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편
<-- 크리스마스 특별편 -->
삐삐삐.. 삐삐삐..
창문의 틈새로 흘러들어오는 싸늘한 한기와 같이 귀에 거슬리는 알람소리가 내 머리를 뒤흔든다.
“으으으...”
마치 곧 죽어가는 병자처럼 힘없는 신음소리를 흘리던 나는 힘겹게 팔을 뻗어 나를 괴롭히는 소음의 진원지를 찾는다. 탁자위를 더듬어가는 내 손 끝에 닿는 딱딱한 이물질. 하지만 나는 그런 이물질을 잡지못하고 손끝으로 밀어버린다.
달그락..
삐삐삐... 삐삐삐...
탁자위에 있던 소음의 진원지는 내 손 끝에 밀려 탁자에서 굴러떨어진다. 하지만 그 소음은 멈출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우... 젠장!!”
결국 귀를 성가시게하는 이 소음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에 나는 욕을 내뱉으며 침상에서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반쯤 떠져 흐리멍텅한 시야속으로 내가 떨어뜨린 소음의 진원지를 찾는다. 그것은 플라스틱의 작은 시계였다. 그 시계를 집어둔 나는 능숙하게 윗부분에 마련된 스위치를 눌러 요란한 소음을 진정시킨다.
“아침인가...”
반강제적으로 잠을 꺤 나는 멍한 눈으로 차가운 바람이 들어오는 창문옆에 걸어둔 달력을 응시한다. 오늘의 날자는 12월 24일. 한주가 시작되는 월요일이자 즐겁다는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날이다. 평소같았으면 저주스럽고 관심없어야할 크리스마스였지만..
“이브라...”
조용히 숫자 24를 바라보던 내 입가에 기대감이 담긴 작은 미소가 지어진다. 덕분에 기분나빴던 머릿속이 환해지는 것같았다. 이번 이브는 나 혼자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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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쿵쿵!!
“일어나!! 아침이야! 학교가야지!!”
아침에 일어나자 내가 하는 일은 우리집 2층에 살고있는 하숙생을 꺠우는 일이었다. 요란스럽게 문을 두드리고 두어번 소리친 나는 별 미련없이 돌아서서 1층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조금있다가 늦었다면 허겁지겁 뛰어내려올 하숙생을 위해 간단한 토스트를 마련해나간다.
치이익..
단순히 버터를 바른 후라이팬 위에다가 식빵조각을 던져놓고 대충 후라이팬을 흔들어준다. 제대로 녹지않은 버터가 빵 가장자리에 응어리지지만 별 상관하지 않았다. 어자피 뱃속에 들어가면 똑같이 변하는 음식을 애써 정성들여 만들 생각은 없었다. 이런식으로 대충 구워낸 토스트를 접시위에 담아 식탁위에 올려둔다.
“시간이 다 됬는데...”
나는 슬쩍 시선을 돌려 시계를 바라본다. 9시를 가리키는 시계. 이제곧 올거다.
쾅쾅쾅!!
역시나 내 예감은 틀리지않았다. 집 전체가 울리는 듯한 요란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왜.. 왜 안꺠웠어!!!”
빗으로 자신의 머리를 허겁지겁 빗으며 한손에는 자신이 두르고 갈 두꺼운 코트를 들고나오는 소녀. 아니. 소녀처럼 보이는 여성이다. 그녀의 이름은 키르비르. 우리집 2층에 월세를 내고 살아가는 대학교 하숙생이다.
“깨웠어. 아주 푹자고 있던데?”
힘껏 빗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두어번 쓸어내린 키르비르는 자신의 빗을 식탁위에 던져놓는다. 그리고서는 급하게 자신의 코트를 입어나간다. 그런 그녀를 시큰둥하게 바라보던 나는 내가 입고있던 앞치마를 풀어 벽에 걸어두며 식탁위에 올려놨던 토스트 접시를 그녀쪽으로 밀어놓는다.
“또 토스트?!”
“늦잠자놓고 말이 많다. 이거라도 감사합니다라고 하면서 먹어.”
“아니아니... 메뉴 자체가 문제있는게 아니라.. 너는 토스트를 지지리나게 못 굽잖아!!”
코트를 걸친 키르비르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토스트 두 개를 집어든다.
“아뜨뜨!!!”
하지만 토스트의 열기를 견디지 못한 키르비르는 집어든 토스트를 허둥거리다 식탁위에 떨어뜨린다. 그러자 잘구어진 토스트의 부스러기가 사방으로 튀겨나가 주변을 더럽힌다. 하지만 키르비르는 별 상관없다는 듯이 붉게 달아오른 손가락을 두어번 후후 분뒤 토스트하나를 입에 물고 허겁지겁 현관으로 달려간다.
“야.. 야!!”
“쏘리쏘리!!”
식탁위에 난장판이 된 식빵 부스러기를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쉰 나는 그녀가 떨어뜨린 다른 토스트 하나를 주워든다. 그리고 미리 마련해둔 가방을 어께에 맨채 토스트를 베어묵으며 현관을 향해 걸어간다. 그 사이 어느새 키르비르는 신발을 다 신은뒤 입에 물고있던 토스트를 꿀꺽 삼킨다.
탁..
“야!!!”
