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터스의 하인-90화 (90/298)

90편

<-- 이리엘 -->

“후우.. 후우..”

높기는 지랄나게 높았다. 망할 탑. 박살내버리던가 해야지... 하늘을 붕붕 날아다니는 키르비르에게는 별 어려움이 없지만 땅에 걸어다니는 나에게는 이만큼 끔찍한 지옥이 따로없었다. 단지 탑을 올라온 것 하나만으로 짜증과 피로가 차오른 나는 크게 심호흡하여 숨을 가다듬은뒤 키르비르의 방문을 천천히 밀어 열어간다.

“....아.”

그리고 내눈에 보이는 것은 끔찍하리만큼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그녀의 방. 방 한쪽을 장식 하던 거대한 책장은 넘어져있었고 바닥에는 수많은 책들과 집기들이 널부러져있었다. 그리고 그 방 한가운데에서 한손에는 먼지털이개를 들고 마스크를 쓴채 멍하니 그 방에 서있는 갈색머리카락의 소년. 이리엘.

내가 들어오자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눈이 희망으로 반짝반짝 빛난다. 만난지 처음으로 보이는 녀석의 확실한 감정표현이었다. 그런 녀석의 기대가 가득찬 눈빛을 마주하며 쓴웃음을 지은 나는 창가를 향해 시선을 돌린다.

“이게... 뭐냐?”

창가에 걸터앉아있는 것은 다름아닌 키르비르. 그녀는 이 먼지구덩이의 방에 발조차 딛기 싫다는 듯이 창가에 걸터앉하 하늘을 바라보며 발을 까닥거리고 있었다.

“아~ 이거?”

내 물음에 그녀는 나를 돌아보며 싱긋이 웃는다.

“방금전 저 빌어먹을 비공정이 들이박은 충격으로... 탐이 살짝 흔들렸어. 하지만 그런 탑 꼭대기에 있는 내 방은 엄청 흔들렸지. 그 쉐이킹의 결과야.”

그러니까... 결론은 저 비공정이 충돌한 여파로 방이 엉망이 되었다는건가?

“뭐... 이런일이 있을 줄은 몰라서 가구를 벽에 고정시키지 않았었거든. 하지만 뭐.. 청소부를 찾았으니 이제 괜찮아.”

키르비르의 말에 나는 방한가운데에서 먼지털이개를 꽉 붙잡고 어쩔줄모른채 서있는 이리엘을 바라본다. 그러자 녀석또한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나를 돌아보며 도와달라는 눈빛신호를 보낸다.

“뭐해? 청소해! 깔끔하게! 먼지 한톨이라도 나왔다가는...”

이리엘이 나에게 한눈을 팔자 기다렸다는 듯이 키르비르는 날카롭게 이리엘을 쨰려보며 명령한다. 그러자 이리엘의 어꼐가 살짝 움츠려들며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낯선 먼지털이개를 바라본다. 마치 어떻게 사용할지 모른다는 눈빛. 이리저리 만져보다 이리엘은 살짝 자신의 입가에 씌워진 마스크를 벗고 먼지털이개의 머리부분에 얼굴을 가져다 데고 냄새를 맡는 한심한짓을 저지른다.

“....콜록!!”

“하아...”

그런 이리엘의 멍청한 행동에 키르비르는 어이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쉰다.

“콜록 콜록!! 켈록!!”

격하게 기침을 하느라 바둥거리는 이리엘. 그와동시에 먼지털이개가 휘둘러지며 주변에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자신의 입가에 씌워진 마스크의 용도를 모르는지 그 마스크를 다시 쓰려하지 않고 양팔을 바동거리며 피어오르는 먼지들을 날려버리려고 안간힘을 쓰는 이리엘. 하지만 먼지가 날라간만큼 다시 새로운 먼지가 떠오르며 그녀의 기침을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타메르?”

그런 이리엘을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키르비르는 가볍게 손을 휘저어 마법으로 바람을 일으켜 자신에게만 오는 먼지를 날려버리며 나를 부른다.

“아아~ 난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나가볼게. 수고해!”

그녀의 부름에 뭔가 불안함을 느낀 나는 황급히 자리를 빠져나가려한다. 하지만 키르비르가 다시 가볍게 손을 휘젓자 나가려는 문이 갑작스레 닫혀버린다.

