유하니까 그런거다. 하지만 말이야... 그걸떠나 타메르라는 남자에게 뭔가가 있다.

“우음~ 그럼 우리 혈이의 생각을 말해봐. 우리 같이 시란을 골탕먹여주자고~!”

신이 나서 즐거움이 가득한 티에르의 말과다르게 혈이의 목소리는 한없이 진지했다. 곧이어 그가 말하는 사실또한 티에르조차도 손쉽게 넘겨나갈 이야기가 아니었다.

-녀석의 곁으로 가면... 내 의식이 흐려진다. 마치 내 존재가 부정당하는 것처럼.

“그게... 무슨뜻이야? 혈이가 사라진다는 거야?”

-아니아니. 그 정도는 아니다. 내 존재는 남아있다. 하지만 나를 유지하는 자의식이 무너져버려...

“....”

이해못할 혈이의 말에 티에르는 입을 다문다. 하지만 그녀또한 혈이가말해주는 사실이 그다지 좋은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나는 불안하다. 내가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 너와 같이라면 나는 영원할 줄알았다. 하지만 나도 사라질 수가 있다.

무미건조하고 투박한 혈이의 목소리였지만 깨어난 이후부터 그와 모든 것을 함께한 티에르는 혈이가 큰 불안에 떨고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사실에 티에르는 조심스레 자신의 머리카락을 위로하듯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말한다.

“괜찮아 괜찮아. 난 혈이를 안버려. 언제나 내 목숨을 살려주던 은인중 하나인데...”

========== 작품 후기 ==========

유운처럼 / 으히히힛 전 다시 활기를 되찾았답니다.

라시아이언 / 으잌! 잘봐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실버링나이트 / 으히히힛; 감사합니다.

카.. 칼날 여왕!!

칼날 여왕?!

칼날여왕!!!!

오오오오!!

군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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