곧이어 그녀는 내가 한입베어먹은 토스트를 냅다 뺏어 자신의 입으로 가져간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발끈하지만 키르비르는 생긋 웃으며 나에게 손을 두어번 흔들며말한다.
“하나론 부족하거든. 쏘오리~”
그리고 후다닥 현관문을 열고 도망치듯이 나가는 키르비르.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투덜거리며 식탁에서 또다른 토스트를 집어들고 그녀를 쫓아 밖으로 걸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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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비르와 나는 같은 대학교에 다닌다. 같은 건물, 같은 학과에서 거의 대부분의 수업을 같이 듣는다. 거기다 우리집에 하숙생으로 지내고 있으니 그녀와 나와의 관계는 거의 남매라고 해도 남들이 의심하지 않을 정도였다. 실제로 키르비르는 나를 허물없이 대하고 있었고 나 또한 그녀를 허물없이 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냥 그정도이다. 상당히 친숙하고 익숙한 존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하아.. 하아..”
학교로 가는 버스안에서 나는 한심하다는 듯이 자리에 서서 헐떡이는 키르비르를 올려다본다.
“어자피 버스오는 시간은 똑같은데 뭐가 그렇게 급히 뛰었던거냐?”
말그대로 스쿨버스가 오는시간은 일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르비르는 나보다도 먼저 허겁지겁 달리곤했다. 그래봤자 언제나 우리 둘이 타는 스쿨버스는 똑같았다. 거기다가 그녀와 다르게 먼저 달려온 나는 자리에 앉아있었고 녀석은 거친 숨을 헐떡이며 자리에 서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정류장까지 힘껏달려와 앞의줄을 차지했던 그녀였지만... 자리의 욕심많은 다른 학생들에게 밀려 결국엔 자리를 빼앗기게 된 그녀였다. 버스가 도착하자마자 혼돈의 도가니가 되는 정류장에서 비교적 몸이 작고 힘이약한 그녀는 자리싸움에 지곤했다. 그에 비해 나는 거의 언제나 앉을 자리를 빼앗을 수 있었다.
“보통... 여자에게 양보하는게 매너 아니야?”
“그러고 싶지만... 혼잡하잖아?”
나는 양보해줄 마음이 전혀없다는 것을 대변하듯 싱글싱글 웃으며 키르비르에게 지금상황을 재 각인시켜준다. 학교로 가는 마지막 오전 스쿨버스인만큼 지각하지 않겠다는 의지에 불타오르는 학생들이 가득한 버스이다. 자리는 당연히 만원이었고 서있을 자리또한 그저 두 발을땅에 딛일 아주 작은 공간만이 존재할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양보는 어림도 없는 말이었다.
“뭐... 정 앉고싶다면 내 무릎위에 앉던가.”
싱글싱글 웃으며 나는 내 무릎을 팡팡 두드린다. 그러자 뚱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던 키르비르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콧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팩 돌려버린다. 그녀는 자신을 어린애 취급을 하는 것을 제일 싫어했다. 몸집이 작은 만큼 대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중학생취급을 종종 받아오던 키르비르였기에 자신이 어린아이처럼 행동한다는 것 자체를 극도로 싫어하는 녀석이었다.
“그럼... 학교 도착하면 꺠워줘.”
승리자의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나는 키르비르가 보는앞에서 여유롭게 팔장을 끼고 눈을 감는다. 따듯하고 부드러운 버스안의 온화한 공기를 느끼며 나는 부족한 아침잠을 채워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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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이 끝났다. 뭐 수업이라 할 것도 없었다. 우리가 들었던 강의 중 하나로 팀별과제를 수행하여 제출하는 일이었다. 단순히 교수님에게 USB로 자료를 전해주면 되었기에 수업이라 칭하기 부끄러울 정도였다.
“오늘은 이브네...”
과제 제출을 완료한 키르비르는 강의실에서 나오며 자신의 스마트폰을 톡톡 두드린다. 그리고 떠오르는 달력. 빨간 25일 숫자옆에 써진 24일이라는 숫자를 바라보며 그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뭐... 어자피 타메르와는 전혀 상관없는 날이잖아?”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마치 당연한 사실을 선고하는 듯한 어투로 말하는 키르비르. 하지만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나또한 지지않고 씨익 웃으며 기대고 설레는 오늘 저녁 계획에 대해 말하려했다.
“키르비르 언니!!”
그때 내가 말을 하려는 순간 우리를 부르는 부름이 들려온다. 우리의 자료제출이 끝나기만 기다렸다는 듯이 복도 한쪽에 기다리고 있던 검은 단발머리카락의 여성. 그녀는 나와 키르비를 발견하자 환히 웃으며 우리쪽으로 달려온다.
“네이~!”
그녀의 이름은 네이. 키르비르가 상당히 아끼고 사랑해주는 3학년 후배이다. 어려보이는 키르비르와 정반대로 나름대로 매력적인 숙녀로써의 모습을 풍기는 네이는 유일하게 키르비르와 잘 어울릴 수 있었던 후배였다. 다른 후배들같은 경우 키르비르의 외모만을 보며 단순히 신입생취급을 했었다. 덕분에 어린애 취급을 극도로 싫어하는 키르비르와 친해질 수 없었지만 네이는 예외였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공손한 존대를 하는 네이는 당연히 키르비르에게도 첫 만남부터 공손한 존대를 했고 그런 네이를 다른 후배들보다 키르비르가 마음에 더 들 수 밖에 없었다.
