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편
<-- Main story 3. 각성 -->
나의 붉은 대검이 허공을 가르며 지나간다. 그런 대검을 어렵지 않게 피해낸 레오는 싱글싱글 웃으며 크게 팔을 휘두른다.
콰앙!!
“이 자식...!”
녀석은 마치 장난을 치는 듯이 나를 농락하고 있었다. 그걸 증명하듯 녀석의 공격에는 진심이 담겨져있지 않았다. 녀석이 휘두른 팔을 가볍게 한팔을 들어 막아낸 나는 다시한번 녀석을 향해 발길질을 날린다.
“이게 뭡니까? 하하핫!!”
그는 얄밉게도 요리조리 내 공격을 피해내며 나를 비웃는다. 아무리 집요하게 공격해도 레오녀석은 얄밉게 간발의 차이로 내 공격을 피해내고 있었다. 마치 만져지지 않는 신기루처럼 내 공격을 전부 피해낸 레오는 뒤로 몇걸음 물러서며 어이없다는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당신. 광혈의 저주에 걸린 것 아닙니까? 근데 이게 뭡니까?”
“시끄러!”
나를 도발하는 녀석의 발언에 발끈한 나는 온 힘을 실어 대검을 사선으로 내려긋는다. 하지만 어김없이 그런 공격또한 가뿐하게 피해내는 레오. 그는 옆으로 몸을 움직여 어이없을 정도로 가뿐하게 내 대검을 피해내며 낄낄거린다.
“아주 단순무식하시군요. 하지만 이런건 저에게 통하지 않습니다.”
가뿐하게 뒤로 몸을 뺀 레오는 이때까지와는 다르게 강하게 주먹을 움켜쥔다. 그리고 대검을 휘두른 빈틈을 노리고 나에게 달려들어 억세게 움켜쥔 주먹을 힘껏 휘둘러온다.
“저는 힘과 강인함을 상징하는 뤼베크족...”
콰앙!!
녀석이 휘둘러온 주먹에 잔뜩 서린 힘을 느낀 나는 황급히 대검을 들어 검면으로 막아낸다. 그러자 묵직한 충격과 함께 커다란 대검을 들고있는 내몸이 뒤로 몇걸음이나 튕겨져나갔다.
“단순무식함으로 따지면 어딜가도 꿀리지 않습니다만?”
아직도 대검전체가 찌르르 울릴 듯한 충격에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레오를 바라본다. 아무리봐도 비리비리하고 약해보이는 몸을 가진 레오였지만 그런 몸에서 뿜어져나오는 힘은 내 상상을 초월했다.
“예상외로 재미없군요. 광혈의 저주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기대치의 반도 못미칩니다.”
녀석은 놀란 내 얼굴을 감상하며 나에게 휘두른 주먹을 가뿐하게 허공에 털어낸다. 빈틈이 많은 여유로운 녀석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나는 녀석에게 달려들지 못하고 조용히 그를 노려볼뿐이었다.
“이 세계의 말로 광혈의 저주. 저희 세계의 말로는 혼돈의 피라고 불리죠. 그런 어마어마한 힘을 몸에 담은 사람치고 너무나도 약함니다.”
선생님처럼 뭘 설명하려는 듯이 레오는 싱긋이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그 순간 기습적으로 레오의 신형이 내 눈앞으로 달려온다.
“큿..?!”
기습적으로 나에게 다가온 레오를 향해 나는 반사적으로 주먹을 날린다. 하지만 그 순간 레오는 기민하게 몸을 비틀어 내 주먹을 피해낼 뿐만이 아니라 내 손목을 움켜쥐고 가볍게 시계방향으로 비틀어버린다.
우드득!!
손목에서 울려퍼지는 섬뜩한 뼈울림. 그와 동시에 뼈의 위치가 억지로 바뀌는 짜릿한 고통이 팔을 타고 올라온다. 하지만 광혈의 저주가 서린 몸은 단순히 뒤틀린 뼈를 어렵지 않게 정상적으로 빠르게 회복시켜준다.