“이리엘 혼자서는 힘들어보이지 않아? 너가 녀석을 보호해준만큼... 조금 거들어주지?”

나를 바라보는 키르비르의 입가에 지어진 진한 미소. 아아. 거부할 수 없는 미소다. 만약 자신의 말을 안듣는다면 혈풍을 부르는 보복이 이어질 것을 예고하는 미소. 나는 할 수 없이 꺼레르 축 늘어뜨리고 고개를 끄덕인다.

“에이... 기분상해하지 말라고. 어자피 널 부를 생각이었으니까.”

그런 나를 놀리듯이 키르비르는 키득거리며 바닥에 쓰러져버린 커다란 책장을 가리키며 말한다.

“저런 커다란 것을 저런 꼬마가 들어올릴 수는 없잖아?”

누가 누구를 보고 꼬마라고 하는건지 참... 둘다 키는 비슷비슷해가지고.. 뭐 솔직히 따지면 키르비르쪽이 아주 미세하게 크다. 하지만 진짜 말그대로 미세하게 큰것일뿐. 내가 보기엔 둘다 꼬맹이다.

“알았어. 하면되잖아. 하면...”

가볍게 투덜거리며 아직도 방 한가운데에서 파닥거리고 있는 이리엘에게 다가가 녀석의 마스크를 다시 제대로 씌워준다. 그러자 호흡하는 것이 한결 편해진듯 이리엘은 살짝 눈물이 고여있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일단... 바닥에 떨어진 집기부터 다 치운다음. 먼지를 털어내는게 좋겠군.”

대충 방을 크게 둘러보며 어떻게 청소할건지 감을 잡은 나는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책이나 장식물 따위를 주우려한다.

파악!

그때 갑작스레 내 얼굴에 새하얀 물건이 날아와 내 시야를 가로막는다.

“뭐야... 이건.”

나는 내 시야를 가로막는 물건을 떼어내며 그 물건을 확인해본다. 그것은 이리엘이 쓰고있는 것과 비슷한 새하얀 마스크.

“먼지를 들이마시면 건강에 좋지않아. 그거라도 쓰고 해.”

키르비르는 그말만을 남긴채 창가에서 밖으로 폴짝 뛰어내려버린다.

“젠장...”

마스크를 챙겨줬다는 사실에 고마움도 있을 법했지만... 갑작스레 이런 피곤한 일을 해야한다는 짜증이 앞서나간 나는 살짝 욕을 내뱉으며 그녀가 던져준 마스크를 얼굴에 써나간다. 그리고 벌써부터 먼지로 더러워진 내 손을 바라보다 내 옆에 멍하니 서있는 이리엘에게 시선을 돌린다.

“.....”

녀석또한 아무말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동변상련이라는 기분을 느낀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잘 부탁한다.”

일단 이리엘에게 잘부탁한다는 한마디와 함께 나와 이리엘은 힘을 합쳐 키르비르의 방을 천천히 청소해나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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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둘.. 셋!!”

쿠우웅!!

나와 이리엘은 힘을 합쳐 바닥에 넘어져있던 커다란 책장을 들어올린다.

“후우...”

간신히 책장을 되돌려놓은 나는 가볍게 한숨을 몰아쉬며 한쪽에 정리해둔 수많은 책들을 바라본다.

“하아.. 하아..”

나와 달리 이리엘은 상당히 힘들었떤 걸까. 녀석은 식은땀까지 흘리며 벌개진 얼굴로 크게 헐떡이고 있었다.

“수고했어. 넌 좀 쉬고있어라.”

이걸로 힘쓸일은 거의다 끝났다. 이제 마지막남은 것은 제자리로 돌려둔 책장에 책들을 정리하는 일뿐. 지금까지 한 일에 비하면 별것 아닌 일이었다.

“하아.. 하아..”

하지만 이리엘은 숨이차서 말도 못하면서도 나를 쫓아 책이 잔뜩 쌓인 곳으로 걸어간다. 쓰잘데기없이 부지런한 녀석. 청소하면서 단 한번의 게으름이나 불평조차 하지 않는 녀석이었다. 마치 명령만을 수행하는 기계같은 면이 좀 특이했지만 그래도 싫지 않은 녀석이었다. 나는 나를 도와 책을 정리하려는 그녀를 제지하며 말한다.