“주말 잘 보내셨어요?!”
“응~! 뭐 한가하게 보냈지! 네이는?”
“저도 뭐 다를게 있나요!”
달라붙은 그 둘은 뭐가 그리 좋은지 서로 얼싸안고 방방 뛴다. 언제나 봐오던 재미난 그녀들의 모습에 나는 그저 피식 미소지을 뿐이었다. 자신보다 키가 작은 키르비르를 마치 여동생처럼 끌어안고있던 네이는 흘끗 나를 바라본다. 그런 그녀와의 시선이 마주치자 나는 아무말없이 그저 싱긋이 웃어줄뿐이었다.
“이렇게 된거 다 같이 점심이나 먹으러가자!”
네이를 만난 것 하나만으로도 기분이 훨씬 좋아졌는지 키르비르는 내 소매를 잡아 이끌며 구내 식당을 향해 걸음을 옮겨나간다. 그녀에 의해 잡아 이끌려지며 우리가 나눈 대화의 주제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네이는 크리스마스 이브날인 오늘 뭐할꺼야?”
“으음... 저는 저녁에 약속이 있네요.”
“약속? 설마.. 설마설마... 데이트?”
키르비르의 질문에 네이는 그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개인적인 일이 있어요. 간만에 크리스마스니까 가족 선물같은 것도 준비해야하구요.”
“우으... 네이도 요번 크리스마스는 쏠로구나...”
“뭐... 그렇죠 뭐.. 아하핫..”
키르비르의 말에 네이는 힘없는 웃음을 터트린다. 네이를 바라보던 키르비르는 그녀과 같이 웃다가 나를 돌아본다.
“타메르는 뭐... 물어보지 않아도 뻔하지. 방에 처박혀 문을 걸어잠근뒤 크리스마스 기념 자신만의 해피타임을 가지는거 아니야?”
“흥... 말도안되는 유언비어같은 것 흩뿌리지마.”
키득키득 웃으며 하는 키르비르의 말에 네이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린다. 나나 키르비르는 이런 장난기가 잔뜩 서린 농담에 별 감흥이 없었지만 네이는 그렇지 않아보이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네이에게 제스쳐로 키르비르의 말이 농담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나도 오늘 저녁은 바빠. 저녁은 챙겨줄 수 없으니 어디서 시켜먹고라도 있어.”
내 말을 들은 키르비르는 과장된 몸짓으로 놀라는 듯한 포즈를 취한다. 하지만 싱글싱글 웃고있는 그녀의 입고리가 그런 그녀의 행동이 진짜 놀란 것이 아니라 나를 조롱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뭐어~ 너가 바쁘다고? 에이... 뭐... 대답은 뻔하겠지만 한번은 물어봐줄게. 데이트야?”
“응.”
짗꿎은 그녀의 질문에 나는 아주 솔직 담백하게 대답한다. 그러자 키득키득 웃으며 질문을 던진 키르비르의 얼굴이 살짝 경직된다.
“에이... 농담하지마~”
“농담 아니거든? 진.짜. 데이트야.”
나는 데이트라는 말을 강조해서 그녀에게 말한다. 그러자 키르비르는 얼굴에 웃음기를 지우고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노려본다.
“아니아니... 잠깐 우리 좀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자.”
크게 한숨을 몰아쉰 키르비르는 손가락을 들어 내 머리카락을 가리킨다.
“머리감고 제대로 빗질 안한데다 버스안에서 쳐 자서 엉망이된 머리.”
그리고 천천히 손가락이 내려와 내 얼굴을 가리킨다.
“호감이란 개뿔도 없는 험악한 산적같은 인상.”
곧이어 손가락은 천천히 더 아래로 내려와 내 옷을 가리킨다.
“돈도 쥐꼬리도 없으면서 메이커도 없는 싸구려 옷과 신발.”
거기서 멈추지 않은 손가락은 내 호주머니를 향한다.
“얇디 얇은 지갑에다가 세대의 흐름에 걸맞지 않게 아직도 피쳐폰을 쓰는 무식함까지.”
그리고 나서야 자신의 손가락을 회수한 키르비르는 어디 한번 반박해보라는 듯이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의견에 마침표를 찍는다.
“인간적으로 이런 남자를 좋아할 사람이 어디있어? 꽃뱀조차도 이런 남자는 피하겠다. 데이트하겠다는 그 여자... 혹시 정신이상자나 어디 장애가 있는거 아니야?”
상대의 생각이나 감정따윈 전혀생각지 않은 키르비르의 직설적인 말에 네이는 긴장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발언은 4년이란 세월동안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진 나였다. 나는 그저 여유롭게 웃으며 어께를 으쓱거린다.
“짚신도 짝이 있다고 이런 내 모습을 좋아해주는 여자가 있긴 있더라.”
내 대답에 키르비르의 대답은 가당치않다는 콧방귀였다. 피식 웃은 키르비르는 내 소매를 잡아 식당을 향해 이끌며 말한다.
