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편
<-- Main story. 신성기사단 -->
서로를 노려보는 란슈와 키르비르. 침착하게 날카로운 눈으로 상대를 훑어보는 란슈와 다르게 키르비르는 이를 바득바들갈며 올테면 와보라는 식으로 란슈를 노려보고있었다.
“후웃..!”
먼저 움직인 것은 란슈쪽이었다. 마법사라는 그녀의 특성상 거리를 벌리며 탐색하기보다 일단 달려들고보는게 이득일거라는 판단같았다. 나에게 했던 것처럼 자세를 낮게 낮추며 키르비르와의 거리를 급속히 좁히는 란슈.
“헛!?”
하지만 불행히도 키르비르의 체구는 작았다. 나에 비해 무지막지하게. 아무리 란슈가 몸을 웅크려 자세를 낮춘다해도 키르비르의 품안에 파고들정도로 자세를 낮출 수는 없었다. 결국 란슈는 보디 블로를 포기하고 키르비르의 턱을 목표로 날카롭게 주먹을 날린다. 빠르고 매서운 일격이었지만.. 키르비르또한 눈뜨고 그의 공격을 맞아줄 위인은 아니었다.
“흥!”
키르비르는 가볍게 콧방귀를 뀌며 내 예상과 다르게 란슈의 주먹을 뒤로 피하기보다 오히려 란슈와 비슷하게 자세를 낮추며 그의 공격을 회피한다. 그리고 되려 그의 품을 향해 파고들어간다.
“뭐.. 뭐야?!”
그런 키르비르의 행동에 란슈또한 크게 당황한다. 단순한 마법사라고 하기에 너무나도 대법한 행동. 하지만 란슈는 이를 악물며 자신의 품에 파고든 키르비르의 안면을 향해 침착하게 주먹을 휘두른다.
“하앗..!”
하지만 키르비르쪽이 더 빨랐다. 란슈와 밀착한 키르비르는 있는 힘껏 팔을 휘둘러 팔꿈치로 란슈의 가슴을 강타한다.
콰앙!!
“커헉!!”
아무리 행사용이라고는 하지만 튼튼한 갑주가 두세겹으로 감싸진 란슈의 가슴보호대를 우그러뜨릴 정도의 어마어마한 힘. 키르비르의 태도로 보아 어느정도 전력이 실린 일격이었을것이다. 그 충격을 증명하듯 자그마한 키르비르가 날린 일격에 우람한 란슈의 몸이 마치 시간을 멈춘듯 정지된다.
“백뢰장!!”
콰아앙!!
뒤이어진 키르비르의 회심의 일격. 그녀는 어마어마한 마력을 품어 마치 번개가 떨어진 듯 푸르스름한 빛으로 스파크를 일으키는 자신의 손바닥으로 주저없이 란슈의 우그러진 가슴 보호대을 재차 강타한다.
쿠당탕!!
얼마나 강한 충격이었는지 커다란 란슈의 몸이 튕겨나간 것에 모잘라 바닥을 대굴대굴 구르다 간신히 멈춰선다. 볼품없는 자신의 모습에 란슈는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지만 이미 흙투성이가 된 그의 모습은 보기 흉하기 그지없었다.
“뭐야.. 벌써 쫀거야?”
주춤주춤 키르비르에게 재차 달려들지 못하고 자신을 노려보는 란슈의 모습에 키르비르는 조소를 머금으며 란슈를 바라본다.
“크으.. 이 자식..”
란슈또한 얼굴이 붉어질정도로 분해보였지만 키르비르의 만만치않은 힘에 쉽사리 달려들지 못하고 신음을 삼키며 주의 깊게 키르비르를 노려볼 뿐이었다.
키르비르와 란슈가 대치하고 있는 상황을 살펴본 나는 천천히 리엔쪽으로 몸을 돌린다. 키르비르가 란슈와 다른 크루세이더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사이. 지금이 리엔을 구할 기회였다.
욱씬..
란슈에게 얻어맞은 상처들이 전부 회복되지는 않았던 걸까. 몸 구석구석에서 간헐적인 통증이 느껴졌지만 무시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마.. 막아!!”
