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편
<-- 키르비르 -->
하여금.. 녀석과의 악연은 그 휴전이 시작된 이후 시작되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을 하고 있었지만 자신이 로터스를 쉽사리 제압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일까. 녀석은 종종 로터스의 하인이라는 이유로 나를 집요하게 괴롭혀왔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쓰잘데기없는 빨래 부탁. 요리부탁. 온갖 잡일과 심부름까지. 뭐... 내 입장으로 본다면 그다지 괴로운 괴롭힘은 아니었다. 안그래도 무료한 유적지 생활에서 그나마 약간의 흥미가 되어준달까. 하지만 그것이 3년동안 지속되오니 나또한 지칠때가 됬기도 했다.
“후우...”
언제쯤 키르비르의 괴롭힘이 끝날까. 뭐 기대는 하지 않지만... 그래도 내심 그녀로부터 해방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그나저나... 그 꼬마 악마자식이 리엔을 위해 옷을 빌려주려나...”
플루토가 키르비르에게 옷을 빌리겠다고 요청하면 키르비르는 당연히 그 이유를 물을 것이다. 아직 리엔과 플루토는 얼굴을 맞대 이야기해본 적도 없었으니... 플루토는 분명 내 이름을 거론할 것이고... 내 이름을 들은 키르비르 쉽사리 그 옷들을 넘겨줄 리가 없었다. 또 저번과도 같은 망할 독약이 든 약통을 건내던가 하겠지.
“누가 악마라는거야?”
“....?!”
그때 예기치 못한 앙칼진 목소리가 내 방안을 휘감는다. 그 누구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상황에서 목소리가 울려퍼지자 퍼뜩 놀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목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본다. 이제 막 해가 졌는지 푸르스름한 달빛이 흘러들어오는 창가. 그런 창가의 옆에서는 기다란 마법지팡이를 팔에 낀채로 팔짱을 끼고 몸을 기댄채 나를 바라보는 키르비르가 서 있었다.
“키르비르?”
“왠지 귀가 가렵다 했더니... 역시 너였네.”
과장된 몸짓으로 자신의 귀를 후벼파던 키르비르는 아무것도 묻어있지 않은 자신의 손가락을 후 하고 불며 나를 바라본다. 나는 그런 그녀를 이해못하겠다는 눈으로 바라본다. 지금은 점점 해가 져가는 밤이다. 이런 밤중에 그녀가 애써 이곳에 내려올 이유는 전혀없었다. 애시당초 높은 첨탑에 살고있는 키르비르에게는 올라오고 내려오는 일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닐 것이 분명했다.
“이 밤중에... 무슨 일이야?”
혼자 고민해서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한 나는 자리에서 살짝 일어서 키르비르를 바라보며 그녀가 여기까지 내려온 용무를 물어본다. 그러자 키르비르는 조용히 나를 노려보다 이내 시선을 돌리면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뱅글뱅글 돌리는 등 시답지 않은 딴청을 부리기 시작한다.
“단지 귀가 가렵다는 이유로... 자신을 욕한 사람을 이 밤에 찾아다닌 것은 아닐테고....”
그 순간 내 머리에 퍼뜩 스치는 한가지 사실. 나는 키르비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신중한 눈으로 그녀의 모습을 관찰한다. 비록 어두운 달빛에 어수룩하게 보이지만... 살짝 상기되어있는 그녀의 얼굴. 미세하지만 작게 들썩거리는 그녀의 자그마한 가슴.
“오호...”
이제 모든 사실을 깨달은 나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선다. 예고없이 갑작스레 다가오는 내 행동에 흠칫 놀란 키르비르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마법지팡이를 움켜쥐며 나를 노려보며 외친다.
“뭐.. 뭐야?”
“몸 상태가...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는데? 키르비르양?”
“......”
내 말이 정곡을 찌른 걸까. 입을 꾹 다물고 나를 노려보는 키르비르. 하지만 그녀가 그래봤자 새빨갛게 상기된 그녀의 얼굴을 더욱 강조하는 꼴이었다. 피식 웃은 나는 슬쩍 눈짓으로 밖으로 나가는 방문을 가리킨다.