“괜히 자존심 세우지말고... 이 추운날 데이트한다하고 구라치고 시간보내기 위해 피씨방같은데 처박히지말라구. 안놀릴테니까.”
내말은 절대로 안믿어주는 키르비르의 태도에 가볍게 한숨을 내쉰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말을 수긍해준다. 이렇게까지라도 하지 않으면 끝까지 추궁할 그녀의 고집센 성격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구.. 그래그래. 어자피 곧 들킬 거짓말을 하지 않는거에요~”
그녀는 마치 나를 달래듯한 말투로 말하며 나를 이끌고 식당으로 들어간다. 그런 나와 키르비르를 쫓아서 네이또한 종종걸음으로 달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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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와 점심식사를 한 후. 학교에 특별한 용무가 없었던 우리들은 이른 저녁에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키르비르는 온풍기를 틀어놓고 소파에 자리를 잡고 누운다. 그리고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듯이 TV의 리모컨을 품에 안은채로 크리스마스 특선채널을 찾아 화면을 돌려가기 시작한다.
“흐음...”
그런 그녀와 다르게 나는 옷장앞에서 옷 몇 개를 꺼내 골라가기 시작한다. 오늘 저녁데이트. 간만에 하는 데이트인 만큼 제대로 차려입고 나갈 예정이었다. 옷장 구석진곳에 아껴뒀던 메이커 옷들까지 꺼내두며 나는 내가 입고 나갈 옷차림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점점 약속시간을 향해 다가간다.
“타메르~ 나 저녁! 오늘은 크리스마스니까 양식으로 해줘어~”
옷을 갈아입고있을때 밖에서 키르비르의 외침이 들려온다. 그런 그녀의 외침따윈 무시하며 내가 코디한 옷을 전부 차려입은 나는 비상금까지 꺼내 지갑을 두둑히 채운채 밖으로 걸어나온다.
“오늘 저녁은 시켜먹으라 했잖아.”
키르비르는 여전히 소파위에서 뒹굴거리며 TV를 보고 있었다. 잠시 뒹굴거리던 그녀는 깔끔하게 차려입고 나온 나를 바라보며 눈을 휘둥그레 뜬다.
“뭐야? 왠 꽃단장? 오늘 외식이야?”
“말했잖아. 데이트라고...”
거울을 보며 간단하게 머리를 정돈한 나는 옷걸이에 걸어뒀던 코트를 꺼내 어께에 걸친다. 그리고 신발장으로 다가가 평소에 쓰던 낡은 운동화가 아니라 전날 미리 광택을 낸 구두를 꺼낸다.
“자.. 자자자.. 잠깐!!”
그때 소파위에서 뒹굴거리던 키르비르가 기겁하며 현관으로 달려나온다. 그런 그녀를 향해 나는 현관에 붙어있는 전단지 몇 개를 꺼내서 건내준다.
“여기. 피자나 스파게티같은거 배달해주니까 시켜먹어. 돈은 내가 나중에 줄게.”
타악!
하지막 키르비르는 보지도 않고 내 손을 탁 쳐 내가 들고있던 전단지를 바닥에 떨어뜨리게 만든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인상을 구긴 나는 그녀를 노려보지만 키르비르는 그런 내 감정따윈 별관심없다는 듯이 나에게 묻는다.
“너.. 너 진짜 데이트야?”
“그렇다니깐.”
“아하하.. 거짓말하지마. 이브날 할 일없을꺼라고 놀리지 않을게. 이 추운 날 이런 쓰잘데기 없는 연극할 필요는 없잖아?”
“진짜 데이트거든?”
그녀의 집요한 질문에 퉁명스럽게 대답한 나는 차갑게 식어있는 현관문의 손잡이를 잡아 비튼다. 그리고 현관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기.. 기다려!!!”
갑작스레 키르비르는 옷걸이에 걸려져있는 자신의 코트를 주섬주섬 걸치며 나를 쫓아 맨발로 자신의 단화를 신어간다.
“너 뭐하는거야?”
“확인해볼꺼야. 넌 못믿으니까.”
고집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쏘아본 키르비르는 단화를 바로신으며 자신의 코트 단추를 단단히 매어나간다. 그러나 코트를 입는다 해도 집안에서 입는 활동복차림인 그녀의 복장. 이 추운 겨울날의 한기를 견디기는 힘들 것이다.
“마음대로...”
하지만 내 말을 믿어주지 않는 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나는 그녀를 걱정하기보다 한번 올테면 와보라는 식으로 생각하며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그러자 키르비르는 차가운 겨울 밤바람에 몸을 움츠리지만 이내 나를 쫓아 종종걸음으로 달려오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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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 쫓아올꺼냐?”
“흥. 그 잘난 가상의 여상친구가 실존하는지 안하는지 확인할때까지.”
약속장소로 가는 버스안에서 내 곁에 앉은 키르비르는 푸르게 변한 입술을 달달 떨면서도 고집스럽게 단단히 팔장을 낀채로 버티고 있는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살펴본다. 그나마 코트를 입은 상체는 괜찮았다. 하지만 양말조차 신지않고 얇은 단화를 신고나온 키르비르. 그녀는 발끝이 시린지 버스안임에도 불구하고 다리를 비비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만 돌아가. 그러다 감기걸리겠어.”