리엔에게 다가서려는 나를 막기 위해 몇몇의 크루세이더들이 달려든다. 하지만 나는 주저없이 왼팔을 들어올려 대검을 휘두른다.
콰앙!!
녀석은 엉망진창인 모습으로 휘둘러지는 내 검을 비웃으며 자신의 거병을 들어 대검을 막아서려하지만.. 그것은 멍청한 행동이었다. 내 검이 녀석의 거병에 부딪히는 순간. 어마어마한 충격에 견디지 못하고 옆으로 튕겨져나간 크루세이더.
“비켜라.”
이미 몸은 한계에 다달았지만 오히려 그 한계에 가까워질수록 힘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마치 구속이 풀어진 듯한 느낌. 온몸은 누적된 피로와 통증으로 괴로워하고 있었지만 폭주했던 야성의 기운이 남아있던 걸까. 마치 약을 한듯 몽롱한 기분속에서 그러한 통증과 고통은 오히려 기분좋게 느껴져왔다.
“크.. 크읏..”
동료가 단 일격에 전투불능이 되자 기겁한 다른 크루세이더는 주춤주춤 나를 피해 뒤로 물러선다. 하지만 그래도 자존심은 있는지 리엔으로 향한 길목은 벗어나지 않은채 버티고 서있었다.
부웅!!
나는 아무말없이 그를 향해 대검을 휘두른다. 방금전 동료가 당한 상황을 똑똑히 목격한 그는 내 검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몸을 수여 내 대검을 피해낸다. 그리고 그 틈을 노리고 힘차게 자신의 거병을 휘두른다.
나를 향해 휘둘러지는 교단을 상징하는 커다란 십자가. 하지만 너무나도 느렸다. 나는 오른손에 쥐어진 시란의 검으로 주저없이 그가 휘두른 거병을 내려찍어버린다.
콰앙!!
그가 들고있는 거병은 시란의 검에 서린 내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파묻혀버린다. 이런 말도안되는 상황에 눈을 휘둥그레뜨고 자신의 무기와 나를 번갈아 돌아보는 크루세이더를 발로 걷어차 밀어낸 나는 기름에 젖은 장작들을 짓밟으며 리엔을 향해 다가간다.
“....”
내가 바로 눈앞까지 다가왔지만 미동도 없는 리엔. 나는 살짝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본다. 이미 빛이 사라지고 초점조차 잃은 공허한 눈동자. 리엔은 내가 자신을 구하러 온 사실조차도 모르는 것 같았다.
“리엔...”
작게 마른침을 삼킨 나는 한가닥 희망을 품고 조용히 그녀의 이름을 불러본다. 그러자 내 부름에 반응하듯 빛을 잃은 그녀의 눈동자가 잔잔히 떨려가기 시작한다.
“정신이.. 들어?”
나는 자신의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리엔을 위해 그녀의 턱을 받혀 조심스럽게 그녀의 고개를 들어준다. 그제서야 리엔은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로 간신히 초점을 잡아 나를 바라본다.
“타.. 메르씨?”
이미 갈라질대로 갈라지고 핏방울까지 맺혀있는 그녀의 입술이 힘겹게 달싹거리며 매마른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모든 것을 잃은 공허한 목소리. 듣는 나 조차도 우울하게 만들정도의 목소리였다.
“타메르씨.. 당신이.. 어떻게?”
“당연히 너를 구하러왔지.”
나는 크게 동요하고 있는 리엔을 진정시키고자 나름대로 괜찮다는 듯이 미소를 지어보려했지만 내 생각과 다르게 피로로 가득찬 내 얼굴은 피로 범벅이 되어 험악하게 일그러질뿐이었다.
“타메르씨..”
뒤늦게 망신창이가 되어있는 내 몸을 확인한 걸까. 리엔의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여기까지 오는데.. 조금 힘들어서 말이야. 솔직히 거리가 좀 멀잖아?”
