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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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오랜시간동안 아무도 방문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그녀의 방의 문고리는 옅은 먼지가 쌓여있었다. 그런 손잡이를 비틀어 열며 네이는 발소리을 죽인채 그녀의 방에 들어선다.
“.....”
방안은 쥐죽은 듯이 고요했다.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고 방안에 사물들 위에는 오랫동안 관리를 안한 것을 증명하듯 뽀얀 먼지가 가득했다. 그런 방안에 들어선 네이는 작게 심호흡을 하며 찬찬히 주변을 둘러본다. 그리고 그녀가 예전부터 눈독들여오던 물건을 발견한다.
“저기있다.”
방 한쪽에는 거무튀튀한 봉이 벽 구석에 기대어져있었다. 낡고 뭉툭하여 쓸모없어 보이는 봉이었지만 그런 봉에서는 무시못할 기운이 은은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봉의 정체는 다름아닌 정제된 다크에테르의 결정체. 차원의 틈새에 고여있는 혼돈의 힘이 응축되어 물질화가 된 물건이었다.
“이것만 있으면...”
그 봉에 담긴 힘은 아무나 사용할 수 없었다. 평범한 마계인이나 인간이 집으면 다크에테르에 서린 끔찍한 혼돈의 힘에 영혼마저 사로잡힐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네베르족인 네이에게는 그만큼 매력적인 무기는 없었다.
마계에서만 존재하는 혼돈의 힘과 관련된 두가지의 특이 종족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네베르족과 뤼베크족. 이 두 종족의 공통점은 차원의 틈에서만 볼 수 있는 끔찍한 혼돈의 힘을 몸에 품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종족은 서로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몸에 품어진 혼돈의 힘을 사용한다.
뤼베크족은 자신의 정신력과 마력으로 혼돈의 힘을 억눌러 지배하여 그 힘을 자기 원하는대로 사용한다. 덕분에 그들은 순수한 혼돈의 힘 그 자체를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지만 기력 소모가 너무 커서 장기전에 불리한 모습을 보인다.
그에 반에 네베르족 같은 경우는 혼돈의 힘을 억누르기보다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자신의 마나와 균형을 맞춰 그 힘을 효율적으로 인도하며 사용한다. 덕분에 네베르족은 뤼베크족처럼 순간적으로 강력한 혼돈의 힘을 발휘할 수 없었지만 그들보다 더욱 안정적으로 혼돈의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봉은 그런 네베르족의 한계를 뛰어넘게 만들 수 있었다. 혼돈의 힘의 응집체인 이 봉을 손에 넣기만한다면 이 봉에 가득담긴 혼돈의 힘과 자신의 마력을 공명시켜 숙적인 뤼베크족들보다도 강력한 혼돈의 힘을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다.
“누... 누구세요?”
조심스럽게 봉을 향해 손을 뻗어가던 네이의 손이 우뚝 멈춘다. 아무런 인기척이 안느껴져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한 방 한가운데에서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움찔 놀란 네이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려 목소리의 진원지를 바라본다.
“당신은... 누구죠?”
작은 침대 위에는 한 어린 소녀가 이불을 끌어안고 오들오들 떨면서 불안한 눈동자로 네이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정체는 키르비르. 그녀는 네이와 최대한 거리를 두려는 듯 자그마한 침상안에서 최대한 뒤로 몸을 빼낸다.
“저는 네이입니다.”
일단 발견된 이상 그녀를 무시할 수 없었던 네이는 그녀에게 자신을 소개한다. 그녀의 소개에도 불구하고 키르비르는 그녀에 대한 경계심을 풀지않고 이불을 꼬옥 움켜쥐며 묻는다.
“무슨 일이세요?”
그녀의 마력이 고갈되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방을 방문하는 방문객은 거의 없다고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미 힘을 잃어 떨어지기 시작하는 그녀를 보살펴주거나 위로해줄 인정따윈 이미 험난한 마계에 남아있지 않았다.
“키르비르님이... 걱정되서 왔습니다.”