“옆방에서 리엔이 자는데... 이곳은 좀 자리가 안좋겠지?”
“.....”
내 말을 이해하는 걸까. 키르비르는 힘겹게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다. 그런 그녀의 행동으로 모든 사실을 확신한 나는 음흉한 미소를 숨기지 않고 앞서 걸어서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선다. 그러자 키르비르또한 그다지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나를 쫓아 밖으로 걸어나왔다.
“달이 참 밝지?”
어두운 밤안. 주변에 빛나는 별빛을 모두 삼키듯이 달빛이 환한 밤이었다. 밖으로 걸어나온 나는 쌀쌀한 밤바람을 맞으며 흘끗 키르비르를 돌아본다. 새하얀 달빛이 내리쬐는 밖으로 걸어나오자 키르비르의 얼굴이 더욱 확연하게 보였다.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붉게 상기된 뺨. 애써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시선을 돌리고 있는 키르비르는 초조하게 자신의 마법지팡이를 손가락으로 조무르고 있었다.
언뜻보면 어린아이. 고작 15살정도밖에 안되보이는 발육이 느린 미성숙한 몸을 가지고 있었지만 평소의 그녀의 행동과 성격 때문이었을까. 간만에 최음제가 때문이 아닌 순수한 성욕이 들끓어 오르는 것을 느낀다.
언제나 내 앞에서 온갖 도도한척을 하며 폭언과 욕설, 심지어 폭력까지 일삼았던 키르비르. 그런 그녀가 내 품안에 안겨 무력하게 헐떡이며 애원하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짜릿했다.
“자. 그럼 시간 끌필요 없겠지.”
“웃..?!
그런 그녀의 행동에 피식 웃은 나는 기습적으로 그녀에게 다가가 단숨에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아 내 몸에 그녀의 몸을 밀착시킨다. 얇고 부드러운 천 넘어로 생생히 느껴지는 그녀의 뜨겁게 달아오른 신체. 바로 코앞에서 보이는 키르비르의 얼굴을 조용히 내려보던 나는 살짝 달아오른 그녀의 숨결을 느끼며 천천히 그녀를 향해 얼굴을 접근시켜나간다.
“흐음...”
입술 끝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촉감. 드디어 그녀의 입술을 뻇은 것이다. 도도하고 오만하고 세상에 적이 없을 것같은 키르비르를... 일종의 성취감과 함께 정복감을 느낀 나는 만족스럽게 감았던 내 눈을 뜬다. 하지만..
“....?”
내 눈에 보이는 것은 터질 듯이 붉게 상기된 키르비르의 얼굴이 아니었다. 내 눈 앞에 보이는 것은 가느다란 4개의 손가락.
“네놈.. 이었구나.”
그리고 이어지는 키르비르의 분노에 가득찬 중얼거림. 지금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성이 미처 이해하기전 본능은 격한 경보를 울리고 있었다.
뻐커헉!!
“크허억!!”
몸과 입에서 동시에 비명을 터트린다. 키르비르에 비해 두배 이상은 더 육중한 내몸이 순간 허공에 붕 뜰정도로 강렬한 충격이 내 복부를 강타한다. 단순한 주먹질. 하지만 그녀가 분노한 만큼 진득한 마나가 담긴 키르비르의 자그마한 주먹은 내 내장을 뒤엉켜놓을 뿐만 아니라 단숨에 척추를 접어버린다.
“크허.. 으허억..”
바닥에 무릎을 꿇은 나는 복부를 감싸쥔채 몸을 웅크린다. 만약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그대로 내장파열과 함께 척추손상으로 즉사할 만한 강력한 일격이었다. 하지만 광혈의 저주를 받은 내 몸은 그런 치명적인 손상과 상처를 빠른 속도로 회복시켜나간다.
“왠지 저녁식사 이후로... 몸이 살짝 이상했다 싶더니.. 네 놈이었어?!”