“확실히 광혈의 저주는 맞군요.”
순식간에 회복된 내 손목을 보고 키득거린 레오는 조용히 팔짱을 끼고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간다.
“하지만 저는 당신이 광혈의 저주를 받은 사람이라 보이지 않습니다. 단순히 힘좀 쎄고... 회복력이 비이상적으로 강하고 가죽이 좀 질긴것을 빼면 아주 평범한 인간일뿐이군요.”
“어디서 충고따위를 하는거냐!!”
내 외침에 레오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리고 나를 비웃는 듯한 더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너무 재미없어서요. 싸우는 법조차 모르는 상대와 싸워도 아무런 감흥이 나지 않는군요.”
“네 놈...”
오만한 레오의 태도에 나는 이를 바득바득간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의 말대로 방법이 없었다. 레오는 공격자체가 통하지 않았다. 마치 그는 내 공격 하나하나를 다 알고 있는 듯이 아주 여유롭게 나를 농락해가며 공격을 피해내고 있었다.
“만약 광혈의 저주를 완전히 컨트롤 할 수 있다면... 당신의 분노에서부터 힘이 나옵니다. 정확히 따지면 광혈의 저주에 오염된 본성에서 오는 광폭함이지요.”
“분노...?”
오만한 녀석의 태도에 나는 충분히 분노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다고해도 변해지는 것은 없었다. 그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레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한다.
“지금 당신이 느끼는 건 분노가 아닙니다. 초조함과 다급함이죠. 진정한 분노란...”
우득..
그 순간 레오의 몸에서 기묘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여유로움과 오만함이 묻어나오던 분위기에서 갑작스레 무겁고 답답한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그는 억지로 웃고있다는 것을 대변하듯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입을 열어간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끌어오르는 주체못할 열기죠. 제 몸이 전부 타 들어버릴 정도의 열기. 그것이 분노입니다.”
콰드득..
그의 팔이 뒤틀리며 짐승과도 같은 거친털이 옷을 뚫고 튀어나온다. 그리고 비리비리하고 연약해보이던 그의 손가락또한 기괴하게 뒤틀리며 서슬퍼런 예기가 서린 날카로운 발톱으로 변해간다. 점점 변해가는 그의 모습은 마치 늑대인간과도 같았다.
“크르르..”
간신히 인간의 얼굴을 유지하고 있는 레오의 입에서 낮은 울음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는 나를 향해 지독할 정도의 살기와 적의를 내비친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뿐..
화악!
곧이어 나를 압박해오던 살기와 적의가 거짓말처럼 허무하게 사라져버린다.
“뭐... 이런 것입니다.”
어느세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레오는 싱긋이 웃으며 가볍게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변신하느라 찢겨진 자신의 옷을 탈탈 털어낸다.
“어떤가요? 좀 공부가 되셨나요?”
분노. 어느정도 그의 말에 동감하는 나 였다. 과거 내 힘이 멋대로 폭주하기 직전에 느꼈던 감각. 그것은 가슴속에서 터져나올 정도로 주체못한 열기였다. 실제로 그 힘으로 지금의 내가 어떻게하지 못했던 네이조차 이겼던 나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것을 알고 있다해도 그 힘을 꺼낼 방법을 모르는 이상...
“시끄러!!”
나에게 여전히 방법이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를 꽉 깨문 나는 다시금 무모하게 그에게 달려든다. 확실히 지금의 내 힘으로 녀석을 이길 수는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녀석을 떨쳐내고 탑으로 돌진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이거이거... 안되겠군요.”
하지만 그런 내 행동을 예상했다는 듯이 가볍게 혀를 찬 레오는 정면에서 달려드는 나를 피하지않는다. 그런 그를 향해 대검을 휘둘러보지만..
빠악!!
대검이 그에게 닿기전. 나는 발목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통증과 함께 온몸의 균형이 무너지는 것을 느낀다.
“크읏!!”
콰악!