잠시 주저하던 네이는 그녀에게 거짓말을 한다. 솔직한 네베르족의 특성상 그녀가 하는 말은 누가봐도 뻔히 거짓말이라는 것이 훤히 보였다. 하지만 약해지는 몸과 모두에게 소외당하는 외로움속에서 키르비르는 그런 네이의 한마디를 진심으로 믿어버린다.
“그럼... 전 이만.”
몰래 물건을 가져가려던 계획이 물거품이 된 이상 더 이상의 오해는 없게하기 위해 네이는 재빨리 자신의 몸을 뺴려고한다.
“아.. 으응..”
키르비르는 그런 네이를 바라보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린다. 방에서 나가려는 그녀를 붙잡고 싶었지만 키르비르에겐 그럴 힘이 없었다. 지금 그녀는 아무런 힘도. 비전도 없는 무력한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
하지만 네이는 쉽사리 그녀의 방을 나갈 수 없었다. 나가는 문 앞에 선 그녀는 사람의 손이 그리운지 조용히 자신을 응시하는 키르비르의 안타까운 시선을 느낀다. 방을 나가는 문고리에 손을 얹은 네이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침대에 앉아있는 키르비르를 돌아본다.
“아... 조.. 조심히 돌아가세요.”
그녀와 눈이 마주친 키르비르는 움찔 놀라며 천천히 고개를 내리깐다. 그리고 마지못해 나지막하게 그녀에게 작별의 인사를 건내며 안쓰럽게 몸을 웅크릴뿐이었다. 그런 키르비르를 바라보던 네이는 작게 마른침을 삼킨다.
자신이 그녀의 방에 나가는 순간. 두 번다시 그녀의 방문이 열릴 일은 없을것이다. 그녀는 그만큼 버림받은 존재였다. 심지어 마왕이라는 그녀의 아버지란 사람또한 마력폭주에서 그녀를 구해준 이후로부터 두 번다시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이 그녀에게 이끌리게 하던 강대한 마력을 잃어버린 키르비르는 모두에게 불필요한 짐처럼 버려진 것이다.
“.....”
네이는 천천히 문고리를 잡았던 손을 놓는다. 이미 다크에테르로 이뤄진 봉에 대한 탐욕은 사라졌다. 그런 그녀의 마음속에 남은 것은 불쌍한 키르비르에 대한 동정심뿐이었다.
“키르비르님.”
네이는 조용히 침대에 웅크린 키르비르를 부른다. 그리고 작고 연약한 동물을 대하듯이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힘내세요. 제가 곁에 있어드릴테니까.”
“....”
그녀의 말에 키르비르는 아무말없이 조용히 네이를 올려다본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뻗은 네이의 고운 손을 돌아본다. 그런 그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가기 시작한다. 곧이어 키르비르는 양손을 뻗어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네이의 손을 감싸쥔다. 두 번다시 놓치않겠다는 듯이.
“키르비르...”
그녀는 작고 연약했다. 아무리 강한 힘을 가졌던 공주라고 했지만 나이가 어린 키르비르였다. 모든 마력이 고갈되고 몸과 정신이 가장 약해졌을때 찾아온 네이의 손길은 무너져가는 그녀에게 커다란 버팀목이 될 수 있었다. 네이또한 자신의 팔을 감싸안고 작게 울음을 터트리는 키르비르를 외면할 수 없었다.
“힘내요.”
결국 네이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녀의 곁에 있기를 결심한다. 그녀의 눈물에 자신의 옷이 젖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네이는 조심스럽게 작은 키르비르를 감싸안고 그녀의 등을 토닥인다. 그리고 그때부터 모든 변화는 시작되었다.
모든 것을 잃고 죽어가던 키르비르가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네이라는 버팀목을 짚고 그녀는 빠른속도로 마력을 회복해나가기 시작했다. 모두의 외면과 무시속에 걸레처럼 찢겨진 그녀의 마음이었지만 네이라는 존재하나가 그녀를 다시 일으켜세운 것이다.
다시 자신의 힘을 되찾아가는 키르비르의 모습에 그녀를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그녀에게 되돌아왔다. 하지만...
“내가 너희들을 도와줄 이유는 없는데?”