“아아~ 역시나 거짓말이지? 그렇게까지 날 떨어뜨리고 싶으셨어요? 어림없는 소리.”
내 말을 쥐뿔도 듣지 않는다. 그녀는 내 말을 듣지 않겠다는 듯이 고개를 팩돌리고 창가를 통해 보이는 흥겨운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바라본다. 그런 그녀의 고집에 나는 고개를 푹 숙인채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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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장소에 도착했다. 그다지 멀지않은 상업지구. 크리스마스 이브라서 그런지 휘양찬란한 네온사인과 요란한 음악이 가득 울려퍼지는 거대한 빌딩들 틈에서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쉰다.
이브날 데이트. 내 가슴을 설레게할 충분한 이벤트였지만... 내 곁에서 오들오들떨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키르비르라는 존재 덕분에 그 기대되는 설레임조차도 느낄 여유가 없었다.
“키르비르...”
“흥! 어림없다니까! 어디한번 보여줘봐! 그 여자친구를!! 없지? 없는거지?!”
“....”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내 시계를 확인해본다. 약속시간까지 남은 시간은 10분. 마음 같아서는 키르비르를 돌려보내고 싶지만... 그녀의 끔찍한 황소고집은 나랑 데이트를 한다는 사람을 봐야지만 풀릴 것 같았다.
“널 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 괜히 고집부리지말고 돌아가자. 나 춥다고!!”
얼마나 추운지 발까지 동동구르는 키르비르. 나는 그런 키르비르를 위해 살짝 내 폰으로 약속장소를 까페로 바꾸자는 메시지를 보내려했지만 사람 많은 대로에서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그녀의 태도에 나는 그 메시지를 지워버린다.
“약속시간까지 10분남았어.”
그리고 그녀에게 별 관심이 없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남은 약속시간을 말한다. 그러자 키르비르는 인상을 구기며 나를 노려본다.
“이씨.. 너.. 진짜... 아무도 안오기만 해봐.. 진짜 아무도 안오기만해봐!!!”
발을 동동구르던 키르비르는 내 퉁명스러운 말에 발끈했는지 주변사람이 보던 뭐라 눈치를 주던 상업지구가 떠나가라 소리를 지른다. 그런 그녀의 태도에 나는 얼굴이 붉어져오는 것을 느끼지만 이내 그녀로부터 살짝 돌려 아무 관계도 아닌 척 관심을 끊어버린다.
띠딩~
그때 들려오는 경쾌한 소리. 내 핸드폰에 문자가 왔다는 소리였다. 그런 소리에 나는 반갑게 내 핸드폰을 들어 문자를 확인해본다.
-어디세요? 저 광장까지 왔는데...
문자를 확인한 나는 지금 내가 있는 위치에 대한 정보를 문자를 통해 다시 보내준다. 확실히 문자를 보냈다는 화면이 뜨자 나는 핸드폰을 접어 다시 호주머니에 넣는다.
“뭐야... 누구에게 문자보낸거야?”
“데이트 상대.”
그런 내 모습을 초조하게 바라보던 키르비르는 조심스럽게 문자를 보낸 상대에 대해 묻는다. 그러자 나는 심드렁한 태도로 그녀의 질문에 대답해줄 뿐이었다. 그런 내 대답에 마치 뭐라도 트집을 잡아보겠다고 나를 지긋이 노려보는 키르비르였지만 계속되는 그녀의 의심에 나는 그저 콧방귀를 뀌며 그녀로부터 고개를 돌린다.
“어? 저건?”
그때 뭔가를 발견한 듯 키르비르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녀는 광장 한쪽에서 달려오는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이!!”
“응?”
그녀의 외침과 동시에 나도 고개를 돌려 그녀가 바라보는 곳을 바라본다. 거기에는 그녀의 말대로 아기자한 목도리와 따듯한 코트를 입고 달려오는 네이가 있었다. 그런 그녀를 발견한 나는 손을 들어 그녀를 반겨준다.
“아.. 안녕하세요. 언니...”
하지만 우리들에게 달려온 네이는 뭔가 찝찝한 눈으로 내곁에 서있는 키르비르를 바라본다. 그런 네이와 다르게 이런 곳에서 예기치 못한 만남을 한 키르비르는 뭐가 그리 좋은지 추위로 빨개진 얼굴로 싱글싱글 웃으며 네이를 반겨주고 있다.
“뭐야~ 네이. 선물사려고 여기까지 온거야?”
“아.. 네... 저희 동네엔 좋은 걸 안팔더라구요.”
키르비르와 대화하며 네이는 은근슬쩍 곁눈짓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런 그녀의 시선에 나는 작게 한숨을 뱉으며 그저 난감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일 뿐이었다.
“잠깐 키르비르... 나 잠시 화장실좀 갔다 올게...”
나는 양해를 구하며 화장실을 갔다오겠다는 빌미로 자리를 피한다. 왠만하면 나를 놓아주지 않을 키르비르였지만 지금은 반가운 네이를 만나서 그런지 나 같은 건 신경도쓰지않고 가라고 손짓을 한다. 슬쩍 네이와 키르비르를 돌아보던 나는 핸드폰을 매만지며 광장 외곽으로 걸어간다.
띠링..
네이와 키르비르의 모습이 멀리서 희미하게 보일 무렾. 기다렸다는 듯이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자가 날라온다. 나는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열어 그 문자를 확인해본다.