“어자피 책의 위치도 잘 모르잖아? 이건 나에게 맡겨. 또 키르비르에게 한소리 듣기 싫다면 말이지.”

솔직히 책의 위치는 나또한 잘 알고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고집센 이리엘은 어떻게든 나를 도우려하겠지. 자신이 분명히 도움이 안된다는 사실을 인지시켜야 녀석이 가만히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응.”

결국 이리엘은 마지못해 자그마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물쭈물거리며 나를 바라보며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이리엘. 쉬라고 해도 제대로 쉬지도 못하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쓴웃음을 짓는다.

“자. 여기 우선 앉아. 그리고 숨돌리면서 쉬라고.”

나는 그런 녀석을 위해 애써 한쪽에 정리해둔 의자를 하나 끌고와 녀석을 억지로 앉힌다. 그리고 별것 아니라는 듯이 느긋하고 여유롭게 책장을 정리해나가기 시작한다.

“우선...”

텅빈 책장. 그리고 산처럼 쌓여있는 책. 어떻게 정리해야 될지 잠깐 고민하던 나는 마땅한 방법을 찾아내지 못한다. 결국 나는 일단 손에 집히는 대로 책장에 책을 구겨넣기 시작했다.

“동작 그만.”

그때 들려오는 키르비르의 목소리. 찔리는게 있던 나는 화들짝 놀라며 손에 쥐고 있던 책을 떨어뜨려버린다. 하지만 책이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 키르비르의 힘에 의해서 허공에 정지된다.

쉬익!

그리고 나에게 날라오는 괴물체. 나는 깜짝 놀라며 황급히 나를 향해 던져진 물체를 낙아챈다.

“이건..”

조그만 유리병. 어디서든 흔히 볼수 있는 유리병이었다. 그런 유리병 안에는 약간의 기포가 뽀글거리는 샛노란 투명한 액채가 가득차 있었다.

“아...”

이리엘또한 자신에게 가볍게 던져진 유리병을 어렵지않게 양손으로 받아낸다.

“마셔.”

어느새 자신의 스텝을 타고 창가로 되돌아온 키르비르는 명령조의 목소리로 나에게 말한다. 그런 그녀의 말에 나는 그녀와 내 손에 쥐어진 유리병을 번갈아 돌아본다.

“이게... 뭔데?”

우선 의심하고본다. 일단 키르비르가 만들었다는 점에서 신뢰가 가지 않았다. 짗궂은 그녀의 성격상 뭔가 질나쁜 장난을 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었다.

“키르비르 특제 생과일음료.”

“....”

좋다. 생과일음료.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생과일음료라는 단어 앞에 붙는 키르비르 특제. 나는 불안감에 가득한 눈으로 뽀글거리는 기포가 올라오는 액체가 담긴 유리병을 바라본다. 아마 사과? 그와 비슷한 쥬스임이 분명했지만... 생과일쥬스에 기포가 이렇게 많이 일어났나?

“...마셔.”

내가 주저하자 키르비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노려보며 다시금 명령한다.

“....”

포옹..

결국 거의 협박조의 키르비르의 말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유리병을 막고 있는 뚜껑을 열어버린다. 그러자 뚜껑이 열리는 청명한 소리와 함께 역시나 상큼한 사과향이 달콤하게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일단... 향으로는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꿀꺽..

“응?”

내가 유리병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고민에 빠져있을 때 옆에서 멍하니 유리병을 바라보던 이리엘은 주저없이 입가에 유리병을 가져다데고 병을 기울인다.

꿀꺽.. 꿀꺽..

얼마있지 않아 유리병에 담겨진 샛노란 과일쥬스가 남김없이 이리엘의 목을 타고 흘러들어간다.

“하아..”

그리고 터져나오는 자그마한 한숨. 괴롭다기보다 만족스러움이 느껴지는 작은 한숨이었다.

“...”

하지만 나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소년의 모습을 관찰한다. 분명 키르비르 특제 음료. 뭔가 이상한 수작을 부려놨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특별한 변화는 없었다. 이리엘은 내가 뚫어지듯 자신을 바라보자 그런 내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살짝 고개를 돌려 내 시선을 피해나간다.