힘을 되찾은 키르비르는 많이 변해있었다. 예전처럼 무력하고 다수의 의견에 휘둘리는 어리숙한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난 더 이상 백색마녀파가 아니야. 우리 어머니의 일과 나를 관련시키려 하지마. 나는 그딴 권력싸움에 더 이상 끼어들지 않겠어.”
중심을 단단히 잡은 그녀는 과거와 다르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구하고 쟁취해나가기 시작한다. 마치 과거 자신을 버린 존재들에 대한 복수를 하는 듯이. 그녀의 한마디에 백색마녀파는 빠른속도로 붕괴되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키르비르는 자신의 어머니가 이끌던 파별의 결말에 별 관심이 없는지 그대로 정치계를 떠나 자유롭게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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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했지?”
“네. 아주 멋지셨는데요?”
여행을 떠나자는 것은 네이의 의견이었다. 키르비르또한 자신을 짐짝처럼 버렸던 정치계에 정이 떨어져나간 후라 그녀의 의견을 큰 고민없이 수락하게 된 것이다. 그녀가 힘을 되찾은 후. 키르비르의 곁에 있는 것이 허락된 사람은 네이 한명뿐이었다.
“이미 떠날 준비는 다 끝났어요.”
키르비르가 힘을 되찾자 그녀가 가진 힘에 비해 평범한 네베르족이었던 네이의 존재는 보잘것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키르비르는 네이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네이의 가치란 힘의 유무가 아니라 그 존재자체가 소중했던 것이다. 가장 힘들때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준 단 한명의 존재. 네이는 그런 커다랗고 소중한 존재로 그녀의 머릿속에 각인되어있었다.
“오. 역시 네이. 고마워~!”
네이와 키르비르의 관계는 주종관계였다. 하지만 평범한 주종관계와 다르게 네이가 스스로 종을 자처하고 나선것이다. 만약 네이가 원한다면 자신을 전부라고 생각하는 키르비르를 자신 종으로 다룰 수 있었다. 실제로 그녀의 다부지고 고집 쎈 성격또한 네이가 요구하여 만들어낸 것이다.
“그럼... 이곳엔 더 이상 미련은 없는거죠?”
“응. 없어. 네이만 있으면 돼.”
네이의 물음에 키르비르는 네이를 바라보며 환히 웃는다. 그녀의 말이라면 자신의 성격조차 바꿀정도의 힘. 그것이 키르비르에 대한 네이의 영향력이었다. 말 그대로 키르비르에겐 네이가 전부였다. 그 사실을 잘 알고있던 네이또한 키르비르를 쉽사리 떠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떠나면 그녀는 과거처럼 무너질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저 물건은 어쩌실 거에요?”
마지막으로 그녀의 방을 떠나기전 네이는 키르비르가 챙기지 않아 방 한쪽에 초라하게 기대어진 거무튀튀한 봉을 바라본다. 애초의 그녀의 목적은 저 봉을 얻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어찌되든 좋았다. 그녀에겐 마계 최강의 마법사라는 키르비르가 든든한 후원자로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저거? 내가 어렸을 때 훈련하느라 사용했던건데... 이제 쓸모가 없네.”
순수하게 고농도로 정제된 다크에테르를 단순히 훈련용으로 사용했다니.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이런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게 된 것을 어느정도 이해가 되는 네이였다. 잠시 봉에게 다가간 키르비르는 과거를 추억하는 듯한 눈으로 천천히 봉을 훑어본다. 그리고 벽에 기대놓았던 봉을 집어든다.
쉬익..
그러자 봉에서 흘러나오던 기분나쁜 검은 기운이 마치 도망치듯이 봉안으로 스며들어간다. 마치 키르비르에게 복종하는 듯한 봉의 행동에 네이는 내심 깜짝놀란다. 봉에 담긴 힘은 그 누구도 컨트롤하기 힘들다는 혼돈의 힘의 결정체다. 그런 결정체를 아무런 어려움없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키르비르의 힘은 그녀가 경외하기 충분하고도 남았다.
“난 필요없지만... 네이에겐 이게 많이 필요할 듯 싶으네.”
