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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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와의 결혼약속. 잠시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힐겸 밖으로 걸어나온 나는 아직도 들뜬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녀와의 결혼이 나와 상당히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애시당초 그녀와의 결혼은 염두에 두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막상 그녀가 내 아이를 임신했다는 소리를 들으니... 이건 피하거나 도망칠 수 없다는 운명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왠지 약간의 기대감과 설렘을 가슴에 안은채로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일단 주례는... 리엔에게 부탁하면 되겠고... 하객은 별로 없겠네. 뭐... 그것도 나름대로 나쁘지 않으려나.”
이미 내 머릿속에는 네이와의 결혼으로 온갖 기분좋은 상상이 떠오르고 있었다. 솔직히 네이면 내 남은 평생을 같이해도 불만이 없을 정도로 좋은 배우자였다. 착하고 순진한 거짓을 모르는 성격. 그리고 나에게 순종적인 태도. 비록 이종족이라는게 문제였지만 그런 문제는 나와 그녀가 가지는 마음가짐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아. 타메르씨!”
복도를 걷는 내 눈앞에 딱 좋게 리엔이 가벼운 인사를 건낸다. 그녀는 이제 점심을 준비하려는 듯 앞치마를 차려입고 식당으로 가는 길 같았다.
“아... 리엔.”
“타메르씨. 네이에게 이야기는 들으셨죠?”
역시나 리엔은 네이가 가진 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그런 그녀의 물음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하며 그녀에게 자신만만하게 나와 네이의 결혼사실을 전하려했다. 하지만...
“어떻게 하실거에요?”
리엔은 그 어느때보다 심각한 표정으로 나에게 묻는다.
“어떻게 하자니? 무슨 문제라도 있나?”
“당연히 문제가 있죠!!”
내 물음에 리엔은 살짝 흥분하며 그녀답지 않게 소리를 지른다. 그런 그녀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던 나는 가볍게 이마를 찡그리며 그녀를 노려본다.
“도데체 뭐가 문제라는거야?”
“네이씨의 몸에 타메르씨의 피가 흐른다구요. 이게 문제가 아니면 뭐에요?!”
“너... 네이가 내 아이를 갖는 것에 대해 무슨 불만이라도...”
“아이요?!”
리엔은 내 말허리를 끊으며 휘둥그레진 눈으로 소리를 지른다. 그리고는 두통이 오는듯 자신의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작게 신음을 흘린다.
“아아... 네이씨. 제 말을 그렇게 해석했네요...”
“도데체... 무슨 말이야?”
작게 한숨을 내쉰 리엔은 조금은 침착해진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연다.
“지금 네이씨는 타메르씨의 아이를 가진게 아니에요. 상식적으로 불가능하잖아요. 서로 전혀다른 종족인데...”
“그렇다면... 내 피가 흐른다는 것은 무슨뜻인데.”
잠시 나를 바라보던 리엔은 자신이 알아낸 사실에 대해 조심스럽게 말하기 시작한다.
“말 그대로에요. 네이씨의 몸안에는 타메르씨의 피가 흐르고 있어요. 광혈의 저주를 받은 피가.”
“설마...”
그때 내 머릿속으로 스쳐지나가는 하나의 사건. 그건 바로 내가 네이와 싸웠을때의 기억이었다. 광혈의 저주로 인해 이성을 잃은 나는 네이를 빈사사태까지 만들었고 나는 그녀를 살리기 위해 내 몸에 담긴 광혈의 저주를 받은 피를 그녀에게 수혈해줬다.
“하지만 그건... 내 몸을 벗어나면 자연스럽게 타인의 몸에 흡수된어 분해된단 말이야. 아무런 문제가...”
“과연 타메르씨의 몸에서 벗어났을까요?”
“.....”
의미심장한 리엔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문다.
“중앙도서관의 서적중 몇 개는 광혈의 저주에 대해 쓰여져있었어요. 거기선 광혈의 저주를 하나의 인격체로 표현하더라구요. 즉 생물처럼 살아남으려는 욕구가 있다는거죠.”
“그럼... 네 말뜻은 네이의 몸에 흡수된 광혈의 저주가 분해되어 사라지지 않으려고했다는거냐?”
나는 말도안되는 허왕된 이야기에 어이없어하면서 그녀에게 묻는다. 하지만 리엔은 오히려 내 말에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하는 것으로 나를 더욱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그때 이후... 네이씨의 변화를 못느꼈나요?”
“네이의 변화...”
