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편
<-- 백색 마녀 키르비르 -->
그녀의 방에서 걸어나온 나는 키르비르가 전해준 약병을 주머니에 쑤셔넣은채 숙소의 비품 창고를 향해 걸어갔다. 낡을 대로 낡은 문을 천천히 밀어서 열자 어두운 창고 안에서 천장에 붙은 키르비르가 만든 마나석이 푸른 빛을 흩뿌린다.
“흐음...”
창고안을 밝혀주는 푸른 빛에 나는 작게 감탄을 삼킨다. 키르비르가 이 베히모스 유적지를 위해 자진해서 한 몇 안되는 좋은 일중에 하나. 물품을 보관하기 위해 완벽히 밀폐가 된 창고에는 빛이 한줌조차 들어오지 못했다. 그런 어둠을 밝혀준 것은 다름아닌 키르비르가 만든 마나석.
“젠장.”
하지만 그런 그녀에 대한 고마움도 잠시. 창고 한쪽에 잔뜩 쌓여져 있는 물건들을 발견한 나는 나도 모르게 욕을 내뱉어낸다. 그것은 다름아닌 키르비르가 쓰고 가져온 이불이나 수건들. 그리고 빨랫감이 잔뜩 들어있을 것 같은 커다란 가죽 주머니. 하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 일을 플루토가 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녀석 떄문에 할만하겠군.”
키르비르의 하인인 플루토는 여러모로 꼼꼼했다. 빨아야 될 수건을 정리한 것만해도 그 녀석의 성격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4가지로 정리된 수건들. 걸레나 행주따위로 쓴 것같은 가장 더러운 수건들을 한쪽에 차곡차곡 게어놨고 그런 수건들과 거리가 떨어진 곳에는 수건의 더러움 정도에따라 구분하여 마치 자그마한 상자처럼 각지게 접어둔 수건이 벽돌처럼 바르게 쌓여져있었다.
“대충 이것들은 물과 향료를 섞어서 빨면되겠고. 문제는 저 가장더러운 수건들이군.”
가장 더러운 수건들은 검게 묻은 때를 빼내기 위해 손빨래는 필수 였다. 나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며 더러운 수건의 수를 세어가기 시작한다.
“그래도 많지는 않네.”
예상외로 적은 수의 수건의 양에 안도한 나는 다음 문제인 이불을 돌아본다. 마치 내 눈앞에 보란듯이 쌓여있는 3개의 이불들. 그다지 더러워보이지는 않았다. 키르비르의 취향일까 아니면 독특한 성격일까. 그녀는 이불에 스며든 향료의 향기가 사라지만 빨아야된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내가 보면 한 1년은 더 안빨고 쓸만한 이불들이었는데.
“어쩔 수 없지.”
비록 이불빨래가 힘들기는 하지만 그건 평범한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타고난 근력이 평범한 성인의 몇배나 되는 나에게는 이불빨래는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이불빨래를 싫어하는 이유는 단 하나. 너무 많은 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고산지대인 베히모스에서 물이 아주 희귀했다. 종종 오는 비나 눈을 모아야만 간신히 물을 모을 수 있었다. 뭐... 아크메이지인 키르비르는 자신의 마법으로 물을 만들 수 있었지만 언제나 나에게 비협조적인 그녀에게만 기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못마땅한 눈으로 한쪽에 놓여있는 커다란 가죽 주머니를 향해 시선을 돌린다. 저것은 분명 키르비르가 입고 벗어둔 빨래감들이다. 그 녀석은 개념이 없는 건지 지조가 없는건지 스스럼 없이 자기 속옷빨래조차도 나에게 맡기고 있었다. 슬쩍 가죽주머니를 열어보니 역시나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잔뜩 구겨진채 담긴 양말과 스타킹, 색색의 갖가지 옷들. 그리고 역시나 속옷들이었다.
“망할...”
고작 꼬마 아이의 빨래나 해야하는 내 처량한 신세를 욕하며 나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쉰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깔끔한 키르비르의 성격 때문일까. 빨랫감에서는 악취는 커녕 그녀가 샤용하는 옅은 사과향의 향료의 향이 흐릿하게 흘러나온다는 것이었다.
“도데체 자기가 할 줄아는 것은 없나. 아니면 내가 남자로 보이지 않는건가.”
작게 투덜거리며 나는 가죽 주머니를 뒤져본다. 그리고 손에 잡혀나오는 새하얀 팬티 한 장. 특별한 장식없이 그저 순수한 새하얀 빛을 가지고 있는 팬티를 무덤덤한 눈으로 바라보던 나는 다시 한번 낮게 한숨을 내쉰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법 한번이면 전부 처리할텐데...”
나는 내 손에 잡혀있던 키르비르의 팬티를 다시 가죽 주머니안에 쑤셔넣으며 되지도 않을 안타까운 소원을 중얼거리며 가죽 주머니의 입구를 다시 묶어버린다.
“좋아. 일단 저녁부터 만들고... 하나하나 처리해 나가면 순식간이겠군.”