교묘하게 내 발목을 후려차 나를 쓰러뜨린 레오는 오만하게 내 가슴을 밟고 나를 내려본다. 그리고 나를 깔보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분노하십시오. 저를 증오하며 가슴속에 잠긴 그 힘을 끌어내는 것입니다.”
“입 닥쳐..”
나는 내 가슴을 누르고 있는 녀석의 발을 떨쳐내려 하지만 녀석은 보기보다 강한힘으로 내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나는 이를 악물며 레오를 노려본다. 그러자 레오는 씨익 웃으며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킨다.
“시간은 많지 않습니다. 저 같은 것은 빨리 무찌르고 구해내야할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의 손가락을 따라 하늘을 바라본다. 거기에는 어느세 거대한 불덩어리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에페리아를 향해 한점으로 모아들던 거대한 마나의 흐름이 엉켜 마치 태양과도 같은 거대한 불덩어리로 변해가고 있었다.
“키르비르...!!”
“그렇습니다. 그녀를 구해야지요. 이제 남은 시간은.. 3분입니다. 그리 많지도... 그렇다고 짧지도 않는 미묘한 시간이군요.”
“네 녀석!!!”
나는 내 가슴을 짓누르는 그의 발을 떨치기위해 안간힘을 쓰며 몸을 비튼다. 하지만 녀석은 마치 거대한 바위처럼 일말의 미동없이 조용히 내 가슴을 꾹 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젠장.. 젠장!!”
“무력하시군요. 한 여자조차도 못지킨단 말입니까? 여러의미로 실망이군요.”
아무것도 못한다는 무력함에 나는 이를 악물고 녀석을 노려본다. 하지만 녀석은 그런 내 표정을 감상하는 듯 비릿하게 웃으며 나를 내려볼 뿐이었다.
“쯧... 어쩔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호문클로스의 한계거든요.”
“...뭐?”
호문클로스라는 그의 말 한마디에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를 바라본다. 호문클로스. 낯설지 않은 단어였다. 누군가 나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나는 호문클로스라고... 이 몸은 내 것이 아니라고...
“인공적으로 만든 이성체. 그런 이성체에 본성이나 본능이란게 있을 리가 없죠. 당신은 단순히 광혈의 저주를 담아둘 그릇일뿐입니다. 그것을 사용할 수도... 이용할 수도 없는 몸이지요. 그 덕에 광혈의 저주에도 오염되지 않는 것입니다. 본능이란게 아예 없기 때문에 말입니다.”
콰득!!
“크아아아!!”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내 가슴을 짓누르는 그의 발에 더욱 강한 힘이 실린다. 동시에 그의 발에 눌리고 있던 내 몸은 단단한 돌바닥을 으스러뜨리며 바닥으로 파고들어간다.
“당신은 호문클로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생명체. 말그대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일뿐입니다.”
“입.. 닥쳐!!”
내 발을 짓누르는 그의 발목을 움켜쥐며 나는 있는 힘껏 그의 몸을 들어올리려한다. 하지만 나보다 작은 몸이 분명한 레오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쉽사리 그의 몸을 들어올릴 수 없었다.
“옛기억이 나시는지요? 과거부터 당신은 아무것도 해오지 못했습니다. 그저 투명한 병안에 갇혀서 밖을 바라보며 무의미한 삶을 지낼 뿐이었지요.”
“...!!”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잊혀졌던 과거 기억. 아니. 외면해왔던 흐릿한 옛기억이 떠오른다. 내가 있던 곳은 아주 자그마한 공간. 팔하나.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비좁은 공간이었다. 그랬었다. 그런 비좁은 공간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투명한 벽 넘어로 밖의 세상을 바라보는 것일뿐.
-개소리..
공허해지는 머릿속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지랄마라. 과거 병조림이었다고... 지금도 병조림일 리가 없잖아?
에페리아에 의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불덩어리가 보이는 하늘이 붉어진다. 그리고 그런 붉은 하늘은 천천히 불투명해지며 누군가 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간다.
“너는...”