통한의 일격에 의한 충격이 미처 회복되기 전. 내가 살짝 들어올린 시선에 보이는 것은 이제 막 시야를 가득히 채워가는 키르비르의 새까만 단화였다.
빠각!!
안면을 강타하는 강한 충격과 함께 이빨이 몇 개 부러진 듯 입안에 날카로운 통증이 휘감아온다.
콰앙!!
얼마나 강한 힘이 실렸는지 발차기 한방에 뒤로 나가떨어진 나는 낡은 유적지 벽에 몸을 부딪히고 나서야 간신히 멈춰서 몸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입가에 진득히 흘러내려오는 붉은 핏물을 소매로 쓰윽 닦아낸 나는 키르비르를 바라본다.
“통하지... 않았던거야?!”
“아니. 통했어. 덕분에 좀 고생했지.”
나에게 천천히 다가온 키르비르는 벽에 기대 쓰러져있는 내 가슴을 자신의 단화로 짓밟으며 오만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한다.
“이래뵈도 아크메이지야. 그정도 약을 해독하는 것. 그다지 어렵지 않던데?”
피식 웃은 키르비르는 보란듯이 내 눈앞에서 자신의 지팡이를 허공에 휘두른다. 그리고 날카로운 지팡이 끝으로 내 미간을 겨누며 묻는다.
“죽기전 유언은?”
“미안하지만 준비할 시간이 없었는걸? 이렇게 빨리 내 죽음이 올줄을 몰랐거든.”
나는 내 미간을 노리는 날카로운 지팡이 끝을 무덤덤하게 바라보며 그녀의 질문에 대답한다. 죽음. 애시당초 내가 바라오던 일. 그게 지금 당장온다해도 두렵거나 아쉽다는 감정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나를 조용히 내려보던 키르비르는 더 이상 말을 나눌 가치도 없다는 듯이 내 미간을 겨누던 지팡이를 힘껏 뒤로 당긴다.
“큿!”
내 미간을 꿰뚫을 키르비르의 지팡이를 도저히 볼 수 없었던 나는 두 눈을 질끈 감는다.
콰앙!!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꼐 키르비르의 지팡이가 나를 향해 찔러들어왔다. 하지만 다행히도 지팡이는 내 미간을 꿰뚫지 않고 내 얼굴을 스치며 귓불에 작은 생채기만을 낸채 낡은 유적의 벽에 박혀들어간다.
“이건...”
나는 나를 죽이지 않는 키르비르를 바라본다. 그녀는 가볍게 콧웃음치며 벽에 박아버린 자신의 지팡이를 잡아 당겨 가볍게 뽑아내며 내 가슴을 밟고 있던 발을 회수해 뒤로 두어걸음 물러선다. 그리고 돌가루가 묻은 자신의 지팡이를 허공에 털어낸 그녀는 나에게 더 이상 관심이 없다는 듯이 무심히 등을 돌린다.
“나름 귀여웠어. 어떻게든 복수해보려고 무력하게 발버둥치는 모습이.”
“나를 살려주는거냐?”
내 질문에 키르비르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오해하지 말라는 듯이 한마디를 남기며 어둠속으로 사라진다.
“시체처리하기 귀찮거든.”
나는 그녀가 사라진곳을 조용히 바라본다. 비록 그다지 두렵지는 않았지만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나는 작은 웃음을 터트린다.
“후우... 젠장할...”
결국 약은 실패했다. 부정할 수 없는 그 사실에 나는 작은 욕설만을 남긴채 내 숙소로 힘없이 돌아갈 뿐이었다.
========== 작품 후기 ==========
Solar Eclipse / 이번에는 좀 해피해피하게 나갈 생각이에요. 모두가 행복한게 좋잖아요?
변사체 /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 씁... 그렇죠. 하지만 이번엔 좀 해피하게 갈 생각입니다.
Lizad / 뭐... 던탐시절때는 그것때문에 울며불며 상담해달라는 쪽지까지 받아봐서요.
키르비르는 강력했다. 결국 패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