그러고보니... 그때 이후였다. 그 일이 있은 이후 네이는 비 이상적으로 나에게 큰 호감을 표했고... 그 호감은 지금에 와서는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변해있었다. 나는 그 호감을 싸움에서 패배한 네이의 단순한 호승심이라 생각해왔었다.
“아마... 타메르씨. 네이씨와 관계를 많이 맺었죠?”
“그.. 랬지.”
“그 관계가... 네이씨의 몸에 흡수된 광혈의 저주의 생명줄이었던 거에요.”
“말도안돼!!”
나는 리엔의 주장에 격한 부정을 표한다. 하지만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심장이 떨릴 만한 불안감은 그녀의 말이 어느정도 신빙성이 있었기 떄문이다.
“그.. 그렇다면... 네이가 조종당했다는거야?! 그녀의 몸에 흡수된 내 피에 의해?!”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네요.”
리엔은 씁쓸하지만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다는 듯이 힘겹게 내 물음에 대답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부터에요. 그 피의 힘이 너무 강해졌어요. 네이씨의 몸에 담겨있던 광혈의 저주의 피가 소멸되기는 커녕 오히려 지금은 네이의 몸에 적응하여 성장하고 있다는거에요.”
“뭐야... 그러면... 나보고 어쩌라는건데?!”
“지금도 늦지 않았어요.”
리엔은 조용히 나를 바라보며 해결책에 대해 말한다.
“네이와 관계를 끊으세요.”
“...거짓말.”
허망한 내 중얼거림에 리엔은 고개를 가로젖는다.
“이제는 너무 위험해요. 같이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네이의 몸에 흘러들어간 광혈의 저주의 피가 성장할 이유가 될꺼에요.”
“만약... 그 피가 네이의 몸을 점령하면 어떻게 되는데?”
나는 마지막 희망삼아 최악의 경우에 대해 묻는다. 그러자 리엔은 씁쓸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아주 평범한... 광혈의 저주의 희생자가 되겠죠. 이성을 잃고 힘에 미쳐 날뛰다가... 결국에는 그 힘을 견디지 못한 몸이 붕괴될거에요.”
“.....”
나는 아무말없이 얼굴을 문지른다. 네이와의 관계를 끊으라고하다니. 그것도 왜 하필이면 지금 리엔을 만나버린걸까. 네이를 만나기전 리엔을 만났더라면... 어떻게라든 네이의 상세한 상황에 대해 알 수 있었다면...
“네이와... 결혼을 약속했단 말이야.”
“.....”
내 말에 리엔은 입을 다문다. 그녀또한 적잖은 충격이었는 듯 딱딱히 굳은 리엔의 표정은 풀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잠시 나를 내려보던 리엔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간다.
“솔직하게 말하는 수밖에 없어요.”
“.....”
리엔의 조언에 나는 허망한 눈으로 땅을 내려본다. 솔직하게 말한다라. 언젠간 책에서 읽은적이 있었다. 진실은 잔혹한 것이라고... 만약 네이에게 아이가 가진게 아니라 진짜 내피가 흘러 너에게 위험한 거라고. 그리고 그 때문에 나와 그녀가 거리를 벌려야한다고 말해주면 어떻게 될까.
마치 천국을 노닐듯이 행복한 네이의 기분이 당장에 지옥 밑바닥까지 메다 꽂힐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극과 극의 상황이 있을까...
“얼마나... 거리를 두고 있어야하지?”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리엔에게 네이와 헤어져있어야하는 기간에 대해묻는다. 그런 나의 질문에 리엔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간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네요.”
그녀의 불확실한 대답에 나는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내뱉는다. 어떻게 해야할지 도통 감이 서지가 않는다.
“...키르비르.”
그때 내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한명의 만능 해결사. 키르비르. 그녀가 있었다. 내 중얼거림을 들은 리엔조차도 그건 생각못했다는 듯이 눈을 휘둥그레뜬다.
“아... 키르비르님이라면!!”
그제서야 희망을 찾은 나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다듬는다.
“일단... 키르비르에게 말해서 해결책을 찾아볼테니까. 네이에게는 이 일에 대해서 비밀로해줘.”
“숨기는 것으로 괜찮을까요?”
리엔의 물음에 나는 잠시 주저한다. 하지만 왠지 두려웠다. 그렇게 행복해하는 네이의 모습을 무너뜨린다는 것이.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리엔을 마주바라보며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일단 숨겨줘.”
“알았어요.”
결국 리엔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내 부탁에 응한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앞치마를 고쳐맨 그녀는 부엌을 향해 몸을 돌리며 말한다.
“그래도 일단... 점심은 드시고 가세요. 키르비르님 몫도 챙길테니까 탑에 올라가실 때 같이 가져가시구요.”