그녀는 능숙하게 허공에 봉을 두어바퀴 돌리며 네이를 바라본다. 그녀또한 알고 있었다. 혼돈의 종족인 네베르족에게 그녀가 들고있는 봉은 어마어마한 힘이 된다는 것을. 네이는 작게 마른침을 삼키며 그녀의 손안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봉에서 눈을 뗴지못한다.
화악!
하지만 그 순간. 키르비르의 손안에서 빙글빙글 돌던 봉이 환한 빛을 흩뿌리며 천천히 줄어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빛이 사라질때쯤에는 거무튀튀한 봉은 키르비르의 손안에서 작게 빛나는 은색 방울로 변해있었다.
“선물이야. 네이.”
그리고 그녀는 봉이 변한 은색 방울을 그녀에게 건낸다. 방울로 변한 봉에는 과거와같은 끔찍한 혼돈의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은색방울로 변한 모습에 네이는 순간 당황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그녀가 은색 방울을 집어들자 방울에서 그녀의 몸으로 스며들어오는 혼돈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이건?!”
그녀가 알고있던 제어하기 힘들정도로 천방지축의 거친 혼돈의 힘이 아니었다. 마치 순한 양처럼 그녀의 의지에 순종하며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의 몸에 흘러들어오는 혼돈의 힘. 그 힘을 통해 네이는 몸안을 채워나가는 새로운 힘을 느낀다.
“봉인해놓은거야. 아직 네이가 감당하기 너무 큰 힘이야. 내 봉인을 통해 그 방울은 너에게 적당한 힘을 전해줄꺼야.”
“그런...”
혼돈의 힘을 봉인한다. 그것은 절대로 쉬운일이 아니었다. 예측불가능하고 제어 불가능한 힘의 대명사가 바로 혼돈의 힘이었다. 혼돈의 힘을 완벽히 봉인하면서 사용자가 원하는 만큼의 힘을 흘러나오게 만드는 능력. 그런 어마어마한 능력을 가진 존재가 키르비르라는 것을 새삼스레 다시 깨닫는 네이였다.
“선물이야. 네이를 믿으니까. 네이는 이걸 악한 곳에 쓸 사람이 아니란걸 아니까.”
“....”
네이는 조심스럽게 키르비르가 건내준 방울을 감싸쥔다. 그녀가 준 그 힘은 어마어마했다. 만약 봉인이 깨진다면 이 마계를 크게 기울게할정도의 힘이 이 작은 방울안에 봉인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봉인을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네베르족인 네이에게 건내준것이다. 그만큼 그녀가 자신을 신뢰하고있다는 사실에 네이는 감동한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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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라.
흐려져가는 의식속에서 네이는 낯선 부름을 듣는다. 과도한 출혈로 흑백이 된 시야속에서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못할 정도의 몽롱함에 네이는 멍하니 눈앞에 일렁이는 아지랑이를 바라본다.
-혼돈의 종인 네베르족이 이대로 무너질리는 없다. 깨어나라.
“누구...?”
한번도 들어본적 없는 낯선 목소리였다. 걸레같이 망가진 그녀의 몸안에서 흘러나오는 검은기운은 천천히 그녀의 앞에 뭉쳐 작은 덩어리로 뭉쳐지기 시작한다.
-키르비르에게 봉인당했던 몸. 너를 통해 하여금 다시 일으켜세우겠다.
빠지직!!
흐릿한 그녀의 시야 사이로 어두운 기운에 둘러싸인 은색방울이 떠오른다. 그런 방울은 애처롭게 떨리며 금방이라도 꺠질듯이 끔찍한 균열들이 그려져가고 있었다. 그런 균열을 통해 본적없는 진한 혼돈의 기운이 터져나오기 시작한다.
“누가... 허락할 것 같아?”
네이는 죽어가는 듯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낯선 목소리에게 저항한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비웃는듯 그녀의 머릿속으로 낯선 목소리가 전해진다.
-혼돈의 종이여. 너의 종들은 두가지의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다. 혼돈의 힘을 지배하는가. 아니면 지배 당하는가.