“마실래? 아님 죽을래?”

“헛?!”

어느새 내 코앞까지 다가온 키르비르는 아주 다정한 목소리로 내 생사 결정여부에 대해 묻는다. 그런 그녀의 협박에 나는 나도모르게 마시겠다는 듯이 유리병을 내 입가로 가져가나. 그리고 주저하기를 몇초. 눈을 질끈 감은 나는 유리병을 크게 기울인다.

꿀꺽.

그러자 상큼한 사과향이 가득한 액체가 내 입으로 들어와 입안 가득히 진한 사과향을 남긴채 목 넘어로 흘러들어간다.

꿀꺽.

“푸하아..”

간단하게 한병을 비워버린 나는 텅빈 유리병을 바라보며 천천히 내 감각을 곤두세워 내 몸의 변화를 확인해갔다.

“.....”

하지만 특별한 변화는 감지되지 않는다. 독극물이나 환각제, 수면제. 최악의 경우 최음제의 가능성도 있었지만... 놀랍게도 약간 긴장한 것을 제외하면 내 신체는 지극히 정상이었다.

“뭐... 뭐야...”

나는 약간의 안도감과 함께 혼란스럽다는 눈으로 키르비르를 바라본다. 그러자 키르비르는 그런 내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이 생글생글 웃으며 입을 연다.

“자~ 그럼... 맛이 어땠어?”

“...뭐?”

맛? 맛이라... 예기치 못한 질문에 살짝 당황했지만... 입안 가득히 퍼진 사과향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었다. 하지만 키르비르가 이렇게 쉬운 문제를 낼 리가 없었다. 사과향이랑 비슷한 다른 과일인가?

“그.. 사.. 사과맛?”

나는 불안해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내 생각을 밝혀본다.

끄덕.

그러자 놀랍게도 키르비르의 자그마한 머리가 나를 향해 끄덕여준다. 정답인 것이다.

“그리고! 또. 또하나 있잖아!!”

“...또?!”

두 개의 과일인가? 두 개의 과일을 섞어만든 쥬스였던 것인가... 낭패다. 너무 긴장한 덕분에 맛을 제대로 느낄 틈도 없을뿐더러 사과향이 강해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오직 사과맛밖에 없었다.

“에.. 그.. 그게 말이지..”

나는 떠듬거리며 최대한 머리를 굴려 또다른 하나의 과일을 알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그것을 조용히 기다려줄 마음이 넓은 키르비르가 아니었다.

“뭐야? 모르는거야? 설마.. 이 키르비르님이 손수 만든 음료를... 아무 생각없이 들이킨것은 아니겠지?”

콰직..

그녀가 움켜쥔 스텝에서 내 생명을 위협하는 섬찟한 소리가 울려퍼진다. 허공에 시원하게 스텝을 붕붕 휘두르며 나에게 다가오는 키르비르. 그런 스텝에서 일어나는 광풍은 나를 시원하게 만들어주다 못해 섬찟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 그게 말이지.. 그.. 그..”

생각해라.. 생각해라.. 뭘까. 사과와 잘어울리는 과일? 하지만 반대되지않고 상큼한 사과향과 맛이 비슷한 또다른 과일. 최소한 찍어야한다.

“후후훗~”

내 앞까지 다가온 키르비르는 자신의 스텝을 양손으로 말아쥐고 마치 야구타자 선수처럼 허공에 스텝을 빙글빙글 돌리며 스윙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 입에서 잘못된 대답이 나오는 순간 그녀의 스텝은 마치 홈런성 타구를 치는 것과 비슷하게 내 몸을 후려칠 것이 분명했다.

“파인애플.”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오직 끔찍한 응징만이 기다리는 긴장된 순간. 나를 구해주는 자그마한 목소리.

“...아?”

그러자 허공에 빙글빙글 돌던 스텝이 멈춘다.

“파인애플. 사과와 파인애플.”

나를 구원해준 사람. 그것은 다름아닌 이리엘. 녀석은 자신의 답이 맞다는 것을 확신하듯 흔들림 없는 눈으로 조용히 키르비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칫.”