“알았어.”
지금 느긋하게 점심까지 챙겨먹을 여럭은 없었지만... 키르비르의 몫이라는 리엔의 말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점심은 먹고 움직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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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비르님은요?”
점심을 먹기위해 모두가 주방에 모였을때 튀어나온 네이의 질문이었다.
“탑으로 돌아갔어.”
“혼자서?!”
내 대답에 네이는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되묻는다. 하지만 나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리엔이 식탁위에 차려준 음식들을 각자의 앞으로 끌어다주며 대답한다.
“그래서 내가 키르비르를 만나고 온다고 나갔다 온거잖아.”
“아...”
그제서야 네이는 안도했다는 듯이 작게 탄성을 내지른다. 그리고는 뭔가 죄책감이 서린 얼굴로 조심스럽게 자신의 앞에 놓여진 식사를 야금야금 먹어가기 시작한다.
“괜히 미안해하지마. 너 대신 내가 녀석을 챙겨줬으니까...”
“내가 했어야하는 일인데... 미안해.”
나는 리엔이 차려준 음식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에 앉아 자신의 몫의 음식을 먹어가는 네이를 흘끗 바라본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그녀의 입가에 지어진 미묘한 미소는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네이의 모습이 오히려 내 가슴을 무겁게 짓누른다.
스윽..
그런 내 시선을 의식했던 걸까. 나를 흘끗 돌아보며 네이는 생긋이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는 리엔과 이리엘이 보이지 않도록 식탁밑으로 손을 집어넣어 내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쥔다.
“....”
나또한 아무말없이 그런 그녀의 손을 같이 마주 잡아쥐어준다. 하지만 그 순간 머릿속으로 스쳐지나가는 리엔과의 이야기. 그녀의 이런 행동 하나하나가 광혈의 저주의 영향이라면... 그 힘에 조종되어 나를 사랑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거라면...
“응? 타메르. 긴장했어? 손이 축축한데...”
“아..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네이의 속삭임에 움찔 놀란 나는 허겁지겁 바지자락에 내 젓은 손을 문질러 물기를 지워낸다. 그리고는 네이를 돌아보자 네이는 재미있다는 듯이 쿡쿡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저런 네이의 모습이 모두 거짓이였다면... 심지어 나를 사랑한 것 자체가 거짓이라면...
“타메르씨. 너무 많은 것을 고민하지 마세요.”
점점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나를 구해준 것은 리엔의 한마디였다. 그런 그녀의 한마디에 퍼뜩 놀란 나는 리엔을 돌아본다
“하나하나 차근차근 풀어나가면 돼요.”
“그.. 그렇지...?”
“무슨 이야기인데?”
나와 리엔의 의미심장한 대화에 네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끼어든다. 그런 네이의 귀에 조용히 속삭인다.
“결혼식 이야기야.”
“아~!”
그제서야 네이는 감탄이 섞인 탄성을 내지른다. 그리고 완전 감동했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는 네이. 하지만 그런 네이를 바라보는 리엔의 눈에는 씁쓸한 감정이 한껏 묻어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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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엔은 나에게 귀엽게 포장한 하나의 도시락통을 건낸다.
“이건 키르비르님 몫이에요.”
“언제나 신세만 지는군.”
리엔이 건낸 도시락통을 받아든 나는 아직도 그녀의 따듯한 온기가 묻어있는 도시락통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어떻게든 키르비르님이라면 좋은 해결책을 가지고 있을꺼에요.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갔다오세요.”
“알았어. 그럼 갔다올게.”
리엔이 건내준 도시락통을 한손에 들고 나는 키르비르의 탑을 오르기 시작한다. 키르비르. 그녀라면 네이를 도와줄 해결책을 가지고 있기를 기대하면서...
========== 작품 후기 ==========
Solar Eclipse / 엌ㅋㅋ 가끔씩 이렇게 오글거려야 제맛!
실버링나이트 / 하렘이죠. 이런 소설의 주인공은 결혼이 허락되지 않앙!!
폭력만세 / 그럴수도... 아닐수도 있다구 했쬬?
타카요 / 죄송하지만 전 반대일세.
누님이조아 / 으허허헛! 로리를 버릴수야 없죠. 아직 이리엘도 있고 등장하지 않은 로리도 있는데!!
믹시아 / 아... 할말이 읍습니다. 그저 죄송할뿐...
Lizad / 이걸노렸죠.
래미너스 /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
이제 칼자루는 키르비르에게.
......
하지만 이 글의 소제목을 본다면...
으음....
좋게끝날것같지 않죠?
데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