나는 씨익 웃으며 얼굴에 묻은 선혈을 대충소매로 닦아내며 그녀를 안심시키고자 시답지 않은 농담을 던진다. 하지만 딱딱히 굳어있는 리엔의 얼굴 표정은 풀릴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놀람의 감정은 이내 나를 향한 미안함으로 가득채워져나가기 시작한다.
“어째서.. 나 같은 걸..”
울먹이는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리엔. 나는 그런 그녀의 중얼거림을 외면하며 그녀의 양팔을 십자가에 단단히 묶어놓고있는 밧줄을 풀어낸다.
“나는 이제.. 신성한 자도 아니고.. 파문당해서 쓸모없는.. 마녀인데..”
그녀의 양팔을 묶고있는 밧줄을 풀어내자 거의 탈진 직전인 리엔의 몸이 실이 풀린 인형처럼 앞으로 쓰러지며 내 몸에 기대어온다. 나는 그런 리엔의 몸을 가뿐하게 부축하여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한다.
“사람들이 전부 너가 쓸모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야. 아직 너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있어.”
“....”
내 말에 리엔은 힘겹게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바라본다. 엉망이 된 그녀의 마음속을 대변하듯 회색빛의 탁한 눈동자. 하지만 그런 그녀의 눈가에 투명한 눈물이 살짝 고여있었다.
“하지만..”
타악..
조용히 나를 바라보던 리엔은 갑작스레 내 가슴을 밀치고 조용히 등뒤에 서있는 심자가에 몸을 기댄다.
“저에게 남은 것은.. 없어요. 이제... 아무것도..”
“....”
울음을 참지 못한 그녀의 볼을 타고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린다. 하지만 이내 팔을 들어 그런 눈물을 닦아낸 리엔은 결심을 굳힌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말한다.
“이제.. 모든게 싫어요. 이제 그만.. 끝내고 싶어요.”
그 말을 끝으로 리엔은 십자가에 몸을 기댄채 기름에 흥건히 젖은 장작위에 주저앉아버린다. 그런 그녀는 지친 듯한 긴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는 리엔.
“타메르도 들었잖아요... 나는 우리 오빠를 죽였어요.”
“하지만.. 그건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네. 이유가 있었어요. 하지만... 뭐라 변명해도 제가 오빠를 제손으로 죽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그녀는 과거 자신의 가족의 피가 묻었던 자신의 손을 바라본다. 이미 고왔던 리엔의 손은 여기저기 상처에다 굳은 살. 이리저리 피부가 갈라져 흉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오빠대신 신성한자의 의무를 다하려고.. 노력했는데.. 신성한 자로 살아왔는데....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네요.”
그녀의 눈가에 다시 투명한 눈물이 맺히기 시작한다. 리엔은 조용히 눈을 감으며 들었던 손을 힘없이 장작더미 위에 떨어뜨려버린다.
“아직.. 더 할 수 있는데... 더 열심히 달릴 수 있었는데... 왜 세상은 절 가만히 놔두지 않았던 걸까요...”
복바쳐 오르는 감정을 더 이상 숨길수 없었는지 그녀의 볼을 타고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려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리엔은 자신의 손으로 얼굴을 가려 그 눈물을 숨기며 축축히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어나간다.
“이제... 쉬고 싶어.. 푹.. 아마도 푹 쉬고나면.. 오빠도 다시 만날 수 있곘죠?”
“.....”
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는지 거칠게 자신의 눈가를 비벼 눈물을 지워낸 리엔은 팔을 내리고 나를 바라본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는 작은 미소가 지어져있었다. 과거처럼 보는 사람을 따듯하게 하는 미소가 아닌.. 가슴을 쓰리게 만드는 슬픔이 가득찬 미소.
이미 모든 것을 잃어 이 세상에 남은 미련이 없는 자의 미소였다.
“아직.. 더 살아볼 마음은 없는거야? 진짜로?”
“.....”
내 물음에 리엔은 파들파들 떨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잠시 주저한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가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실버링나이트 / 그건 먼 훗날의 이야기...;;
유이버 / 키르비르~!
abcbbq / 아.. 그 냥이 들이요... 엑스트라입니닷. 허허헛;;
Lizad / 선리 후감도 좋습니다. 리플만 있다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