-키르비르 언니는 왜있는거에요?
“.....”
역시나 키르비르에 대한 질문이었다. 다시금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답장을 보내기 위해 핸드폰을 두드려가기 시작한다.
-그 녀석이 의심하더라... 데이트 상대가 있을 리가 없다고.. 데이트 상대를 꼭 확인해봐야 한다고...
-그래도 이건... 그냥 저희끼리 몰래가요.
문자에서 네이가 얼마나 실망했는지 그녀의 감정이 가뜩 담겨져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곤란한 상황에 머리를 벅벅 긁은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멀리서 보이는 네이와 키르비르를 바라본다.
얇은 옷에 그저 코트하나만 달랑입고 나온 키르비르. 그녀는 네이와 이야기 하면서도 상당히 추운지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버리고 네이와 간다니..
“.....”
키르비르놈은 갑자기 사라진 나를 찾아 돌아다닐 것이 분명하다. 필요도 없이 고집만 쎈 저 망할 꼬마놈은 나를 찾아 이 추운 날씨에 넓은 상업지구를 돌아다닐 것이다. 잠시 고민하다 핸드폰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내가 알아서 할게...
“후우...”
그렇게 문자를 보낸 나는 다시 핸드폰을 주머니에 찔러넣는다. 그리고 크게 심호흡을 하며 다시 네이와 키르비르를 향해 걸어간다.
“일 다보고 온거야?”
내가 오자마자 키르비르는 눈을 빛내며 나를 노려본다. 어디한번 그 잘난 데이트 상대라는 것을 꺼내보라는 듯이. 그런 키르비르를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한다.
“오늘 일이 있어 못나온다고 하는데?”
“.....”
“.....”
내 말에 네이와 키르비르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나를 노려본다. 쓴웃음을 지은 나는 어께를 으쓱이며 어쩔 수 없다는 제스쳐를 취하지만...
퍼억!!
나에게 돌아온 것은 돌돌 뭉친 눈뭉치였다.
“어디서 약을 팔아!!!”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이런 추운날 이렇게 기다리게 해놓고 결과가 이런식이니 저렇게 화를 낼만하지. 나는 천천히 얼굴에 가득 묻은 눈덩어리들을 쓸어내리며 작게 한숨을 내쉰다.
“이렇게 됬으니 돌아가자.”
퍼억!!
눈덩어리를 닦아내니 기다렸다는 듯이 눈뭉치가 하나 더 던져진다.
“네이? 너는 왜...”
“아.. 그냥... 재미있어보여서요.”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웃고있는 네이의 입가가 씰룩거린다. 그런 네이에게도 할말이 없었던 나는 조용히 얼굴에 묻은 눈덩어리를 다시 닦아내며 키르비르의 손을 잡아 이끈다.
“자... 돌아가자.”
“아.. 으응.. 네이! 그럼 내일봐!”
내 손에 잡아 이끌려 거의 반강제적으로 걸음을 걷는 키르비르는 마지막까지 네이를 향해 잘가라고 손을 흔든다. 그런 키르비르를 이끌고 나는 버스정류정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나간다.
“아 추워... 진짜 이게 무슨 꼴이야!!”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에서 키르비르는 붉게 달아오른 자신의 손을 연신 비빈다.
“내가 왜 타메르 놈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해야하는데?”
코까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연신 투정을 부리는 키르비르를 나는 아무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에게 할 말을 많았다. 그냥 집에 처박혀있을 것이지 쓰잘데기 없는 의심으로 괜히 사서 고생을 하는지... 하지만 그런 것을 지금 그녀에게 말해봤자 말싸움밖에 되지 않을 것을 알고 있던 나는 그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 그렇지... 타메르 같은 녀석에게 애인이라고? 말도 안돼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실실 웃음을 흘리는 키르비르의 모습에 나는 그녀가 들리지 않게 작게 한숨을 내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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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역시 집이 최고야!”
그녀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집에 돌아오자 마자 냅다 소파로 달려가 온풍기를 틀며 이불을 몸에 돌돌 매는 키르비르를 바라본다. 그리고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네이에게 문자를 누르기 시작한다.
-곧 돌아갈게. 미안해. 조금만 기다려줘.
문자를 보낸 나는 초조하게 답장만을 기다린다. 그 사이에 키르비르는 몸이 녹자 못먹었던 저녁이 생각났는지 주방으로 쪼로로 달려간다. 그런 키르비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내 호주머니에서 경쾌한 문자알림이 울려퍼진다. 나는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열어 그 문자 내용을 확인한다.
-기다리고 있어요. 대신 저녁은 크게 쏴야해요?
-알았어. 정말 미안해.
네이의 문자를 받은 나는 씨익 미소지으며 답장을 보낸뒤 다시 호주머니에 핸드폰을 찔러넣는다. 일단 키르비르도 집에 돌려놓았겠다... 이제 다시 네이를 만나기 위해 나는 그녀들이 던진 눈으로 엉망이된 얼굴과 옷을 정리한다.
“짜잔~!”
그리고 다시 코트를 걸치려는 순간. 키르비르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무언가를 들고 주방에서 나온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고개를 돌려 키르비르를 바라본다.