그런 남자가 낯설지 않았다. 온몸에 피칠이 된채로 붉은 빛이 가득한 공간에 매달려있는 남자. 그는 다름아닌 나였다. 그는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붉게 충혈되어 빛나는 눈동자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너는 너다. 과거 호문클로스라고해도... 지금의 너는 너야.
“무슨.. 소리냐?”
점차 그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기시작한다. 하지만 그런 그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나는 신음을 삼킬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사지가 험악하게 찢겨진채 푸른 사슬에 몸이 묶여 허공에 매달려있었다. 그런 모습으로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믿을 수 없는 끔찍한 그의 모습에 나는 할말을 잃는다.
-뭐냐? 놀랐냐?
그의 모습을 보고 입을 다무는 내 행동에 그는 키득키득 웃음을 터트린다.
-망할 하얀 꼬맹이 때문에 이 꼴이지.
그는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처참하게 찢긴 자신의 팔다리를 찬찬히 훑어본다. 괴물같은 무언가에 잡아뜯긴듯 억지로 뜯겨진 그의 사지에는 송곳처럼 날카롭게 벼뤄진 쇠사슬들이 꿰어져 일말의 움직임조차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녀석을 원망하지 않아. 덕분에 아직 내 영혼이 이 미친 광기에 흡수되지 않고 버텨내고 있는 거니까.
키득거리며 자조적인 웃음을 터트리던 남자는 크게 한숨을 들이킨다. 그의 숨소리 하나하나에서 그가 느끼는 고통이 묻어나왔지만 정작 자신은 이런 고통에 익숙한듯 작게 미소지으며 나를 바라본다.
-지나간 과거는 버려라. 다가올 미래를 꿈꾸며 지금의 현실을 헤쳐나가라.
“그게... 무슨 소리냐?”
-검은 꼬마가 나에게 해줬던 말이지. 내가 멋진 말은 잘 못하지만... 이 말이 지금 너에게 필요할 것 같았다.
긴 말을 하는 것이 힘든지 그는 다시금 큰 한숨을 들이킨다. 그리고 두어번의 기침을 하여 입에 고인 생혈을 뱉어낸 녀석은 핏물이 묻은 입술을 훑으며 말을 이어나간다.
-병조림이었던 과거는 신경쓰지마라. 지금의 너는 타메르다. 나를 대신해야할 타메르란 말이다.
“너를.. 대신할 타메르라고?”
-대륙을 공포로 뒤흔들었던 살육자. 수많은 용사들의 전설에 끝마침을 찍어주는 남자. 그가 바로 나다.
그의 오만한 말에 할말을 잃는다. 내 머릿속에 그런 기억은 없었다. 하지만 사슬에 매달려 온몸이 봉인되었지만 그가 가진 자신감과 패기만은 거짓이 아니었다.
-내 이름에 먹칠할 생각은 하지마라. 내가 이 꼴이 되어도... 뒤져서 나에게 올 네놈의 목젓하나는 물어뜯어줄 이빨은 아직 남아있다.
녀석은 비릿하게 웃으며 피투성이가된 자신의 이빨을 내비친다. 그런 허세 가득한 그의 행동에 나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트려버린다.
-가라. 내 힘을 끝까지 써봐라. 넌 더 이상 무력한 병조림이 아니다. 나를 대신할. 내 이름을 이어갈. 진정한 타메르가 될 최강의 병조림이다.
“젠장... 그놈의 병조림 타령. 그만하라고...”
녀석의 말에 뭔가 머릿속으로 환해지는 것이 느낀다. 그와 동시에 내 시야에 선명히 보이던 남자의 모습이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그리고 내눈에보이는 것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거대한 불덩어리가 떠있는 하늘. 그리고 레오의 재수없는 얼굴이 보였다.
“포기하신겁니까?”
그의 질문에 나는 아무말없이 미소를 지어보인다. 그런 내 태도에 재수없게 싱글 싱글 웃고만있던 그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생긴다. 녀석의 얼굴을 노려봐주며 나는 힘껏 숨을 들이키며 말한다.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