은색방울에서 흘러나온 검은 기운은 걸레가된 그녀의 몸을 감싸안아가기 시작한다. 검은 기운에 휩싸인 그녀의 신체는 빠른속도로 회복되어가기 시작한다.
-네 상태로 지배하는 것은 무리겠군. 그럼 결론은 하나밖에 없는것이지.
콰드득..
파묻힌 잔해사이로 그녀의 팔이 들어올려진다. 네이는 자신의 의지를 벗어나 들어올려지는 손의 모습에 기겁한다. 그런 그녀의 팔은 검은 기운에 휩싸여져 야수의 팔처럼 기괴하게 변해있었다. 그렇게 들어올려진 그녀의 팔은 허공에 떠있는 은색방울을 움켜쥔다.
-내가 너를 지배하겠다. 내가 지배당했던 것처럼. 너의 영혼은 심연의 밑바닥에서 내 힘의 원천이 될것이다.
콰득.
은색방울을 움켜쥔 그녀의 손안에서 무언가 부숴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와 동시에 방울 속에 갇혀있던 어마어마한 혼돈의 힘이 사방으로 터져나가기 시작한다.
“키... 르비르...”
그녀의 손안에서 부숴져내리는 방울의 파편을 바라보며 네이는 애처롭게 키르비르의 이름을 부른다. 곧이어 그녀는 자신의 의식이 점점 아래로 가라앉는 것을 느낀다. 마치 늪에 빠진 것처럼 그녀의 몸이 깊은 어둠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한다.
“믿음을 배신한... 업보인가...”
그녀는 힘없는 미소를 짓는다. 아마 징벌일 것이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키르비르를 배신한 일에 대한 징벌. 뒤늦게 그녀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후회한다. 시란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힘없이 눈을 감아간다.
콰악!
“아...”
멀어지는 의식속에서 그녀가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순간. 어둠속에 빠지려는 그녀의 팔을 붙잡는 손이 느껴졌다. 그런 손길에 네이는 깜짝놀라 눈을 뜬다.
“타...메르?”
그녀의 눈앞에 흐릿한 붉은 그림자가 아른거린다. 하지만 그녀는 상대가 누군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팔을 뻗어 어둠에 잡아먹히려는 그녀를 붙잡아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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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아앙!!
“읏!!”
커다란 폭음과 동시에 네이가 떨어진 유적지가 터져나가며 사방으로 수많은 파편들이 폭사된다. 그런 폭음에 깜짝 놀란 티에르는 황급히 자세를 낮춰 그런 파편들과 충격파들로부터 몸을 피한다.
-뭐... 뭐야 이건?!
시란또한 이런 일은 예상못했는지 상당히 놀란 목소리로 웅얼거린다. 어느정도 폭풍이 가라앉자 티에르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네이가 떨어진 유적을 바라본다. 그곳에는 멀리서도 확연히 보일정도로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이건... 혼돈이다.
그때 가만히 있던 혈이 불안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온다.
-너무나도 진한 혼돈. 이건 위험해.
-혼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느낀다. 이건 상대하면 안돼. 도망쳐라 티에르!!
혈이는 평소와 다르게 상당히 겁에 질려하며 티에르에게 도망치라고 말한다. 혈이가 불안해하자 티에르또한 자신의 불안감을 숨기지 못하고 초조하게 시란의 검을 매만지며 검은 어둠이 터져나오는 곳을 바라본다.
“어... 어뜩해 시란...”
-크읏... 도망친다해도 이 유적지에서 벗어날 방법을 아는 것도 아니잖아? 그 망할 검은 마녀도 어디있는지도 모르겠고.
콰드득
그때 유적의 벽이 무너지며 검은 어둠을 퍼트리는 정체가 들어난다. 무너진 유적파편을 헤치며 걸어나오는 인물. 그 인물의 정체는 다름아닌 네이였다. 왼손에 거무튀튀한 봉을 움켜쥐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처음과 많이 변해있었다.
검은 봉을 움켜쥐고 있는 왼팔을 타고 지독할 정도로 검은 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런 기운은 그녀의 왼쪽가슴과 얼굴 절반을 침식하여 마치 불타는 듯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네...이?”