“뭐야... 그건...”
키르비르가 자신만만하게 들고나온 쟁반에는 아기자기한 장식이 가득한 작은 케잌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케잌 위에는 어설픈 솜씨로 써진 해피 크리스마스라는 영어가 적혀있었다.
“헤헤.. 즐거운 크리스마스 이브잖아. 홀로 집안에서 보낼 타메르를 걱정하여 솜씨좀 부려봤어!”
쟁반을 들고 불안하게 걸음을 옮긴 키르비르는 소파 앞에 마련된 탁자에 조심스럽게 쟁반을 내려둔다. 그리고는 미리 준비한 듯 촛불 하나를 꺼내 케잌 한가운데에 찔러넣는다.
“보통... 케잌 만드는 사람들은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지않는데... 이거 어디서 산거냐?”
“수제거든요?!”
퍼억!
내 물음에 키르비르는 냅다 소파 옆에 마련된 쿠션을 던져버린다. 그녀가 던진 쿠션을 어렵지 않게 받아낸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녀가 가져온 케잌을 바라본다. 케잌 위의 장식도 하나하나 일관성없이 그저 맛있어 보이는 것만 잔뜩 쌓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거기다 케잌 위에 써진 크리스마스라는 영어또한 어설프게 삐뚤삐뚤하게 써져있었다.
“뭐... 이런 걸 만드냐...”
“이브잖아. 4년동안 널 봐왔어. 맨날 이브날마다 찌질하게 방에 처박혀서 궁시렁거리고 있는걸 봐줄 수가 있어야지.”
그녀는 조심스럽게 케잌위에 꽂힌 촛불에 불을 붙인다. 그러자 은은하고 따듯한 작은 불꽃이 우리가 있는 공간을 천천히 데워가기 시작한다.
“내가 이렇게 애써 준비해놨는데... 뭐? 데이트? 그런 시답지않은 거짓말로 도망가려고 했던거야?”
“.....”
그녀의 말에 나는 쓴웃음을 짓는다. 그녀가 만들었다는 케잌을 조용히 바라보던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키르비르를 바라봤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싱글싱글 웃고있는 키르비르. 하지만 나는 그녀 몰래 초조하게 핸드폰을 매만져나간다.
“일단... 이런 케잌까지 준비해준것. 정말 고마워.”
“흥! 나니까 이렇게 준비해주는 거야. 고맙게 생각하라고! 그리고 말이야...”
“잠깐만...”
나는 뭐라 말하려는 키르비르의 말을 끊는다. 그러자 키르비르는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말고 왜그러냐는 듯이 나를 바라본다. 그런 키르비르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은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나간다.
“나... 일이 좀 있어서. 나가봐야 할 것같은데?”
“일? 무슨 일!!”
역시나 버럭 소리를 지른다. 하지만 네이와의 약속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나는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태연하게 그녀에게 거짓말을 한다.
“친구가... 이브날 쓸쓸하자고 같이 술좀 마시자고 해서...”
“너.. 너에게 그런 친구가 있을 리가 없...”
얼마나 화가 났으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에게 삿대질까지 하려는 키르비르. 하지만 그녀는 갑작스레 몸을 우뚝 멈추며 하려던 말을 멈추고 입을 꾹 다문다. 그리고 바들바들 떨며 나를 노려보던 그녀는 이내 팔짱을 끼며 소파에 털썩 걸터앉아버린다.
“마음대로해!!!”
“....”
이젠 꼴도 보기 싫다는 듯이 고개를 완전 획 돌려버리는 키르비르였다. 그런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던 나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는 생각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미안... 돌아올때 선물 사올게..”
“필요없거든!!”
퍼억!
다시한번 소파의 쿠션이 날라온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는 그런 쿠션을 피하거나 막지않고 그저 순순히 맞아줄뿐이었다. 여전히 팔짱을 낀채 소파에 앉아있는 키르비르를 바라보던 나는 천천히 그녀로부터 등을 돌린다. 그런 내 시선에 그녀가 만든 케잌이 눈에 걸렸지만... 이내 그런 케잌을 애써외면하며 현관을 향해 걸음을 옮겨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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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시 34분.
시간을 확인한 나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간다. 불이 전부 꺼져있는 집안. 아마도 잠이 든 것일까.
“....”
나는 오른손에 들려있는 작은 비닐봉지를 바라본다. 그녀에게 사죄한답시고 나름대로 선물이랍시고 준비한 물건이었다. 네이와 같이 저녁을 먹었던 아웃백에서 포장구입한 크리스마스 한정판매스테이크였다. 키르비르가 좋아할 지는 모르겠지만..
끼이익..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어간다. 어두운 집안에서 보이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조심스럽게 그런 집안으로 걸음을 옮겨나간 나는 벽을 더듬어 전등스위치를 켠다.
“키르비르?”
그리고 환해진 집안 거실에서 보인 것은 내가 나갈 때 그 모습 그대로 소파에 쪼그려앉아있는 키르비르였다. 그녀는 반쯤 감긴 눈으로 그저 조용히 케잌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도착하자 키르비르는 살짝 눈동자를 굴려 나를 바라보며 힘없는 목소리로 묻는다.
“데이트 재미있었어?”
“아.. 으응. 그럭저...읍!”