결국 키르비르의 입에서 안타깝다는 듯이 혀가 차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마도 정답이었던 걸까.

“운 좋은 줄 알라고. 저 꼬맹이 덕분에 산거니까...”

아쉽다는 듯이 자신의 스텝을 내려놓는 키르비르. 그녀는 날카롭게 이리엘을 째려보지만 이리엘은 여전히 흔들림없는 눈으로 그녀의 날카로운 눈을 마주 바라본다.

“하여튼. 오늘 수고했어. 돌아가도 좋아.”

자신의 뜻대로 되지않자 삐진듯 볼을 살짝 부풀린 키르비르는 한쪽에 의자를 끌고와 걸터앉는다.

“잠깐.. 아직 책장 정리가..”

“흥.”

내 말에 키르비르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손을 휘저은다. 그러자 잔뜩 쌓아둔 책들이 전부 허공으로 떠오른다. 그리고 이어서 키르비르가 책장쪽으로 손을 휘젓자 수많은 책들이 한번에 책장사이에 가지런히 꽂히기 시작한다.

“뭐... 너도 책장이 어떻게 정리된지 잘 모르잖아? 도움도 되지 않을 짓까지 애써 할 필요는 없어.”

애시당초 그녀가 나섰다면 모두 순식간에 끝날 일이었을텐데... 괜한 그녀의 심술에 약간 씁쓸해진다. 괜히 힘뺐다는 사실에 무거운 한숨을 내쉰 나는 아직도 적의를 품고있는지 조용히 키르비르의 뒷모습을 노려보는 이리엘의 어꼐를 토닥거리며 나가는 출구로 걸음을 옮겨나간다.

“아. 잠깐!”

그때 우리의 발걸음을 막는 키르비르의 외침. 왠지모를 불안함을 느끼면서도 거절할수 없는 그녀의 불음에 나는 키르비르를 돌아본다.

“그... 뭐더라? 너희들 숙소 지하에 목욕탕이 하나 있더라.”

욕탕.. 있긴했다. 과거 학자들이 안락하게 쉴수 있도록 마련된 커다란 대중목욕탕이. 하지만 모든 마법사가 사라진 지금 산 속 깊숙한 곳에 있는 그 목욕탕은 관리되지 않았고 지금와서는 사용조차 하지 않아 물과 이끼가 고여있는 냄새나는 곳으로 변해있었다.

“거기 대충 치워놨어. 그리고 물도 받아놨으니까 이용해.”

“...어째서?”

난데없는 그녀의 배려에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뜬채로 그녀를 바라본다. 거기는 냄새도 심하고 더러워서 나조차 가지않고 입구를 단단히 봉해놨었다.

“엉망진창이잖아 너희들. 설마 그 꼴로 비올날만 기다릴 것은 아니지? 고생했으니까 간만에 시원하게 씻으라고.”

“....”

그녀의 말에 나는 나와 이리엘의 옷차림을 확인해본다. 먼지가 묻어 꼬질꼬질해진 손과 얼굴. 거기다 옷까지 시꺼멓게 변색되어있었다.

“뭐... 서비스로 물도 따듯하게 데워놨으니까. 고마운줄 알라고..”

“그.. 고마..”

“시끄러. 빨리 가버려. 물이 식어버려서 귀찮게 부를 생각하지 말고.”

그녀는 우리의 감사조차도 듣기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젓는다. 그런 그녀의 건방진 태도에 기분이 나쁠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우리를 배려해줬다는 그녀의 행동에 작게나마 그녀에게 고마워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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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타메르가 떠나고 방안에 홀로남은 키르비르.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책장을 바라본다. 언뜻보면 책들이 잘 꽃혀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바라보면 여러책이 뒤엉키거나 구겨넣어져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에효...”

다시금 작게 한숨을 내쉰 키르비르는 손을 휘젓는다. 그러자 책장에 꽂혀있던 책들이 밖으로 우수수 빠져나온다. 그리고 자리에 주저앉아 자신이 빼낸 책들을 하나하나 자신의 손으로 정리해나가는 키르비르.

“마법은 편하지만... 세심한 작업은 무리인걸...”