대충 내가 할 일을 짐작한 나는 우선 내 숙소로 돌아온다. 그리고 키르비르가 만들어준 알약통을 흔들어 두 알의 약을 꺼낸 뒤 탁자에 내려두고 자리에 걸터앉는다.
“그 망할 독약이 빨리 걸렸으면 좋겠는데...”
이왕 맞는 매 빨리 맞아야 더 좋았다. 뭐가 독약인지 구분안되는 상황에서 알약을 하나씩 섭취할 수는 없었다. 혹시나 하나씩만 먹다가 재수없게 독약에 걸렸을 경우 내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에 보험삼아 하나 더 먹는 것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동시에 두 개의 알약을 섭취하며 빨리 독약이 걸리기를 기대할 뿐이었다.
“후우...”
가볍게 심호흡을 한 나는 알약 두 개를 단숨에 입안에 털어넣는다. 그리고 그 알약을 삼키려는 순간.
물컹.
“흡?!”
하나의 알약과는 다르게 입안에 들어가자마자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또다른 약. 본능적으로 나는 그 약이 독약임을 직감하고 허겁지겁 입에 손을 넣어 그 망할 약을 빼내려하지만 얄미운 키르비르가 만들었기 때문일까. 이 요망스러운 약은 타액에 닿자마자 순식간에 녹아내려 순식간에 목 넘어로 흘러들어간다.
“콜록! 콜록!”
나는 뒤늦게 기침을 해내며 목 넘어들어간 약을 뱉어내려하지만 이미 전부다 내 몸에 흡수되었는지 아무리 기침을 해도 입안에서 튀어나오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젠장... 이번엔 도데체 뭐야!!”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빽 지른 나는 머리를 쓸어올리며 침대에 주저앉는다. 일단 무슨 독약인지 확인되지 않았다. 그녀의 장난끼가 가득한 성격상 자신의 몸종으로 부려먹을 나를 죽이려고 하는 맹독은 아닐 것이었다. 죽지 않을 정도로 괴로움을 줄만한 약물. 가령 예를 들면 전과 비슷한 환각제. 혹은 시력이나 청력, 방향감각을 상실시키는 독일 가능성이 높았다.
“후우... 우선 진정하자.”
나는 흥분한 내 감정을 천천히 다스리며 그녀가 만들어준 알약통을 흔들어 알약 하나를 꺼낸다. 그리고 독약 때문에 삼키지 못한 알약대신 새로꺼낸 알약을 단숨에 씹어삼키며 조용히 눈을 감고 내 몸상태를 하나하나 확인해가기 시작한다.
“자... 움직이지만 않으면 돼. 환각제든 강력한 독약이든... 그저 가만히만 있으면 돼.”
침착하게 호흡을 가다듬은 나는 내 몸의 감각들을 하나하나 확인해가본다. 사지는 근육 경련같은 아무런 이상없이 잘 움직여주고 있었다. 손끝은 스쳐지나가는 바람을 느낄 정도로 예민한 감각을 자랑하고 있었도. 귓가로는 창문틈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바람소리를 느낄 수 있었고 콧가로는 퀴퀴한 유적지의 냄새가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천천히 눈을 떠가자 내 방의 풍경이 확연히 보인다. 그 어떤 괴물도. 괴 생물체도 보이지 않았다. 지극히 정상.
“...정상이잖아?”
그녀의 까칠하고 참지못하는 성격상 느릿느릿 효과가 나타나는 독약을 만들 리가 없었다. 왠지모르게 내 몸에 아무런 장애도 주지않는 독약의 효과에 고개를 갸웃거린 나는 재차 내 몸상태를 점검해보지만 이내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휴우... 키르비르녀석. 괜히 사람을 겁주고 있어.”
나는 결국 그녀의 실수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비록 키르비르가 그 잘난 아크메이지로 로터스와 버금가는 최강의 존재라고는 하지만 결국 인간이었다. 그녀또한 실수를 저지를 수 있는 것이다.
“운이 좋군.”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있던 내 몸을 일으킨다. 하지만 뒤늦게 내 몸에 뭔가 이상한 점을 찾아버린다.
두근..
“뭐야 이건...”
처음엔 그저 독약에 대한 두려움과 긴장감으로 고조되었다고 생각했던 심장박동. 하지만 지금 그 독약이 실패된 독약이라고 판단된 이 상황에서까지 고조된 심장박동은 줄어들 생각이 없었다.
“하아... 설마...”
어떻게든 고조된 심장박동 진정시켜보려 가볍게 심호흡을 해보지만 심장박동은 진정되기는 커녕 더욱더 강하고 빠르게 박동하며 내 숨결이 점점 뜨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망할! 흥분제같은 건가?!”
가슴을 움켜쥐며 나는 이를 악물어 뜨거워지는 몸을 가라앉혀보려고 하지만 그녀가 만든 약이라 그런걸까. 내 몸은 이미 내 제어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대체 그 꼬맹이자식은 도데체 무슨 생각으로 이딴 것을...!!”