그녀의 질문에 거의 반사적으로 대답한 나는 황급히 내 말실수를 깨닫고 입을 다문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하지만 키르비르는 이미 다 알고있었다는 그다지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너... 계속 이러고 있었던거야?”
“내가 뭘 하든 뭔상관이래?”
그녀를 걱정하는 내 물음에 대한 대답은 그저 차갑고 싸늘한 한마디 뿐이었다. 그런 키르비르를 내려보던 나는 이미 초가 끝까지 녹아버려 사라져버린 케잌을 돌아본다. 이미 케잌은 녹아내려 눌러붙은 초 때문에 먹기 힘들어보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내가 가져온 비닐봉지를 탁자위에 올려둔다.
“저녁먹었어?”
“....”
내 물음엔 이제 대답도 하지 않는다. 그녀는 슬쩍 눈동자를 굴려 내가 놓은 비닐봉지를 보다가 이내 관심을 끊고 다시 시선을 돌려 자신의 케잌을 응시할 뿐이었다.
“어땠어?”
“뭐.. 뭐가?”
나는 애써 모른척 뭘 물어보냐는 듯이 되물으며 그녀의 옆에 마련된 소파에 걸터앉는다. 그러자 키르비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사귀는거야?”
“그런거 아니야... 그냥 뭐... 간단히 저녁만 같이한거야.”
이미 숨길 수 없다는 사실에 나는 그냥 데이트했다는 것을 인정하며 대답한다.
“사귈 맘은 있어?”
“....”
하지만 곧이어진 그녀의 질문엔 대답할 수 없었다. 조용히 침묵을 지키는 내 모습을 슬쩍 바라보던 키르비르는 천천히 팔장을 풀고 몸을 일으키며 나를 바라본다.
“일단 사귀지 않는거지?”
“뭐 일단 그런 셈이지.”
자리에서 일어난 키르비르는 뭔가 큰 결심을 했는지 성큼성큼 내앞으로 걸어온다. 그런 그녀의 박력에 움찔한 나는 한 대라도 맞아줄 생각으로 각오하며 마른침을 삼킨다. 내앞으로 다가온 키르비르는 자신보다 키가 큰 나를 올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연다.
“나랑 사귀자.”
“....뭐?”
너무나도 어이없는 그녀의 말에 나는 어이없는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본다. 하지만 키르비르는 자신이 한 말을 철회할 생각도 없는지 단단한 결심을 한듯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랑 사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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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삐삐...
크리스마스다. 산타가 찾아오는 즐거운 크리스마스 날인데도 불구하고 알람은 여느때처럼 요란하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게슴치레한 눈으로 천천히 눈을 뜬 나는 어김없이 손을 뻗어 탁자위에 올려둔 알람시계를 끈다.
“아... 크리스마스.”
침대위에 벌렁 누운채 나는 눈이 쌓인 도시를 바라본다. 눈을 꿈벅거리며 그런 도시를 바라보던 나는 천천히 침상에서 몸을 일으킨다. 한숨자면 괜찮아 질 거라 생각했지만 아직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고개를 두어번 좌우로 턴 나는 잠옷차림으로 밖으로 나온다.
“메리 크리스마스~!”
나오자마자 나를 반겨주는 것은 역시나 그놈이었다. 키르비르. 평일에는 그렇게 신나게 늦잠을 자면서 휴일이나 주말에는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는 그녀는 소파에 앉아 크리스마스 특선채널을 찾아보며 키득거리던 녀석은 내가 나오자 나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낸다.
“아침밥은 간단하게~ 토스트는 사양할께!”
“너... 어젯밤 무슨 일을 했는진 기억이나 하냐?”
어이없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며 나는 그녀가 앉아있는 소파 옆자리에 걸터앉는다. 그러자 키르비르는 TV를 보고 웃음을 터트리며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말한다.
“내가 고백했잖아.”
“....”
“그리고 넌 받아줬고.”
“제대로 전부 기억하네.”
나는 슬쩍 그녀를 돌아본다. 어젯밤 그녀의 말대로 어이없게 그녀의 고백을 받아들이기는 했다. 하지만 뭐랄까...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 것같은 느낌이었다.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척 TV를 보며 키득거리던 키르비르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나를 돌아본다.
“내가 널 위해 아침상이라도 차려주는 것 같은걸 기대한거야?”
“아니 뭐... 그런 것은 애초에 기대도 안하지만...”
내 대답에 키르비르는 피식 웃는다. 그리고는 TV를 바라보며 지나가는 듯한 어투로 말한다.
“저녁에 시간있지?”
“뭐...?”
“첫 데이트나 하자고.”
“.....”
TV를 바라보는 키르비르는 싱글싱글 웃고있었다. 난데없는 그녀로부터의 데이트 신청에 나는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그녀를 쫓아 같이 TV를 바라본다. 하지만 TV에서 나오는 것은 아주 식상한 뉴스일뿐이었다.
“뭐... 그러자.”
내 대답에 지루한 뉴스를 바라보는 키르비르의 입가의 미소가 더욱 짙어진다.
========== 작품 후기 ==========
써두고 썩히기는 아까워서 올리는 크리스마스 특별편.
시작은 아주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후반에 가서는 흐지부지흐지부지흐지부지..
....
반성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