티에르는 불안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러본다. 하지만 네이는 아무런 반응없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나간다. 곧이어 그녀는 검은 기운에 침식당한 왼쪽 눈동자는 생물의 눈이 아닌 것처럼 회백빛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크으읏...”
그녀는 괴로운 듯 신음을 흘리며 비틀비틀 걸음을 옮겨나간다. 그런 그녀를 관찰하던 티에르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뭔가... 이상해.”
그녀의 말대로 네이는 이상했다. 검은 기운에 침식당한 왼쪽 얼굴의 회백빛 눈동자는 살아있는 것처럼 번뜩이지만 그 반대편인 침식당하지 않은 오른쪽 눈동자는 마치 넋을 잃을 듯이 동공이 풀려있었다.
-추락의 충격이 적지는 않은 것같아. 이대로 공격하면 승산이...
-아니다! 도망쳐라!! 이건 진짜 위험하다!!
네이의 불안한 걸음걸이에 용기를 얻은 티에르는 작게 마른침을 삼킨다. 혈이는 계속해서 도망치라고 외치지만 시란과 티에르는 네이를 노려보며 검의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쥔다.
-지금 아니면 기회는 없어. 달려들어 티에르!
“으.. 으아아아!!!”
시란의 말에 티에르는 자신의 불안감을 떨쳐내려는 듯 힘찬 기합을 지르며 네이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다.
“크아아아아!!
하지만 그 순간 네이는 마치 야수처럼 괴성을 지른다. 그런 그녀의 괴성은 힘차게 내친 티에르의 기합을 파묻으며 어마어마한 위압감을 주변으로 터트려버린다. 동시에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던 검은 기운이 발광하며 마구잡이로 휘둘러지기 시작한다.
“....포기할래.”
그런 위압감에 밀린 티에르는 힘없는 미소를 흘리며 들어올렸던 검끝을 바닥으로 떨어뜨린다. 괴성과 함께 휘둘러진 검은 기운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주변의 모든 사물을 부수고 으꺠고 있었다. 저런 것을 돌파하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지만 불행히도 티에르는 그런 용기가 없었다.
“아직... 저항하는거냐!! 크읏!!”
몸의 절반이 괴물로 변한 네이는 몸을 웅크리며 티에르가 이해못할 말을 중얼거린다. 그녀는 괴로운듯 아직 변하지 않은 자신의 오른쪽 얼굴을 움켜쥔채 바들바들 몸을 떨어간다.
“어쨰서.. 어째서 또 다른 혼돈의 힘이... 한 몸에 두 개의 혼돈의 힘이 있단 말인가?!”
“미친것같아.”
-외형만봐도 이미 미쳤다고하기 충분해.
그런 네이를 바라보던 티에르는 짧은 감평을 내린다. 그런 그녀의 감평에 시란또한 동의한다.
“튀자.”
-응.
괴물로 변하가는 네이의 모습에 이미 전의를 상실한 티에르는 주저없이 도주를 선택한다.
“이 힘의 주인을 없에야한다. 이 힘의 주인을...!!!”
그 순간 네이의 회백색 눈동자가 번들거리며 도망치려는 티에르를 노려본다.
-표적이 되었다! 조심해!!
몸을 돌려 도망가는 티에르를 대신해 혈이가 비명같이 티에르에게 외친다. 그의 말을 증명하듯 네이는 도망치는 티에르를 쫓아 달려오기 시작한다.
“으... 으아아아앙!!”
티에르는 멍청한 비명을 지르며 네이에게 대항할 생각도 하지 않은채 머리를 감싸쥐고 줄행랑을 치기 시작한다.
========== 작품 후기 ==========
abcbbq / 혼돈과 파괴와 망가...?
유운처럼 / 으히히힝...
Solar Eclipse / 키르비르 좋죠. 으하하하핫;;
이걸로 키르비르와 네이 사이에 대한 떡밥도 해결.
하지만 해결할 떡밥이 산처럼 남아있네.
하나하나 처리해나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