그녀는 투덜투덜거리며 자신이 가진 어마어마한 힘에 대한 불평을 늘여둔다. 그녀는 자신의 책을 일일이 정리하며 타메르가 나갔던 방문을 흘끗 바라본다.

“그나저나.. 이리엘... 기억을 잃어버린건가...?”

혹시나 싶어 다시금 생각해보지만 이리엘. 그녀의 존재는 키르비르또한 잘알고 있는 존재였다.

“분명 그 은빛 비공정은 디에그 데그. 차원 구축전함일텐데...”

그녀가 들은 바로는 마계를 위협했던 두 전함. 하나는 디에스 이레라는 전투순양함. 그리고 그런 디에스 이레를 호위하며 정탐 및 주요 시설 정밀 포격을 담당하는 구춘전함 디에그 데그가 있었다.

저번 전투에서 에페리아는 자신이 개발해낸 새로운 무기. 상위차원 왜곡 미사일. 4차원이라는 차원의 틈새속에서 5차원급 왜곡을 통해 공간이동이 가능한 미사일을 이용해 디에그 데그를 치명적인 피해와 함께 격침시켰다. 그녀의 설명상 모든 것이 무로 변하는 차원의 틈새에서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디에그 데그는 완벽히 소멸했을거라 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그 디에그 데그가 중앙탑에 박혀있는 것을 확인한 키르비르는 작게 마른침을 삼킨다.

“그런 기술이 이 세계에 존재할 리가 없어. 분명 격침된 디에그 데그야. 그렇다면 이 곳에 불시착하여 모든 선체를 수리했다는건데... 하지만 이리엘이 문제라서 다시 복귀하지 못하는건가?”

잠시 고민하던 키르비르는 자기 스스로 결론을 내린다. 지금 상황상 이리엘은 정상이 아니었다. 아마도 추락의 충격에 대다수의 기억을 상실한 듯 그녀는 이 세계에 잘 어울려지내고 있었다.

“뭐... 그러면 좋은거겠지. 강한 적도 사라지고.. 녀석도 잘지낸다니 해피엔딩이잖아?”

조용히 중얼거리던 키르비르는 산더미처럼 책들을 뒤져 몇권의 책을 꺼낸다. 척봐도 낡디 낡은 표지. 누렇게 변해버린 종이가 이 책이 얼마나 오래된 책인가를 대변해주고 있었다. 그런 책 표지에는 황금색의 실로 ‘방주’라는 책 제목이 써져있었다.

“마계인들이 살아남기 위한 최후의 프로젝트. 방주.”

그런 책 제목을 읽은 키르비르는 긴 한숨을 내쉰다.

“마계인을 살리려던 프로젝트가... 마계인을 가장 위협하는 존재가 되어버렸지...”

힘없이 책을 책장에 꽂아넣은 키르비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가 자신의 탑 아래쪽에 존재하는 거대한 중앙탑에 들이박혀있는 거대한 은빛 비공정 디에그 데그를 바라본다.

“방주를 만들기 위해 동원된 마계최고의 기술들. 하지만 그런 기술들보다 몇 십배는 진보되었어.”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은빛 비공정을 내려다보던 키르비르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직... 전투순양함 데이스 이레가 남아있지만... 괜찮을 꺼야... 마계는 에페리아 언니가 지키고 있으니까.. 그리고 우리 아빠도 있으니까..”

키르비르는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는 디에그 데그로부터 관심을 끊고 다시 책장정리에 집중한다.

========== 작품 후기 ==========

abcbbq / 배신. 참 달콤하고 짜릿한 단어죠. 네. 제가 제일 좋아합니다. 하지만 이번엔 그런 배신이 조금 일찍 나올꺼긔

zzzdnlsdnlszzz / 읭? 이해한되는 사실을 말해주시면 전부다 성심성의것 답변해드립니돠.

실버링나이트 / 으음.. 리엔은 풍만하고... 네이는 노말. 키르비르는 A-로 잡고. 이리엘은 절벽. 이정도? 응앜ㅋㅋ 빈유 맞잖아!! 한국인 정서에 올바르게갑시다.

유운처럼 / 헛.. 오타가 있었나요;; 이런..

로나프 / 후에 차차 나옵니다. 의외로 흥하니까 걱정하지 말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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