제멋대로 격하게 박동하는 심장 때문에 가슴을 움켜쥔 나는 힘겹게 한걸음 한걸음을 옮겨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방안보다 비교적 시원한 밖의 바람을 쐬어보지만 흥분감은 진정되기는 커녕 점점 내 몸을 더 뜨겁게 달궈간다.
“요오~! 기분어때?”
그 순간 내 눈앞에 나타난 키르비르. 그녀는 장난끼가 가득한 얼굴로 싱글싱글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놈... 이건 대체 무슨 약이냐?!”
“너 스스로가 잘알텐데~”
키르비르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여유롭게 딴청을 부리며 피식 미소짓는다. 그녀의 말대로 이 약이 뭔지를 나또한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점점 뜨거워지는 신체. 그리고 욱씬거리기 시작하는 사타구니. 이건 분명 성적 흥분제였다.
“으음... 꽤나 고통스러울꺼야. 욕망을 해소하지 않으면... 내가 남자가 아니라서 모르겠는데. 엄청 아플꺼야.”
키득키득 거리며 뭐가 그리 재미난지 웃음을 터트리는 키르비르를 노려보며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간다. 하지만 그런 내 접근에도 불구하고 별 위협을 느끼지 못했는지 키르비아는 내 눈앞에서 싱글싱글 웃으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욕망을 해소하면 괜찮다는거지?”
“뭐어... 그런 셈이지.”
“그래?”
키르비르를 내려다보며 나는 비릿한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주저없이 그녀를 향해 손을 뻗힌다.
“네 놈도 여자라는 것을 잊은거냐?”
퍼엉!
하지만 그녀의 몸에 내 손이 닿는 순간 그녀의 모습이 무너져내리며 한줌의 새하얀 연기로 변해 사라진다.
“아하하핫! 내가 멍청하게 너에게 잡힐 리가 없잖아?”
내 등뒤에서 들려오는 키르비르의 목소리에 나는 흘끗 뒤를 돌아본다. 그러자 어느세 창틀에 걸터앉아있는 키르비르는 싱글싱글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애시당초 그녀를 붙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날카롭게 그녀를 노려보며 묻는다.
“설마... 노린거냐?”
“아니. 리엔의 경우는 예상외야. 나는 그냥 니가 니 거시기를 부여잡고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싶었거든.”
“......”
“어떻게할꺼야? 덮칠꺼야?”
여유롭게 팔로 턱을 괸채 마치 재미난 개그쇼를 보듯이 나를 지켜보는 키르비르를 노려보며 나는 다시금 뜨거운 한숨을 뱉어낸다. 그녀의 말대로 점점 몸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워지고 있었다. 더불어 고통스러워지기 시작하는 하반신. 어떻게든 이 뜨거운 욕망을 풀어내고 싶었다.
“아니... 그런 짓 말고 이걸 풀어낼 한 가지 방법이 있지.”
“오호라... 그래? 내가 생각하지 못한 방법이 있다고? 어떻게 하게? 텐타클의 주둥이에 한번 박아보게?”
그녀는 자기가 한말이 스스로도 웃긴지 키득거리며 나를 바라본다. 그런 그녀를 노려보며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리엔. 그녀는 신관이다. 그녀라면 독같은 것을 해독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겠지.”
“...아.”
그러자 그것까지는 예상 못했는지 키르비르는 작은 탄성을 흘린다. 그런 그녀를 살짝 비웃은 나는 보란 듯이 리엔의 방문을 연다. 하지만.
“...리엔?”
아무도 없었다. 그녀의 방안은 텅 비어있었다. 하지만 옷갖 가구들은 가지런히 정리되어있는 것을 보면 그녀가 분명 이방에서 방금전까지 지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로터스..! 혹시 리엔을 보지못했나?!”
다급해질대로 다급해진 나는 로터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자 내 머릿속으로 무뚝뚝한 로터스의 사념이 흘러들어온다.
-리엔... 아마 중앙 도서관쪽으로 간 것같다.
베히모스 유적지에 있는 텐타클을 통해 유적 구석구석을 살펴볼 수 있었던 로터스는 어렵지 않게 리엔의 행보를 알아내 나에게 알려준다.
“중앙 도서관?! 망할... 그 녀석은 왜 거기에..!”
“키키킥.. 이거 참 안타까운걸~”
키득키득 웃은 키르비르를 무시하며 나는 리엔을 쫓아가기 위해 베히모스 유적지 중앙. 그러니까 로터스가 있는 그 거대한 공동의 지하에 중앙 도서관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곳을 리엔이 어떻게 찾았는지 모르겠지만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었기에 나는 리엔을 찾기 위해 서둘러 그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갔다.
========== 작품 후기 ==========
으아아아... 피곤하고 졸려...
Lizad / 그렇게 생각해주시다니... 감사합니다!
Solar Eclipse / ㅎㄷㄷ 저도 타메르의 매력을 모르는데...
운 / 로터스를 주인공으로 하면 선정적으로 변하겠지만 단조로워진다는 단점이..
사짜인생 / 헐. 그런 흔해빠진 전개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나요?